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코 비

키코
紀子
Kawashimakiko.jpg
2022년 9월 11일, 만 56세 생일 기념사진
인물 정보
다른이름 결혼 전: 가와시마 키코
어린 시절 별명: 키키(Kiki)
출생 1966년 9월 11일 (57세)
일본 시즈오카현
국적 일본
학력 시즈오카시립 나카다초등학교
신주쿠구립 와세다초등학교(전학)
가쿠슈인 초등과(편입)
오스트리아 The American International School of Vienna(편입)
가쿠슈인 여자중등과(편입)
가쿠슈인 여자고등과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심리학과(학사)
가쿠슈인대학 대학원(석사)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대학원(박사)
직업 왕족(왕자비)
종교 신토
신체 162cm
배우자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
가족 시아버지 아키히토 상왕, 시어머니 미치코 상왕비
친정아버지 가와시마 타츠히코, 친정어머니 가와시마 카즈요
시아주버니 나루히토 일왕, 손윗동서 마사코 왕비
시누이 구로다 사야코
남동생 가와시마 슈, 올케 가와시마 나오
자녀: 장녀 코무로 마코, 차녀 카코 공주, 장남 히사히토 왕자
시조카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
친정조카 가와시마 리코
활동기간 1990년 왕자비 책봉

일본의 왕족(왕자비). 나루히토 일왕의 남동생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의 아내. 오시루시는 부채붓꽃.

출생[편집 | 원본 편집]

1966년 9월 11일, 일본 시즈오카현에서 부친 가와시마 타츠히코(川嶋辰彦)와 모친 가와시마 카즈요(川嶋和代)의 1녀 1남 중 첫째로 태어났다.

친정[편집 | 원본 편집]

키코의 증조할아버지인 가와시마 쇼이치로(川嶋庄一郞)의 본래 이름은 마츠우라 리키마츠(松浦力松)였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리키마츠는 일찍이 아버지 히라요시(平吉)를 여의고 어머니 카츠(かつ)와 두 형과 함께 가난하게 살았지만, 총명했기에 부유한 자산가인 가와시마 쇼우에몬(川嶋庄右衛門)의 눈에 들었고 그의 맏사위가 되었다. 데릴사위가 된 리키마츠는 처가를 따라 ‘가와시마’로 성씨를 바꾸었고, 성씨뿐 아니라 이름도 (장인 쇼우에몬의 이름에서 庄을 따서) ‘쇼이치로’로 바꾸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처제(쇼우에몬의 3녀)와 재혼했다.

할아버지 가와시마 타카히코(川嶋孝彦)는 내각통계국장을 지냈다. 할머니의 이름은 가와시마 이토코인데, 손녀인 키코와 똑같이 「川嶋紀子」라고 쓴다. 할머니를 닮으라는 뜻에서 똑같은 한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토코의 아버지 이케가미 시로(池上四郎)는 아이즈(会津)[1] 출신으로 메이지유신에 반대하는 보신(戊辰) 전쟁에 참가했고, 이후에는 경찰관을 거쳐 정치인이 되었다. 제6대 오사카시 시장을 지냈으며, 제6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역임한 악질 침략자이기도 하다.

타카히코와 이토코는 3남 2녀를 낳았다. 차남인 타츠히코는 도야마(戶山) 고등학교[2]도쿄대학 경제학부를 거쳐,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대학원에 유학하여 가쿠슈인대학 경제학부 교수가 되었다. 타츠히코의 작은누나 사토 토요코(佐藤豊子)의 남편은 센슈(專修) 대학 교수를 지낸 사토 에이치로(佐藤英一郎)이며, 남동생 유키히코(行彦)는 도쿄국제대학에 교수로 재직했다.

타츠히코의 장인은 스기모토 카스케(杉本嘉助), 장모는 스기모토 사카에코(杉本栄子)이다. 아내 카즈요는 타츠히코보다 2살 연하인 1942년생으로, 시즈오카현 에이와여학원(英和女学院) 중고등학교를 거쳐 쇼와여자단기대학을 졸업했으며, 시즈오카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1964년 10월에 타츠히코와 결혼했다. 사카에코의 종교는 (공식적으로는) 창가학회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녀는 기독교인이며 외손녀인 키코에게 성경을 선물했다’는 소문도 있다.

키코의 남동생 가와시마 슈(川嶋舟)는 1973년생으로, 가쿠슈인 고등과를 졸업하고 아자부(麻布) 대학 수의학부에 진학하여 수의사가 되었다.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도쿄농업대학 강사를 거쳐 현재는 동 대학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유년기와 학창시절[편집 | 원본 편집]

아버지 타츠히코가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대학원에 유학하게 되어, 태어난 지 1년 만인 1967년에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키코는 영유아기를 미국에서 지내고 유치원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영어에 능통해졌다. 때문에 훗날 일본으로 돌아와서는 일본어가 오히려 서툴러 애먹기도 했다고 한다. 1973년에 가와시마 일가는 일본으로 귀국했고, 그 해에 키코의 남동생 슈가 태어났다.

타츠히코는 가쿠슈인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고, 키코는 공립초등학교 2군데를 거쳐 1976년 가쿠슈인 초등과 4학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편입했다. 그러나 이듬해에 다시 외국으로 떠나게 되는데, 타츠히코가 오스트리아 빈의 IIASA[3]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재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쿠슈인 초등과 5학년 1학기를 마친 키코는 현지의 국제학교에 편입했고, 영어에 이어 독일어를 배우게 된다. 이렇게 키코처럼 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을, 일본에서는 ‘귀국자녀(歸國子女)’라고 부른다.

가와시마 일가는 1979년 일본으로 돌아왔고, 키코는 가쿠슈인 여자중등과 2학년에 편입했다. 이어 가쿠슈인 여자고등과를 거쳐 1985년 4월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심리학과에 입학했다. 학창시절 키코는 밝고 명랑한 성격에 무엇이든 열심히 노력하는 우등생이었고, 스키테니스 등의 다양한 스포츠에 능했으며, 예쁘고 청순한 외모로 남학생들에게 인기도 많았다고 한다.

왕자와의 만남과 결혼[편집 | 원본 편집]

1990년 6월,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의 결혼식

대학 신입생이던 1985년, 키코는 캠퍼스 내의 서점인 세이분도(成文堂)에서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왕자를 만났다. 그는 아키히토 당시 왕세자의 차남으로, 키코보다 1살 연상인 1965년생이며 법학부 정치학과 2학년(84학번)이었다.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는 단골로 드나들던 세이분도에서 자주 마주치며 서로 익숙해졌고, 세이분도의 사장은 “경제학부 가와시마 타츠히코 교수의 딸입니다.”라며 키코를 후미히토 왕자에게 소개했다.

이후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는 테니스동아리와 자연문화연구회 등의 모임에서 함께 활동하며 친해졌고, 차츰 남녀관계로 발전하게 되어 교제를 시작했다(캠퍼스커플). 두 사람은 결혼하고 싶었지만, 후미히토 왕자의 형인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왕자가 아직 미혼이었다. ‘형이 먼저 결혼한 다음에 동생이 결혼한다’는 것이 암묵적인 법도(위계질서)이고 상식이었으므로 기다렸지만, ‘장래의 왕세자비이자 왕비’라는 자리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나루히토 왕자와 결혼하려는 여성은 선뜻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한 후미히토 왕자는 가쿠슈인대학 근처의 신호등 아래에서 키코에게 청혼했고, 키코도 청혼을 받아들인다.

1989년에 키코는 가쿠슈인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심리학 공부를 계속했으며, 후미히토 왕자와의 약혼을 발표했다. 당시 히로히토 일왕이 사망하고 상중(喪中)이라, 약혼 발표 기자회견에 임하는 20대 초반의 두 남녀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 검은색 상복(喪服) 차림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0년 6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하여 가장(家長)이 된 후미히토 왕자는, 1965년 출생한 이래로 줄곧 써오던 ‘아야노미야’라는 어칭호 대신 ‘아키시노노미야(秋篠宮)’라는 궁호를 새로 받았다. 이로써 후미히토 왕자와 그의 처자식은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로 불리게 된다.

후미히토 왕자와의 약혼결혼이 발표되면서 키코는 유명해졌고, 일본인들은 키코의 이모저모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다. 시어머니 미치코 왕비처럼 키코도 ‘평민 출신의 비(妃)’였으나, 어마어마한 재벌가의 딸이자 옛 화족(귀족) 가문의 외손녀인 미치코 왕비에 비하면 키코의 친정은 (친가와 외가 모두) 소박했다. 가와시마 일가는 가쿠슈인대학 교직원용 아파트에 살았는데, 때문에 언론에서는 키코를 ‘3LDK[4]의 공주(3LDKのプリンセス)’라고도 불렀다. 시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키코도 혼수깨나 들고 시집왔는데, 넓지 않은 아파트에 혼수품을 보관할 공간이 없어 애먹었다고 한다. 또한 키코의 친정에는 텔레비전이 없어서[5], 가와시마 일가의 독특한 교육방침 및 학구적인 분위기가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후지 텔레비전에서는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의 결혼을 기념하여, 두 사람의 만남과 교제와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헤이세이의 신데렐라 키코 님 이야기(平成のシンデレラ紀子さま物語)>라는 제목의 만화영화로 제작하여 방영했다. 1959년 쇼다 미치코아키히토 왕세자에게 시집올 때 ‘미치 붐(ミッチーㆍブーム)’이 어마어마하게 일어나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것처럼, 가와시마 키코가 후미히토 왕자에게 시집올 때도 ‘키코 붐’이 한창 일어났다.

신혼생활과 두 딸의 탄생[편집 | 원본 편집]

갓 결혼한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는, 후미히토 왕자의 셋째 고모인 다카츠카사 가즈코[6]가 생전에 살던 집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스스로 원해서 시집온 만큼, 키코 비는 부지런히 노력하며 왕실 생활에 적응하려 애썼다. 시부모인 아키히토 일왕 내외에게 싹싹하고 사근사근하게 굴며 비위를 잘 맞추었고, 시집오자마자 금방 두 공주를 낳았고, 왕족으로서의 각종 공무에도 열심히 참석했다. 상중에 약혼 발표를 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도 있었지만, 키코 비의 성실한 모습에 그러한 의견은 사라졌다.

아키히토 일왕의 둘째 숙모인 세츠코 비도 키코 비를 아꼈다. 자녀를 낳지 못했던 그녀는 대신 조카의 아들인 후미히토 왕자를 손자처럼 귀여워했기에, 키코 비 역시 손자며느리처럼 귀여워한 것이다. 또한 ‘귀국자녀’이며 ‘둘째 왕자의 아내’라는 공통점 때문에도 친근감을 느꼈다. 키코 비는 세츠코 비로부터 결핵예방협회 명예총재직을 물려받았고, 1995년 세츠코 비가 사망하자 후미히토 왕자 일가는 세츠코 비의 집을 물려받아 그곳에 거처하게 된다.

시누이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와는 시집오기 전부터 친했는데, ‘남자친구의 여동생’이라는 인연에다가 ‘같은 학교(가쿠슈인) 동문’이라서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제과제빵’이라는 취미까지 같았던 두 여자는 종종 만나서 함께 케이크쿠키를 만들며 놀았는데, 여기에는 미치코 왕비도 자연스럽게 합류하여 어울렸다. 결혼 전부터 예비 시어머니 및 예비 시누이와 친했으니, 키코 비는 왕실에 적응하는 것이 수월했다.[7] 미치코 왕비는 작은며느리를 ‘키코 짱(ちゃん)’이라고 부르며 귀여워했다.

키코 비는 결혼 6개월 만에 임신을 했다. 그녀는 점점 불러오는 배를 안고 시어머니 미치코 왕비를 방문했고, 첫 손주를 보게 된 미치코 왕비는 무척 기뻐하며 키코 비를 잘 챙겨주고 돌봐주었다. 키코 비는 미치코 왕비가 읽었던 벤저민 스포크 박사의 육아서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를 읽었고, 미치코 왕비가 손수 만든 육아지침인 ‘나루 짱 겐뽀(ナルちゃん憲法)’[8]도 참조했으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태교했다.[9] 그리고 1991년 10월 23일, 도쿄 궁내청병원에서 무사히 첫째 마코 공주를 낳았다.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의 첫아이일 뿐 아니라 일왕 내외에게도 첫 손주라서, 마코 공주는 굉장한 관심과 애정 속에서 태어나 자랐다.

형님 마사코 왕세자비가 시집온 이듬해인 1994년에는 둘째를 임신했는데, 히사코 비[10]로부터 “큰며느리가 아직 아이를 낳지 않았는데 작은며느리가 계속 임신하는 것은, 왕실의 법도와 서열에 어긋난다.”라는 지적을 듣기도 했다. 그래도 동년 12월 29일에 궁내청병원에서 무사히 둘째 카코 공주를 낳았다. 딸이지만 첫째라서 환영받았던 언니와 달리, 차녀인 카코 공주의 탄생에는 다소 아쉬워하는 목소리들도 있었다. 어머니인 키코 비부터가 출산 직후 둘째도 딸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산부인과 의사에게 “아들을 낳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물었을 정도였다.

이렇듯 출생 직후에는 아쉬움을 받기도 했지만, 카코 공주는 3살 위의 언니와 함께 왕실과 국민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자랐다.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는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자주 일왕 내외를 방문했고, 일왕 내외는 손녀들의 재롱을 보며 즐거워했다.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도 작은오빠의 딸들을 예뻐했고, 다함께 모이면 더없이 화목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가정이었다.

소문[편집 | 원본 편집]

사실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의 만남과 결혼 과정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좋지 않은 소문들도 많다. 실상은 ‘두 사람이 가쿠슈인대학에서 처음 만났고, 캠퍼스커플로 건전하고 아름답게 연애하다가 결혼에 이르렀다’는 대외적이고 공식적인 선전과는 다른 점들이 많다는 것이다.

연애와 결혼 과정[편집 | 원본 편집]

우선 ‘두 사람이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생 시절이다’라는 설이 있다. 가쿠슈인 고등과(남고) 3학년이던 후미히토 왕자는 가까운 여고 몇 군데에 ‘예쁜 여학생들의 사진을 달라’고 요구했는데, 다른 학교들은 어이없어하며 다들 거절했지만 가쿠슈인 여자고등과만 고분고분 사진을 제출했고, 그 가운데 ‘가와시마 키코’의 사진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키코는 후미히토 왕자를 만나면서부터 말투가 바뀌었다’고도 한다. 키코는 후미히토를 만나 그가 왕자임을 알게 되면서부터, 이전의 보통 말투를 왕실 특유의 말투로 싹 바꾸었는데, 이미 그때부터 (어린 나이에) ‘나는 장차 왕실로 시집가겠다!’고 작정했다는 의미이다. 시어머니와 형님이 거듭되는 왕실의 청혼을 결국 이기지 못하고 시집왔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고등학생 시절의 소문에서도 알 수 있듯) 후미히토 왕자는 여색을 밝히기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키코와 함께 활동했다는 테니스동아리와 자연문화연구회도 사실은 건전한 동아리가 아니라 후미히토 왕자를 위한 일종의 ‘하렘’이라고 한다. 후미히토 왕자는 예쁜 여학생을 보면 (똘마니를 시켜서) 자신의 동아리로 데려오곤 했는데, 그렇게 모인 여학생들 중에서 끝까지 후미히토 왕자의 곁에 남았던 여학생이 키코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왕실로 시집가고 싶었던 키코와 달리, 후미히토 왕자는 키코 역시 (다른 여학생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잠시 데리고 놀다가 정리할 생각이었다. 심지어 몇 차례 키코를 임신시켜 낙태까지 했는데도 후미히토 왕자는 시큰둥했고,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타츠히코가 분노하여 ‘내 딸을 책임지라’며 강하게 항의하는 바람에 결혼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결혼 후에도 후미히토 왕자의 호색한(好色漢) 기질은 사라지지 않았고, 이 때문에 여러 가지 일화들을 만든다.

원만하지 못한 부부관계[편집 | 원본 편집]

1990년대 초반, 왕족들의 모임에서 후미히토 왕자가 만취하여 시녀를 희롱하는 등의 추태를 부렸는데, 심지어 5살이나 위인 형 나루히토 왕세자의 만류에도 오히려 대드는 바람에 형제끼리 크게 다투었고,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가 달려와 험악한 분위기의 두 오빠를 뜯어말려 간신히 진정시켰다고 한다. 이 와중에 새댁이자 아기(마코 공주) 엄마였던 키코 비는, 남편의 포악한 행동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고.

또한 호색한인 후미히토 왕자는 여러 애인들을 두고 있으며, 다카라즈카가극단 단원과의 염문설 외에 태국에도 애인이 있다는 설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태국인 애인과 밀회하느라 공무에 제대로 출석하지 못한 후미히토 왕자의 행적을 궁내청에서 둘러대느라 애먹었고, 때문에 친정아버지 타츠히코가 아키히토 일왕 내외에게 항의했다고. 심지어 2003년 아내와 어린 두 딸[11]과 함께 떠난 태국 순방에서도 애인을 만났으나, 그런데도 키코 비는 남편의 만행을 참으며 순방 내내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어야 했다. 키코 비의 미소는 일명 ‘키코 짱 스마일’로도 불리며 유명한데, 결혼 전에 해맑고 자연스러우며 아름답던 그녀의 미소는, 왕실에서 보내는 세월이 길어질수록 차츰 억지스럽고 때로는 기괴하고 무섭게까지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남편의 문란한 여자관계 때문에, 키코 비는 부인과 질환이 심하여 산부인과를 자주 드나들었다고도 한다.

젊은 시절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의 사진을 보면, 키코 비가 일일이 후미히토 왕자의 겉옷을 입혀주거나, 키도 훨씬 큰 후미히토 왕자[12]에게 키코 비가 우산을 씌워주는 등, 마치 하녀처럼 시중을 드는 모습들이 종종 있다. 그리고 후미히토 왕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내의 시중을 받고 있다. 그러나 히사히토 왕자가 태어난 후로는 키코 비도 더 이상 고분고분 순종만 하지 않고, 남편과 자주 다툼을 벌인다고 한다.

고부관계[편집 | 원본 편집]

시어머니 미치코 왕비와의 고부관계가 좋았다고 알려졌지만, 결혼 전에는 미치코 왕비로부터 꾸중을 들은 일화도 전해진다.

결혼을 앞둔 키코는 어머니 카즈요와 함께 왕궁을 방문하여 미치코 왕비를 만났는데, 시종이 다과를 내오자 카즈요는 딸의 앞에 찻잔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미치코 왕비가 “딸이 어머니에게 시중을 받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감히 어머니에게 시중을 받다니, 그러면 안 됩니다!”라며 큰 목소리로 꾸짖었고, 무안해진 모녀는 아무 대꾸도 못했다. 미치코 왕비가 키코 비를 예뻐하긴 했지만, 모든 것을 무조건적으로 오냐오냐 허용만 해주는 시어머니는 결코 아니었고, 만만치 않은 성격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화이다.

미치코 왕비는 1959년 시집올 때 ‘장갑’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그녀의 친정인 쇼다(正田) 가문은 재벌이지만 평민이었기에, 왕족들과 화족들이나 사용하는 (드레스용) 긴 장갑을 구하지 못하여 애먹었다. 키코 비가 시집오던 1990년에는 백화점에서 얼마든지 긴 장갑을 구할 수 있어서, 시어머니 때처럼 난처해질 일은 없었다. 그런데 타츠히코는 장갑을 구입하느라 지출한 비용을 왕실에 청구했다고 한다. ‘딸이 왕실에 시집가서 사용할 물건이니 왕실에서 돈을 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는데, 장갑의 가격은 가쿠슈인대학 교수인 타츠히코의 높은 연봉에 비하면 푼돈이었다. 때문에 이는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라, ‘왕실에 대한 타츠히코의 항의’로 보는 편이 더 합당해 보인다.

아들을 낳아 의기양양[편집 | 원본 편집]

키코 비보다 3년 늦게 시집온 형님 마사코 왕세자비는 오랜 난임으로 고충을 겪었다. 유럽미국에서 오랜 시간 성장하여 각종 외국어에 능통하고, 하버드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일본으로 귀국해서는 외교관이 되어 활약하다가 나루히토 왕세자로부터 7년간 끈질긴 청혼을 받은 끝에 시집온 마사코 왕세자비는, 결혼 후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싶었다. 왕실에서 그녀를 설득한 논리도 “왕세자비가 되어서도 왕실외교ㆍ해외순방ㆍ대외활동 등으로 나라에 공헌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정작 왕실로 시집와보니 마사코 왕세자비에게 요구되는 최우선 과제는 ‘아들 출산’이었고, 그런데도 왕세자 부부가 좀처럼 아이를 낳지 못하자 비난의 화살은 마사코 왕세자비에게만 쏟아졌다. 왕실에서는 마사코 왕세자비의 활동을 엄격하게 제약하며 임신을 위해 노력할 것을 종용했다. 마사코 왕세자비는 임신과 유산을 반복하다가 결혼 8년 만인 2001년에야 어렵게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를 낳았지만, 왕실에서는 ‘다시 임신해서 아들을 낳으라’고 압박했고, 가뜩이나 심신이 지쳐 있었던 마사코 왕세자비는 심한 우울증과 적응장애로 두문불출하며 공식석상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된다.

2003년, 당시 궁내청 장관이던 유아사 토시오(湯淺利夫)는 기자회견에서 “왕세자 부부가 어서 둘째를 낳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발언했다. 그리고 몇 개월 후에는 “솔직히 말해서, 왕실의 후사를 생각한다면 후미히토 왕자 부부가 셋째를 낳았으면 좋겠습니다. 두 공주와의 나이 차이를 생각한다면, 어서 빨리 셋째를 가져야 합니다.”라고까지 말했다. 물론 이것은 장관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고, 일왕 부부가 장관의 입을 빌려 요구한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여왕 허용론’도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1965년 후미히토 왕자가 태어난 이래로 줄줄이 공주들만 태어나고 있는 왕실의 상황 때문이었다. 만약 여자의 즉위가 허용된다면, 아이코 공주가 아버지 나루히토 왕세자에 이어 왕위를 물려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여왕 허용론’도 논의되던 2006년 초반,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는 ‘셋째를 임신했다’는 발표를 한다. 그리고 동년 9월 6일, 아이이쿠병원에서 히사히토 왕자를 낳았다. 40세 생일을 5일 앞두고 있었던 키코 비의 출산은 ‘일본 왕실 최고령 출산’으로 기록되었고, ‘일본 왕실 최초의 제왕절개 출산’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적지 않은 나이의 출산이라서 그런지, 일본 최고의 산부인과ㆍ소아과ㆍ마취과 의료진들이 동원되어 출산했다고 한다. 그만큼 키코 비에게는 여러모로 힘들었던 출산이었다.

히사히토 왕자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도 잡음은 많다. 일왕 부부도 ‘셋째를 낳으라’고 종용하긴 했지만, 후미히토 왕자 부부도 욕심이 많아 무리하게 늦둥이를 가졌다는 것이다. 왕세자 부부도 인공수정으로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를 낳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13], 후미히토 왕자 부부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일부러 인위적인 방법으로 ‘아들’을 골라 임신한 것으로 의심되었다. 키코 비가 제왕절개로 히사히토 왕자를 낳은 이유에 대해서는 ‘전치태반[14] 때문’이라고 공표되었으나, 세간에는 ‘좋은 사주를 갖기 위해서’라는 설이 유력했다. 히사히토 왕자가 태어난 날짜와 시간이, 일명 ‘오래 살면서 많은 여자들을 거느릴 팔자’라고.

아무튼 히사히토 왕자가 태어나면서 ‘여왕 허용론’은 자취를 감추었고, 일본은 ‘41년 만의 왕자 탄생’에 감격했다. 히사히토 왕자는 ‘장래 왕위를 계승할 귀한 남자아이’로 떠받들어졌고, 그의 부모와 누나들도 ‘훌륭하고 이상적인 왕족’으로 칭송되며 각광을 받았다. 그와 반비례하여 왕세자 일가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사촌언니들과 달리 수줍음이 많았던 어린 아이코 공주에 대해 ‘자폐아가 아니냐?!’는 악의적인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고, 이에 나루히토 왕세자는 해명하려고 나름대로 애썼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일으켰다.

2010년 4월, 히사히토 왕자는 가쿠슈인 유치원이 아닌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유치원에 입학했다. 예상을 깨뜨린 선택에 대해,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는 ‘아들이 다양한 또래 친구들을 사귀게 하려고’라고 설명했다. 마침 키코 비가 오차노미즈여대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었다는 인연도 있었다.

2013년 4월, 히사히토 왕자는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초등학교에 진학했다. 이전에도 외부 유치원에 다닌 왕족은 몇 있었고, 2008년부터는 전통적 왕실학교인 가쿠슈인을 벗어나 다른 교육기관을 택하는 왕족들이 하나둘 생기고 있었지만, 그래도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는 다들 가쿠슈인에서 다녔는데, 가쿠슈인 초등과가 아닌 다른 초등학교에 입학한 왕족은 히사히토 왕자가 처음이다.

히사히토 왕자의 초등학교 입학 전후부터,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이세신궁, 역대 일왕들의 묘지, 심지어 일본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오키나와현 평화기념공원의 전몰자 묘지까지 참배하는 등, 본격적으로 ‘이 아이가 장래의 후계자다’라고 보여주려는 듯이 행동했다.

조카 아이코 공주와의 경쟁[편집 | 원본 편집]

점점 힘을 얻으면서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는 오만해졌다. 후미히토 왕자는 ‘연로한 노인이 국왕의 임무를 수행하려면 힘드니까’라는 일견 타당하게 보이는 이유를 내세워 ‘국왕 정년제’의 도입을 제안했다. 왕위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것이다. 2013년에는 야마오리 데쓰오(山折哲雄)라는 원로 종교학자가 월간지 <신초(新潮)> 3월호에 ‘나루히토 왕세자 전하, 나라와 왕실을 위해 퇴위하십시오!!’라는 내용의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글을 쓰기도 했는데, 일본은 이런 주장을 개인이 당당히 펼칠 수 없는 분위기이므로, 배후세력이 있다고 의심된다. 후미히토 왕자와 가까운 우익들도 ‘왕위를 이을 아들도 없고, 아프다며 요양만 하고 있는 마사코 왕세자비가 장래 왕비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것 같으니, 왕세자는 퇴위하라’며 공격했다.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가쿠슈인 초등과 2~3학년 시절 학교에서 짓궂은 남자아이들로부터 심한 괴롭힘을 당하여 한동안 등교거부까지 한 적이 있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키코 비가 배후세력으로 의심받기도 했다. 아이코 공주를 괴롭힌 남자아이들의 부모들이, 키코 비와 친한 사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키코 비는 도서 관련 행사에 참가해서 을 1권 골라들고 “주변의 어떤 어머니와 아이에게도 권해주고 싶다.”고 발언했는데, 그 책은 정신적 문제를 겪고 있는 부모와 자녀의 상담에 관한 책이었다. 즉 형님 마사코 왕세자비와 조카 아이코 공주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비꼬아 조롱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코 공주는 이지메를 극복하고 차츰 학교생활에 적응했고,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는 공부에 재능을 보여 우수한 성적을 올렸다.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성적이며, 심지어 일본 최고의 명문인 도쿄대학 합격도 가능하리라는 전망도 있었다.

이에 키코 비는 바짝 긴장하고 히사히토 왕자의 교육에 각별히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게임도 금지하고, TV 시청도 뉴스다큐멘터리 등의 ‘건전하고 교육적인’ 방송만 허용하는 등, 아들의 학업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아이코 공주와 달리) 히사히토 왕자가 우등생이라는 이야기는 없다. 오히려 (과거 아이코 공주가 당했던 것처럼) ‘어딘가 뒤떨어지고 부진한 아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유치원ㆍ초등학교ㆍ중학교 입학, 이후의 진학 계획에 대해서도 뒷말이 무성했다.

반전(反轉)[편집 | 원본 편집]

마냥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 일가의 위상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갑질 논란[편집 | 원본 편집]

키코 비가 (공식석상에서 항상 상냥하게 미소를 짓는 것과 달리) 시종들에게 험악하고 가혹하게 대한다는, 일명 갑질 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녀가 어찌나 히스테리를 부리는지 시종들이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는 사례가 줄을 이었는데, 아무리 경력이 풍부하고 출중한 시종을 보내주어도 키코 비의 갑질을 견디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며, 이러다 보니 궁내청의 직원들도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시종으로 배속되는 것을 꺼린다고 한다.

어느 주간지에서는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에서 근무했던 요리사와 인터뷰하려고 시도했으나, 요리사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듯이 잔뜩 겁에 질렸고, 결국 인터뷰를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도망쳐 버렸다. 저택에서 근무하는 시종들에게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키코 비는 공무에 동행하여 도와주는 수행원ㆍ공무원ㆍ통역 등에게도 종종 화를 내고 성질을 부린다고 전해진다.

이런 소문 때문에 키코 비는 히사히토 왕자의 과외 선생님도 구하지 못했다.[15] 하지만 경호 문제 때문에 일반 학생들처럼 학원에 보내기도 어려우니, 더욱 난감한 상황이다.

박사학위[편집 | 원본 편집]

1990년 결혼 당시 키코 비는 가쿠슈인대학 대학원생이었는데, 결혼 이후로도 공부를 계속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그녀는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는데, 이러한 열정은 단지 ‘학구열’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일본 왕족들 중에는 해외의 명문대학에 유학한 사람들이 많다. 후미히토 왕자와 나루히토 왕세자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 유학했고, 키코 비의 둘째 임신을 나무랐던 히사코 비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출신이다. 특히 마사코 왕세자비하버드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도쿄대학옥스퍼드대학교에서도 공부했다. 키코 비도 명문 사립대학인 가쿠슈인대학을 졸업했지만 해외유학 경험은 없기 때문에, 다른 왕족들의 틈에서 그녀는 열등감을 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키코 비의 박사학위 논문은 ‘비공개’여서 열람할 수 없는데, 이 때문에 그녀가 과연 정당하게 박사학위를 취득했는지 의심하는 시선들이 있다.

남동생의 가정사[편집 | 원본 편집]

수의사인 슈는 후쿠시마현 이와키시의 목장에서 일하다가 타시로 마사미(田代麻紗美)라는 여성을 알게 되어 결혼했다. 마사미의 아버지 타시로 세이신(田代誠信)은 지역의 유서 깊은 신사인 소마나카무라(相馬中村) 신사의 제관(祭官)으로, 마사미도 보조 제관으로 활동하며 아버지를 돕고 있었다. 2007년에 리코(理孔)라는 딸을 낳았는데, 슈와 마사미가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어난 까닭에 ‘속도위반 결혼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슈와 마사미는 각각 도쿄와 후쿠시마에서 거주하며 주말부부로 지냈고, 리코는 후쿠시마에서 어머니 마사미와 함께 살았다. 2011년 3월 도호쿠(東北) 대지진이 일어나자 마사미는 구호활동에 참가했는데, 그녀는 여기서 알게 된 남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어린 딸 리코를 소마나카무라신사의 홍보용으로 써먹다가도, 한편으로는 제대로 돌보지 않고 방임하기도 했다. 결국 슈는 마사미와 이혼했고, 리코의 양육권을 가지게 되었다. 지역 유지의 딸에 화려한 외모로 눈에 띄는 인물이었던 마사미는 지역사회에서 잔뜩 비판을 받아, 한동안 신사의 제사에도 일절 참가하지 못하고 자숙하며 지내다가 재혼했다고 한다.

슈는 디자이너이자 사업가인 쿠리하라 나오(栗原菜緒)[16]와 재혼했고, 리코는 도쿄의 명문 사립 여학교인 도쿄여학관(東京女学館)[17]에 다니고 있다. 슈와 나오에 대해서도 ‘왕실의 친척이라는 특권을 남용하고 있다’는 논란이 있다.

자녀들에 대한 논란[편집 | 원본 편집]

히사히토 왕자[편집 | 원본 편집]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는 두 딸 마코 공주카코 공주에 비해 아들 히사히토 왕자를 더욱 각별히 챙기고 있다. 2004년 3월 큰딸 마코 공주의 가쿠슈인 초등과 졸업식 이후로 후미히토 왕자는 딸들의 학교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히사히토 왕자의 유치원ㆍ학교 행사에는 아내 키코 비와 함께 나란히 참석한다. 또한 똑같은 행동도 딸들이 (어린 시절에) 했을 때는 꾸짖었는데, 아들이 했을 때는 꾸짖지 않는다. 부모의 이러한 편애에 딸들이, 특히 작은딸 카코 공주가 불만이 많다고 한다.

어린 자녀를 두고 있는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대학원생들과 교직원들은 부속어린이집[18]을 이용하는데, 키코 비가 대학원에 재학 중일 때 ‘대학원생ㆍ교직원의 자녀를 부속유치원에 입학시키는 특별제도’가 생겨났다. 그리고 이 제도의 수혜자는 히사히토 왕자뿐이다. 부속유치원과 달리, 부속어린이집에는 부속초등학교에 자동으로 진학할 수 있는 혜택이 없다. 또한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는 아들을 가쿠슈인 대신 오차노미즈부속에 입학시킨 이유에 대해 ‘다양한 또래 아이들과 폭넓게 교류시키고 싶어서’라고 밝혔지만, 이 때문에 ‘가쿠슈인에 합격하지 못해서 뒷돈으로 오차노미즈부속에 입학시킨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늦둥이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로, 키코 비는 극성스러운 학부모가 되었다. 조카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학업에도 박차를 가하였고, 아들의 경호 문제에도 각별히 유의했다.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초등학교의 운동회 때도 보안에 만반을 기하여, 사전에 허가받지 않은 사람은 (학부모라도) 입장하지 못하게 하고 사진도 찍지 못하게 했다. 이에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사이에서 불만이 많았고, 시부모인 아키히토 일왕 내외도 당혹스러워했지만, 키코 비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초등학교 6학년이나 된 아들의 가방을 일일이 들어주어 과잉보호하는 듯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들과 험한 산을 등산하기도 했다. 이는 ‘우리 아들은 어린데도 이렇게 험한 산까지 등반할 수 있다’고 보여주기 위한 과시로 보인다.

한편 히사히토 왕자가 학교에서 따돌림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자 키코 비는 득달같이 학교로 쫓아가 항의했는데, 정작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초등학교 관계자들은 “히사히토 왕자는 제대로 등교하지도 않는데 무슨 소리냐?!”는 반응을 보였다. 학교 근처의 주민들은 경호원들이 돌아다니는 날이면 ‘오늘은 히사히토 왕자가 등교했나 보다’라고 짐작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사실 다른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히사히토 왕자를 부담스럽게 여긴다고 한다. 아이들끼리 같이 놀다 보면 다투기도 하고, 다칠 수도 있는데, ‘장래 일왕이 될 후계자’인 히사히토 왕자와 그런 식으로 얽혔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다. 미치코 왕비, 마사코 왕세자비, 그리고 키코 비의 왕실생활(호된 시집살이)이 어떠한지 널리 알려진 만큼, 딸을 둔 학부모들은 더욱 자신의 딸이 히사히토 왕자와 가까워지는 것을 꺼린다고.

히사히토 왕자가 중학교 1학년이던 2019년, 그를 노린 흉기난동미수 내지는 살인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히사히토 왕자의 교실 책상에, 손으로 조잡하게 조립하여 만든 흉기가 놓여 있었다. 마침 히사히토 왕자가 속한 1학년 국화반은 이동수업 중이어서 교실이 텅 비어 있었고, 범인은 아무도 해치지 못한 채 체포되었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히사히토 왕자 내지는 다른 학생들이 크게 다치거나 사망할 수도 있었던 사건이었다. 학부모 모임이 소집되었고,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그러게 가쿠슈인에 다니지 왜 오차노미즈부속에 와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느냐”, “지금이라도 가쿠슈인 중등과(남중)로 전학시켜라”라는 반응이 많았지만, 키코 비는 험악하고 고압적인 태도로 다른 학부모들의 반발을 억눌렀고, “경호에 더욱 유의하겠다”는 말만 하며 전학을 거부했다. 그리고 이 사건 때문에 2019년도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중학교의 운동회는 취소되었다.

오차노미즈여자대학의 부속중학교까지는 남녀공학이지만 부속고등학교는 여고이기 때문에, 남학생들은 입시를 치러 외부 고등학교로 진학해야 한다. 아예 초등학교 시절에 입시를 치러 외부 중학교로 진학하는 남학생들도 많아서,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중학교에는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많다. 히사히토 왕자가 초등학교 고학년에 접어들면서부터 ‘부속여고를 남녀공학으로 전환시킨다’느니, ‘부속남고를 설립한다’느니 등등의 이야기들이 나와서, 오차노미즈여대와 부속학교의 구성원들을 술렁이게 했다.

그러나 그러한 방안들은 무산되었다. ‘일본 최고(最古)이자 최고(最高)의 여학교’라는 자부심이 강한 오차노미즈 동문들은 ‘남녀공학 전환’을 경악하며 반대했고, 당시 총장인 무로후시 키미코(室伏きみ子)부터가 오차노미즈여대 부속학교들을 거쳐 오차노미즈여대(이학부)를 졸업한 사람이라, 긍정적일 리가 없었다. 부속남고를 설립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방안으로 ‘자매대학 부속학교로의 무시험 추천 입학’이라는 전형이 도입되었고, 이 제도를 활용하여 히사히토 왕자는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중학교를 졸업하고 쓰쿠바(筑波) 대학 부속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오차노미즈여대 부속학교뿐 아니라 쓰쿠바대학 부속학교도 합격하기 어려운 굉장한 명문학교이다. 키코 비가 아들을 위해 특혜를 마련하고 남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서 시민들, 특히 학부모들이 반발하고 있다. 그리고 두 딸의 선례로 보아, 아들의 대학 진학에도 키코 비가 관여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마코 공주카코 공주[편집 | 원본 편집]

할머니 미치코 왕비와 어머니 키코 비는 우등생이었지만, 마코 공주카코 공주의 학업성적은 좋지 못했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아버지 후미히토 왕자를 닮아서’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어려서부터 부모를 따라 온갖 공무에 참석하느라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두 공주는 명문 사립대학인 국제기독교대학에 입학하여, ‘부정입학’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게다가 그녀들이 합격한 ‘AO입시’라는 전형은 시험성적이 아닌 서류와 면접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방식이라서, 더욱 그러한 의심에 불을 지폈다. 물론 일본 왕실궁내청ㆍ국제기독교대학의 공식적인 입장은 “일반 학생들과 똑같이 경쟁하여 합격했다.”는 것이었지만, 곱지 않은 시선들이 많다.

카코 공주는 2013년 4월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교육학과[19]에 입학했는데, 하필 2013년부터 신설된 학과여서 이 역시 카코 공주를 위한 조치처럼 보였다. 카코 공주는 2학년 1학기까지 다닌 가쿠슈인대학을 중퇴하고 국제기독교대학에 새로 입학했는데, 2014년 12월 29일의 성년(만 20세) 기자회견에서 직접 “유치원부터 줄곧 가쿠슈인에만 다니고 있어서 새로운 환경을 경험해보고 싶었고, 국제기독교대학의 폭넓은 교양교육(liberal arts)과 우수한 영어교육에 매료되어서”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카코 공주는 가쿠슈인대학 1학년 때부터 학교에 제대로 등교하지 않았고, 때문에 성적과 출석상황이 좋지 않아 학교에서 그녀를 제적시키려고 하던 직전에, 키코 비가 나서서 카코 공주를 자퇴시키고 국제기독교대학에 입학시킨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부정입학 문제와는 별개로, 키코 비는 두 딸을 엄격하게 통제해왔다. 큰딸 마코 공주가 대학 신입생 시절에 참가한 스키동아리 MT에서 남학생들과 어울려 을 마시고 노는 모습의 사진이 공개되자, 키코 비는 마코 공주를 스키동아리에서 탈퇴시키고, 동아리 활동을 금지했다. 맏이라서 더욱 엄하게 자라난 마코 공주는 행동도 옷차림도 수수했지만, 작은딸 카코 공주는 또래 젊은이들처럼 노는 것도 좋아했고, 사석에서는 화려하고, 캐주얼하고, 다소 노출도 있는 패션 및 진한 화장도 즐겼다. 키코 비는 카코 공주에게 ‘공부를 더 열심히 하라’고 잔소리했고, 댄스동아리ㆍ남학생들과의 교제ㆍ파티 등도 통제했으며, 옷차림에 대해서도 나무랐다. 하지만 카코 공주는 언니와 달리 순순히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고, 때문에 키코 비와 카코 공주는 종종 충돌하기도 했다.

하지만 카코 공주보다 얌전하고 무난한 듯했던 마코 공주에게서 정말 큰 문제가 터진다.

큰딸 마코 공주의 결혼 소동[편집 | 원본 편집]

2017년 5월, 마코 공주약혼 발표 기자회견을 했다. 상대 남성은 국제기독교대학에서 캠퍼스커플로 교제해온 동갑내기 코무로 케이(小室圭)였다. 케이는 법률사무소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히토츠바시(一橋) 대학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고, 초등학생 시절에 아버지 코무로 토시카츠(小室敏勝)를 잃고 외할아버지 카쿠다 쿠니미츠(角田國光)ㆍ어머니 코무로 카요(小室佳代)와 함께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2018년 가을에 결혼식을 올릴 계획이었다. 이전까지 인기가 높았고 별 사고도 없었던 마코 공주이기에, 세간에서는 그녀를 축복하고 지지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이와 코무로 일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사실들이 폭로되었다. 토시카츠와 그의 부모의 수상쩍은 죽음, 카요의 남자관계와 돈 문제, 케이의 자질 문제 등이었다. 또한 케이는 법률사무소의 정직원이 아니라 1주일에 2~3일 근무하는 파트타임 직원이었고, 학창시절 학교폭력 가해자였던 과거와 여자관계(양다리) 등의 문제도 있었다. 장모가 될 키코 비에 대해서 “귀국자녀이셔서 일본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무례한 발언도 했다. 코무로 일가가 사이비종교인지 신흥종교인지를 믿는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카요는 왕실에 노골적으로 금전적 지원을 요구했다. 이러한 온갖 지저분한 이야기들이 폭로되면서, 마코 공주와 케이의 결혼을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졌다.

논란이 계속되자 2018년 2월 두 사람은 “결혼식을 2020년으로 미루겠다”고 발표했고, 결혼식은커녕 정식 약혼식(노사이)도 치르지 못한 채, 케이는 동년 8월 미국 뉴욕의 포덤대학교(Fordham University) 로스쿨로 유학을 떠났다. 졸업까지는 3년이 걸리며, 미국변호사 자격 취득이 목표라고 했다. 케이는 가정형편도 부유하지 못하고 로스쿨 입학 자격도 의심스러운데도 물가와 학비가 비싼 미국 뉴욕의 로스쿨에서 넉넉하게 생활하며 공부했고, 정식 약혼자가 아니라 ‘약혼 예정자’에 불과한데도 여러 경호원들로부터 경호를 받았다. 일본인들은 이것을 왕실, 더 정확히는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 내외가 베풀어준 부당한 특혜로 여기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2021년 10월, 마코 공주는 케이와 혼인신고를 하여 평민 코무로 마코가 되었다. 결혼식도 지참금[20]도 없이 혼인신고만으로 케이와 부부가 된 마코는, 얼마 후에 남편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여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코무로 부부가 살고 있는 신혼집의 집세는 그들이 스스로의 경제적 능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라서, 겉으로는 ‘지참금을 한 푼도 주지 않았다’지만 사실 왕실이 드러나지 않게 뒤에서 도와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아버지의 ‘생전퇴위’와 그 이후[편집 | 원본 편집]

2016년, 아키히토 일왕은 ‘생전퇴위’라는 놀라운 소식을 발표했다. 그동안 일본 왕실에서는 일왕이 사망한 후에야 왕세자가 즉위하는 것이 당연한 관례였는데, 아키히토 일왕은 “왕위를 장남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물려주고 은퇴하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겉으로 밝힌 이유는 “이제 많이 늙고 병들어서 국왕의 업무를 수행하기 힘들다”는 것과 “선왕의 장례식과 왕세자의 즉위식을 동시에 준비하려면 번거롭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이유들도 있지만, ‘차남 내외를 견제하고 장남 내외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라는 분석도 있다.

작은며느리는 큰며느리보다 권리도 적고 사람들로부터 관심과 주목도 덜 받지만, 그만큼 부담도 덜한 자리이다. 그런데도 그동안 키코 비는 부지런히 힘쓰며 시부모로부터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해왔다. 특히 ‘41년 만의 왕위 계승자(남자)’인 히사히토 왕자를 낳아 각광을 받았고, 후미히토 왕자 내외는 ‘형님 내외를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욕심까지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아키히토 일왕이 직접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양위하겠다”고 선언하여, 후미히토 왕자 내외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생전퇴위’ 발표 이후, 미치코 왕비도 공식석상에서 키코 비보다 마사코 왕세자비를 앞세우며 큰며느리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2019년 아키히토 일왕이 은퇴하고 나루히토 왕세자가 새 일왕으로 즉위했다. 여자의 왕위 계승을 허용하지 않는 일본의 법에 따라, 계승서열 1위는 일왕의 남동생인 후미히토 왕자, 2위는 후미히토 왕자의 아들인 히사히토 왕자가 차지했다. 나루히토 일왕은 후미히토 왕자를 왕세제로 책봉했고, 키코 비도 남편을 따라 왕세제비가 되었다.

2021년 11월 4일, 키코 비의 친정아버지 타츠히코가 사망했다. 향년 81세. (1940년 4월 20일 출생)

각주

  1. 오늘날의 후쿠시마현.
  2. 도쿄의 명문 공립(도립) 고등학교이다.
  3. International Institute for Applied Systems Analysis
  4. 방 3개, 거실(living room), 식당(dining room), 주방(kitchen)을 갖춘 서민 주택.
  5. 때문에 키코는 당시 자신의 인기를 실감하지 못했다고 한다.
  6. 불행한 결혼생활과 사별 이후, 친정(왕실)에 돌아와 살다가 1989년 사망했다.
  7. 반면 이 때문에 마사코 왕세자비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시집와보니 이미 시어머니, 아랫동서, 시누이가 똘똘 뭉쳐 친해져 있으니,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었던 것이다.
  8. 1960년에 미치코 왕세자비가 첫째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왕자의 이름을 따서 지은 명칭.
  9. 덕분에 당시 일본에서는 ‘모차르트 음악으로 태교하기’가 유행이 되었다고 한다.
  10. 아키히토 일왕의 사촌동생인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의 아내. 노리히토 왕자는 5촌 조카이지만 자신보다 겨우 5~6살 연하인 나루히토 왕세자와 친했다.
  11. 당시 마코 공주는 초등학교 6학년, 카코 공주는 초등학교 3학년으로, 두 공주에게는 첫 해외여행이었다.
  12. 178cm로, 일본 왕실에서 가장 키가 크다.
  13. 의료진이 성감별로 아들을 임신하는 방법을 제안했지만, 나루히토 왕세자와 마사코 왕세자비는 성감별 임신을 택하지 않았다고 한다.
  14. 태반이 산도를 막는 증상.
  15. 사촌누나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조치대학 출신의 여선생님에게 과외를 받았다.
  16. 가쿠슈인대학 출신.
  17. 1888년에 설립된 오랜 전통의 여학교로, 초등학교ㆍ중학교ㆍ고등학교 과정까지 갖추고 있는 일관제 사립학교이다. 본래 대학도 있었으나, 학령인구 감소로 인하여 신입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어 2016년 폐교되었다.
  18. 일본에서는 어린이집을 ‘보육원(保育)’이라고 부른다. 한국의 보육원(고아원)은 保育이라는 한자를 쓴다.
  19.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학과이다.
  20. 일본 왕실에서는 시집가는 공주에게 거액의 지참금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