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준왕후

고준왕후
香淳王后
인물 정보
본명 나가코
다른이름 구니노미야 나가코(결혼 전)
출생 1903년 3월 6일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
사망 2000년 6월 16일 (97세)
도쿄도 치요다구 고쿄
국적 일본
학력 가쿠슈인 여학부 유치원
가쿠슈인 여학부 초등과
가쿠슈인 여학부 중등과 중퇴
직업 왕족(왕비)
종교 신토
배우자 히로히토(쇼와) 일왕
가족 아버지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어머니 치카코
시아버지 다이쇼 일왕, 시어머니 데이메이왕후(사다코)
시동생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왕자,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왕자,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
아랫동서: 세츠코 비, 키쿠코 비, 유리코 비
자녀: 장녀 히가시쿠니 시게코, 차녀 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 3녀 다카츠카사 가즈코, 4녀 이케다 아츠코, 장남 아키히토 상왕, 차남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왕자, 5녀 시마즈 다카코
손자 나루히토 일왕,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
손녀 구로다 사야코
증손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 코무로 마코, 카코 공주
증손자 히사히토 왕자
활동기간 1918년 왕세자비 내정
1924년 결혼(왕세자비 책봉)
1926년 왕비 즉위
1989년 대비 즉위

일본의 왕족(왕비). 본명은 나가코(良子). 히로히토(쇼와) 일왕의 아내, 아키히토 상왕의 어머니, 나루히토 일왕의 할머니. 오시루시복숭아이다.

친정[편집 | 원본 편집]

고준왕후(나가코)의 친가는 방계 왕족으로, 할아버지 구니노미야 아사히코(久邇宮朝彦)는 측실 이즈미 마키코(泉万喜子)에게서 나가코의 아버지(3남) 구니요시(邦彦)를 낳았다. 이후 다른 측실들에게서 4남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 8남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朝香宮鳩彦), 9남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東久邇宮稔彦) 등을 낳았다.

모리마사의 큰딸 마사코(方子)는 훗날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李垠)의 아내 이방자가 된다. 야스히코는 메이지 일왕의 8녀 후미노미야 노부코(富美宮允子) 공주와 결혼했고, 난징대학살을 총지휘한 악질 전쟁범죄자이다. 나루히코는 메이지 일왕의 9녀 야스노미야 도시코(泰宮聰子) 공주와 결혼했고, 패전 이후 일본 총리를 지냈으며, ‘히가시쿠니교’라는 신흥종교를 창립하여 교주가 되었다. 훗날 고준왕후의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는 어머니의 숙부이자 시고모부인 나루히코의 장남 모리히로(盛厚)와 결혼한다.

어머니 치카코(俔子)는 시마즈 다다요시(島津忠義)와 측실 야마자키 스마코(山崎壽滿子)의 8녀이다. 외할아버지 다다요시는 사츠마번(薩摩藩)[1]의 마지막(12대) 번주로, 폐번치현(廢藩置縣)[2] 이후에는 작위를 받아 화족(귀족)이 되었다.

출생과 성장[편집 | 원본 편집]

1903년 3월 6일, 구니요시와 치카코의 3남 3녀 중 셋째(장녀)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위로는 큰오빠 아사아키라(朝融)와 작은오빠 구니히사(邦久)가 있었다. 이후로 여동생 산조니 노부코(三條西信子)와 오오타니 사토코(大谷智子), 남동생 히가시후시미 구니히데(東伏見邦英)가 태어났다.

1907년, 4살이 된 나가코는 일본 왕족과 화족의 딸들을 위한 학교인 가쿠슈인 여학부(女學部)의 유치원에 입학했다. 당시 왕족 학생들은 별실에서 따로 점심식사를 했다. 가쿠슈인은 남학교와 여학교로 나뉘어 있었지만, 유치원 시절 나가코는 두 여동생 외에 메이지 일왕의 손자들-훗날 남편이 된 미치노미야 히로히토 왕자와, 그의 바로 아래 동생인 아츠노미야 야스히토 왕자와도 함께 점심을 먹곤 했다.

어린 시절 나가코는 맏언니로서 의젓하고 모범이 되었기에, 여동생 노부코와 사토코는 나가코를 동경하며 본받으려 했다고 한다. 훗날 사토코의 장남 오오타니 고쇼(大谷光紹)는 나가코 왕비의 3녀 다카노미야 가즈코 공주와 혼담이 오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종사촌 남매 간의 혼담은 파기되었고, 가즈코 공주는 다카츠카사 도시미치(鷹司平通)와 결혼한다. 한편 사토코는 사촌언니 이방자 여사와도 긴밀히 교류했다.

왕세자비 내정[편집 | 원본 편집]

1912년, 다이쇼 일왕의 장남 히로히토 왕자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와 함께 왕세자비 후보에 대한 물색도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1945년 패망할 때까지 육군과 해군의 대립이 (도저히 같은 나라의 군대라고 생각될 수 없을 지경으로) 심각했는데, 왕세자비 간택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육군의 근거지는 조슈번(長州藩)[3]이었고, 해군의 근거지는 나가코의 외가인 사츠마번이었다. 조슈번은 화족 이치조 사네테루(一條實輝) 공작의 3녀 이치조 도키코(一條朝子)를, 사츠마번은 나가코를 왕세자비 후보로 주장했다.

당시 사다코 왕비(데이메이왕후)는 쿠조(九條) 가문의 딸이었고, 시어머니 쇼켄왕후(하루코)는 이치조 가문의 딸이었으며, 시할머니 에이쇼왕후(英照王后)[4]는 쿠조 가문의 딸 아사코(夙子)였다. 이렇듯 이치조 가문과 쿠조 가문에서 번갈아가며 왕비를 배출하고 있었으니, 다음 왕비가 될 왕세자비는 이치조 가문에서 선발될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당시 일본 정계의 거물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도키코를 강력히 지지하고 있었다. 여러 모로 도키코가 왕세자비로 책봉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러나 사다코 왕비는 도키코를 맏며느리로 맞이하고 싶지 않았는데, 자신의 남편을 무시하는 야마가타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야마가타는 몸도 마음도 유약하며 모자란 다이쇼 일왕을 바보 취급했고, 드센 성품의 사다코 왕비는 그러한 남편과 어린 장남을 대신하여 야마가타 및 조정의 거물급 신하들과 맞서 싸웠다. 그리고 그녀는 직접 맏며느릿감을 물색하기 위하여, 왕족과 화족 가문의 딸들을 초대하여 다과회를 열기도 했다.

사츠마번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사다코 왕비에게 은밀히 접근, 나가코를 왕세자비 자리에 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마침내 1918년 1월에 “방계 왕족 구니노미야 가문의 장녀 나가코가 왕세자비로 정해졌다”는 사실이 일본의 여러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나가코가 왕세자비로 확정된 배경에는 도키코(를 지지하는 야마가타)에 대한 사다코 왕비의 반감과 당사자인 히로히토 왕세자의 의견 외에, 시할아버지인 메이지 일왕의 의견도 있었다. 다른 방계 왕족 가문들에 비하여 구니노미야 가문은 (상대적으로) 부유하지 못했고, 메이지 일왕은 생전에 구니노미야 가문의 그러한 형편을 걱정했던 것이다.

당시 가쿠슈인 여학부 중등과에 재학 중이던 15살의 나가코는, 왕세자비로 정해지자마자 학교를 중퇴하고 어른들의 지도에 따라 결혼 준비를 시작했다. 신부수업과 함께, 장래 왕세자비와 왕비로서의 역할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구니노미야 저택에는 나가코의 교육을 위한 ‘오하나고덴(お花御殿)’이라는 건물이 지어졌고, 나가코의 여동생들과 학우들은 수업이 끝나면 나가코를 보러 오하나고덴에 놀러오곤 했다. 이후 오하나고덴은 도쿄도립 코마바(駒場) 고등학교에 하사되었다.

당연히 야마가타, 육군, 조슈번에서는 분노했다. 1921년, 일본신문잡지에는 “구니노미야 가문에 색맹 유전자가 있다!”는 기사들이 대서특필되었다. 나가코의 오빠들이 신체검사를 받다가 색맹으로 진단되었고, 나가코에게도 색맹 유전자가 있을지 모르니, 행여 (장래 일왕이 될) 왕손이 색맹이면 곤란하므로 나가코의 왕세자비 책봉을 취소해야 한다는 논지였다.

물론 해군, 사츠마번, 구니노미야 가문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나가코의 아버지 구니요시는 “왕세자비 책봉이 취소되면 내 딸 나가코를 죽이고 나도 함께 죽겠다!”며 강경하게 맞섰다. 두 세력의 싸움은 일명 ‘궁중모중대사건(宮中某重大事件)’이라고 불리며 몇 년을 질질 끌었다. 결국 1922년 일본 왕실에서 “왕세자비 결정에는 번복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결혼 당사자인 히로히토 왕세자는 나가코를 좋아했고, 시아버지 다이쇼 일왕도 “과학에도 틀리는 것이 있는 줄로 안다”며 나가코를 지지했다. 야마가타는 정계에서 은퇴하여 쓸쓸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고, 나가코의 경쟁자였던 도키코는 방계 왕족 후시미노미야 히로요시(伏見宮博義)에게 시집갔다.

그러나 결혼식은 곧장 치러지지 못했는데, 야마가타의 세력이 워낙 거대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1923년 도쿄 일대에 일어난 간토대지진의 영향도 있다. 일본 왕실과 정부는 애도를 위해 히로히토 왕세자와 나가코의 결혼식을 미루었고, 나가코는 예비 시어머니 사다코 왕비와 함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애도하는 와카(和歌)[5]를 발표했다. 역겹고 가증스럽다.

한편 사촌언니 마사코(이방자)도 한때 왕세자비 후보로 거론된 적이 있었으나, 마사코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과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과 왕비로서의 삶[편집 | 원본 편집]

1924년 1월 26일, 나가코는 히로히토 왕세자와 결혼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왕세자비가 되었다. 이듬해 12월 6일에는 첫째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를 낳았다. 왕세자 부부의 첫째 아이이자 일왕 부부에게도 첫 손주여서, 시게코 공주의 탄생은 많은 축복을 받았다. 나가코 왕세자비는 (유모의 도움도 받았지만) 가능한 한 스스로 모유 수유를 했는데, 당시로서는 굉장히 파격적인 행보였다.[6]

원래부터 병약했던 시아버지 다이쇼 일왕은 1926년 12월 25일에 세상을 떠났고, 히로히토 왕세자가 ‘쇼와(昭和)’라는 새로운 연호와 함께 다음 일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교토에서 즉위식이 열렸고, 나가코 왕세자비도 왕비로 즉위한다.

1927년 9월 10일에는 차녀 히사노미야 사치코(久宮祐子) 공주를 낳았다. 나가코 왕비는 사치코 공주에게도 모유 수유를 했고, 사치코 공주는 순조롭게 자라는 듯했다. 그러나 생후 6개월이던 1928년 3월부터 사치코 공주는 앓기 시작했고, 나가코 왕비는 시녀들과 함께 며칠간 밤을 새며 직접 간병했지만 결국 사치코 공주는 나가코 왕비의 25세 생일 이틀 뒤인 3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7살[7] 미만이었던 사치코 공주는 법도에 따라 간소한 장례 절차를 거쳐 매장되었고, 큰 충격에 빠진 나가코 왕비는 한동안 아기와 비슷한 크기의 베개를 안고 다녔다. 동년 5월에는 대만을 방문 중이던 친정아버지 구니요시가, 조선의 독립운동가 조명하(趙明河)가 휘두른 단검에 부상을 입었다. 구니요시는 안타깝게도 현장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단검에 독약이 발라져 있었기에 계속 부상으로 앓다가 이듬해인 1929년에 사망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에 이어 1941년에는 진주만 공습까지 일으키면서, 일본은 제국주의적 침략 야욕과 광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가코 왕비도 왕족ㆍ화족 부인들을 지휘하여, 침략 전쟁에 몰두하고 있던 일본군을 후원하고 격려했다. 병원을 방문하여 부상병들을 문병하고, 위문품을 마련하여 보내기도 했다. 어린 공주들도 어머니의 이러한 행보에 함께했다. 그러나 이러한 발악에도 불구하고, 1945년 히로시마나가사키원자폭탄을 1발씩 맞은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만다.

패전 이후 전범국인 일본은 미군정의 지배를 받았다. 전범 히로히토 일왕과 그의 일족은 간신히 목숨만은 건졌지만, 신상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살아있는 신’으로 신격화되고 숭배되던 그들은 ‘인간선언’을 하여 많은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전과 같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잃고 상징적인 입헌군주로 전락했다.

이토록 바뀐 세상에서, 히로히토 일왕은 일본 왕실을 유지하기 위하여 발버둥을 쳤다. 우선 1947년에는 아버지 다이쇼 일왕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여러 방계 왕족들과 화족들을 한꺼번에 평민으로 강등(신적강하)하여, 왕실의 규모를 대폭 줄였다. 히로히토 일왕 내외의 첫째인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는 방계 왕족에게 시집가서 결혼 후로도 왕족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신적강하로 인하여 왕족 지위를 잃고 평민 히가시쿠니 시게코가 되었다.

또한 히로히토 일왕은 일본 전국을 순례하며 다양한 행사에 얼굴을 비추고 시민들을 만나는 등의 행보로 왕실의 존재감을 나타내려 했다. 나가코 왕비도 1947년 일본적십자사 명예총재 취임을 시작으로 1952년 전국 전몰자 추도식, 1964 도쿄 올림픽 개회식, 1970 일본 만국박람회 개회식, 1972 삿포로 동계올림픽 개회식 등에 참석했다. 또한 패전 이전에 미국유럽을 ‘귀축(鬼畜)’이라고 부르며 경멸하던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이 바꾸어, 일왕 일가는 서양인 교사들을 초빙하여 영어기독교ㆍ서양식 예절 등을 배웠다.

일본뿐 아니라 해외도 방문했는데, 1971년 히로히토 일왕과 나가코 왕비는 유럽을 방문했다가 영국네덜란드에서 엄청난 반발에 맞닥뜨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잔혹한 학대를 당했던 참전용사들과 민간인들이, 일왕 내외의 방문을 환영할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히로히토 일왕과 나가코 왕비를 향하여 온갖 욕설, 날달걀, 보온병, 심지어 벽돌까지 날아왔다고 한다. 꼴좋다

자녀들의 양육과 결혼[편집 | 원본 편집]

  •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 1925년 12월 6일~1961년 7월 23일(향년 35세). 방계 왕족 히가시쿠니노미야 가문의 아들 모리히로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낳았다.
  • 차녀 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 1927년 9월 10일~1928년 3월 8일
  • 3녀 다카노미야 가즈코 공주: 1929년 9월 30일~1989년 5월 26일(향년 59세). 다카츠카사 도시미치와 결혼했다. 자녀는 없다.
  • 4녀 요리노미야 아츠코 공주: 1931년 3월 7일 (93세). 이케다 다카마사(池田隆政)와 결혼했다. 자녀는 없다.
  • 장남 쓰구노미야 아키히토 왕자: 1933년 12월 23일 (90세). 제125대 일왕. 쇼다 미치코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 차남 요시노미야 마사히토 왕자: 1935년 11월 28일 (89세). 츠가루 하나코(津輕華子)와 결혼했다. 자녀는 없다.
  • 5녀 스가노미야 다카코 공주: 1939년 3월 2일 (85세). 시마즈 히사나가(島津久永)과 결혼하여 1남을 낳았다.

히로히토 일왕과의 사이에서 2남 5녀를 낳았다. 남성만이 국왕이 될 수 있는 일본 왕실에서 첫째부터 넷째까지 줄줄이 딸만 낳았기 때문에, 나가코 왕비는 ‘온나바라(女腹、딸만 낳는 여자)’라고 불리며 많은 비난을 받았다. 신하들은 히로히토 일왕에게 “후궁을 들여 아들을 낳으라”고 강력히 권했고, 실제로 화족 가문의 딸들 중에서 후궁 후보를 물색하여 몇몇 여성들을 내정해두고, 그녀들의 사진을 제출하는 등등, 구체적으로 관련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가코 왕비와의 금슬이 좋았던 히로히토 일왕은 신하들의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고, 후궁 후보들의 사진을 신하들에게 그대로 돌려주며 “다들 훌륭한 숙녀들이니, 어울리는 집안에 시집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나가코 왕비에게는 “나에게 남동생이 3명이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위로를 건넸다.

나가코 왕비는 1933년에 다섯째를 임신했고, 마침내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 쓰구노미야 아키히토 왕자를 낳았다. 2년 후인 1935년에는 차남 요시노미야 마사히토 왕자까지 낳아, 후궁 논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해졌고 나가코 왕비의 입지는 한층 굳건해졌다.

일본 왕실의 전통에 따라, 자녀들은 부모와 분리된 처소에서 유모와 담당 시종들에 의해 양육되었다. 히로히토 일왕은 불만을 표하기도 했으나 결국 ‘전통’을 이기지 못했다. ‘아이들이 응석을 모두 받아주는 친부모의 곁에서 버릇없이 자라고 있다’는 비판이 있었고, 공주들의 경우 장차 시집갈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나마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는 5살까지, 장남 아키히토 왕자는 3살까지 부모의 곁에서 지냈는데, 이것도 당시로서는 예외적인 경우였고 너무도 소중한 첫째/아들이었기 때문에 제한적으로 허용된 것이었다. (히로히토 일왕은 생후 70일부터 부모와 분리되어 자라났다.)

딸들은 공주들을 위한 거처인 구레타케료(烏竹寮)에서, 아들들은 왕자들을 위한 거처에서 지냈고, 일왕 부부와 7남매는 주말에나 다함께 모일 수 있었다. 나가코 왕비는 아키히토 왕자가 좋아하는 두부 요리를 손수 만들기도 했지만, 아키히토 왕자가 이 음식을 직접 먹은 적은 없었다고 한다.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는 전형적인 옛날식 결혼을 했다. 직접 신랑감과 제대로 대면하여 대화해보지도 못하고 어린 나이에 어른들이 정해주는 대로 결혼했기에, 신혼 시절 시게코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나아졌지만) 결혼생활에 이런저런 어려움들을 겪었다. 시게코의 여동생들도 왕실에서 정해주는 남성과 결혼하긴 했지만, (형식적으로나마) 일정 기간 맞선과 데이트 등의 교제 과정을 거치며 서로에 대해 알아보고 결혼했다.

그러나 3녀 다카노미야 가즈코 공주와 4녀 요리노미야 아츠코 공주는 오히려 맏언니보다도 더 불행하고 어려운 결혼생활을 했다. 가즈코는 유산, 불임, 남편의 불륜과 사별, 강도 등의 불운을 연이어 겪다가 친정으로 돌아와 살다가 60세 생일을 몇 달 앞두고 사망했다. 아츠코도 자녀를 낳지 못했고, 부부관계도 별로 좋지 못했으며, 오랫동안 병으로 투병했다. 언니들보다 한참 늦게 결혼한 막내 스가노미야 다카코 공주만이, 자매들 중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

악독한 시어머니[편집 | 원본 편집]

나가코 왕비의 장남 아키히토 왕세자는 평민 재벌가의 딸 쇼다 미치코와 연애결혼을 했다. 1950년대에 연애결혼이란 흔치 않은 일이었고, 그의 누이들과 남동생은 모두 왕실에서 정해주는 (옛) 왕족 내지는 화족 가문의 자제와 결혼했으며, 특히 장래 일왕이 될 왕세자의 결혼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파격적인 일로 큰 화제가 되었다.

나가코 왕비뿐 아니라 당시 왕족들, 신적강하 이전의 옛 왕족들, 옛 화족들은 아키히토 왕세자가 미치코와 결혼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크게 분노했고, 합심하여 강력하게 반대운동을 펼쳤다. 이전까지 왕실의 결혼 상대는 모두 같은 왕족 내지는 화족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치코가 아름답고, 총명하고, 다재다능하며, 부유해도, 그녀는 그저 ‘평민’일 뿐이었다. 나가코 왕비와 그녀의 두 아랫동서 세츠코 비키쿠코 비, 세츠코 비의 친정어머니이자 가쿠슈인 동창회장인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8], 노부코의 언니이자 나가코 왕비의 숙모이며 이방자 여사의 친정어머니인 나시모토 이츠코(梨本伊都子)[9] 등등이 합심하여 미치코를 반대했다.

사실 미치코가 등장하기 이전에 왕세자비 후보로 거론되던 기타시라카와 하츠코(北白川肇子)라는 여성이 있었다. 하츠코의 부계인 기타시라카와 가문은 방계 왕족이었고, 모계인 도쿠가와(德川) 가문은 메이지유신 이전에 에도 막부를 다스렸으며 이후에는 화족 작위를 받았다. 또한 하츠코의 할머니는 메이지 일왕의 7녀인 카네노미야 후사코(周宮房子) 공주이다. 즉 하츠코는 두루두루 왕족과 화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전통적 상류층이자 아키히토 왕세자와도 가까운 친족(6촌)으로, 패전 이전의 기준으로는 더없이 적합한 왕세자비 후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1939년 출생한 직후부터 ‘장래의 왕세자비’로 유력하게 여겨졌으나, 시대가 바뀌면서 왕세자비 후보에게 요구되는 조건도 바뀌었던 것이다.

반대운동도 소용없이 결국 미치코가 1959년 아키히토 왕세자와 결혼하여 왕실에 입성하자, 시어머니 나가코 왕비와 그녀의 무리들은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 미치코 왕세자비를 미워하며 괴롭혔다. (자세한 시집살이 일화들은 이 항목을 참조) 나가코 왕비는 마키노 스미코(牧野純子)[10]라는 여성을 왕세자궁의 시녀장(侍女長)으로 손수 임명했는데, 스미코를 추천한 사람은 나가코 왕비와 함께 ‘미치코 반대운동’에 앞장섰던 노부코였다. 그러니 스미코가 미치코 왕세자비에게 어떤 감정과 태도를 보였을지는 뻔한 일이다.

한편 하츠코는 왕세자비 후보에서 탈락한 이후 나가코 왕비의 외가인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고, 나가코 왕비는 하츠코의 고모할머니 호시나 다케코(保科武子)[11]를 자신의 시녀장으로 삼았으며, 다케코가 퇴임한 후로는 하츠코의 어머니인 사치코(祥子)를 왕비궁의 새로운 시녀장으로 삼았다. 나가코 왕비가 누구를 자신의 맏며느리로 삼고 싶었는지 보이는 부분이다.

그나마 나가코 왕비의 아랫동서인 세츠코 비키쿠코 비는 차츰 감정이 누그러져 미치코 왕세자비와도 나름대로 원만하게 지내게 되었고, 특히 자녀를 낳지 못한 그녀들은 미치코 왕세자비의 3남매를 자신의 손주처럼 귀여워했다. 그러나 나가코 왕비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큰며느리에 대한 미움을 풀지 못했다.

1989년에 남편 히로히토 일왕이 사망하고 아키히토 왕세자가 새로운 일왕으로 즉위하면서, 미치코 왕세자비는 왕비가 되고 나가코 왕비는 대비가 되었다. 그러나 나가코 대비와 그녀의 똘마니들은 지치지도 않고 미치코 왕비를 괴롭혔고, 미치코 왕비에 대한 갖가지 악성 소문들(가짜뉴스)을 꾸며내어 세간에 흘리곤 했다. 결국 왕실에 시집온 지도 34년이나 지난 1993년, 59세의 미치코 왕비는 공식석상에서 쓰러져 앓아누웠고, 실어증으로 1년이나 고생했다. 이후 2000년 6월 16일 나가코 대비가 향년 97세에 사망한 후에야, 미치코 왕비는 (약혼 기간까지 합하면) 42년 만에 시어머니로부터 해방되었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편집 | 원본 편집]

사실 나가코 왕비도 자신의 시어머니 데이메이왕후(사다코)로부터 호된 시집살이를 당했다. 우선 사다코 대비와 나가코 왕비 사이에는 차이점이 많았다. 사다코 대비는 화족 가문의 서녀(庶女)였지만, 나가코 왕비는 방계 왕족 가문의 적녀(嫡女)였다. 즉 시어머니보다 며느리의 출신 성분이 더 높았던 것이다. 때문에 사다코 대비가 열등감을 가지고 맏며느리를 더욱 괴롭혔다고도 한다.

또한 사다코 대비는 어린 시절 ‘쿠조(九條)[12] 가문의 쿠로히메(黑姬)’[13]라고 불릴 정도로 활달하고 씩씩했으며, 왕비가 된 후로는 유약한 남편 다이쇼 일왕과 어린 장남 히로히토 왕세자를 대신하여 거물급의 정치인들과 치열한 다툼을 벌일 정도로 강한 성격의 여장부였다. 반면 나가코 왕비는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어서, 고부(姑婦) 간에 성격 차이도 심했다. 게다가 나가코 왕비의 친정인 구니노미야 가문이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는 것과, 나가코 왕비가 결혼 이후 첫째부터 넷째까지 줄줄이 딸만 낳은 것은, 아주 좋은 시집살이 구실이 되었다.

덕분에 고부관계는 좋지 못했다. 심지어 당사자들뿐 아니라 아랫사람들까지 고통을 받았는데, 사다코 대비의 시녀 다케야 츠네코(竹屋津根子)와 나가코 왕비의 시녀 다케야 시게코(竹屋志計子)는 친자매이면서도 (상전들의 다툼 때문에) 제대로 대화조차 나누지 못하며 지냈을 정도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사다코 대비는 맏며느리를 직접 꾸짖기보다는 시녀를 통해 자신의 의견(꾸짖음)을 전달했는데, 이례적으로 맏며느리의 면전에 대놓고 퍼부었던 일이 있다. 다이쇼 일왕이 하야마(葉山)의 왕실 별장에서 병석에 누워 말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나가코 왕세자비는 남편 히로히토 왕세자와 함께 시아버지를 문병하러 왔다가, 시어머니 사다코 왕비의 앞에서 긴장한 나머지 장갑[14]을 낀 손으로 물수건을 짜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자 사다코 왕비는 “너는 무엇을 시켜도 못나게 구는구나!”라며 나가코 왕세자비를 꾸짖었고, 나가코 왕세자비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시어머니의 꾸중을 듣고만 있었다. 마침 시종들도 함께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시종들에게도 고부갈등을 광고한 꼴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사다코 대비는 맏며느리 나가코 왕비에게 엄격했지만, 나머지 3명의 며느리들에게는 너그러운 시어머니였다. 특히 둘째며느리 세츠코 비를 귀여워했는데, 매년 3월 3일 히나마츠리 때마다 세츠코 비는 시집올 때 친정에서 가져온 히나인형들로 집안을 장식했고, 사다코 대비와 세츠코 비는 함께 인형 장식을 감상하며 즐거워하곤 했다.

사다코 대비는 1951년에 사망했고, 비로소 27년에 걸친 나가코 왕비의 시집살이도 끝났다.

말년과 사망[편집 | 원본 편집]

노인이 되면서 나가코 왕비는 건강이 점점 나빠졌다. 74세이던 1977년 여름에는 도치기현 나스(那須)에 있는 왕실 별장에서 넘어져 허리뼈가 골절되었는데, 시종들이 이 사실을 숨기는 바람에 치료가 늦어졌고 그 결과 완치되지 못했다. 이후 공무에 참석할 때도 시녀들의 부축을 받거나 휠체어를 이용했다. 84세이던 1987년 12월 11일에는 가족사진[15]을 촬영한 직후 가벼운 심장 발작을 일으켰고, 다음해부터 나가코 왕비는 공무에서 은퇴했다. 가벼운 치매 증상도 보였지만, 왕실에서는 “노인 특유의 증상”이라며 치매설을 부정했다.

1989년에는 남편 히로히토 일왕이 사망하고 장남 아키히토 왕세자가 새로운 일왕으로 즉위했다. 큰며느리 미치코 왕세자비도 왕비가 되었고, 나가코 왕비는 대비가 되었다. 몇 개월 후에는 사촌언니 이방자 여사와 3녀 다카츠카사 가즈코가 줄줄이 사망했다. 하지만 이렇게 늙고 병들어 주변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뒷전으로 물러나서도, 나가코 대비는 지치지 않고 큰며느리 미치코 왕비에게 시집살이를 시켰다.

2000년 6월 16일, 나가코 대비는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97세로, 일본 왕실의 역대 왕비들 중에서 가장 장수했다. 시호(諡號)는 ‘고준(香淳)’으로 정해졌다.

한편 고준왕후의 장례식 때, 미치코 왕비와 그녀의 큰며느리 마사코 왕세자비 사이에 (오해일 수도 있는 일로) 고부갈등이 있었다. 미치코 왕비는 마사코 왕세자비에게 왕실 장례식에서 입어야 하는 상복[16]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에 대해 마사코 왕세자비는 ‘다른 사람들도 다 보고 있는 앞에서 시어머니가 나를 질책했다’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훗날 마사코 왕세자비는 (우울증과 적응장애 등의 문제로) 의사와 상담할 때 시할머니의 장례식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때 시어머니가 그렇게 말해서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 남편 히로히토(쇼와) 일왕과의 금슬이 무척 좋았다. 신혼이던 1920년대는 (부부라도) 남녀의 자유로운 애정표현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히로히토 일왕과 나가코 왕비는 항상 손을 잡고 다니며 다정하게 지냈다. 결혼 전부터도 히로히토 왕세자는 약혼녀 나가코와 처제들에게 종종 소소한 선물을 주었고, 결혼 후에도 어딘가 다녀올 때면 아내에게 줄 선물을 가져오곤 했다. 말년에도 매일 함께 NHK 아침드라마를 시청하고, 산책을 다니곤 했다. 1쌍의 바퀴벌레
  • 나가코 왕비는 장미를 좋아하여 정원에 다양한 장미꽃들을 심었는데, 손수 잡초를 뽑고 가지를 치는 등등 정성껏 가꾸었다고 한다. 생물에 관심이 많았던 히로히토 일왕은 “잡초라는 이름의 식물은 없다”며 모든 식물들을 다 좋아했지만, 나가코 왕비가 장미 정원에서 잡초를 제거하는 일만큼은 말리지 않고 존중했다.

각주

  1. 오늘날의 가고시마현 전역+미야자키현 서남부 일부
  2. 에도 막부 시절의 행정구역인 번을 폐지하고, 오늘날과 같은 도도부현 체제를 실시함
  3. 오늘날의 야마구치현
  4. 데이메이왕후에게는 고모이자 시할머니가 된다.
  5. 일본의 전통 시(詩)
  6. 훗날 나가코 왕비의 큰며느리 미치코 왕세자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모 제도를 폐지했고, 직접 모유 수유를 하다가 모유가 부족하면 분유를 먹였다.
  7.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옛날에는 영유아 사망률이 높았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나온 격언이 ‘7살 이전까지는 부모의 자녀가 아니라 신의 자녀’라는 격언이다. ‘7살 이전에 죽으면 본래의 부모인 신에게 돌아가는 것이므로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뜻으로, 어린아이를 잃은 부모를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8. 1969년 향년 82세에 사망할 때까지, 지치지도 않고 미치코 왕세자비를 괴롭혔다.
  9. 이츠코는 평생 일기를 썼는데, 당시 일기에 “이제 일본도 다 끝났구나!”라고 썼다. 반면 이츠코의 큰딸이자 나가코 왕비의 사촌언니인 이방자 여사는, 아키히토 왕세자와 쇼다 미치코의 결혼을 지지했다.
  10. 스미코의 딸 하야시 데이코(林貞子)는 쇼토유치원의 설립자이다.
  11. 메이지 일왕의 6녀인 츠네노미야 마사코(常宮昌子) 공주의 손아래 시누이. 마사코 공주의 아들 다케다 츠네요시(竹田恒德)는 생체실험 만행으로 악명이 높은 731부대에서 복무한 전쟁범죄자이고, 츠네요시의 아들 츠네카즈(恒和)는 일본올림픽위원회 임원이었다가 2020 도쿄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물의를 일으켜(뇌물) 퇴임했다. 츠네카즈의 아들 츠네야스(恒泰)는 1975년생으로, 악질적인 망언과 망동을 일삼는 혐한ㆍ극우 인물이다.
  12. 데이메이왕후의 친정
  13. ‘검은 아가씨’라는 뜻으로, 햇볕에 새카맣게 그을릴 때까지 온종일 밖에서 활발하게 뛰어노는 여자아이였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14. 훗날 나가코 왕비의 며느리가 되는 쇼다 미치코와 손자며느리가 되는 가와시마 키코도, 왕실로 시집오면서 장갑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15. 일본 왕실에서는 매년 12월마다 직계 가족들끼리 모여서 사진을 촬영한다.
  16. 일본 왕실의 상복 규정은 까다롭다. 단순히 검은색 옷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경우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치마, 스타킹, 구두, 진주목걸이, 귀걸이, 모자, 베일, 장갑 등까지 전부 검은색으로 갖추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