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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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왕실.

기원과 특징[편집 | 원본 편집]

전설에 의하면, 일본 왕실은 초대 일왕인 진무(神武) 일왕이 BC 660년에 즉위한 이래로 현재까지 왕조가 바뀌지 않고 계승되어 왔다고 한다. 이것을 일명 ‘만세일계(萬世一系)’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의 연구와 견해에 의하면 몇 차례 왕통이 바뀌었다고 하며, 진무 일왕 역시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설이 있다. 히로히토(쇼와) 일왕의 막냇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도 “진무 일왕은 허구의 인물이다”라고 주장했다가 우익들로부터 공격받은 바 있다.

역사와 근현대[편집 | 원본 편집]

오랫동안 일본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것은 막부(幕府)의 쇼군이었고, 교토일왕과 왕실은 허수아비였다. 그러다가 1867년 대정봉환으로 막부의 권력이 일왕에게 이양되었고, 이듬해인 1868년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인해 일본이 근대화되면서, 메이지 일왕과 왕실은 천년고도(千年古都)였던 교토를 떠나 도쿄로 이주한다. 그리고 그동안 존재감이 없던 일왕과 왕실은 일본의 전통 종교인 신토와 결합하여 신격화되며 숭배되기 시작하는데, 이것을 국가신토라고 한다.

메이지 일왕의 왕비쇼켄왕후(하루코)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대신 메이지 일왕은 여러 후궁들로부터 무려 15명(5남 10녀)의 아이들을 낳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어린 나이에 일찍 죽었고, 1남 4녀만 살아남았다. 그중에서 유일한 아들인 요시히토(嘉仁) 왕세자가 살아남아 다이쇼 일왕으로 즉위한다.

다이쇼 일왕의 아내 데이메이왕후(사다코)는 건강한 왕자를 4명이나 낳았고, 덕분에 다이쇼 일왕은 후궁을 둘 필요가 없었다. 데이메이왕후는 병약하고 유약한 남편과 어린 장남 히로히토(쇼와) 왕세자를 대신하여 거물급의 정치인들과 맞섰다. 쇼와 일왕의 아내 고준왕후(나가코)는 시어머니와 달리 줄줄이 공주만 4명을 낳아서 ‘온나바라(女腹)’[1]라고 불리며 눈칫밥을 먹었다. 신하들은 쇼와 일왕에게 “후궁을 들여 아들을 낳으라”고 권유하며 구체적으로 몇몇 여성들을 후궁 후보로 추천했지만, 아내와의 금슬이 좋았던 히로히토 일왕이 단호하게 거부했고, 나가코 왕비도 마침내 다섯째와 여섯째로 아들을 낳아, 측실 제도의 부활은 무산되었다.

1959년, 히로히토 일왕의 장남 아키히토 왕세자가 쇼다 미치코와 결혼했다. 이전까지 왕족들은 어른들이 정해주는 왕족 내지는 귀족가의 자제와 결혼했는데, 다음 일왕이 될 아키히토 왕세자는 그러한 오랜 전통을 깨뜨리고 스스로 평민 여성을 배우자로 선택한 것이다. 대중으로부터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왕실 상’이자 ‘신세대 왕세자 부부’로 많은 각광을 받았고, 아키히토 왕세자의 큰누나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평민 출신의 큰올케를 지지해주었으나, 왕실에서 미치코 왕세자비는 오랫동안 혹독한 시집살이에 시달렸다.

아키히토 일왕의 장남 나루히토 왕세자는 1993년 외교관 오와다 마사코와 결혼했으나,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여 전전긍긍하다가 2001년 무남독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를 낳았다. 방계에도 남자아이라고는 1명도 없기에 ‘법을 바꾸어 여왕을 허용하자’는 의견도 크게 대두되었지만, 나루히토 왕세자의 남동생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가 2006년 늦둥이 셋째 히사히토 왕자를 낳으면서 ‘여왕 허용론’은 잠잠해졌다. 그러나 후미히토 왕자 일가가 인심을 잃고, 반대로 왕세자 부부와 아이코 공주가 인기를 얻으면서, 다시금 ‘아이코 공주를 여왕으로 즉위시키자’는 의견이 나타나고 있다.

2019년 아키히토 일왕은 관례를 깨고 생전에 왕위에서 물러났고, 나루히토 왕세자가 새 일왕으로 즉위했다. 그리고 나루히토 일왕의 남동생 후미히토 왕자는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이름[편집 | 원본 편집]

남성 왕족은 ‘~히토(仁)’, 여성 왕족은 ‘~코(子)’ 돌림으로 이름을 짓는다. 일본 왕족에게는 성씨가 없으나, 왕자/공주에게는 성씨와 비슷한 ‘어칭호(御稱號)’와 ‘궁호(宮號)’라는 것이 있다. 학교, 직장, 기타 사회생활을 할 때 성씨처럼 사용한다.

어칭호는 일왕과 왕세자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노미야’ 형태의 명칭이다. 장남은 왕세자 책봉 전까지, 차남 이하의 아들들은 결혼하여 분가(分家)하기 전까지, 딸들은 시집가기 전까지 사용하는, 일종의 아명(兒名)이다.

나루히토 일왕은 출생 당시 아키히토 ‘왕세자’의 자녀(첫째)였기에 ‘히로노미야’라는 어칭호를 받아 ‘히로노미야 나루히토’로 불렸으나, 1991년 왕세자로 책봉되면서부터 어칭호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구로다 사야코 또한 출생 당시 아키히토 왕세자의 자녀(셋째)였기에 ‘노리노미야’라는 어칭호를 받아 ‘노리노미야 사야코’로 불렸으나, 2005년 구로다 요시키(黑田慶樹)에게 시집가면서 남편의 성씨를 따라 ‘구로다 사야코’가 되었다.

차남 이하의 아들들이 결혼하여 분가하면 방계 왕족 가문이 창설되는데, 이러한 가문을 일본 왕실에서는 미야케(宮家)라고 하며, 미야케를 창설한 가장(家長)에게 주어지는 이름이 궁호이다. 어칭호와 마찬가지로 ‘~노미야’ 형태이다. 후미히토 왕자는 출생 당시 아키히토 왕세자의 자녀(둘째)였기에 ‘아야노미야’라는 어칭호를 받았으나, 1990년 가와시마 키코와 결혼하면서 어칭호 대신 ‘아키시노노미야’라는 궁호를 새로 받았다.

본래 궁호는 가문의 가장이 사용하는 것이지만, 그의 아내와 자녀들도 궁호를 성씨처럼 사용하곤 한다. 가장이 죽으면 장남이 궁호를 물려받아 가문을 계승하며, 차남 이하의 아들들은 결혼하면 분가하여 새로운 궁호를 받는다. 히로히토 일왕의 막냇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의 3남인 노리히토 왕자는, 1984년 돗토리 히사코와 결혼하면서 ‘다카마도노미야’라는 궁호를 새로 받았다. 한편 궁호를 계승할 장남은 ‘와카노미야(若宮)’라고 부르는데, 다카히토 왕자의 장남인 토모히토 왕자는 생전에 ‘미카사노미야 와카노미야’라고 불렸다. 본래 토모히토 왕자가 ‘미카사노미야’라는 궁호를 계승할 예정이었으나, 아버지 다카히토 왕자보다 먼저 죽어 계승하지 못했다.

공주들은 왕위를 계승할 수 없고, 미야케를 창설할 수도 없으며, 결혼하면 남편의 성씨와 신분을 따라야 한다. 일본의 민간에서는 남편이 아내의 성씨를 따르는 것, 사위가 처가를 계승하는 것(데릴사위), 외손주가 외가를 계승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왕실에서는 그 모두가 불가능하다. 과거에는 왕족끼리 결혼하여 공주가 결혼 후로도 왕족 신분을 유지할 수도 있었지만, 1947년부터 왕족의 범위가 대폭 줄어들었고 수십 년간 줄줄이 공주들만 태어났기 때문에, 이제는 왕족들도 왕실 밖에서 배우자를 찾을 수밖에 없다. 즉 일본 왕실의 공주는 (평생 독신으로 살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결혼으로 평민이 될 수밖에 없다.

패전 이후 왕실의 변화[편집 | 원본 편집]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후로 일본은 많은 변화와 혼란을 겪었으며, 그것은 왕실도 마찬가지였다. 왕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잃고 상징적 입헌군주로 전락했으며,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되었던 일왕과 그 일가는 ‘인간선언’을 하여 일본인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하지만 히로히토 일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왕실이 폐지된 국가들도 많았기 때문에 그는 큰 위기감을 느꼈고, 일본 왕실을 보존하기 위하여 많은 개혁적 조치들을 단행했다. 우선 왕실의 규모를 대폭 축소했다. 1947년부터 자신과 남동생 3명 일가들을 제외한 모든 방계 왕족들을 평민으로 강등했다. 메이지 시대부터 귀족 등 고위층들을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의 5개 등급으로 나누어 작위를 부여하여 화족(華族)이라고 불렀는데, 이때 화족들 역시 방계 왕족들과 함께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이렇게 왕족ㆍ화족이 신분을 잃고 평민으로 내려가는 것을 ‘신적강하(臣籍降下)’라고 부른다. 이때 강등된 옛 방계 왕족들에 대해서는 일본 왕실#옛 방계 왕족 항목 참조.

그러나 신적강하 이후로도 옛 방계 왕족들과 화족들의 높디높던 콧대는 하루아침에 꺾이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끼리끼리 뭉쳤고, 신적강하 이전처럼 자신들끼리 결혼하곤 했다. 그리하여 1959년 아키히토 왕세자가 평민 재벌가의 딸 쇼다 미치코와 결혼하려 하자 나가코 왕비와 합세하여 강력하게 반대운동을 펼쳤으며, 결혼이 성사된 이후로도 끊임없이 미치코 왕세자비를 괴롭혔다.

여왕 허용론[편집 | 원본 편집]

옛날에는 일본 왕실에도 여왕들이 많았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1868~1912)에 왕실전범을 개정하면서, 왕위는 남성만이 계승하도록 규정했다.

1965년 후미히토 왕자가 태어난 이후부터 2006년 후미히토 왕자의 아들 히사히토 왕자가 태어날 때까지, 41년간 일본 왕실에서는 줄줄이 공주들만 태어났다. 심지어 나루히토 왕세자도 간신히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 하나밖에 낳지 못하여, 일본 정부와 왕실에서는 여왕 허용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히사히토 왕자의 탄생으로 일단 여왕 허용론은 잠잠해졌지만, ‘왕자가 1명밖에 없는 상황에서 여전히 남성의 계승만을 인정하는 것은 너무 불안정하다’는 의견이 강하다. 또한 (이전과 달리) 후미히토 왕자 일가에 부정적인 여론이 높아지고, 반대로 아이코 공주의 이미지는 좋아지면서, 후미히토 왕자와 히사히토 왕자 부자(父子) 대신 아이코 공주가 여왕으로 즉위하기를 바라는 의견도 많아지고 있다.

문제는 아이코 공주의 후사이다. 예전에 있었던 여왕들은 모두 아버지로부터 왕족의 핏줄을 이어받은 왕녀들이었다. 그러나 왕녀와 일반인 남성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 왕위를 계승한 적은 없었기에, 만약 그런 일이 시도된다면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결방안으로 ‘아이코 공주히사히토 왕자를 결혼시키자’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사촌끼리의 결혼은 (법적으로 허용되지만) 일상적인 일이 아니고, 긍정적으로 여겨지지 않으며, 게다가 나루히토 일왕 일가와 후미히토 왕자 일가의 사이도 썩 좋지 않으므로,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다.

또 다른 해결책으로, 1947년에 신적강하된 옛 방계 왕족 가문의 아들들이 거론된다. 그들 가운데 적당한 인물을 왕실의 부마로 삼아 아이코 공주와 결혼시키면,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부계로부터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라는 조건을 만족시킨다. ‘그렇게 하면 아이코 공주가 여왕으로 재임한 후에 그녀의 후손이 왕위를 이어받는 것도 가능하다’는 논리이다. 아키히토 상왕의 큰누나인 히가시쿠니 시게코의 후손들이, 아이코 공주의 신랑감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구성원[편집 | 원본 편집]

상왕 내외[편집 | 원본 편집]

일왕 일가[편집 | 원본 편집]

아키히토 상왕과 미치코 상왕비의 장남 일가.

아키시노노미야 일가[편집 | 원본 편집]

아키히토 상왕과 미치코 상왕비의 차남 일가.

히타치노미야 일가[편집 | 원본 편집]

아키히토 상왕의 남동생 부부. 자녀가 없기 때문에, 부부 모두 사망하면 히타치노미야 가문은 절손(絶孫)된다.

미카사노미야 일가[편집 | 원본 편집]

아키히토 상왕의 막내 숙부 일가. 남자들은 모두 죽고, 여자들만 남아있다.

  •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 1915년 12월 2일~2016년 10월 27일(향년 100세)
  • 아내 유리코 비: 1923년 6월 4일 (100세)
    • 장녀 고노에 야스코(近衛寗子): 1944년 4월 26일 (79세). 1966년 고노에 타다데루(近衛忠煇)와 결혼하여 왕족 신분 상실.
    • 장남 故 토모히토 왕자: 1946년 1월 5일~2012년 6월 6일(향년 66세)
    • 큰며느리 노부코 비: 1955년 4월 9일 (69세)
    • 차남 故 카츠라노미야 요시히토(桂宮宜仁): 1948년 2월 11일~2014년 6월 8일(향년 66세).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도, 예외적으로 ‘카츠라노미야’라는 궁호를 받았다.
    • 차녀 센 마사코(千容子): 1951년 10월 23일 (72세). 1983년 센 소시츠(千宗室)와 결혼하여 왕족 신분 상실.
    • 3남 故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 1954년 12월 29일~2002년 11월 21일(향년 54세). 1984년 돗토리 히사코와 결혼하여 분가.

두 공주가 시집가고, 유리코 비와 노부코 비가 사망하면, 미카사노미야 가문은 문을 닫게 된다. 때문에 장손녀 아키코 공주는 “시집가지 않고 독신으로 살며 미카사노미야 가문과 왕실을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 역시 임시방편일 뿐, 아키코 공주까지 세상을 떠나면 미카사노미야 가문은 더 이상 존속될 수 없다.

다카마도노미야 일가[편집 | 원본 편집]

장녀 쓰구코 공주가 시집을 가고, 히사코 비가 세상을 떠나면, 다카마도노미야 가문도 절손된다.

단절된 가문[편집 | 원본 편집]

지치부노미야[편집 | 원본 편집]

다이쇼 일왕의 차남. 히로히토(쇼와) 일왕의 동생. 아키히토 일왕의 숙부. 나루히토 일왕의 종조부. 자녀가 없어 절손되었다.

  •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秩父宮雍仁) 왕자: 1902년 6월 25일~1953년 1월 4일(향년 50세). 어칭호는 아츠노미야(淳宮). 1928년 결혼.
  • 아내 세츠코 비: 1909년 9월 9일~1995년 8월 25일(향년 85세)

다카마츠노미야[편집 | 원본 편집]

다이쇼 일왕의 3남. 히로히토(쇼와) 일왕의 동생. 아키히토 일왕의 숙부. 나루히토 일왕의 종조부. 자녀가 없어 절손되었다.

  •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高松宮宣仁) 왕자: 1905년 1월 3일~1987년 2월 3일(향년 82세). 어칭호는 데루노미야(光宮). 1930년 결혼.
  • 아내 키쿠코 비: 1911년 12월 26일~2004년 12월 18일(향년 92세)

아리스가와노미야[편집 | 원본 편집]

키쿠코 비의 외가. 자세한 것은 키쿠코 비 항목 참조.

옛 방계 왕족[편집 | 원본 편집]

1947년의 신적강하 때 평민으로 강등된 방계 왕족 가문들. 신적강하 이후 이들은 옛 궁호에서 ‘~노미야’를 제외한 부분을 성씨로 사용하고 있다.

  • 히가시쿠니노미야(東久邇宮): 메이지 일왕의 9녀 야스노미야 도시코(泰宮聰子) 공주가 시집간 가문. 도시코 공주의 장남인 모리히로(盛厚)는, 1943년 메이지 일왕의 증손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2]와 결혼했다. 시게코 공주는 왕족에게 시집갔기에 결혼 후로도 왕족 신분을 유지했으나, 패전 이후 왕족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되어 고생하며 살다가 병으로 일찍 죽었다.
  • 아사카노미야(朝香宮): 메이지 일왕의 8녀 후미노미야 노부코(富美宮允子) 공주가 시집간 가문. 노부코 공주의 남편 아사카 야스히코(朝香鳩彦)는, 1937년 중국에서 난징(南京) 대학살을 총지휘한 악질 전쟁범죄자이다.
  • 카야노미야(賀陽宮): 현재 카야 가문의 가장인 카야 마사노리(賀陽正憲)는 외교관으로, 나루히토 일왕의 가쿠슈인 동창이다. 마사코 왕비 또한 결혼 전 외교관이었기에 마사노리와 친분이 있었다.
  • 후시미노미야(伏見宮)
  • 히가시후시미노미야(東伏見宮)
  • 간인노미야(閑院宮)
  • 야마시나노미야(山階宮)
  • 기타시라카와노미야(北白川宮): 메이지 일왕의 7녀 카네노미야 후사코(周宮房子) 공주가 시집간 가문. 후사코의 손녀 하츠코(肇子)는 1939년 출생 직후부터 아키히토 왕세자의 신붓감 후보로 꼽혔으나, 쇼다 미치코에게 밀려 탈락했고, 이후 나가코 왕비의 외가인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 당시 후사코는 이세신궁의 제관(祭官)이었는데, 때문에 결혼을 앞두고 아키히토 왕세자와 함께 이세신궁에 참배하러 온 미치코를 홀대했다. 후사코로서는 자신의 손녀를 제치고 왕세자비 자리에 오른 미치코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다케다노미야(竹田宮): 메이지 일왕의 6녀 츠네노미야 마사코(常宮昌子) 공주가 시집간 가문. 마사코의 아들 다케다 츠네요시(竹田恒德)는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에서 근무했고, 츠네요시의 손자 다케다 츠네야스(竹田恒泰)는 악질 혐한 극우 인물이다. 한편 마사코의 손아래 시누이인 호시나 다케코(保科武子)는 나가코 왕비의 시녀장(侍女長)을 지내면서, 나가코 왕비와 함께 미치코 왕세자비를 괴롭혔다. 다케코가 퇴임한 후로, 나가코 왕비는 하츠코의 어머니인 사치코(祥子)를 시녀장으로 삼았다. 나가코 왕비가 누구를 큰며느리로 삼고 싶었는지 보이는 부분이며, 사치코 역시 (시어머니 후사코와 마찬가지로) 미치코 왕세자비를 미워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왕실 담당 부서[편집 | 원본 편집]

일본 정부에는 ‘궁내청(宮內廳)’이라는 왕실 담당 부서가 있다. 패전 이전에는 ‘궁내성(宮內省)’이라고 불렸다. 패전 이후 명칭의 변경과 함께, 규모와 권한도 많이 줄어들었다. 궁내성 관할의 관립학교였던 가쿠슈인 역시, 패전 이후 사립학교로 전환되었다.

학교[편집 | 원본 편집]

일본 왕족들은 (해외유학을 제외하고) 가쿠슈인이라는 왕실학교에 다니는 것이 오랜 관례였다. 그러나 2008년 9월 쓰구코 공주와세다대학 국제교양학부에 입학한 것을 시작으로, 가쿠슈인 외의 학교에 다니는 왕족들이 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가쿠슈인 참조.

노사이(納采)[편집 | 원본 편집]

일본 왕실의 정식 약혼식. 신랑의 집안에서 신부의 집으로 사자(使者)를 보내어 결혼을 청하는 예절이다. 사자는 청주(술), 도미(생선) 암수 1쌍, 옷감(비단)을 예물로 전달한다. 신부는 부모와 함께 정중하게 예물을 받는다. 신부와 신부의 어머니는 기모노를 입는데, 신부는 미혼 여성의 예복인 후리소데(振袖)를, 어머니는 기혼 여성의 예복인 도메소데(留袖)를 입는다. 신부의 아버지는 연미복을 입는다.

약혼 발표 기자회견을 하더라도, 노사이를 치르기 전까지는 정식으로 약혼이 성립된 것이 아니다. 노사이를 치른 후에야 왕실의 정식 약혼자로 인정된다. 마코 공주의 남편 코무로 케이는 왕실과 일본 전국의 반대로 노사이를 치르지 못하고 미국 포덤대학교 로스쿨에 도피유학을 떠났음에도, 학교에 자신을 ‘일본 공주의 약혼자’라고 소개하여 특혜를 받았고, 이것을 알게 된 왕실에서 포덤대학교에 정정을 요구했다. 결국 마코 공주는 노사이와 정식 결혼식도 없이 혼인신고만으로 케이와 부부가 되었고,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여 신접살림을 차렸다.

오시루시(お印)[편집 | 원본 편집]

일본 왕족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문장(紋章). 주로 식물이지만, 식물 외의 자연물이나 글자(한자)인 경우도 있다. 주로 사용하는 물건 등에 부착되며, 왕족 개인을 상징한다.

각주

  1. ‘딸만 낳는 여자’를 가리키는 일본어
  2. 히로히토(쇼와) 일왕의 장녀. 나루히토 일왕에게는 큰고모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