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년~1791년)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클래식 음악 작곡가, 피아니스트다. 고전파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이며 클래식 음악 역사상 최대의 천재로 손꼽힌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유년기[편집 | 원본 편집]
1756년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레오폴트 모차르트로, 역시 유명한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1]였으며 당시에는 잘츠부르크 궁정에서 음악감독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수많은 자녀를 두었지만 장성한 자식은 볼프강과 그의 누나인 마리아 안나(통칭 난네를, 1751-1829) 둘뿐이었다.
유아기부터 그의 천재성은 장난이 아니었는데, 누나인 난네를이 건반악기를 연습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미 세 살 무렵에는 스스로 건반을 연주할 수 있었으며, 다섯 살 무렵에는 첫 번째 작곡을 하였다고 한다. 음악가인 레오폴트는 자기 아들의 천재성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스스로의 커리어를 대부분 양보해가며 아들의 음악교육에 매달리게 되었다.
모차르트는 우선 여러 해에 걸쳐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연주 활동 및 음악교육을 수행하였다. 레오폴트가 볼프강을 그런 고생길로 이끌어간 것은 아들의 재능을 각지에 알리고, 여러 지역의 음악 스타일을 골고루 배워 장성한 이후 궁정 오케스트라에 취직하는 데 유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2]. 모차르트는 가는 곳마다 자신의 천재성을 뽐내며 커다란 화제가 되었고, 아버지의 의도에 따라 음악 교육도 충실하게 받았다.
이후 청소년기에는 고향인 잘츠부르크의 궁정에서 일했는데, 자신의 재능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궁정에서의 생활을 매우 불만스러워했으며, 결국 1777년 잘츠부르크를 떠나 뮌헨, 파리 등지를 돌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게 된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이들 지역에서 모차르트는 외면당할 뿐이었는데, 어릴 적 그가 주목받았던 것은 그가 '어렸기 때문'이었으며 이미 장성한 모차르트가 새삼 사람들의 주목을 끌 계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은 잘 풀리지 않고 함께 여행에 나선 어머니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모차르트는 할 수 없이 잘츠부르크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이미 잘츠부르크에서 마음이 떠난 모차르트에게 현실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고, 모차르트는 얼마 후 자신의 고용주인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대판 싸운 이후 잘츠부르크를 완전히 떠나 빈으로 이주하게 된다.
성년기[편집 | 원본 편집]
당시 중부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던 빈에서 모차르트는 당시로는 보기 드물었던 '자유 음악가'로서 인기를 얻게 된다. 물론 시대가 시대인지라 완전히 독립적인 음악가는 아니었고, 오스트리아 황궁의 오르간 연주자로서 봉급을 받는 등 반쯤 걸친 활동을 이어갔다. 실제로 빈에서의 초기에 모차르트는 상당한 인기를 얻었고,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3]. 당시 빈으로 모차르트를 찾아온 레오폴트가 그의 화려한 생활을 보고 경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782년에는 콘스탄체 베버(1762-1842)[4]와 결혼하였는데, 아버지 레오폴트는 이 결혼을 강하게 반대하였지만 모차르트는 이를 거역하고[5] 콘스탄체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가뜩이나 금전감각이 없던 모차르트와 낭비벽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콘스탄체의 결합은 상호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중상층 이상의 수입이 있었음에도 점차 빚에 허덕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빈에서 모차르트는 작곡가로도 활약했지만,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것은 무엇보다도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이었다. 그는 당시 막 발명되어 퍼지기 시작한 피아노(피아노포르테)의 가능성에 주목하였고, 피아노 시대 초창기를 대표하는 연주자 중 하나가 되었다. 모차르트는 자작 피아노 협주곡을 무대에서 협연하며 스타덤에 올랐고, 무치오 클레멘티 등 다른 연주자들과의 경쟁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불안정한 수입과 이를 상회하는 낭비였다. 사실 말년에도 모차르트는 당시 임대료가 상당히 비쌌던 빈 중심가의 넓은 집에 거주하면서, 자신의 아들을 학비가 비싼 사립학교에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적지 않은 수입을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수입으로도 감당이 되지 않았던 모차르트 부부의 씀씀이는 결국 모차르트 자신에게 과중한 일을 하도록 강제하고 있었다.
모차르트 자신에게 가장 큰 문제는 도박이었는데, 특히 내기당구와 케겔슈타트[6] 등을 즐겼다고 한다. 문제는 거기서 돈을 따면 모를까 주로 돈을 잃는 쪽이었다고(...). 도박을 어쩌다 한두 번도 아니고 거의 허구헌날 하다시피 했으니 암만 돈을 벌어도 금새 탕진하는 게 당연했다.
흥미로운 것은 모차르트가 갈수록 어려움에 빠지던 이 시기에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들을 쏟아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던 모차르트는 레퀴엠, 오페라 마술 피리 등 몇 개의 작업을 연달아 진행한 1791년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쓰러졌고, 결국 레퀴엠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35세).
그의 사인(死因)은 확실히 밝혀진 것이 없다. 당시 의사의 진료기록에는 '열과 발진, 사지통(四肢痛)'이라고 적혀 있는데, 18세기 말의 뒤처진 의학기술로 기록된 것만으로 정확한 병명을 추정하기가 쉽지 않다. 거기에 사후 시신을 부검하지 않아서 겉으로 보이는 대략적인 증상만 기록에 남았기 때문에 더욱 병명을 알아내기 어렵다. 부족한 기록을 토대로 돼지고기 선모충 감염, 류머티스열, 매독이나 납 중독 등 여러 가지 추측만 할 뿐이다. 사실 모차르트는 어릴 적에도 몇 차례나 중병을 앓고 간신히 살아난 바 있었던지라, 원래 그렇게 건강이 좋은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5세 무렵부터 작곡 활동을 시작한 것만으로 이미 천재라 부르기에 충분하지만, 모차르트 음악의 진가는 말기로 갈수록 그 깊이를 무한히 더해간다는 점에 있다. 특히 그의 3대 교향곡(39, 40, 41번)이나 말년의 협주곡들은 고전파의 수준을 뛰어넘어 낭만파의 가능성을 엿보이게 한다는 평가도 있다.
그의 작품으로 인정된 곡은 대략 600여 곡을 넘는다. 다만 당시는 현대적인 저작권 개념이 없었고 악보가 소실되거나 해서 전해지지 않는 경우도 있어, 현재의 시점에서 정확한 곡 수를 알기는 쉽지 않다. 모차르트의 작품 번호인 쾨헬(K) 번호는 1862년 쾨헬에 의해 처음 정리된 이후 여러 차례 개정되어야 했는데, 새로 발견된 곡을 추가하거나 위작으로 판명된 작품을 제외하고, 곡의 작곡 순서도 수정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루트비히 판 베토벤 등과 함께 고전파 음악을 상징하는 작곡가다. 자신보다 20년 이상 연상인 하이든과는 활동한 시기가 비슷하며, 둘은 실제로도 대단히 친하고 서로간에 음악적 영향도 많이 끼쳐서 모차르트는 하이든을 '파파'라고 부르며 <하이든 4중주>를 작곡하여 하이든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한 세대 뒤 사람인 베토벤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는 의견이 분분한데, 모차르트가 베토벤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냥 미적미적한 평가를 내렸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베토벤은 이후 1달여만에 어머니의 사망을 계기로 고향으로 돌아갔고, 둘 사이의 인연은 더 이상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와 관계없이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음악을 매우 존경했던 듯한데,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4번[7]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3악장에 비슷한 음형을 사용했을 정도하지만 감7도를 빼버렸다보니 모차르트보다 훨씬 밋밋하다.
작품 목록[편집 | 원본 편집]
여담[편집 | 원본 편집]
스카톨로지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어릴적부터 그의 편지에는 대변과 방귀 등에 관한 온갖 지저분한 농담들이 넘쳐난다(...). 아무래도 19세기 이후 도덕적 엄숙주의가 유럽 사회를 지배하다보니, 모차르트 신화화에 걸림돌이 되는 이런 부분들은 오랫동안 잊혀져 왔고 모차르트는 '하늘에서 내려온 순결한 천사' 정도의 이미지로 만들어졌던 측면이 있다. 아무튼 모차르트는 스카톨로지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성에 대해 자유로운 생각이었던 듯, 콘스탄체와 주고받은 서신들은 그야말로 온갖 섹드립의 대향연이다(...).
"Leck mich im Arsch" 번역하면 "내 엉덩이 핥아줘"(...)
현대 연구자들이 추정하는 그의 IQ는 대략 220(!!!!!) 전후. 거기에 미술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으며 운동능력으로는 제자리에서 점프하여 공중제비를 돌 수 있을 정도였다니 그야말로 만능 인간. 그를 보면 '신은 불공평하다'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다(...)물론 모차르트의 죽음을 보면서 '신은 공평하다'로 환원될 수도 있다..
또 흔히 알려져 있는 사실은 아니지만, 그는 공식적으로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 모차르트는 1784년 이후 프리메이슨에 가입하게 되었고, 1785년부터는 활발하게 프리메이슨 사상과 관련된 곡들을 작곡하게 되었다. 또 제 3도[8] 이상의 훈련을 마쳤고, 주기적으로 롯지 모임에 참여했다는 기록도 있다.[9]
개신교의 새찬송가 367장 "십자가를 내가 지고"의 곡조는 모차르트가 작곡한 곡이다. 그러나 평생 가톨릭으로 살았고, 또 프리메이슨에 활발히 몸담았던 경력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레퀴엠에 관한 뒷 이야기[편집 | 원본 편집]
모차르트의 마지막 작품이자 최대 걸작 중의 하나인 '레퀴엠'은 모차르트가 처음에 작곡 요청을 받았을 때에는 누가 의뢰한 것인지 몰랐었다고 한다.
어떤 집사가 찾아와서 자기 주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작곡을 의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모차르트의 사후에 프란츠 폰 봘제그 백작이란 사람이 세상 떠난 자기 부인을 위해 레퀴엠을 의뢰한 것이 밝혀졌다.
폰 봘제그 백작은 평소에도 작곡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하고서 만들어오면 마치 자기가 작곡한 것처럼 자랑하기를 좋아했던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모차르트에게 레퀴엠을 부탁하고서 완성되면 자기가 작곡한 것처럼 자랑할 생각이었지만 모차르트가 완성하지 못한채 세상을 떠나자 생각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폰 봘제그 백작은 모차르트의 미완성 레퀴엠을 자기가 작곡한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콘스탄체의 주장에 의해 작곡료 잔금은 지불했다고 한다. (...)
미완성인 레퀴엠은 모차르트의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비엔나의 미하엘러키르헤에서 초연되었다. 모차르트를 추모하기 위한 음악회로서 친구이며 후원자인 고드프리트 반 슈비텐 (Van Switeten)남작이 주선했다고 한다.
미완성의 레퀴엠을 완성한 사람은 모차르트의 제자인 프란츠 사버 쥐스마이어 였다. 완성된 레퀴엠은 모차르트의 추모음악회에서 연주되었다. 1848년 에는 프레데릭 쇼팽의 장례식에서 연주되었고, 1840년에는 나폴레옹 1세를 파리의 앵발리드에 다시 안치할 때에 연주되었다.
대중문화 속의 모차르트[편집 | 원본 편집]
- 모바일 게임 《Fate/Grand Order》에서는 캐스터 클래스의 서번트로 등장한다.
각주
- ↑ 그가 저술한 바이올린 교본은 널리 사용되었으며, 당시의 연주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취급된다.
- ↑ 18세기 중후반까지 서양의 음악가들은 대부분 왕실이나 영주에게 고용되어 일했다.
- ↑ 그가 황궁에서 받은 봉급은 800굴덴으로, 전임자인 빌리발트 글루크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글루크가 이미 수십 년간 명성을 쌓은 대작곡가였음을 고려하면 신참 작곡가인 모차르트가 푸대접을 받았다고 볼 수는 없으며, 실제 그 금액 자체도 당시 공무원 봉급의 두 배를 넘었다.
- ↑ 카를 마리아 폰 베버와 사촌지간이다.
- ↑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말을 어긴 적이 별로 없다. 굳이 꼽자면 잘츠부르크를 떠난 것과 콘스탄체와의 결혼 정도?
- ↑ 공을 굴려 핀을 쓰러뜨리는, 볼링의 전신쯤 되는 놀이
- ↑ 1악장 도입부 멜로디에 감7도를 대거 집어넣은, 당시로서는 매우 대담한 작품이다.
- ↑ 가장 낮은 계급이 제1도
- ↑ http://www.freemasons-freemasonry.com/mozart_freemasonry.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