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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혁 ==
== 연혁 ==
[[1899년]](광무 2년) [[9월 18일]] 노량진역-제물포역 사이가 개통되어 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11년]] [[한강철교]]가 개통되면서 당시의 남대문역([[서울역]])까지 연장되었으나,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노량진-구로 구간이 경부선에 넘어가면서 현재의 노선으로 단축되었다.
=== 철도부설 쟁탈전 ===
17세기 말에 전 세계적으로 보급이 확산된 철도교통은 1880년대 말에 본격적으로 조선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 시초는
1876년 2월 26일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체결 이후 같은 해 4월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김기수 예조참의가 1877년경
당시 막 개통된 [[도카이도 본선]]의 [[신바시역]]~[[요코하마역]]까지의 구간을 타보고 화륜거(火輪車)라 표현해 저서인 일동기유에 소개한 것이었다.
 
이후 1882년 4월 한미수호조규(韓美修好條規)에 따라 1887년 주미조선공사 박정양을 수행한 이하영이 1889년 대리공사로 기국하면서 미국에서 이용한 철도의 모형을 구입해 들여와 고종 황제와 대신들과 함께 도입의 필요성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인천항]][[부산항]]은 대한민국의 양대 물자 관문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그 당시에도 두 도시는 바다와 바로 연결되어 있는 탓에 수도와 연결할 철도의 필요성이 가장 먼저 논의되었고 구한말 한반도를 노리던 수많은 열강들의 표적 중 하나가 된다.  그리고 경인선은 한국에서 가장 먼저 착공되고 먼저 개통된 철도 노선이 되었다. 이것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어촌에 불과했던 인천이 대도시로 성장한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의 철도부설권과 광산개발권은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수많은 강대국들이 따먹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의 움직임은 필사적이었다. 이미 1885년 일본인 마쓰다 코조(松田行藏)수 년 동안 조선을 답사해 교통과 경제 상황을 파악했던 전력이 있었고 1892년에는 일본인 철도전문 기사가 경부 간의 경로 답사후 부산 주재 일본 영사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 이후 1894년 8월, 일본은 철도건설에 관한 권리를 조선에서 못박아 버리기 위해 [[개소리|조선 정부 내정의 개혁을 희망하며, 이를 위하여 경부, 경인 간에 부설 철도 권리는 조선정부가 재정적 여유가 없음을 감안하여 일본 정부 또는 일본의 기업이 시기를 보아 기공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한일잠정합동조관(韓日暫定合同款)을 강제 체결시키기까지 이른다.
 
경인선과 경부선의 부설을 두고 [[일본]]과 [[미국]]은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보다 앞서 1892년 4월 '구한국외교문서 제 10권 993호'에 내용에 따라 당시 고종 황제는 미국인 모어스(James R. Morse)를 초청하여 [[이완용]], [[이하영]] 등에게 경부철도 건설 조건에 대해 협의하고 모어스가 부설자금을 출자해 부설하고 25년 내 자금을 회수하며, 5개의 금광 개설권을 허가하도록 했으나 정병하 등 일부의 강경한 반대로 무산되자 모어스는 왕복 여비, 출장중 사업상 손해 등 은화 10,000냥에 달하는 손해 배상금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다.
 
상황은 뜻밖으로 흘러갔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면서 고종과 [[순종|세자]]가 아관파천을 감행하면서 일본의 영향력이 잠시 약해지게 됝 것, 미국은 이 틈을 타서 1896년 3월 29일 경인선의 부설권을 얻어냈고, 모어스는 다시 바닥에 복귀했다.
철도부설에 관한 권리는 모어스에게 부여되는 대신 특허 1년 내에 착공하고, 전쟁 등의 비상사태가 아닌 이상 3년 이내에
반드시 완공할 것, 완공 후 15년이 경과하면 한국 정부는 전체를 매수할 수 있으나 매수하지 못할 경우에는 특허권을 10년 더
연장할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의 Morse는 건설 특허를 얻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일본의 끈질긴 방해에 점점 지쳐가기 시작한다.
건설권이 체결되자마자 일본은 1894년 한일잠정합동조관에 위배된다는 주장에서부터 갖은 논리로 공격했고, 마침내는 한국에 곧 난리가 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미국인 투자자들이 발을 빼게 만드는 것이었다. 덕분에 처지가 곤궁해진 모어스는 일본은행에서 융자를 빌려야만 했고, 공사 완료 후 경인선에 관한 권리를 일본에 양도하도록 계속 회유하는 한편, '경인철도인수조합'을 구성하여 부설권 매수 공작을 하는 등 갖은 노력을 한다.
 
공사 자체의 추진도 쉽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로 착공을 시도하기도 전에 지금의 답동인 탁포(坼浦)의 소유자인 일본인 지주 2명의 반발이 일어났다. 탈포의 물가를 매립하여 인천역을 건설하려는 계획이었지만 시작부터 난항을 겪었다. 그 뒤로 만석동 방면의 토지 소유자였던 독일인 Wollter와 초대 인천해관 세무사였떤 영국인 stripiig, 일본인 2명 등 4명이 자신들의 사유지를 기부하는 것을 제공하자 노선을 우회하여 전환국과 응봉산을 위회한 현재의 인천역 위치를 정했다. 뒤늦게 탁포의 일본인 두명이 협상에 응하겠다고 했지만 거부당했다.
 
이러한 힘겨운 과정에 지친 Morse는 공사 완료 후 철도를 일본에 넘긴다는 조건으로 공사를 진행했으나 조합과의 의견충돌과 일본인들의 끈질긴 간섭에 경인선을 완전히 포기하고 이후의 건설권과 소유권은 일본에 넘어가게 된다.
 
=== 착공과 개통 ===
초기 공사부터 어려움을 겪었지만 철도에 관한 권리가 미국에 있던 1897년 3월 22일 우각동 역터에서 기공식을 거행, 공사를 시작했다. 특허조건의 특허일(1897년 3월 29일)로부터 1년 이내 착공 조건을 7일 앞서 아슬아슬하게 지킨 셈이었다. 당시 촬영 사진에 따르면 기공식에 참여한 한국 사람들의 복장은 전부 흰 옷을 입고 있는데, 이 시기의 조선은 [[명성황후]]의  국상 기간이었다.
 
1898년 1월 29일자 미국 뉴욕의 신문 Harper's Weekly에 따르면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Korea에서 미국인이 철도를 건설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소개하면서 주말에 이미 개통된 구간을 트롤리를 통해 이동하는 사진, 노반 공사 현장의 사진 또한 소개하고 있다.
 
일본의 공작으로 사업 자체가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30개월의 건설 기간 중 80%에 달하는 25개월이 미국인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그리고 1899년 4월 23일 끝내 권리를 얻어낸 일본은 인천에서 다시 기공식을 열고(...) 나머지 5개월 동안 공사를 진행했다. 이런 덕분에 한국 최초의 역인 인천역(당시에는 제물포역으로 불리며, 현재의 제물포역과는 다르다) 사의 모습은 전형적인 미국 역의 모습을 따르고 있으며, 레일 또한 미국의 lllinois 철강회사의 것을, 최초로 달린 기관차 또한 미국 Brooks 사의 모갈(Mogal), 심지어는 한강 철교의 철재 또한 미국제를 사용하고 있었다.
 
 
 
 


[[1965년]]에 복선화되었으며, [[1974년]] [[8월 15일]]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면서 수도권 전철이 다니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일반 열차는 운행되지 않는다.
[[1965년]]에 복선화되었으며, [[1974년]] [[8월 15일]]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면서 수도권 전철이 다니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일반 열차는 운행되지 않는다.

2015년 7월 3일 (금) 23:22 판

틀:수도권 1호선 틀

京仁線 / Gyeongin Line

경인선
운영기관 한국철도공사
영업거리 27.0km
궤간 1435mm 표준궤
역 수 21
신호 ATS
차량기지 구로차량사업소
지상구간 전구간
연혁 1899. 09. 18 제물포-노량진
1911 한강철교 개통
1974. 08. 15 수도권 전철 운행 개시

대한민국 최초의 철도이자 한국 철도의 시발점

개요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역인천광역시 중구 인천역을 잇는 헬게이트 복복선 간선철도. 길이 27.0km로 1974년 이래로 수도권 전철 1호선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연혁

철도부설 쟁탈전

17세기 말에 전 세계적으로 보급이 확산된 철도교통은 1880년대 말에 본격적으로 조선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 시초는 1876년 2월 26일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체결 이후 같은 해 4월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김기수 예조참의가 1877년경 당시 막 개통된 도카이도 본선신바시역~요코하마역까지의 구간을 타보고 화륜거(火輪車)라 표현해 저서인 일동기유에 소개한 것이었다.

이후 1882년 4월 한미수호조규(韓美修好條規)에 따라 1887년 주미조선공사 박정양을 수행한 이하영이 1889년 대리공사로 기국하면서 미국에서 이용한 철도의 모형을 구입해 들여와 고종 황제와 대신들과 함께 도입의 필요성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인천항부산항은 대한민국의 양대 물자 관문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그 당시에도 두 도시는 바다와 바로 연결되어 있는 탓에 수도와 연결할 철도의 필요성이 가장 먼저 논의되었고 구한말 한반도를 노리던 수많은 열강들의 표적 중 하나가 된다. 그리고 경인선은 한국에서 가장 먼저 착공되고 먼저 개통된 철도 노선이 되었다. 이것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어촌에 불과했던 인천이 대도시로 성장한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의 철도부설권과 광산개발권은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수많은 강대국들이 따먹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의 움직임은 필사적이었다. 이미 1885년 일본인 마쓰다 코조(松田行藏)가 수 년 동안 조선을 답사해 교통과 경제 상황을 파악했던 전력이 있었고 1892년에는 일본인 철도전문 기사가 경부 간의 경로 답사후 부산 주재 일본 영사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 이후 1894년 8월, 일본은 철도건설에 관한 권리를 조선에서 못박아 버리기 위해 조선 정부 내정의 개혁을 희망하며, 이를 위하여 경부, 경인 간에 부설 철도 권리는 조선정부가 재정적 여유가 없음을 감안하여 일본 정부 또는 일본의 기업이 시기를 보아 기공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한일잠정합동조관(韓日暫定合同款)을 강제 체결시키기까지 이른다.

경인선과 경부선의 부설을 두고 일본미국은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보다 앞서 1892년 4월 '구한국외교문서 제 10권 993호'에 내용에 따라 당시 고종 황제는 미국인 모어스(James R. Morse)를 초청하여 이완용, 이하영 등에게 경부철도 건설 조건에 대해 협의하고 모어스가 부설자금을 출자해 부설하고 25년 내 자금을 회수하며, 5개의 금광 개설권을 허가하도록 했으나 정병하 등 일부의 강경한 반대로 무산되자 모어스는 왕복 여비, 출장중 사업상 손해 등 은화 10,000냥에 달하는 손해 배상금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다.

상황은 뜻밖으로 흘러갔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면서 고종과 세자가 아관파천을 감행하면서 일본의 영향력이 잠시 약해지게 됝 것, 미국은 이 틈을 타서 1896년 3월 29일 경인선의 부설권을 얻어냈고, 모어스는 다시 이 바닥에 복귀했다. 철도부설에 관한 권리는 모어스에게 부여되는 대신 특허 1년 내에 착공하고, 전쟁 등의 비상사태가 아닌 이상 3년 이내에 반드시 완공할 것, 완공 후 15년이 경과하면 한국 정부는 전체를 매수할 수 있으나 매수하지 못할 경우에는 특허권을 10년 더 연장할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의 Morse는 건설 특허를 얻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일본의 끈질긴 방해에 점점 지쳐가기 시작한다. 건설권이 체결되자마자 일본은 1894년 한일잠정합동조관에 위배된다는 주장에서부터 갖은 논리로 공격했고, 마침내는 한국에 곧 난리가 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미국인 투자자들이 발을 빼게 만드는 것이었다. 덕분에 처지가 곤궁해진 모어스는 일본은행에서 융자를 빌려야만 했고, 공사 완료 후 경인선에 관한 권리를 일본에 양도하도록 계속 회유하는 한편, '경인철도인수조합'을 구성하여 부설권 매수 공작을 하는 등 갖은 노력을 한다.

공사 자체의 추진도 쉽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로 착공을 시도하기도 전에 지금의 답동인 탁포(坼浦)의 소유자인 일본인 지주 2명의 반발이 일어났다. 탈포의 물가를 매립하여 인천역을 건설하려는 계획이었지만 시작부터 난항을 겪었다. 그 뒤로 만석동 방면의 토지 소유자였던 독일인 Wollter와 초대 인천해관 세무사였떤 영국인 stripiig, 일본인 2명 등 4명이 자신들의 사유지를 기부하는 것을 제공하자 노선을 우회하여 전환국과 응봉산을 위회한 현재의 인천역 위치를 정했다. 뒤늦게 탁포의 일본인 두명이 협상에 응하겠다고 했지만 거부당했다.

이러한 힘겨운 과정에 지친 Morse는 공사 완료 후 철도를 일본에 넘긴다는 조건으로 공사를 진행했으나 조합과의 의견충돌과 일본인들의 끈질긴 간섭에 경인선을 완전히 포기하고 이후의 건설권과 소유권은 일본에 넘어가게 된다.

착공과 개통

초기 공사부터 어려움을 겪었지만 철도에 관한 권리가 미국에 있던 1897년 3월 22일 우각동 역터에서 기공식을 거행, 공사를 시작했다. 특허조건의 특허일(1897년 3월 29일)로부터 1년 이내 착공 조건을 7일 앞서 아슬아슬하게 지킨 셈이었다. 당시 촬영 사진에 따르면 기공식에 참여한 한국 사람들의 복장은 전부 흰 옷을 입고 있는데, 이 시기의 조선은 명성황후의 국상 기간이었다.

1898년 1월 29일자 미국 뉴욕의 신문 Harper's Weekly에 따르면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Korea에서 미국인이 철도를 건설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소개하면서 주말에 이미 개통된 구간을 트롤리를 통해 이동하는 사진, 노반 공사 현장의 사진 또한 소개하고 있다.

일본의 공작으로 사업 자체가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30개월의 건설 기간 중 80%에 달하는 25개월이 미국인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그리고 1899년 4월 23일 끝내 권리를 얻어낸 일본은 인천에서 다시 기공식을 열고(...) 나머지 5개월 동안 공사를 진행했다. 이런 덕분에 한국 최초의 역인 인천역(당시에는 제물포역으로 불리며, 현재의 제물포역과는 다르다) 사의 모습은 전형적인 미국 역의 모습을 따르고 있으며, 레일 또한 미국의 lllinois 철강회사의 것을, 최초로 달린 기관차 또한 미국 Brooks 사의 모갈(Mogal), 심지어는 한강 철교의 철재 또한 미국제를 사용하고 있었다.



1965년에 복선화되었으며, 1974년 8월 15일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면서 수도권 전철이 다니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일반 열차는 운행되지 않는다. 서울-인천 사이를 연결하는 간선 철도 겸 수도권 전철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수요가 터져나가기 시작했고(...) 결국 1994년부터 1999년까지 단계적으로 복복선화 공사를 단행했다. 이에 따라 경인선은 인천역~동인천역 구간을 제외하고는 전부 복복선 구간으로 되어 있다.

특징

  • 철도노선 일람에서는 경부선의 지선으로 간주하고 있으나, 정작 수도권 전철 1호선 운행계통에서는 이 노선이 본선으로 지정되어 있고, 경부선이 지선이다(...)

역 목록

경인선 역 목록
역번호 km 역명 급행[1] 승강장 환승 소재지
신도림
141 0.0 구 로 九 老 ■││■││■││■││■│││ 1호선
(경부선)
142 1.4 구 일 九 一 │■││■│■
143 2.4 개 봉 開 峰 │■││■│
144 3.7 오류동 梧柳洞 │■││■│
145 5.6 온 수 溫 水 │■││■│ 7호선
146 6.9 역 곡 驛 谷 │■││■│
147 8.4 소 사 素 砂 │■││■│ 소사원시선
대곡소사선
148 9.5 부 천 富 川 │■││■│
149 11.2 중 동 中 洞 │■││■│
150 12.2 송 내 松 內 │■││■│
151 13.4 부 개 富 開 │■││■│
152 14.9 부 평 富 平 │■││■│ 인천 1호선
153 16.6 백 운 白 雲 │■││■│
154 18.1 동 암 銅 岩 │■││■│
155 19.3 간 석 間 石 │■││■│
156 20.5 주 안 朱 安 │■││■│ 인천 2호선
157 21.5 도 화 道 禾 │■││■│
158 22.5 제물포 濟物浦 │■││■│
159 23.9 도 원 桃 源 │■││■│
160 25.1 동인천 東仁川 │■││■│
161 27.0 인 천 仁 川 ■││■│ 수인선

각주

  1. 용산-동인천 급행. 동두천 급행은 경인선에서 완행으로 운행하므로 기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