경인선

네크로필리아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7월 4일 (토) 18:51 판

틀:수도권 1호선 틀

京仁線 / Gyeongin Line

경인선
운영기관 한국철도공사
영업거리 27.0km
궤간 1435mm 표준궤
역 수 21
신호 ATS
차량기지 구로차량사업소
지상구간 전구간
연혁 1899. 09. 18 제물포-노량진
1911 한강철교 개통
1974. 08. 15 수도권 전철 운행 개시

대한민국 최초의 철도이자 한국 철도의 시발점

개요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역인천광역시 중구 인천역을 잇는 헬게이트 복복선 간선철도. 길이 27.0km로 1974년 이래로 수도권 전철 1호선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연혁

철도부설 쟁탈전

17세기 말에 전 세계적으로 보급이 확산된 철도교통은 1880년대 말에 본격적으로 조선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 시초는 1876년 2월 26일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체결 이후 같은 해 4월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김기수 예조참의가 1877년경 당시 막 개통된 도카이도 본선신바시역~요코하마역까지의 구간을 타보고 화륜거(火輪車)라 표현해 저서인 일동기유에 소개한 것이었다.

이후 1882년 4월 한미수호조규(韓美修好條規)에 따라 1887년 주미조선공사 박정양을 수행한 이하영이 1889년 대리공사로 기국하면서 미국에서 이용한 철도의 모형을 구입해 들여와 고종 황제와 대신들과 함께 도입의 필요성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94년 7월 갑오경장(甲午更張)이후 관제개혁과 함께 의정부(議政府) 산하 공무아문에 철도국을 설치하고 참의 1명과 주사 2명을 배치하고 도로 측량작업을 실시해 본격적으로 철도부설에 관한 논의를 하게 되었다. 1885년 의정부 산하 공무아무과 농상아문을 통합하여 농상공부로 개편함에 따라서 농상공부 산하 조직이 되었다.

지금도 인천항부산항은 대한민국의 양대 물자 관문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그 당시에도 두 도시는 바다와 바로 연결되어 있는 탓에 수도와 연결할 철도의 필요성이 가장 먼저 논의되었고 구한말 한반도를 노리던 수많은 열강들의 표적 중 하나가 된다. 그리고 경인선은 한국에서 가장 먼저 착공되고 먼저 개통된 철도 노선이 되었다. 이것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어촌에 불과했던 인천이 대도시로 성장한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의 철도부설권과 광산개발권은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수많은 강대국들이 따먹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의 움직임은 필사적이었다. 이미 1885년 일본인 마쓰다 코조(松田行藏)가 수 년 동안 조선을 답사해 교통과 경제 상황을 파악했던 전력이 있었고 1892년에는 일본인 철도전문 기사가 경부 간의 경로 답사후 부산 주재 일본 영사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 이후 1894년 8월, 일본은 철도건설에 관한 권리를 조선에서 못박아 버리기 위해 조선 정부 내정의 개혁을 희망하며, 이를 위하여 경부, 경인 간에 부설 철도 권리는 조선정부가 재정적 여유가 없음을 감안하여 일본 정부 또는 일본의 기업이 시기를 보아 기공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한일잠정합동조관(韓日暫定合同款)을 강제 체결시키기까지 이른다.

경인선과 경부선의 부설을 두고 일본미국은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보다 앞서 1892년 4월 '구한국외교문서 제 10권 993호'에 내용에 따라 당시 고종 황제는 미국인 모어스(James R. Morse)를 초청하여 이완용, 이하영 등에게 경부철도 건설 조건에 대해 협의하고 모어스가 부설자금을 출자해 부설하고 25년 내 자금을 회수하며, 5개의 금광 개설권을 허가하도록 했으나 정병하 등 일부의 강경한 반대로 무산되자 모어스는 왕복 여비, 출장중 사업상 손해 등 은화 10,000냥에 달하는 손해 배상금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다.

상황은 뜻밖으로 흘러갔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면서 고종과 세자가 아관파천을 감행하면서 일본의 영향력이 잠시 약해지게 된 것, 미국은 이 틈을 타서 1896년 3월 29일 경인선 철도에 대한 부설권을 얻어냈고, 모어스는 다시 이 바닥에 복귀했다. 철도부설에 관한 권리는 모어스에게 부여되는 대신 특허 1년 내에 착공하고, 전쟁 등의 비상사태가 아닌 이상 3년 이내에 반드시 완공할 것, 완공 후 15년이 경과하면 한국 정부는 전체를 매수할 수 있으나 매수하지 못할 경우에는 특허권을 10년 더 연장할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모어스가 철도부설권을 얻는 데 성공하자 다른 강대국들의 움직임도 빨라져서 압박이 더욱 거세졌고, 프랑스의 Five Lile상사가 징징서울~원산간, 서울~의주간, 서울~홍성간 철도 부설을 요구해서 결국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얻어내는 등의 일이 있게 된다.

  • 제 1조 국내 인민 왕래와 물품출입의 편리함을 위하여 국내 각 지방의 철도를 설치함
  • 제 2조 국내 각 지방철도의 척량(尺量)을 균일케 하여 이쪽 지방의 윤차(輪車)가 다른 지방에서도 지장 없이 통행케 함
  • 제 3조 국내 각 지방철도의 넓이를 외국의 현행 표준에 따라 부설 선로 간의 간격을 영국식 거리(英尺) 4척 8촌 반으로 확정함
  • 제 4조 관립(官立)한 철도기차의 왕래인 표값과 출입문 운반비는 농상공부대신이 정함
  • 제 5조 본국인이나 외국인이 철도회사를 국내 각 지방에 설치할 시에도 이 규칙을 일체 준행하고 표값과 운반비도 농상공부와 협의해서 결정함
  • 제 6조 철도세칙은 농상공부대신이 추후로 정함
  • 부칙-본령은 반포일로부터 시행함
틀:날짜/출력 대한제국 정부 칙령 제 31호 철도규칙

1896년 7월 15일 칙령 제 31호로 철도규칙이 제정됨과 동시에, 궤간에 대한 문제도 논의되었다. 초기에는 표준궤로 정해졌다가 1896년 아관파천에 따라 러시아의 영향력이 세지면서 시베리아 철도와 연결되게 1,524mm 광궤로 변경되었다가 1898년 7월 6일 농상공부 산하에 설치된 철도사는 최종적으로 1898년 9월 철도궤간을 다시 표준궤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는 케이프궤로 철도를 부설한 일본 또한 무시하지 않고 한국 내 철도를 표준궤로 건설했다.

우여곡절 끝에 경인선 철도의 건설 특허를 얻어내는 데 성공한 모어스였지만, 일본은 계속된 공작으로 끈질기게 괴롭혔다. 건설권이 체결되자마자 일본은 1894년 한일잠정합동조관에 위배된다는 주장을 들이대 계약이 무효라고 주장했고, 마침내는 한국에 곧 난리가 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미국인 투자자들이 발을 빼게 만들었다. 덕분에 처지가 곤궁해진 모어스는 일본은행에서 융자를 빌려야만 했고, 공사 완료 후 경인선에 관한 권리를 일본에 양도하도록 계속 회유하는 한편, '경인철도인수조합'을 구성하여 부설권 매수 공작을 하는 등 갖은 노력을 한다.

점점 지쳐가던 Morse는 공사 완료 후 철도를 일본에 넘긴다는 조건으로 공사를 진행했으나 조합과의 의견충돌과 일본인들의 끈질긴 간섭에 경인선을 완전히 포기하고 이후의 건설권과 소유권은 일본에 넘어가게 된다.

착공과 개통

탁포((坼浦, 현재의 답동)의 물가를 매립하여 인천역(당시 제물포역)을 건설하려는 계획이 시작부터 난항을 겪으면서 착공이 지 지연되었다. 토지의 소유자인 일본인 지주 2명의 반발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뒤로 만석동 방면의 토지 소유자였던 독일인 Wol lter와 초대 인천해관 세무사였떤 영국인 stripiig, 일본인 2명 등 4명이 자신들의 사유지를 기부하는 것을 제공하자 노선을 우회하여 전환국과 응봉산을 위회한 현재의 인천역 위치를 정하게 된다. 뒤늦게 협상에 응하겠다고 한 일본인 두명의 요구는 거부당했다. 가까스로 특허조건의 특허일(1897년 3월 27일)로부터 1년 이내 착공 조항을 만족시켜 1897년 3월 22일 우각동 역터에서 기공식을 거행, 공사를 시작했다. 당시 촬영 사진에 따르면 기공식에 참여한 한국 사람들의 복장은 전부 흰 옷을 입고 있는데, 이 시기의 조선은 명성황후의 국상 기간이었기 때문.

1898년 1월 29일자 미국 뉴욕의 신문 Harper's Weekly에 따르면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Korea에서 미국인이 철도를 건설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소개하면서 주말에 이미 개통된 구간을 트롤리를 통해 이동하는 사진, 노반 공사 현장의 사진 또한 소개하고 있다.

일본의 공작으로 사업이 계속 방해 되었지만 전체 30개월의 건설 기간 중 80%에 달하는 25개월이 미국인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이런 덕분에 한국 최초의 역인 인천역(당시에는 제물포역으로 불리며, 현재의 제물포역과는 다르다) 사의 모습은 전형적인 미국 역의 모습을 따르고 있으며, 레일 또한 미국의 lllinois 철강회사의 것을, 최초로 달린 기관차 또한 미국 Brooks 사의 모갈(Mogal), 심지어는 한강 철교의 철재 또한 미국제를 사용하고 있었다. 끝내 모어스로부터 철도에 관한 권리를 얻어낸 일본은 1899년 4월 23일 인천에서 다시 기공식을 열고(...) 나머지 5개월 동안 공사를 진행했다.

공정의 최후단계인 한강철교의 부설이 장마철 홍수 덕분에 지연되자 노량진역부터 인천역(혹은 제물포역)까지의 구간을 1899년 9월 18일 먼저 개통시켜 한국 최초의 철도노선은 사실상 개통되었다. 구간은 노량진역부터 제물포역까지, 총 7개 역이 개통했는데 제물포역은 현재의 제물포역이 아니라 인천역과 같은 위치이다. 역명 또한 인천역으로도 불렸다. 노선을 따라 현재의 동인천역인 축현역(杻峴驛, 역명의 유래는 '싸릿재'에서 왔다), 우각동역(牛角洞驛, 이름의 유래는 말 그대로 쇠뿔고개이며 1906년 4월 폐역), 부평역(富平驛), 소사역(素砂驛, 현재의 부천역), 오류동역(梧柳洞驛), 노량진역(鷺梁津驛)까지.

1899년 9월 19일자 독립신문의 내용은 철도 개업식을 위하여 인천에서 화륜거가 떠나 영등포로 와서 내외 귀빈을 모시고 오전 9시로 향하는데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를 진동하고 기관차의 굴뚝 연기는 하늘로 솟아오르더라..., 창밖을 바라보니 산천초목이 내달리는 듯하고 나는 새도 따르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개통 당시의 표정속도는 약 시속 20kph, 총 소요시간은 1시간 40분이나 걸렸지만 자전거를 타고 가도 이 정도로 갈 수 있다당시로써는 혁명과도 같은 변화였다. 지금의 같은 구간은 급행열차로 50분이면 가면 된다.

한강철교의 개통

공사가 지연되던 한강철교는 1900년 7월 5일 개통됨으로써 한강 남북이 직접 연결되었다. 이후 7월 8일 북쪽 구간인 용산역, 남대문역(현 서울역 위치), 경성역(1905년 3월 24일 서대문역으로 변경되었으며 3.1 운동의 집결지가 된 후에 폐지되었다.) 까지의 구간을 완공했다.

한강철교 건설의 비화라면, 모어스는 한강철교의 양 교대와 중간의 제 1, 제 2, 제 9교각 3개를 준공하였는데, 일본은 양 교대만 남겨놓고 중간 교각 3개를 돌연 철거해 버린다. 사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본래 한강철교 우측에 폭 4자의 인도를 가설한다는 계획이 있었고, 이 계획 또한 폐지해 버렸으므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해방 이후, 수도권 전철 개통과 카오스

추가바람

1965년에 복선화되었으며, 1974년 8월 15일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면서 수도권 전철이 다니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일반 열차는 운행되지 않는다. 서울-인천 사이를 연결하는 간선 철도 겸 수도권 전철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수요가 터져나가기 시작했고(...) 결국 1994년부터 1999년까지 단계적으로 복복선화 공사를 단행했다. 이에 따라 경인선은 인천역~동인천역 구간을 제외하고는 전부 복복선 구간으로 되어 있다.

특징

  • 철도노선 일람에서는 경부선의 지선으로 간주하고 있으나, 정작 수도권 전철 1호선 운행계통에서는 이 노선이 본선으로 지정되어 있고, 경부선이 지선이다(...)

역 목록

경인선 역 목록
역번호 km 역명 급행[1] 승강장 환승 소재지
신도림
141 0.0 구 로 九 老 ■││■││■││■││■│││ 1호선
(경부선)
142 1.4 구 일 九 一 │■││■│■
143 2.4 개 봉 開 峰 │■││■│
144 3.7 오류동 梧柳洞 │■││■│
145 5.6 온 수 溫 水 │■││■│ 7호선
146 6.9 역 곡 驛 谷 │■││■│
147 8.4 소 사 素 砂 │■││■│ 소사원시선
대곡소사선
148 9.5 부 천 富 川 │■││■│
149 11.2 중 동 中 洞 │■││■│
150 12.2 송 내 松 內 │■││■│
151 13.4 부 개 富 開 │■││■│
152 14.9 부 평 富 平 │■││■│ 인천 1호선
153 16.6 백 운 白 雲 │■││■│
154 18.1 동 암 銅 岩 │■││■│
155 19.3 간 석 間 石 │■││■│
156 20.5 주 안 朱 安 │■││■│ 인천 2호선
157 21.5 도 화 道 禾 │■││■│
158 22.5 제물포 濟物浦 │■││■│
159 23.9 도 원 桃 源 │■││■│
160 25.1 동인천 東仁川 │■││■│
161 27.0 인 천 仁 川 ■││■│ 수인선

각주

  1. 용산-동인천 급행. 동두천 급행은 경인선에서 완행으로 운행하므로 기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