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메이왕후

데이메이왕후
貞明王后
인물 정보
본명 사다코
다른이름 쿠조 사다코(결혼 전)
출생 1884년 6월 25일
일본 도쿄도 치요다구
사망 1951년 5월 17일 (향년 66세)
교토부 교토시
국적 일본
학력 화족여학교
직업 왕족(왕비)
종교 신토
배우자 다이쇼 일왕
가족 아버지 쿠조 미치타카, 어머니 노마 이쿠코
시아버지 메이지 일왕, 시어머니 쇼켄왕후(하루코)
자녀: 장남 쇼와(히로히토) 일왕, 차남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왕자, 3남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왕자, 4남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
며느리 고준왕후(나가코), 세츠코 비, 키쿠코 비, 유리코 비
손자 아키히토 상왕,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왕자, 토모히토 왕자,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왕자,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
손녀 히가시쿠니 시게코, 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 다카츠카사 가즈코, 이케다 아츠코, 시마즈 다카코, 고노에 야스코, 센 마사코
증손자 나루히토 일왕,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
증손녀 구로다 사야코, 아키코 공주, 요코 공주, 쓰구코 공주, 센게 노리코, 모리야 아야코
고손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 코무로 마코, 카코 공주
고손자 히사히토 왕자
활동기간 1900년 왕세자비 책봉
1912년 왕비 즉위
1926년 대비 즉위

다이쇼 일왕의 왕비. 現 나루히토 일왕의 증조할머니. 이름은 사다코(節子)이며, 오시루시등나무이다.

출생과 가계[편집 | 원본 편집]

친정인 쿠조(九條) 가문은 일본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으로, 고노에(近衛)[1]ㆍ다카츠카사(鷹司)[2]ㆍ이치조(一條)[3]ㆍ니조(二條) 가문과 함께 일명 ‘고셋케(五攝家)’라고도 불리는 최고위 귀족이었다. 대정봉환메이지유신 등으로 일본이 근대화되면서 귀족 계급도 서양식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의 5등급으로 개편되었고, 이렇게 근대화ㆍ서구화된 귀족들은 화족이라고 불리게 된다. 쿠조 가문은 공작 작위를 받았다.

사다코는 쿠조 미치타카(九條道孝) 공작의 4녀로, 어머니는 미치타카의 측실()인 노마 이쿠코(野間幾子)이다. 미치타카의 누나인 아사코(夙子)는 고메이(孝明) 일왕의 왕비인 에이쇼왕후(英照王后)로, 사다코에게는 고모이자 시할머니가 된다. 단 메이지 일왕의 생모는 에이쇼왕후가 아니라, 고메이 일왕의 후궁인 나카야마 요시코(中山慶子)이다.

사다코의 언니 가즈코(籌子)는 ‘오타니 컬렉션’으로 유명한 승려 오타니 고즈이의 아내이다.[4] 한편 고즈이의 여동생 다케코(武子)는 가즈코와 사다코의 남동생인 요시무네(良致)와 결혼했다. (겹사돈) 다케코는 ‘다이쇼 시대의 3대 미인’[5] 중 하나로 꼽히며 미모와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았고, 불교계 여학교인 교토고등여학교(現 교토여자대학)의 설립에도 깊이 간여했다.

성장[편집 | 원본 편집]

1884년 6월 25일에 태어나, 불과 다음 달인 7월부터 인근의 농가에 맡겨져 1888년까지 성장했다. 사다코를 맡아 기른 사람은 오가와라 긴초(大河原金蔵)와 그의 아내 데이(てい)였다. 사다코는 농촌에서 활달하고 씩씩하게 뛰어놀며 자랐는데, 온종일 밖에서 뛰어놀아 햇볕에 새카맣게 그을렸기 때문에 ‘쿠조 가문의 쿠로히메(黑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먹성도 좋아서 식사 때마다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생선 반찬은 내장까지 모두 먹어치울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건강함과 활달함은 그녀가 훗날 왕세자비로 간택되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1888년부터 본가인 쿠조 가문으로 돌아와 살게 되었고, 2년 후인 1890년에는 가쿠슈인의 전신인 화족여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시작했다. (화족여학교는 가쿠슈인에 흡수되어 ‘가쿠슈인 여학부’와 ‘여자가쿠슈인’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가쿠슈인 여자중등과ㆍ여자고등과ㆍ여자대학으로 개편되었다.)

화족여학교에서는 당시의 여성 교육자인 시모다 우타코(下田歌子), 이시이 후데코(石井筆子), 쓰다 우메코(津田梅子) 등이 사다코를 가르쳤는데, 특히 후데코와의 인연은 평생토록 이어졌다. 후데코와 그녀의 남편 이시이 료이치(石井亮一)는 훗날 일본 최초의 지적장애인 시설인 다키노가와학원(瀧乃川学園)을 설립했는데, 이 사업에도 사다코가 많은 후원을 했다.

왕세자비 책봉과 출산[편집 | 원본 편집]

1900년 2월 11일, 16세 생일을 약 4개월 앞둔 사다코는 왕세자비로 책봉되어 5년 연상의 요시히토(嘉仁) 왕세자와 약혼했다.

왕세자비 책봉을 앞두고, 사다코는 늙은 궁녀 마데노코지 사치코(万里小路幸子)로부터 궁중예법 교육을 받았다. 오랜 세월 궁녀로 살아온 궁중예법 전문가였던 사치코는 어린 사다코를 엄격하게 가르쳤다. 당시 사다코는 무척 힘들어했지만, 시간이 지나 왕비가 되고 대비가 된 후로는 “그때 사치코의 교육이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동년 5월 10일, 사다코는 요시히토 왕세자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려 왕세자비가 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지금의 영빈관(迎賓館)인 아카사카이궁(赤坂離宮)이 지어졌다.

몸도 마음도 병약하고 유약하여 바보 취급을 받았던 요시히토 왕세자와 달리 사다코는 활달하고 건강하며 총명한 소녀였기에, 일본 왕실에서는 사다코가 요시히토 왕세자를 잘 보필해주기를 기대하며 그녀를 왕세자비로 선택한 것이었다. 왕실의 기대대로 두 사람의 금슬은 무척 좋았고,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부부는 서로 잘 어울렸다.

이듬해인 1901년, 사다코 왕세자비는 장남 미치노미야 히로히토 왕자를 낳았다. 오랫동안 일본 왕실은 정실이 아들을 낳지 못하여 측실(후궁) 소생의 왕자로 계승되어 왔는데, 매우 오랜만에 적장자(嫡長子)가 태어난 것이다. 사다코 왕세자비는 1902년에 차남 아츠노미야 야스히토 왕자를, 1905년에 3남 데루노미야 노부히토 왕자를 낳았고, 건강한 아들을 여럿 낳은 그녀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원만한 부부관계와 다남(多男) 덕분에 다이쇼 일왕은 선대 일왕들과 달리 후궁을 들이지 않았고, 이때부터 일본 왕실에도 일부일처제가 시행되었다.

왕비 시절과 맏며느리 간택[편집 | 원본 편집]

1912년 7월 30일, 시아버지 메이지 일왕이 사망하고 남편 요시히토 왕세자가 다이쇼 일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사다코 왕세자비도 왕비가 되었다. 3년 뒤인 1915년 11월 10일 교토에서 즉위식이 치러졌지만, 마침 사다코 왕비는 넷째를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결석하였다. 다음 달인 12월에 4남 스미노미야 다카히토 왕자가 태어났다.

사다코 왕비는 신토 의례와 궁정여관(宮庭女官) 제도 등의 관습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신학문을 공부한 신여성들을 자주 궁으로 불러 조언을 들었다. 시어머니 쇼켄왕후의 뒤를 이어 양잠을 장려하며 본인도 직접 양잠을 했고, 이러한 전통은 대대로 이어져 오늘날도 일본 왕실의 여성들은 양잠을 하고 있다. 한센병 환자와 등대지기를 돕는 일에도 힘썼다.

병약했던 남편 다이쇼 일왕은 결국 국정을 직접 돌보지 못하게 되어, 20세의 장남 히로히토 왕세자가 섭정을 맡게 되었다. 사다코 왕비는 몸져누운 남편과 어린 장남을 대신하여 국정에 간여하는 한편, 당대 일본 정치계의 거물급 인사들과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남편과 달리 강인하며 드센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왕세자비 선정 또한 그러한 다툼 중의 하나로, 원로 정치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화족 가문의 딸 이치조 도키코(一條朝子)를 왕세자비 후보로 강력히 추천했지만 사다코 왕비는 반발했다. 다이쇼 일왕을 만만히 여기며 바보 취급했던 야마가타였기에, 그가 추천하는 후보를 받아들이기 싫었던 것이다.

직접 맏며느릿감을 물색하기 시작한 사다코 왕비에게, 일본 해군의 근거지인 사츠마번(薩摩藩)[6]이 접근한다. 그들은 사츠마번 제12대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島津忠義)의 외손녀이자 방계 왕족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의 장녀인 나가코를 왕세자비 후보로 추천한다. 결혼 당사자인 히로히토 왕세자도 나가코를 좋아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18년 일본의 여러 신문들에 “구니노미야 가문의 나가코 왕녀가 왕세자비로 간택되었다”고 대서특필되었다.

야마가타 일파는 분노하여 강력히 반발했다. 도키코를 추천했던 그들은 육군의 근거지인 조슈번(長州蕃)[7] 출신이었고, 당시 일본 육군과 일본 해군은 도저히 같은 나라의 군대라고 생각될 수 없을 정도로 서로를 극렬하게 미워하며 대립했기에, 왕세자비 간택 문제를 두고도 몇 년간 치열하게 싸우게 된다. 일명 ‘궁중모중대사건(宮中某重大事件)’이라고 불린 이 싸움에서 결국 해군과 사츠마번의 지지를 받는 나가코가 승리했고, 1924년 히로히토 왕세자와 결혼식을 올려 왕세자비가 된다.

본래 좀 더 일찍 결혼식을 거행할 예정이었으나, 1923년 발생한 간토대지진의 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하여 미루었다. 사다코 왕비는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추모하는 내용의 와카(和歌)[8]를 발표했고, 나가코도 예비 시어머니의 이러한 행보에 동참했다. 역겹고 가증스럽다

1925년 12월 6일, 히로히토 왕세자와 나가코 왕세자비는 첫 아이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를 낳았다. 이로써 사다코 왕비는 할머니가 되었다. 다이쇼 일왕에게는 생전에 유일하게 본 손주이기도 하다. 딸이지만 첫 아이이고 첫 손주이기에, 시게코 공주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26년 12월 25일, 다이쇼 일왕은 하야마(葉山)에 있던 왕실 별장에서 사망했다. 아내 사다코 왕비의 배려로, 그는 친어머니 야나기하라 나루코(柳原愛子)[9]가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했다. 장남 히로히토 왕세자가 왕위를 이어받으면서, 사다코 왕비는 대비가 되었다.

대비 시절[편집 | 원본 편집]

다이쇼 일왕과 사별한 이후로 사다코 대비는 하루에 몇 시간씩 남편의 초상화가 안치된 방에서 머물렀는데, 차남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왕자의 증언에 따르면 “어머니는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여 시중하는 것처럼 지냈다”고 한다.

한편 한센병(나병) 환자에 대한 관심도 여전하여, 1931년에는 친히 지원금을 내놓아 일본나병예방협회를 설립했다. 또한 사다코 대비의 생일 전후로 ‘나병 예방의 날’도 지정되었다. (현재는 ‘한센병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주간’이라고 개칭).

1941년 일본진주만을 공격하여 미국과 연합국을 도발했고, 당연히 반격을 받게 된다. 도쿄에까지 공습이 퍼부어지는 와중에도 일본 왕실은 피난하지 않았는데, 왕실의 어른인 사다코 대비가 피난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43년에는 맏손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가 방계 왕족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東久邇宮稔彦)의 장남인 모리히로(盛厚)에게 시집갔고, 2년 후인 1945년에는 첫째(장남) 노부히코(信彦)를 낳았다. 이로써 사다코 대비는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일본의 패배로 끝났고, 패전 이후부터 사망할 때까지 사다코 대비는 주로 시즈오카현의 왕실 별장에서 말년을 보냈다.

2년 후인 1947년에는 왕실의 대규모 개혁으로 다이쇼 일왕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수많은 방계 왕족들과 화족들이 평민으로 강등되었다(신적강하). 방계 왕족에게 시집간 맏손녀 시게코 공주도 평민 히가시쿠니 시게코가 되었다.

후손[편집 | 원본 편집]

남편 다이쇼 일왕과의 사이에서 아들만 4명을 두었다. 다이쇼 일왕의 아버지 메이지 일왕은 5남 10녀를 낳았으나, 그중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겨우 1남 4녀뿐이었다. 반면 다이쇼 일왕의 아들 4명은 모두 건강하게 살아남았다. 무뚝뚝하고 친자녀들에게조차 정이 없었던 메이지 일왕과 달리, 다이쇼 일왕은 (왕으로서는 바보 취급을 받았지만) 아이들에게 애정이 많았다고 한다.

사다코 왕비가 제일 예뻐한 아들은 차남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왕자인데, 자신과 생일이 같아서 더욱 각별하게 여겼다고 한다. (18세 생일에 차남을 낳았다.) 4남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도 예뻐했는데, 바로 위의 형인 3남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왕자보다도 10살이나 어린 늦둥이 막내였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왕실의 자녀들은 친부모와 분리된 거처에서 유모와 전담 시종들에 의해 양육되었으나, 사다코 왕비는 당대의 엄격한 관례를 깨고 막내만큼은 자신의 품에서 손수 키웠다.

차남 야스히토 왕자와 3남 노부히토 왕자는 자녀를 낳지 못했기에, 사다코 대비에게 손주를 안겨준 아들은 장남 히로히토 일왕과 4남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뿐이었다. 게다가 히로히토 일왕은 줄줄이 딸만 4명을 낳다가 다섯째로 간신히 아키히토 왕세자를 낳았기에 더욱 후손이 귀했다. 사다코 대비는 어렵게 얻은 장손 아키히토 왕세자를 각별히 아꼈고, 늦둥이 막내 다카히토 왕자의 아이들도 귀여워했다.

고부갈등[편집 | 원본 편집]

맏며느리 나가코 왕비는 사다코 대비 자신이 직접 간여하여 간택한 인물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심한 고부갈등이 있었다.

우선 사다코 대비는 화족 쿠조 가문의 서녀(庶女)인데, 나가코 왕비는 방계 왕족 구니노미야 가문의 적녀(嫡女)였다. 때문에 사다코 대비가 자신의 출신 신분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고 맏며느리를 불편하게 대했다고도 한다. 또한 구니노미야 가문은 왕비의 친정임을 믿고 오만방자하게 굴어 사다코 대비로부터 미움을 샀다. 성격 차이도 있었는데, 활달하고 자기주장이 강하며 드센 성격이었던 사다코 대비와 달리 나가코 왕비는 다소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무엇보다도 사다코 대비는 건강한 아들을 4명이나 낳았지만, 나가코 왕비는 첫째부터 넷째까지 줄줄이 딸만 낳았다. 그리고 둘째 히사노미야 사치코(久宮祐子) 공주는 생후 6개월이던 1928년 3월 8일에 요절했다.

고부관계가 워낙 불편했기에, 사다코 대비의 시녀 다케야 츠네코(竹屋津根子)와 나가코 왕비의 시녀 다케야 시게코(竹屋志計子)는 친자매이면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눈치가 보여) 마음 놓고 편안히 대화하지도 못하며 지냈다고 한다.

사다코 대비는 맏며느리를 꾸짖을 때 주로 시녀를 시켜 간접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곤 했지만, 이례적으로 대놓고 꾸짖은 적도 있다. 사다코 왕비가 하야마의 왕실 별장에서 임종 직전의 다이쇼 일왕을 간병하고 있을 때, 히로히토 왕세자와 나가코 왕세자비 내외가 문병을 왔다. 23세의 나가코 왕세자비는 시어머니 사다코 왕비의 앞에서 긴장하여, 그만 손에 장갑[10]을 낀 채로 시아버지의 머리맡에 있던 물수건을 짜는 실수를 저질렀다. 사다코 왕비는 시종들도 함께 있는 와중에 “너는 무엇을 시켜도 못나게 구는구나!!”라며 나가코 왕세자비를 꾸짖었고, 나가코 왕세자비는 감히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하고 시어머니의 꾸중을 듣고만 있었다.

반면 ‘맏며느리’라는 부담이 없었던 나머지 며느리들에게는 관대하게 대했고, 자주 만나서 식사와 다과를 함께하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차남 야스히토 왕자를 제일 예뻐했던 만큼, 그중에서도 둘째며느리 세츠코 비를 예뻐했다. 매년 3월 3일 히나마츠리마다 세츠코 비는 시집올 때 친정에서 가져온 히나인형들을 집안에 장식했고, 시어머니 사다코 대비와 함께 인형들을 감상하며 즐거워했다. 훗날 세츠코 비는 자신의 회고록 <은의 본보니엘(銀のボンボニエール、For my memoir Silver Bonbonniere)>[11]에서 “시어머니는 (아들만 두었기 때문에) 딸을 위해 히나마츠리를 준비해줄 일이 없었으므로, 며느리와 히나마츠리를 보내는 것을 매년 즐거움으로 삼으셨다.”라고 회고했다.

한일결혼 주선[편집 | 원본 편집]

일본이 조선(대한제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을 당시, 사다코 왕비는 대한제국의 왕손들을 일본인과 결혼시키는 일에도 앞장섰다.

우선 1920년에는 영친왕 이은(李垠)을 일본의 방계 왕족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12]의 큰딸인 마사코(方子)와 결혼시켰다. 이후 마사코는 이방자(李方子)로 불리게 된다. 1931년에는 의친왕 이강(李堈)의 장남인 이건(李健)을 이방자의 이종사촌 여동생인 마츠다이라 요시코(松平誠子)와 결혼시켰고, 덕혜옹주를 대마도주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결혼시켰다. 이어 의친왕의 차남인 이우(李鍝)도 일본인과 결혼시키려고 했으나 이우는 매우 강력하게 반발하며 한국인과의 결혼을 고집했고, 기어이 박영효(朴泳孝)의 손녀인 박찬주(朴贊珠)와 결혼하고 만다.

그러나 사다코 대비가 결혼시킨 한일부부들의 결말은 좋지 못했다. 결혼 전부터 조현병을 앓고 있었던 덕혜옹주는 다케유키와의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고, 일본이 패전한 이후 화족 제도가 폐지되자 다케유키는 신분과 재산을 잃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다케유키는 사다코 대비가 사망한 이후 (덕혜옹주의 정신이 온전치 못했기 때문에) 영친왕이방자 내외와 의논하여 1955년에 이혼했다. 이건도 아내 요시코와 불화를 겪다가 이혼했고, 이후 일본으로 귀화하여 ‘모모야마 켄이치(桃山虔一)’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했다.

유일하게 영친왕이방자는 이혼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살았지만, 위의 두 부부와 마찬가지로 패전 이후 생활고 때문에 많이 고생했고, 영친왕은 병을 얻어 의식도 없이 누워서 앓게 되었다. 그 상태로 1963년 영친왕과 이방자는 한국으로 귀국했고, 1970년 영친왕과 사별한 이후로 이방자는 한국에서 복지사업과 장애인 교육에 힘쓰다가 19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망[편집 | 원본 편집]

1951년 5월 17일, 67세 생일을 1달여 앞둔 사다코 대비는 갑작스레 사망했다. 그녀는 무척 건강하여, 왕세자비 시절 잠깐 장티푸스에 걸렸던 것을 제외하면 생전 병으로 앓은 적이 없었다. 사망 당일에도 공식 일정이 있어서 참석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의 죽음은 예상치 못한 급사였다.

교토에서 사망했지만 장례식과 매장은 도쿄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일본 왕실의 역대 왕비들 중에서 최초였다. 시호(諡號)는 ‘데이메이(貞明)’이다.

각주

  1. 4남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의 장녀 야스코(寗子) 공주가 시집간 가문
  2. 장남 쇼와(히로히토) 일왕의 3녀 다카노미야 가즈코 공주가 시집간 가문
  3. 시어머니 쇼켄왕후의 친정
  4. 일본에는 대처승이 많다.
  5. 쿠조 다케코, 야나기하라 뱌쿠렌(柳原白蓮), 에기 킨킨(江木欣々) or 하야시 키무코(林きむ子)
  6. 오늘날의 가고시마현 전역+미야자키현 서남부 일부
  7. 오늘날의 야마구치현
  8. 일본의 전통 시(詩)
  9. 메이지 일왕의 후궁
  10. 훗날 고준왕후(나가코)의 맏며느리가 되는 쇼다 미치코와 손자며느리가 되는 가와시마 키코도, 결혼을 앞두고 장갑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자세한 이야기는 항목 참조.
  11. Bonbonniere은 ‘과자 가게’, ‘과자 상자’라는 뜻의 영어 단어이다.
  12. 고준왕후의 작은아버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