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常陸宮正仁
인물 정보
다른이름 요시노미야 마사히토(결혼 전)
출생 1935년 11월 28일 (88세)
도쿄도 치요다구 고쿄
국적 일본
학력 가쿠슈인 초등과
가쿠슈인 중등과
가쿠슈인 고등과
가쿠슈인대학 이학부 화학과
도쿄대학 대학원
직업 왕족(왕자)
종교 신토
배우자 하나코 비
가족 아버지 쇼와 일왕(히로히토), 어머니 고준왕후(나가코)
숙부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왕자,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왕자,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
숙모 세츠코 비, 키쿠코 비, 유리코 비
첫째 누나 히가시쿠니 시게코, 둘째 누나 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 셋째 누나 다카츠카사 가즈코, 넷째 누나 이케다 아츠코, 형 아키히토 상왕, 형수 미치코 상왕비, 여동생 시마즈 다카코
사촌동생 고노에 야스코, 토모히토 왕자,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왕자, 센 마사코,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
조카 나루히토 일왕,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 구로다 사야코
조카손주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 코무로 마코, 카코 공주, 히사히토 왕자
5촌: 아키코 공주, 요코 공주, 쓰구코 공주, 센게 노리코, 모리야 아야코
활동기간 1964년 결혼으로 분가, 히타치노미야 가문 창설

일본의 왕족. 나루히토 일왕의 작은아버지. 왕위 계승서열 순위는 나루히토 일왕의 남동생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1위), 후미히토 왕자의 아들 히사히토 왕자(2위)에 이어 3위이다.

출생과 성장[편집 | 원본 편집]

1935년 11월 28일, 히로히토(쇼와) 당시 일왕과 나가코 왕비(고준왕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칭호는 요시노미야(義宮)였으며, 오시루시는 초령목(招靈木)이다.

나가코 왕비는 줄줄이 딸만 4명을 낳아 비난을 받았고, 후궁 제도의 부활까지 구체적으로 거론되는 것을 보며 마음고생을 하다가, 다섯째로 마침내 고대하던 아들 쓰구노미야 아키히토 왕자를 낳았다. 이어 2년 후에 여섯째로 요시노미야 마사히토 왕자까지 낳으면서, 나가코 왕비의 마음은 한층 편안해졌고 그녀의 입지 또한 강화되었다.

당시 일본 왕실의 관례대로, 마사히토 왕자는 부모와 분리되어 형 아키히토 왕자와 함께 따로 떨어진 거처에서 시종들에 의해 양육되었다. 누이들은 공주들을 위해 마련된 별도의 거처에서 자라났다.

학업 및 활동[편집 | 원본 편집]

마사히토 왕자는 여느 일본 왕족들과 마찬가지로 가쿠슈인 초등과, 중등과(남중), 고등과(남고)를 거쳐 가쿠슈인대학에 진학했다. 히로히토 일왕 내외의 2남 5녀 중에서 유일하게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인물이다.

첫째 누나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공부를 좋아하며 잘했고 생물학에 관심이 깊었으나, 당시의 관례대로 여자가쿠슈인만 졸업하고 18세가 되던 해에 어른들이 정해준 남성에게 시집갔다. 둘째 누나 히사노미야 사치코(久宮祐子) 공주는 생후 6개월에 요절했다. 셋째 누나 다카츠카사 가즈코가쿠슈인 여자고등과를 졸업하자마자, 넷째 누나 이케다 아츠코는 가쿠슈인여자단기대학 가정생활과를 졸업하자마자 시집갔다. 여동생 시마즈 다카코는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진학했으나, 재학 중에 결혼하면서 대학을 중퇴했다. 형 아키히토 왕세자도 잦은 공무와 해외순방으로 가쿠슈인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수료에 그쳤다.

마사히토 왕자는 가쿠슈인대학 이학부 화학과를 졸업했고, 이후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동물학을 연구했다. 에 대해서도 연구하여 암연구회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했으며, 명예총재까지 지냈다.

결혼과 불임[편집 | 원본 편집]

평민 재벌가의 딸 쇼다 미치코와 연애결혼을 하여 큰 화제가 되었던 형 아키히토 왕세자와 달리, 마사히토 왕자는 어머니 나가코 왕비가 손수 골라준 여자와 결혼했다. 결혼과 동시에 그는 출생 이후로 사용해온 ‘요시노미야’라는 어칭호 대신 ‘히타치노미야’라는 궁호를 새로 받았고, 이로써 히타치노미야 가문이 창설되었다. 패전 이후 최초로 창설된 방계 왕족 가문이다.

큰며느리 미치코 왕세자비를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몹시 미워했던 나가코 왕비는, 작은며느리만큼은 절대로 평민층에서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직접 옛 왕족 및 화족 가문의 딸들 중에서 작은며느릿감을 물색했고, 마침내 츠가루 요시타카(津輕義孝) 백작의 4녀 중 막내인 하나코(華子)를 마사히토 왕자와 결혼시켰다. 하나코는 마사히토 왕자보다 5년 연하(1940년생)로, 가쿠슈인여자단기대학[1] 문과(영어 전공) 출신이다.

1964년, 29세의 마사히토 왕자는 24세의 하나코와 결혼식을 올렸다. 많은 반대를 뿌리치고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성공했던 아키히토 왕세자와 달리, 어머니가 정해주는 대로 어머니의 마음에 드는 여자와 결혼한 마사히토 왕자의 결혼 과정은 순조로웠다. 나가코 왕비 또한 (큰며느리를 가혹하게 대하던 것과 대조적으로) 작은며느리 하나코 비를 예뻐했다.

그러나 2 1녀를 낳은 형님 미치코 왕세자비와 달리, 하나코 비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마사히토 왕자가 어린 시절에 소아마비를 앓아 불임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마사히토 왕자와 하나코 비가 사망하면 히타치노미야 가문은 절손된다.

종교에 대한 관심[편집 | 원본 편집]

마사히토 왕자는 그리스도교[2]에도 관심이 많아, 교황 바오로 6세를 알현한 적도 있다. 마침 그의 형수 미치코 왕세자비가톨릭 미션스쿨(세이신여학원) 출신이고 친정도 가톨릭 집안이라, 마사히토 왕자는 형수에게도 가톨릭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하여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런데 시어른들에게 이 사실을 들켜, 가뜩이나 왕실에서 매운 시집살이를 당하고 있던 미치코 왕세자비만 또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기본적으로 일본 왕실의 종교는 신토이기 때문이다.

각주

  1. 가쿠슈인여자대학
  2. 천주교(가톨릭), 정교회, 개신교(프로테스탄트)를 통틀어 일컫는 말. ‘기독교’ 내지는 ‘크리스트교’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