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 사야코

구로다 사야코
黑田淸子
Kurodasayako.jpg
인물 정보
다른이름 노리노미야 사야코(결혼 전)
출생 1969년 4월 18일 (55세)
도쿄도 치요다구 궁내청병원
국적 일본
학력 카키노자카 유치원
가쿠슈인 유치원
가쿠슈인 초등과
가쿠슈인 여자중등과
가쿠슈인 여자고등과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일어일문학과
직업 왕족(공주) → 일반인
종교 신토
배우자 구로다 요시키
가족 할아버지 쇼와(히로히토) 일왕, 할머니 고준왕후(나가코)
아버지 아키히토 상왕, 어머니 미치코 상왕비
큰오빠 나루히토 일왕, 큰올케 마사코 왕비
작은오빠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 작은올케 키코 비
조카: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 코무로 마코, 카코 공주, 히사히토 왕자
활동기간 2005년 결혼으로 왕실 이탈
2012년 이세신궁 보조제관 취임
2017년 이세신궁 제관 취임

일본의 前 왕족(공주). 나루히토 일왕의 여동생.

출생[편집 | 원본 편집]

1969년 4월 18일, 일본 도쿄 궁내청병원에서 아키히토 당시 왕세자와 미치코 왕세자비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칭호는 ‘노리노미야(紀宮)’, 이름은 ‘사야코(淸子)’[1]로 지어졌다. 오시루시는 수련화(睡蓮花).

큰오빠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왕자는 1960년 2월 23일생, 작은오빠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왕자는 1965년 11월 30일생으로,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보다 각각 9살과 4살 연상이었다. 오빠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막내에 유일한 딸이었기 때문에, 많은 귀여움을 받으며 자라났다.

학창시절[편집 | 원본 편집]

일본 왕족들은 전통적 왕실학교인 가쿠슈인에서 학업의 전 과정을 마치는 것이 관례였지만, 사야코 공주는 가쿠슈인 유치원에 입학하기 전에 1년간 카키노자카(柿の坂) 유치원에 다녔다. 이후 가쿠슈인 유치원으로 옮겼고, 졸업 이후에는 가쿠슈인 초등과로 진학했다.

초등학교 시절, 사야코 공주는 짓궂은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패전 이후 사립학교로 전환되고 평민의 입학도 허용된 가쿠슈인에서, ‘평민’이지만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에게 ‘왕자’나 ‘공주’는 더 이상 패전 이전처럼 어려운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사야코 공주의 물건을 빼앗으며 “이건 우리 부모님이 내주신 세금으로 구입한 물건이니까 우리 거야!”라고 우기기도 했고, 사야코 공주의 책가방을 물에 던지기도 했다. 사야코 공주는 많이 힘들어했지만 ‘왕족이 다니는 학교는 가쿠슈인’이라는 관습 때문에 전학은 불가능했다. 마침 어머니 미치코 왕세자비도 시집살이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1977년부터 1987년까지 10년 동안, 모녀는 각자의 상처를 위로하기 위해 둘이서 종종 짧은 여행을 다녔다.

고등학교 시절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같은 반 친구가 사야코 공주와 나눌 이야기가 있었는데,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왕궁으로 전화했다. 당연히 사야코 공주에게 곧장 연결되지 않았고, 시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전화를 넘겨받는 것이었다. 마침내 폭발해버린 친구는 “이제 그만하고 사야코 좀 바꿔주세요!”라며 버럭 소리쳤고, 전화를 받은 사람은 정중하게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했다. 그리고 드디어 사야코 공주가 전화를 받았다.

친구는 사야코 공주와 통화하다가, 문득 아까 전화를 받았던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런데 네가 전화받기 직전에 나와 통화했던 분은 누구야?”라고 물었다. 사야코 공주는 간단하게 “우리 아버지야.”라고 대답했고, 자신이 ‘친구의 아버지’이자 ‘왕세자’[2]에게 큰소리를 쳤다는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된 친구는 경악했다.

성년[편집 | 원본 편집]

가쿠슈인 초등과, 여자중등과, 여자고등과를 거쳐 사야코 공주는 1988년 4월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일어일문학과에 입학했다. 이듬해인 1989년에는 성년(만 20세)을 맞이하는 그녀를 위해 다양한 축하행사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할아버지 히로히토 일왕이 사망하는 바람에 모두 이듬해로 미루어졌다. 할아버지가 사망하자 아버지 아키히토 왕세자가 새 일왕으로 즉위했고, 어머니 미치코 왕세자비왕비가 되었다.

사야코 공주는 일본무용, 전통연극, 맹도견 육성, 자원봉사, 영어 등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과 특기가 많았다. 일본무용의 경력이 상당하여 국립극장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또한 중학교 시절부터 만화를 좋아하여 즐겨 보았고, 결혼식 때의 웨딩드레스도 만화 캐릭터가 입었던 것과 비슷한 디자인으로 선택했다. 취미이자 특기인 요리는 (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더 가르칠 필요가 없는’ 수준이었다고.

1992년 3월, 사야코 공주는 대학을 졸업했다. 성적이 우수하여 주변에서는 그녀에게 대학원 진학도 권했지만, 그녀는 조류연구소 근무를 택했다. 치바현 아비코시(我孫子市)에 있는 야마시나(山階) 조류연구소[3]에서 비상근연구원으로 일했는데, 주 2~3회 출퇴근할 때는 요리 솜씨를 발휘하여 손수 만든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물총새에 대해 연구하여, 출판사 헤이본샤(平凡社)의 <일본동물대백과> 집필에도 참여했다.

한편 왕족으로서의 공무도 꾸준히 수행했다. 1997년에는 프랑스 파리를 방문하여 일본문화센터 개관식에도 참여했다. 사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왕세자 부부를 초청하고 싶었지만, 왕실과 궁내청은 ‘마사코 왕세자비임신을 준비해야 한다’는 이유로 사야코 공주를 대신 보냈다.[4]

가족과의 관계[편집 | 원본 편집]

어머니 미치코 왕비에게 무척 의지되는 딸이었다. 시집살이로 힘들었던 어머니와 학교폭력으로 힘들었던 사야코 공주는 서로 기대어 이겨냈고, 사야코 공주가 성장하자 미치코 왕비에게는 더더욱 든든한 존재가 되었다. 환갑을 앞두고 (시집살이 스트레스로) 쓰러져 실어증까지 앓았던 미치코 왕비가 회복되자마자 제일 먼저 했던 말은, 옆에서 내내 간병했던 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2005년 사야코 공주가 시집갈 때도, 미치코 왕비는 ‘딸에 대한 고마움’과 ‘딸을 시집보내는 아쉬움’을 고백하며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3살 연상인 작은올케 키코 비와는, 키코 비가 1990년 왕실로 시집오기 전부터 친했다. 두 사람 모두 가쿠슈인 출신이라 공감대도 많았고, 키코는 대학 1학년이던 1985년부터 후미히토 왕자와 (캠퍼스커플로) 교제하고 있었기에, 사야코 공주는 ‘학교 선배 언니’이자 ‘작은오빠의 여자친구’인 키코와 자연스레 친밀해졌던 것이다. 게다가 ‘제과제빵’이라는 취미를 공유하고 있었던 두 여자는 종종 만나서 함께 케이크쿠키를 만들며 수다를 떨곤 했는데, 이 자리에는 미치코 왕비도 곧잘 어울렸다. 덕분에 키코는 시집오기 전부터 예비 시어머니 및 예비 시누이와도 두터운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5]

오빠들의 다툼을 말린 일화도 있다. 1990년대 초반의 어느 날, 왕족들이 모인 행사에서 후미히토 왕자는 에 만취하여 시녀를 희롱하는 등의 추태를 부렸다. 나루히토 왕세자가 만류했지만 후미히토 왕자는 자중하지 않고 오히려 5살이나 위인 형에게 대들었고, 이에 형제간에 크게 싸움이 벌어졌다. 사야코 공주가 달려와 간신히 두 오빠를 뜯어말려 진정시켰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새댁에 아기 엄마[6]였던 키코 비는 남편의 포악한 행동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고 한다.[7]

아버지 아키히토 일왕의 둘째 숙모 세츠코 비와 셋째 숙모 키쿠코 비는 자녀를 낳지 못해, 대신 조카인 아키히토 일왕의 아이들을 손주처럼 귀여워하곤 했다. 키쿠코 비는 사야코 공주를 아꼈고, 사야코 공주의 약혼결혼 준비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결혼[편집 | 원본 편집]

2005년에 구로다 요시키(黑田慶樹)와 결혼했다. 요시키는 도쿄도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평민으로, 후미히토 왕자와는 가쿠슈인 동창이자 절친한 친구이다. (하지만 말이 ‘평민’이지 가쿠슈인에 다니며 왕자와 친구로 지냈을 정도이면, 빠듯하고 아무런 배경도 없는 ‘서민’은 아니다.) 자연히 사야코 공주와 요시키는 오래 전부터 ‘오빠의 친구’이며 ‘친구의 여동생’인 서로를 알고 지냈다. 연애를 시작한 두 사람은 주로 전화와 메일로 교류했는데, 왕족인 사야코 공주가 자유로이 외출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요시키가 왕궁을 방문하여 사야코 공주를 만나기도 했다.

1947년의 신적강하로 왕실의 범위가 대폭 줄어들고, 귀족 제도도 없어지고, 후미히토 왕자가 태어난 1965년 이후로 공주들만 줄줄이 태어났기 때문에[8], 일본 왕족들은 이제 왕실 밖에서 배우자를 찾을 수밖에 없다. 왕자는 평민 여자와 결혼해도 여전히 왕족 신분을 유지하지만, 공주는 평민 남자와 결혼하면 남편을 따라 평민이 된다. 일본의 민간에서는 남자가 아내의 성씨를 따르고 처가의 일원이 되는 것도(데릴사위) 가능하지만, 왕실에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야코 공주는 요시키와의 결혼으로 인해 왕족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되었다. 이름도 ‘노리노미야 사야코’에서 남편의 성씨를 따라 ‘구로다 사야코’가 되었고, 일반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가 주어졌다. 운전면허도 취득했고, 처음으로 은행계좌도 만들었고, 선거권도 가지게 되었다. 결혼생활에 대비하여 신부수업도 받았다. 또한 지참금[9]으로 1억 5,250만엔(약 13억 2,000만원)의 돈도 받았다.

본래 좀 더 일찍 약혼식과 결혼식을 치를 예정이었지만, 2004년 키쿠코 비의 사망으로 인해 늦추어졌다. 결혼식은 도쿄 데이코쿠(帝国) 호텔에서 150여명을 초대하여 간소한 티타임 형식으로 치러졌는데, 하객 중에는 요시키의 상관이자 극우 망언 정치인으로 악명이 높은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당시 도쿄도지사도 있었다. ‘왕족의 결혼식’을 처음 맡은 데이코쿠호텔에서는 무척 긴장하여 철저히 보안을 점검했으며, 하객들의 명단과 사진을 입수하여 청첩장과 얼굴을 일일이 확인했다고도 한다.[10]

일왕의 딸이 결혼하는 것은 1960년 사야코 공주의 막내 고모인 시마즈 다카코가 결혼한 이래로 무려 45년 만의 일이어서, 일본에서는 큰 경사로 취급되었다. 사야코 공주의 결혼이 결혼 관련 업계에 큰 이익을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다.

결혼 당시 사야코는 36세, 요시키는 40세였다. 공주 시절 사야코는 결혼에 대해 ‘내가 원하는 시기에 하겠다’며 서두르지 않았고, 그녀의 태도에 많은 일본 여성들이 공감했다.

결혼 이후의 삶[편집 | 원본 편집]

도쿄의 신축 아파트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도쿄의 아파트치고는 드물게 숲과 맞닿아 있고, 보안과 경비가 철저하여, 사생활 보호를 위해 선택한 집이라고 한다. 결혼 후로는 비상근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야마시나조류연구소를 그만두고 한동안 전업주부로 생활했다. 결혼 이후로도 사야코는 여전히 왕실(친정)과 친밀하게 교류하고 있다.

2012년부터 이세신궁의 보조 제관(祭官)이 되었다. 셋째 고모 다카츠카사 가즈코에 이어 1988년부터 이세신궁 제관을 맡아오고 있었던 넷째 고모 이케다 아츠코가 고령[11]으로 쇠약해져서, 사야코가 고모를 보조하게 된 것이다. 5년 후에 아츠코는 은퇴했고, 보조 제관이던 사야코가 정식 제관으로 취임했다.

한때는 ‘사야코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사야코와 요시키의 사이에 자녀는 없다.

소문[편집 | 원본 편집]

사야코를 둘러싼 이런저런 (좋지 않은) 소문과 험담들도 있다. ‘미치코 왕비의 친딸이 아니라, 아키히토 일왕이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라더라’라는 소문[12]도 있고, 어린 시절 미치코 왕비와 함께 다녔던 여행에 대해서도 ‘고급 숙소와 고급 음식점을 이용하여 돈(세금)을 많이 썼다’는 비판도 있다.

결혼 후의 생활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았다. 요시키와의 결혼생활은 위장결혼 내지는 쇼윈도 부부이며, 사야코는 요시키와 별거하여 친정(왕궁)에서 거주하고 있다는 등등. ‘공주였던 사야코가 평민 주부로서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여, 집안일도 남편과 시어머니가 해주고 있다’고도 했다.

다만 2017년 이후부터는 작은오빠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의 큰딸인 마코 공주가 코무로 케이(小室圭)와의 결혼 문제로 압도적인 문제를 일으켜 비판의 화살을 모두 받고 있다. 반면 사야코는 시간이 지나면서 요시키와 부부동반으로 종종 왕실 행사에 참석하고, 왕위에서 퇴임하고 은퇴한 부모 아키히토 상왕과 미치코 상왕비의 생활을 도우면서, 국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티아라[편집 | 원본 편집]

일본 왕실공주가 성년이 되면 거액의 세금을 들여 티아라(왕관)를 만드는데, 공주는 큰 행사 때마다 드레스와 티아라를 착용하며, 시집갈 때는 왕실에 도로 반납한다. 다만 사야코 공주의 티아라는 부모인 아키히토 일왕 내외의 개인재산으로 제작하여, 사야코 공주는 2005년 시집갈 때 티아라를 가지고 갔다.

2021년 12월에 성년식을 치른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13]는, 고모 사야코에게서 티아라를 빌려 자신의 머리 크기에 맞도록 조절하여 착용했다. 코로나19로 경제가 어려운 시기라서 결정한 일이며, 아이코 공주의 전용 티아라는 향후 경제 사정이 나아지면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각주

  1. 淸子는 ‘키요코’로도 읽을 수 있다.
  2. 사야코는 1985년 4월 가쿠슈인 여자고등과에 입학하여 1988년 3월에 졸업했고, 아키히토 상왕은 1989년에 일왕으로 즉위했으므로, 사야코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에 아키히토 상왕은 왕세자였다.
  3. 1932년 방계 왕족 야마시나노미야 요시마로(山階宮芳麿)가 설립한 연구소이다. 현재는 사야코의 작은오빠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가 총재, 사야코 공주의 큰고모 히가시쿠니 시게코의 차남(셋째)인 미부 모토히로(壬生基博)가 이사장을 맡고 있다.
  4. 이외에도 후미히토 왕자 부부와 사야코 공주가 왕세자 부부를 대신하여 다녀온 해외순방이 많았고, 마사코 왕세자비는 나중에야 이를 알고서 놀랐다.
  5. 반면 마사코 왕세자비는 이렇게 한참 전부터 친해져 있었던 시어머니, 아랫동서, 시누이의 틈에 끼어들기 어려웠고, 그녀가 왕실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원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
  6. 장녀 코무로 마코가 태어난 이후~차녀 카코 공주가 태어나기 이전이었다고 하니, 1991년 10월 23일~1994년 12월 29일 사이의 일이다.
  7.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부부관계가 좋지 않다는 소문을 뒷받침해주는 일화 중 하나이다. 심지어 결혼 초기부터.
  8. 2006년에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히사히토 왕자를 낳아, 무려 41년 만에 남자 왕손이 태어났다.
  9. 일본 왕실에서는 시집가는 공주에게 지참금을 준다.
  10. 당시 하객의 증언에 의하면, 청첩장을 지참하지 않으면 결혼식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다만 데이코쿠호텔은 ‘하객들의 사진을 입수하여 실제 얼굴과 대조했다’는 소문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있다.
  11. 1931년생
  12. 작은오빠 후미히토 왕자에게도 마찬가지의 소문이 있다.
  13. 2020년 4월, 고모가 졸업한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일어일문학과에 입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