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코 왕비

마사코
雅子
Owadamasako.jpg
2020년 1월 1일, 신년 인사에서
인물 정보
다른이름 오와다 마사코(결혼 전)
출생 1963년 12월 9일 (60세)
도쿄도 미나토구 토라노몬병원
국적 일본
학력 후타바여학원 초등학교(편입)
후타바여학원 중학교
후타바여학원 고등학교
미국 Belmont 고등학교(편입)
하버드대학교 경제학부
도쿄대학 법학부
직업 외교관 → 왕세자비 → 왕비
종교 신토
신체 167cm
배우자 나루히토 일왕
가족 시할아버지 쇼와(히로히토) 일왕, 시할머니 고준왕후(나가코)
아버지 오와다 히사시, 어머니 오와다 유미코
시아버지 아키히토 상왕, 시어머니 미치코 상왕비
여동생 이케다 레이코, 시부야 세츠코
시동생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 아랫동서 키코 비
시누이 구로다 사야코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
시조카 코무로 마코, 카코 공주, 히사히토 왕자
활동기간 1986년 외무고시 합격
1993년 왕세자비 책봉
2019년 왕비 즉위

일본의 왕족(왕비). 나루히토 일왕의 아내.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의 어머니. 오시루시해당화.

출생[편집 | 원본 편집]

1963년 12월 9일,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 국가공무원공제조합연합회 토라노몬(虎の門) 병원에서 부친 오와다 히사시(小和田恒)와 모친 오와다 유미코(小和田優美子)의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당시 히사시는 30세, 유미코는 25세였다.

친정[편집 | 원본 편집]

부모[편집 | 원본 편집]

아버지 히사시는 도쿄대학 출신으로, 외교관이자 국제법학자이다. 도쿄대학, 하버드대학교 로스쿨, 뉴욕대학교 로스쿨, 컬럼비아대학교 로스쿨, 헤이그국제법아카데미, 와세다대학, 케임브리지대학교 등등 일본과 해외의 여러 명문대학에서 교수로서 국제법을 가르쳤고, 국제사법재판소 판사 및 소장을 지냈다.

어머니 유미코는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고, 결혼 전에는 에어프랑스에서 근무했다.

친가[편집 | 원본 편집]

마사코의 조부모는 교사였다. 할아버지 오와다 다케오(小和田毅夫)는 고등학교 교장을 지냈고, 할머니 시즈카(靜)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다케오와 시즈카는 5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5명 모두 일본 최고의 명문인 도쿄대학을 졸업했다. 그중에서 차남(셋째)인 히사시가 가장 성공했지만, 나머지 아들들과 사위들도 다들 출세한 인물들이다.

마사코의 큰아버지 아키라(顯)는 런던대학교교수와 센슈(專修) 대학의 교수를 지냈고, 작은아버지 다카시(隆)는 도요타자동차 자문변호사, 오사무(統)는 해상보안청 차장, 마코토(亮)는 국토교통성 항만기술연구소장을 지냈다. 큰고모부 카타다 타다시(片田中)[1]는 주식회사 쿠로사키하리마(黑崎播磨)의 전무이사, 작은고모부 카시와바라 카즈히데(柏原一英)[2]는 일본산업은행 전무이사를 지냈다.

외가[편집 | 원본 편집]

외할아버지 에가시라 유타카(江頭豊)는 일본해군 중장을 지낸 에가시라 야스타로(江頭安太郞)의 아들로, 일본흥업은행 상무이사와 신일본질소주식회사 회장을 역임한 사업가이자 은행가이다. 일본해군 대장 야마야 타닌(山屋他人)의 5녀 스즈코(壽々子)와 결혼하여 유미코를 낳았다.

신일본질소주식회사는 흔히 약칭인 ‘칫소(ちっそ)’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1950년대에 미나마타병으로 크게 물의를 일으킨 회사이다.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에 있는 칫소사의 공장에서 불법으로 방류한 폐수에 수은이 함유되어 있었고, 오염된 바닷물에서 잡힌 생선을 먹고 많은 사람들이 병들었다. 유타카는 사건이 일어난 후에 부임했기에 직접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싸구려 생선을 먹어서 병에 걸렸다”며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고, 이 때문에 훗날 마사코가 왕세자비 후보로 물망에 올랐을 때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여동생들[편집 | 원본 편집]

마사코의 여동생 이케다 레이코(池田禮子)와 시부야 세츠코(澁谷節子)는 쌍둥이로, 1966년 7월 8일 스위스에서 태어났다. (현재 57세)

레이코는 게이오기주쿠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와 제네바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UN 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에서 근무했으며, 일본유니세프협회 고문을 지냈다. 레이코의 남편 이케다 마사히사(池田祐久)는 변호사로, 도쿄대학 법학부와 하버드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했다. 레이코와 마사히사는 2000년 미국에서 결혼하여 2003년과 2005년에 각각 큰아들(21세)과 작은아들(19세)을 낳았으며,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다.

세츠코는 도쿄대학 영문과와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출신의 번역가이자 문화인류학자이며, 후쿠치야마(福知山) 공립대학의 교수이다. 1999년 도쿄대학 출신의 동갑내기 의사인 시부야 켄지(澁谷健司)와 결혼했으나 자녀 없이 2017년에 이혼했고, 이후 켄지는 11살 연하의 프리랜서 아나운서 후나하시 아키에(舟橋明惠)와 재혼했다. 참고로 켄지는 세츠코와 이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키에와 재혼했는데, 이 때문에 ‘이혼 전부터 아키에와 불륜 관계를 맺어오고 있덨던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유년기[편집 | 원본 편집]

마사코는 일본에서 태어났으나, 외교관인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아주 어려서부터 외국에서 오랜 시간을 성장했다.[3] 2살부터 소련 모스크바에서 거주하기 시작했고, 현지의 탁아소(어린이집)에 다니면서 자연스레 러시아어를 익혀 유창하게 구사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거주하던 1966년 7월 8일에는 쌍둥이 여동생 레이코와 세츠코가 태어났다. 아직 3살도 채 되지 않은 마사코에게 한꺼번에 동생이 2명이나 생긴 것이다. 마사코는 맏언니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어린 나이부터 맏이라는 책임감을 갖게 되어 힘들어하기도 했고, 자신의 고민이나 어려움을 내색하지 않고 혼자서 다스리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유럽에 거주하던 오와다 일가는 1968년에 미국으로 이주했고, 마사코는 미국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소련에서 러시아어를 배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린 마사코는 자연스레 영어를 배웠다. 1971년 오와다 일가는 일본으로 귀국했고, 마사코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히사시와 유미코는 외국에 살면서도 어린 딸들에게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집에서는 일본어로 대화했고, 일본 요리를 먹었고, 일본 전래동화를 읽어주고, 기모노를 입히고, 유치원 도시락으로 일본식 주먹밥 등을 싸주었다. 그럼에도 마사코는 문화충격으로 혼란스러워했다. 그녀는 일본식 학교행사를 낯설어했고, 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친구가 되면 주변에서 놀리는지 당황스러워했다. 또한 줄곧 유럽미국에서 성장했던 그녀는 일본식 ‘연호’를 몰랐다.[4]

마사코는 공립초등학교 2군데를 거쳐, 후타바여학원(雙葉女学園) 초등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이듬해에 쌍둥이 여동생들도 후타바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후타바여학원은 아기예수의 애덕교육수녀회[5]에서 운영하고 있는 가톨릭계 사립학교로, 어머니 유미코와 훗날 시어머니가 된 미치코 상왕비[6]의 모교이기도 하다.

학창시절의 마사코는 우수한 성적에 활달한 성격의 학생이었다. 수예부와 생물부에서 활동했고, 스포츠도 좋아했다. 체육을 잘하고 리더십도 뛰어나서, 후타바여중 3학년 때는 소프트볼 팀을 조직하여 대회에 출전해서 우승까지 거두었다. 이과 과목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올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담임교사로부터 의과대학 진학을 권유받기도 했다.

마사코가 후타바여고 1학년이던 1979년, 아버지 히사시가 미국으로 부임하게 되어 오와다 일가는 다시 미국으로 떠나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시에 거주하기 시작한다. 마사코는 벨몬트(Belmont) 고등학교 1학년에 편입했고,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미국 생활에 적응했으며,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학교생활을 열심히 했다. 수학ㆍ합창ㆍ소프트볼 등의 동아리에서 활약했고, 현지인 학생들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학업에도 힘을 기울여 우수한 성적을 올렸다. 전국 상위 5%의 학생에게 주어지는 National Honor Society(NHS)를 수상했고, 미국의 여러 명문대학에 합격했다. 마사코는 1981년 하버드대학교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과 외무고시 합격[편집 | 원본 편집]

대학 시절 마사코는 학교 기숙사에 살면서[7], 전공 공부 외에도 여러 활동들을 열심히 했다. 영어러시아어에 이미 능통했지만 ‘국제무대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프랑스어독일어스페인어 등도 공부했고, 봉사활동에도 참가했다. 또한 ‘일본문화연구회’라는 모임을 조직하여 회장을 맡았는데, 어려서부터 외국에서 오랜 시간 성장했던 그녀가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일본인, 일본계 외국인, 일본 국적이나 일본 혈통은 아니지만 일본문화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이 이 모임에 참가했다.

1985년 6월, 마사코는 하버드대학교 경제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수리경제학을 공부하여 졸업논문을 썼는데, 제프리 삭스(Jeffrey D. Sachs)[8] 교수와 에즈라 보겔(Ezra F. Vogel)[9] 교수가 마사코의 논문 지도교수였다. <External Adjustment to Import Price Shocks : Oil in Japanese Trade>라는 제목의 이 졸업논문은, 일본 외무성에서 참고자료로 활용되기도 했다. 1985년 당시 하버드대학교 졸업생은 1,681명이었는데, 우등상인 Magna Cum Laude를 수상한 학생은 마사코를 포함하여 55명이었고, 마사코가 재학했던 경제학부에서는 3명이었다.

미국에서 좋은 기회가 많았지만, 마사코는 자신의 뿌리를 더욱 탐구하고 정체성을 찾기 위하여 일본으로 귀국하기로 마음먹는다. 마사코는 1986년 4월 도쿄대학 법학부에 편입했는데, 지원자 100명 중에 합격자는 (마사코를 포함하여) 3명이었다. 키가 크고(167cm),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녀는 혼혈로 오해받기도 했지만, 도쿄대학에서도 이내 활달한 성격과 친화력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인이 되었다.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마사코는 아버지처럼 ‘외교관’이 되기로 마음먹고, 열심히 공부하여 1986년 외무고시에 합격했다. 당시 여성 외교관은 드물었고, 부녀(父女) 외교관은 더더욱 희귀했기에, 여러 언론매체에서 마사코에게 주목했다. ‘왜 외교관이 되려고 했느냐’, ‘일과 가정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라고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23세의 마사코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일본에서도 남녀가 평등하게 일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본을 남녀차별이 없는 나라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일과 가정을 병행하고 싶지만, 만약 2가지 중에서 하나만을 택해야 한다면 일을 택하고 싶습니다.

외교관이 된 마사코는 열심히 즐겁게 일했고, 그녀의 인생은 탄탄대로일 것처럼 보였다.

나루히토 왕세자와의 만남과 결혼[편집 | 원본 편집]

마사코가 외교관이 된 1986년, 스페인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의 장녀인 엘레나 공주[10]일본을 방문했다. 왕궁에서 성대한 환영회가 열렸고, 고위 외교관인 아버지 히사시와 신입 외교관인 장녀 마사코도 참석했다. 한편 환영회에는 히로히토 당시 일왕의 장손이자 아키히토 왕세자의 장남인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왕자도 참석했는데, 그는 마사코에게 그야말로 ‘첫눈에’ 반해버렸다.

나루히토 왕자는 1960년 2월 23일생으로, 당시 한창 결혼적령기였던 26세였다. 특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장래 일왕이 되어야 할 그로서는 반드시,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결혼해야만 했다. 장래 그의 곁에서 왕세자비와 왕비의 역할을 해야 할 아내와, 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당시 왕실에서는 이런저런 행사에 나루히토 왕자 또래의 젊은 미혼 여성들을 초청하여 살펴보는 등, 신붓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좀처럼 나루히토 왕자와 결혼하겠다는 여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시대가 바뀌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보수적이고 엄격한 왕실에서의 생활을 동경하지 않았고, 나루히토 왕자의 어머니인 미치코 왕세자비가 1958년부터[11] 겪어오고 있는 혹독한 시집살이가 대중에도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방계 왕자비라면 주목받는 정도와 맡겨지는 의무도 덜하지만, 종부(宗婦)는 몹시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때문에 나루히토 왕자의 신붓감 후보로 물망에 오른 여성들은 급히 해외로 도피유학을 떠나거나, 서둘러 다른 남성과 결혼해버렸다.

이런 와중에 나루히토 왕자가 마사코를 알게 된 것이었다. 그는 총명하고 활달하며 아름다운 마사코에게 첫눈에 반했다. 또한 이전부터 그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여성’을 선호했고, 결혼 상대에게 바라는 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왕족들은 공무상 외국인들과 만날 일도 많기 때문에, 어느 정도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여성이면 좋겠다”고 답한 적이 있는데, 마사코는 그의 이상형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여성이었다. 비록 마사코는 나루히토 왕자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마사코를 사랑하게 된 나루히토 왕자는 자신의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끈질기게 청혼했다.

하지만 애초에 마사코는 ‘일과 가정 중에서 하나만을 택해야 한다면 일을 택하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로 외교관이라는 직업의 매력에 빠져 있었고, 그러한 생각이 송두리째 뒤흔들릴 정도로 나루히토 왕자에게 반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청혼을 거절했다. 그리고 얼마 후, 마사코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로 연수를 떠나게 되었다. 영국까지 쫓아와서 “나루히토 왕자와 어떤 관계냐? 그와 결혼할 생각이 있느냐?”라고 질문공세를 퍼부으며 달라붙는 기자들에게, 그녀는 단호하게 “아무 관계도 아니고, 나는 외교관으로 계속 일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왕실에서도 마사코를 며느릿감으로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외할아버지의 문제도 있고, 마사코는 나루히토 왕자보다 키가 더 컸으며, 마사코에게는 오빠나 남동생이 없이 여동생들만 있고, 심지어 그 여동생들이 쌍둥이이기 때문이었다. 마사코의 거절과 왕실의 반대로, 나루히토 왕자는 마사코와 인연이 더 이상 없을 것처럼 보였다.

원치 않게 마사코와 멀리 떨어지게 되면서, 나루히토 왕자는 주변의 권유로 다른 여성들과도 선을 보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 꼭 드는 여성은 없었고, 언뜻 괜찮아 보이는 여성들에게는 결격사유가 있었다. 어떤 여성의 조상 중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일했던 인물이 있었고[12], 어떤 여성에게는 경제사범으로 교도소에 수감 중인 친척이 있었고, 또 다른 여성은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 왕자비 후보에서 탈락했다.

그러는 사이에 1989년 할아버지 히로히토 일왕이 사망하면서 아버지 아키히토 왕세자가 새 일왕으로 즉위했고, 이듬해인 1990년 6월에는 아키히토 일왕의 차남인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왕자가 가와시마 키코와 결혼했다. 후미히토 왕자는 가쿠슈인대학 2학년이던 1985년부터 1년 후배인 키코와 사귀고 있었으나, ‘형이 먼저 결혼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법도에 따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도무지 형이 결혼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결혼해버렸다. 후미히토 왕자도 그 점을 의식한 듯, 기자회견에서 “형에게는 아직도 아내가 없다.”는 말을 했다. 결혼하여 가장(家長)이 된 후미히토 왕자는 출생 이후로 줄곧 써오던 ‘아야노미야’라는 어칭호 대신 ‘아키시노노미야’라는 궁호를 새로 받아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가 되었고, 후미히토 왕자와 그의 처자식은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로 불리게 된다.

약 8개월 뒤인 1991년 2월 23일, 31번째 생일을 맞은 나루히토 왕자는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여전히 그는 미혼이었고, 그와 함께 왕세자비로 책봉된 여인은 없었다. 5살이나 어린 남동생이 먼저 결혼했고, 이제 ‘왕자’도 아닌 ‘왕세자’이니,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결혼’은 그야말로 발등에 떨어진 불처럼 더욱 시급한 지상과제가 된 것이다.

한편 영국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마사코는 여전히 외교관으로 재미있게 일하고 있었고, 자신이 결국 마사코를 잊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루히토 왕세자는 “오와다 마사코가 아닌 다른 여자와는 결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하며 마사코와 다시 만나기 위해 애쓴다. 5촌 당숙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13]의 집에서 마사코와 재회한 나루히토 왕세자는, 평소 내성적이던 그의 성격답지 않게 “꼭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라며 직설적으로 청혼했다.

하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여 외교관이 되었던 마사코로서는, 외교관을 그만두고 왕실로 시집오라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에 나루히토 왕세자는 “왕세자비가 되어서도 해외순방과 왕실외교 등의 활동을 할 수 있다. 외교관도, 왕세자비도, 모두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다.”라고 설득했고, 그제야 마사코의 마음이 겨우 움직였다. 또한 왕실에서 거듭 청혼하는데 감히 끝까지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다.

1993년 6월, 나루히토 왕세자와 결혼식을 올리는 마사코

1993년 6월, 비로소 마사코는 나루히토 왕세자와 결혼하여 왕세자비가 되어 일본 왕실에 입성했다.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의 끈질긴 청혼 끝에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많은 일본인들이 그들의 결혼을 축하했고, 대단한 엘리트 외교관 출신 왕세자비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결혼식 당시 마사코는 모리 하나에(森英惠)[14]디자인웨딩드레스를 입었는데, 목 부분이 장미꽃잎처럼 꾸며져 신부(新婦)가 마치 꽃처럼 아름답게 돋보이도록 해주는 모습이었다. 마사코의 앞날도 마치 장미꽃처럼 환히 피어날 것처럼 보였다.

결혼 이듬해인 1994년과 그 다음 해인 1995년, 왕세자 부부는 중동의 여러 국가들을 순방했다. 마사코 왕세자비는 세계의 여러 명문대학에서 공부한 학연, 유창한 외국어 실력, 외국 생활과 외교관 근무 경력에서 터득한 예법 지식 등을 발휘하여 크게 활약했다. 그녀는 여러 외국의 지도자들과 통역 없이 자유자재로 대화했고, 하버드대학교옥스퍼드대학교 출신인 인물들과는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공감대와 친근함으로 소통할 수 있었다.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후, 나루히토 왕세자는 기자들의 앞에서 “마사코 왕세자비가 이번 순방을 정말 잘 해냈습니다.”라고 밝히며 아내를 자랑스러워했다.

고달픈 왕실 생활[편집 | 원본 편집]

나루히토 왕세자는 어렵사리 마사코와 결혼했으나, 마사코는 일본 왕실의 입맛에 딱 맞는 며느릿감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서양에서 성장하여 개방적ㆍ서구적ㆍ현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보수적인 일본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왕실에서 (당연히) 온갖 크고 작은 충돌과 혼란을 겪었다.

이러한 문제는 결혼 전에도 이미 있었다. 왕실의 며느리가 될 여성들은 결혼 전에 일정한 교육[15]을 받는데, 왕족으로서의 예법 외에도 일본 왕실에서 믿는 종교인 신토와 신토의 제사의식에 대해서도 배운다. 기독교(유일신교) 문화권인 서양에서 살았던 마사코는 일본 전통 종교인 신토(다신교)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다행인지 신토에 대해 영어로 설명해놓은 책이 있어서, 마사코는 그 책을 읽으며 신토에 대해 공부했다. 역대 왕실 며느리들 중에서, 이 교육을 제일 어려워한 사람은 마사코였다고 한다.

약혼결혼을 앞두고 행해진 기자회견 때도 문제가 있었다. 패션 센스도 상당하여 멋지고 개성적으로 옷을 입고 다녔던 마사코는, 왕실의 지시에 따라 일본 왕족 특유의 단정하지만 촌스러운 옷차림을 하고서 기자회견에 임했다. 하지만 복장과 달리, 성격과 습관은 하루아침에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일본인들은 마사코가 감히 ‘나’라는 단어를 그토록 많이 사용하고,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이야기하는 것에 놀랐다. 또한 마사코가 나루히토 왕세자보다 19초 더 길게 말한 것도 비난거리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어디 감히 여자가 남자보다 더 길게 말하느냐”, “이렇게 남편을 깎아내리는 여성은 일본 여성이 아니다”, “왕세자가 3마디를 하면 마사코는 1마디만 해야 한다”라고 지적하며 마사코를 ‘교정’하려 했다.

왕실 가족들과 어울리는 데도 문제가 있었다. 마사코 왕세자비의 아랫동서인 키코 비는, 형님보다 3년이나 빠른 1990년에 왕실로 시집왔다. 그러나 키코 비와 왕실의 인연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녀는 가쿠슈인대학 1학년이던 1985년부터 1년 선배인 후미히토 왕자와 사귀기 시작했고(캠퍼스커플),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그의 어머니 미치코 왕비 및 여동생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와도 굉장히 친해졌다. 그러니 왕실로 시집온 후로도 적응이 빠를 수밖에 없었다.

반면 마사코 왕세자비는 이미 자신들끼리 친해져 있었던 시어머니, 아랫동서, 시누이의 틈에 끼어들기 어려웠다. 또한 마사코 왕세자비는 왕실의 다른 여성들과 많이 달랐다. 다들 대학을 졸업하긴 했지만 미치코 왕비는 영문학, 키코 비는 심리학, 사야코 공주는 일문학을 전공했다. 흔히 말하는 ‘여성들이 선호하는’ 전공들이다. 반면 마사코 왕세자비는 경제학, 법학, 국제관계학 등을 공부했다.

또한 키코 비는 (시어머니 및 형님과는 달리) 스스로 원해서 왕실로 시집왔고, 상냥하고 애교스러운 행동으로 시부모에게 싹싹하게 굴면서 비위를 잘 맞추었다. 반면 마사코 왕세자비는 그런 행동을 잘 하지 못했다. 아키히토 일왕의 친구이자 제82~83대 일본 총리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의 사촌형인 하시모토 아키라(橋本明)[16]는 이를 두고 “마사코 왕세자비가 키코 비처럼 눈치 빠르고 사근사근한 태도로 시부모에게 순종했다면, 왕실에서 가족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불임[편집 | 원본 편집]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사코 왕세자비를 괴롭힌 것은 임신출산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뛰어난 학력ㆍ경력ㆍ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해외순방과 왕실외교를 잘해내더라도, 왕실에서 그녀에게 가장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은 ‘아들 출산’이었고, 나머지 문제들은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었다. 서양 왕실들과 달리 일본 왕실에서는 남성만이 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왕실의 종부인 마사코 왕세자비는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만 했다. (옛날에는 일본에도 여왕들이 많았으나, 메이지 일왕 시절이던 1889년부터 남성만이 왕이 될 수 있도록 법이 정해졌다.)

시동생 부부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는 결혼 이듬해인 1991년 10월 23일에 큰딸 마코 공주를 낳았고, 마사코 왕세자비가 시집온 이듬해인 1994년 12월 29일에는 작은딸 카코 공주까지 낳았다. 이에 노리히토 왕자의 아내인 히사코 비는 “큰며느리가 아직 아이를 낳지 않았는데 작은며느리가 자꾸 임신하는 것은, 왕실의 법도와 서열에 어긋나는 일이다.”라고 지적하며, 왕세자 부부에게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마코 공주아키히토 일왕 내외의 첫 손주라서, (성별과 무관하게) 태어나면서부터 일본 왕실과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관심과 애정을 받았다. 카코 공주는 둘째 딸이라서 세간에서 그녀의 탄생에 대하여 아쉬워하는 반응도 있었지만[17], 이내 언니 마코 공주와 함께 왕실과 국민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미치코 왕비는 작은며느리 키코 비임신, 출산, 육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잘 돌봐주었다. 키코 비는 점점 불러오는 배를 안고서 시어머니를 정기적으로 방문했고, 시어머니가 왕세자비 시절에 (영어 원서로) 읽었던 벤저민 스포크 박사의 육아서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를 읽었으며, 시어머니가 젊은 시절에 만들었던 육아지침 ‘나루 짱 겐뽀(ナルちゃん憲法)’[18]에 따라 아이들을 키웠다.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는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일왕 내외를 자주 방문했고, 일왕 내외는 손녀들의 재롱을 보며 즐거워하곤 했다.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도 작은오빠의 딸들을 예뻐했다.

반면 왕세자 부부에게서는 좀처럼 아이 소식이 없었다. 1960년생인 나루히토 왕세자와 1963년생인 마사코 왕세자비는 1993년에 결혼했는데, 오늘날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굉장히 늦은 결혼이었다. 의사들은 “오늘날 사람들은 옛날 사람들보다 훨씬 건강과 영양 상태가 좋으니 괜찮다”고 말했지만, 일본 왕실에서는 수천 년간 내려온 전통과 관습에 따라 ‘마사코는 임신하기에 나이가 많으니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19]

한 가지 예로, 마사코의 신부수업은 시어머니 미치코 왕비가 시집올 때보다 기간도 짧았고 과목도 적었다. 그 이유에 대해 왕실에서는 “마사코가 혼란스러워하지 않도록, 반드시 필요한 사항들만 교육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지만, 사실 ‘(당시로서는) 만혼(晩婚)인 마사코를 하루빨리 결혼시켜 후사를 보기 위함’이라는 설이 대중의 사이에서는 진짜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마사코가 시집오기 전부터, 미치코 왕비는 큰며느리의 임신출산을 담당할 산부인과 의사도 정해놓았다. 미치코 왕비와 키코 비를 담당했던 ‘사카모토 쇼이치’라는 의사였다. 사카모토는 결혼을 앞둔 마사코를 방문하여 임신과 출산에 대한 지식들을 알려주었고, 마사코는 그의 가르침을 경청했다.

마사코가 왕실로 시집오자마자, 왕실과 일본 전체는 그녀의 임신을 몹시 기다렸다. 그녀가 감기로 공무에 불참한다는 뉴스가 보도되자 여기저기서 ‘혹시?!’라고 기대했다가, 단순 감기였을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김이 새기도 했다. 신문과 방송 등에서는 나루히토 왕세자와 마사코 왕세자비의 얼굴을 합성하여, 장차 두 사람의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의 얼굴을 예상해보기도 했다. 마사코 왕세자비의 단순한 행동이나 신체 변화[20]를 가지고도 ‘혹시 임신한 것이 아니냐?!’며 세간에서는 호들갑을 떨었다. 이에 나루히토 왕세자는 “너무 재촉하면, 아기를 점지해주는 황새의 기분을 상하게 할지도 모릅니다.”라는 농담을 던지며 ‘자중해 달라’는 의견을 나타냈다.

왕세자 부부는 아이들을 좋아했고, 기자들로부터 “자녀를 몇 명 낳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축구단을 꾸릴 정도까지는 계획하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농담하며 웃는 여유도 보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조급해지고 초조해졌다. 일본에는 ‘시집온 지 3년이 지나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친정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옛말이 있는데, 왕세자 부부는 결혼한 지 3년이 된 1996년까지도 아이 없이 둘이서만 지내고 있었다.

반면 후미히토 왕자 부부는 결혼하자마자 금방 큰딸 마코 공주와 작은딸 카코 공주를 낳았고, 두 공주는 (비록 왕위 계승자가 될 수 없는 여자아이지만) 왕실과 일본 전체로부터 온갖 관심과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왕세자 부부는 점점 가족들과의 만남이 부담스러워졌고, 이는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족 모임에 가면 시아버지 아키히토 일왕, 시어머니 미치코 왕비, 시동생 후미히토 왕자, 아랫동서 키코 비, 시누이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 조카 마코 공주카코 공주가 더없이 친밀하며 화기애애하게 서로 어울리고 있었으나, 여기에 마사코 왕세자비와 그녀의 남편 나루히토 왕세자가 끼어들면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색하고 불편하며 서먹하게 가라앉아 버렸다. 자연히 서로의 만남과 교류는 줄어들었고, 게다가 (나름대로 상대방을 배려하려고 시도한 일이었지만) 제대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오해가 쌓여, 가족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마사코 왕세자비는 몇 차례 임신과 유산을 반복했고, 그때마다 왕실과 일본에서는 기대했다가 실망하기를 거듭했다. ‘불임의 원인은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있다’는 설이 거의 정설이었고, 이것은 일본뿐 아니라 해외에까지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다.[21] 그러나 비난의 화살은 마사코 왕세자비에게만 쏟아졌다. 왕실에서는 ‘임신을 준비해야 한다’는 이유로 마사코 왕세자비의 해외순방을 자제시켰다. 해외에서 왕세자 부부를 초청해도 왕세자 단독으로 보내거나, 차남 부부 내지는 사야코 공주를 대신 보내곤 했다. 마사코 왕세자비는 몹시 스트레스를 받으며 예민해졌다.

2000년에는 시할머니 나가코 대비(고준왕후)가 향년 97세로 사망했는데, 이때도 마사코 왕세자비는 왕실과 갈등했다. 시어머니 미치코 왕비가 장례식에서 입어야 하는 상복[22]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했는데, 마사코 왕세자비는 ‘시어머니가 여러 사람들의 앞에서 나를 질책했다’고 받아들여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훗날 마사코 왕세자비는 (우울증과 적응장애 등의 문제로) 의사와 상담할 때도 “시할머니의 장례식 때, 시어머니가 내게 했던 말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의 탄생과 계속되는 좌절[편집 | 원본 편집]

2001년 초반에 마사코 왕세자비는 다시 임신했고, 동년 12월 1일 궁내청병원에서 공주를 낳았다. 왕세자 부부는 감격했고, 오랫동안 불임이던 왕세자 부부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에 일본에서는 환호했지만 동시에 ‘왕자’가 아님을 아쉬워했다. 왕세자 부부는 자연임신이 되지 않아서 인위적인 시술[23]로 임신과 출산에 겨우 성공했는데, 당시 의료진은 아들을 선택하여 임신하는 방법을 권했지만, 왕세자 부부가 “그 문제(아이의 성별)만큼은 하늘의 뜻에 맡기고 싶다”고 거절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공주의 이름은 ‘도시노미야 아이코(敬宮愛子)’로 지어졌는데, 중국 고전 <맹자(孟子)>의 “애인자 인항애지, 경인자 인항경지(愛人者人恒愛之、敬人者人恒敬之)”라는 구절에서 각각 敬과 愛를 따와서 지은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사람을 공경하는 사람은 항상 사람들로부터 공경을 받는다.”라는 의미이다. 일본 왕실의 법도에 따라 할아버지 아키히토 일왕이 이름을 하사하는 형식을 취했으나, 부모인 왕세자 부부의 의중이 많이 반영되어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가 태어난 후로도 왕실에서는 마사코 왕세자비를 계속 다그쳤다. 궁내청 장관과 동궁대부 등은 그녀에게 “이제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시지요?”라고 말했다. 일왕 내외는 3번째 손녀의 탄생을 기뻐하긴 했지만, 이내 ‘다시 임신해서 이번에는 아들을 낳으라’고 큰며느리를 압박한 것이었다. 나루히토 왕세자는 “아이코가 3살 정도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청했다. 아기를 충분한 사랑과 관심으로 돌봐주고 싶었고, 아내의 심신 회복에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사코 왕세자비는 오랜 불임으로 인한 마음고생 및 거듭된 유산과 인위적인 시술로 인하여, 심신이 무척 지쳐 있었으며 건강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독촉은 계속 이어졌다.

2003년 6월, 궁내청 장관 유아사 토시오(湯淺利夫)는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왕세자 부부가 둘째를 낳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의 기자회견에서는 “솔직히 이야기해서, 왕실의 후사를 생각한다면 차남 부부가 셋째를 낳기 바랍니다. 두 공주와의 나이 차이[24]를 고려한다면, 이제 빨리 셋째를 낳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것은 장관의 개인적 의견이 아니라, 일왕 부부가 장관의 입을 빌려 널리 공개한 소망이다. 그리고 일왕 부부가 바란다는 ‘둘째’와 ‘셋째’는, 당연히 ‘공주’가 아닌 ‘왕자’였다.

마사코 왕세자비는 점점 지쳐갔다. 결국 그녀는 우울증, 적응장애, 대상포진 등의 질병을 얻었고, 이 때문에 공식석상에 출석하지 못하고 왕세자궁에 칩거하여 요양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두문불출이 기약 없이 계속되자, 일본에서는 그녀를 ‘세금으로 놀고먹는 세금도둑’이라며 비난했다. 그리고 이러한 비난은 그녀를 더욱 집안에만 가두어놓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1993년 결혼 당시 나루히토 왕세자는 “모든 힘을 다하여 마사코를 지키겠습니다.”라는 각오를 밝혔고, 2004년 여름의 기자회견에서는 (비난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익히 알면서도) “왕실에 마사코 왕세자비의 경력과 인격을 부정하는 의견이 있습니다.”라는 충격적인 발언까지 했지만, 그의 사랑만으로 아내를 보호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조카 히사히토 왕자의 탄생[편집 | 원본 편집]

한편 ‘법을 바꾸어 여왕을 허용하자’는 의견도 대두되기 시작했다. 마사코 왕세자비가 나이도 많고 건강도 좋지 않아 더 이상 아이를 가지기 어려울 듯하고, 키코 비도 마사코 왕세자비보다 고작 3살 아래로 나이가 적지 않으며, 1965년 후미히토 왕자가 태어난 이래로 일본 왕실에는 줄줄이 공주들만 태어났기 때문에 직계에도 방계에도 남자아이라고는 1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을 깨뜨리면 안 된다’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여왕 허용론’이 한창 논의되고 있던 2006년 초기,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 내외가 ‘셋째 임신’을 발표했다. 당시에 ‘임신 6주’라고 밝혔던 키코 비는 동년 9월 6일 아이이쿠병원에서 제왕절개로 히사히토 왕자를 낳았고, 이내 ‘여왕 허용론’은 잠잠해져 버렸다. ‘41년 만의 남자 왕손’인 히사히토 왕자는 ‘장차 왕위를 이을 남자아이’로 각광을 받았고, 후미히토 왕자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아들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형님이 기약 없이 휴식하고 있는 와중에 열심히 공무를 수행하는 키코 비 역시 마찬가지였고, 두 딸 마코 공주카코 공주도 자라면서 점점 부모를 따라 각종 공식석상에 자주 참석하면서 예쁘고 귀여운 외모로 칭송받았다. 반면 후미히토 왕자 일가의 인기에 반비례하여, 왕세자 일가는 뒤로 밀려나고 찬밥 신세가 되었다.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는 어려서부터 주목받는 것에 무척 익숙했다. 자매는 아직 말도 잘 못하는 아기 때부터, 사람들 앞에서 꾸벅꾸벅 인사도 잘하고, 손도 흔들어주고, 카메라 앞에서 척척 포즈를 취하곤 하여, 더욱 귀여움을 받았다. 반면 어린 시절의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는 이러한 사촌언니들과 달리 수줍음이 많아,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면 부모님의 뒤에 숨거나, 카메라를 부담스러워하며 피하곤 했다.

왕세자 일가에 악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를 두고 ‘아이코 공주는 혹시 자폐아가 아니냐?!’라며 헐뜯었다. 나루히토 왕세자는 그러한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손수 아이코 공주가 건강하게 뛰어노는 모습을 촬영했고, 그 영상을 대중에 공개했다. 그러나 이 대응은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왔다. 사람들은 왕세자 부부를 ‘평일 대낮에도 아기와 놀아줄 수 있는 아버지’와 ‘뚜렷한 병명도 없이 몇 년이고 마음껏 집에서 휴식할 수 있는 어머니’라며 비난했고, 왕세자 부부가 미움을 받으니 그들의 딸인 아이코 공주 역시 좋은 시선을 받을 수 없었다.

나루히토 왕세자를 향하여 ‘마사코 왕세자비와 이혼하고, 새로 젊은 여자와 재혼하여 아들을 낳으라’고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나루히토 왕세자가 그런 일을 실행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으니 한층 더 나아가 ‘왕세자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과격한 요구로 바뀌었다. ‘대를 이을 아들도 없고, 항상 아프다며 요양만 하고 있는 아내가 장래에 왕비 역할을 제대로 해낼 리가 없으니, 물러나는 것이 옳다’는 논리였다.

한편 왕실과 세간의 지지를 등에 업은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는 ‘일왕 정년제 도입’을 주장했다. 겉으로는 ‘연로한 노인이 국왕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힘드니까’라는 이유를 댔지만, 왕위에 앉고 싶은 그의 속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발언이었다. 키코 비는 공식석상에서 형님 마사코 왕세자비와 조카 아이코 공주를 은근히 조롱하기도 했다.

아이코 공주의 성장과 마사코 왕세자비의 회복[편집 | 원본 편집]

왕세자 부부의 유일한 즐거움은 무남독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를 기르는 것이었다. 아이코 공주는 무럭무럭 자라 2006년 4월 가쿠슈인 유치원에 입학하여 2008년 3월 졸업했고, 다음 달인 4월에는 가쿠슈인 초등과로 진학했다. 그녀는 초등학교 1학년을 무사히 마친 듯했으나, 2~3학년 무렵에 문제가 발생했다. 짓궂은 남자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심하게 당한 것이다. 일본 왕실궁내청ㆍ가쿠슈인 측에서는 애써 별 일 아닌 것처럼 취급하려 했지만, 아이코 공주는 학교를 두려워하며 한동안 등교조차 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칩거하고 있던 마사코 왕세자비였지만, 딸이 어려움을 겪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녀는 매일같이 딸과 함께 등교했고, 교실에서 수업을 참관했고, 수업이 끝나면 함께 하교했다. 어머니의 각별한 보살핌에 아이코 공주는 차츰 안정을 되찾았으며, 학교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아이코 공주가 겪은 학교폭력에 대해 ‘키코 비가 꾸민 일’이라는 소문도 있다. 아이코 공주를 괴롭힌 남자아이들의 부모가, 키코 비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초등학교 고학년에 접어들면서 아이코 공주는 공부에 재능을 보여 우수한 성적을 올리기 시작했고, 어머니의 영향으로 영어 등의 외국어 학습에도 힘썼다. 2013년에는 가쿠슈인 초등과를 졸업하고 같은 재단인 가쿠슈인 여자중등과로 진학했는데, 중학교에는 외부 초등학교에서 수험을 치르고 입학한 우등생들도 많아서, 아이코 공주는 경쟁심을 가지고 더욱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건강 문제[25]를 이유로 지각, 결석, 장기결석이 잦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아이코 공주는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다. ‘일본 최고의 명문대학인 도쿄대학 합격도 가능하다’는 전망까지 나올 정도였다.

아이코 공주가 점점 자라면서 마사코 왕세자비는 차츰 건강을 회복했고, ‘딸을 위해서라도 왕족으로서의 역할을 활발하게 수행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50번째 생일을 맞이한 2013년 12월 9일, 그녀는 기자회견에서 “차츰 공무를 늘려 활동하려 한다.”며 이와 같은 포부를 밝힌다.

2015년 초에는 필리핀의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여, 왕궁에서 환영 만찬회를 했다. 필리핀 대통령이 영어로 연설할 때, 마사코 왕세자비는 통역이나 번역문 없이 영어 연설을 막힘없이 알아들어 모처럼 영어 실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반면 당시 국제기독교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던 조카 카코 공주는 내내 일본어 번역문만 읽고 있었는데, 하필 국제기독교대학은 영어 수업이 많고 영어 공부를 굉장히 중요시하는 학교라서 ‘카코 공주가 영어를 못하는 것이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있었다.

반전(反轉)[편집 | 원본 편집]

한편 언제까지나 영원할 것만 같았던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 일가의 인기도 하락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전에도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좋지 않은 소문들이 있었지만, 일왕 내외의 비위를 잘 맞추고, 공무를 부지런히 하며, 무엇보다 ‘41년 만의 왕자’인 히사히토 왕자를 낳아 인심을 얻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만한 언행으로 인심을 잃기 시작했다. 키코 비가 뒤에서 시종들에게 가혹하게 대한다는 소문과 그녀의 갖가지 기상천외한 갑질 일화들이 무성했고, 후미히토 왕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부정입학’ 논란이 문제였다. 가장인 후미히토 왕자부터가 1984년 가쿠슈인대학에 부정입학했다는 소문이 자자하고, 마코 공주카코 공주국제기독교대학 입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히사히토 왕자가 굳이 유치원부터 가쿠슈인을 외면하고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유치원에 입학한 것에 대해서도 ‘당시 오차노미즈여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던 키코 비의 입김’이라는 설이 있다. 참고로 키코 비는 박사학위를 취득했지만, 그녀의 논문은 비공개이다.

게다가 2017년부터는 마코 공주가 여러 모로 문제투성이인 남자친구 코무로 케이(小室圭)[26]와의 결혼을 고집하여, 그녀 자신뿐 아니라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평판이 더욱 떨어지기 시작했다. 왕실뿐 아니라 일본인 대부분이 반대했지만, 결국 마코 공주는 2021년 가을에 결혼식도 지참금[27]도 없이 혼인신고만으로 케이와 부부가 되었으며 미국으로 이주하여 신접살림을 차렸다. 결혼 전에 케이가 미국에 유학했던 과정과, 코무로 부부의 미국 생활에 대해서도, 왕실에서 특혜를 베풀어주었다는 의혹이 많다.

왕비 즉위[편집 | 원본 편집]

2016년, 아키히토 일왕은 ‘생전퇴위’라는 파격적인 계획을 발표했다. 본래 일왕이 사망한 후에야 왕세자가 새 일왕으로 즉위하는 것이 당연한 관례였으나, 아키히토 일왕은 “생전에 장남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은퇴하려 한다.”는 소망을 밝혔다.

일단 공식적으로는 ‘선왕의 장례식과 왕세자의 즉위식을 동시에 준비하려면 번거롭다’는 이유와, ‘이제 늙고 건강이 좋지 않아서 공무를 수행하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다.[28] 하지만 ‘차남 후미히토 왕자 일가를 견제하고, 장남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행보’라는 분석도 유력했다. 미치코 왕비도 공식석상에서 작은며느리 키코 비를 제치고 큰며느리 마사코 왕세자비를 앞세웠다. 그동안 왕위에 욕심을 보이며 부단히 노력해온 후미히토 왕자 내외에게는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2019년 5월 아키히토 일왕이 퇴위하고 나루히토 왕세자가 새 일왕으로 즉위함에 따라, 마사코 왕세자비도 왕비가 되었다. 왕비가 된 이후로는 한층 더 공식행사에 열심히 참석하고 있다.

각주

  1. 다케오와 시즈카의 장녀(둘째)인 카타다 야스코(片田恭子)의 남편
  2. 다케오와 시즈카의 차녀(막내)인 카시와바라 도시코(柏原紀子)의 남편
  3. 이렇게 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 또는 외국에서 태어나 살다가 일본으로 귀국한 사람을 가리켜, 일본에서는 ‘귀국자녀(歸國子女)’라고 부른다.
  4. 오와다 일가가 귀국했던 1971년은 쇼와(昭和) 46년이었다.
  5. 한국에는 진출하지 않은 수도회이다.
  6. 후타바여학원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거쳐, 성심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세이신여학원 중고등학교와 동(同) 학원의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7. 이때 아버지 히사시, 어머니 유미코, 두 여동생 레이코와 세츠코는 모스크바에 거주하고 있었다.
  8.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정책연구자
  9. 미국의 대표적 동아시아 전문가
  10. 펠리페 6세 국왕의 큰누나. 마사코와 같은 1963년 12월생이다.
  11. 쇼다 미치코아키히토 왕세자에게 시집온 것은 1959년의 일이지만, 시집오기 전 약혼 발표 때부터 호된 반대와 구박에 시달렸다.
  12. 나루히토 왕자의 제수인 키코 비에게도 같은 문제가 있었으나, 그녀는 둘째 왕자비(작은며느리)였기 때문인지 왕실로 시집올 수 있었다.
  13. 아키히토 일왕의 사촌동생. 1954년 12월 29일생으로, 1960년 2월 23일생인 나루히토 왕세자와는 나이 차이가 많지 않아서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14. 도쿄여자대학 출신의 일류 디자이너.
  15. 일종의 신부수업
  16. 가쿠슈인 고등과(남고) 졸업을 앞둔 1952년 초반, 당시 왕세자였던 아키히토 일왕은 시종들을 따돌리고 몰래 궁을 빠져나가 동급생 아키라와 함께 도쿄의 번화가인 긴자(銀座)에서 실컷 놀다가 귀가하여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적이 있다. 이 사건을 일명 ‘긴부라 사건(銀ブラ事件)’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긴부라’는 ‘긴자를 돌아다니며 노는 일’을 가리킨다.
  17. 어머니 키코 비부터가 출산 직후 둘째도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산부인과 의사에게 “어떻게 해야 아들을 낳을 수 있나요?”라고 질문했을 정도였다.
  18. 맏이인 나루히토 왕세자의 이름을 따서 지은 명칭.
  19. 물론 왕실에도 훌륭한 반례가 있었다. 1953년생인 히사코 비는 33세이던 1986년에 첫째 쓰구코 공주를 낳았고, 1988년에 둘째 노리코 공주, 1990년에 막내 아야코 공주를 낳았다. 또한 히사코 비의 작은시누이인 센 마사코(千容子)도 33세이던 1984년에 장남 키쿠치 아키부미(菊地明史)를 낳은 것을 시작으로, 1987년 장녀 사카다 마키코(阪田万紀子), 1990년 차남 센 다카부미(千敬史)를 낳았다.
  20. 배 위에 손을 얹는다거나, 낮은 굽의 구두를 신었다거나, 이전보다 살이 조금 쪘다거나 등등.
  21. 독일의 어느 잡지에서 이러한 내용으로 풍자화를 그렸는데, 일본에서 반발하였다.
  22. 단순히 검은색 옷만 입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무릎 아래로 길게 내려오는 치마, 구두, 스타킹, 모자, 베일, 진주목걸이귀걸이, 장갑, 부채 등을 전부 검은색으로 갖추어야 한다.
  23. 인공수정 내지는 시험관아기
  24. 당시 마코 공주는 초등학교 6학년, 카코 공주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25. 거식증과 폭식증을 오가는 식이장애 등.
  26. 국제기독교대학에서 만나서 교제를 시작한 캠퍼스커플이었다.
  27. 일본 왕실에서는 시집가는 공주에게 지참금을 준다.
  28. 발표 당시 아키히토 일왕은 83세의 고령이었고, 이미 이런저런 질환으로 수술도 여러 차례 받은 뒤였다. 1살 연하의 아내 미치코 왕비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