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모히토

토모히토
寬仁
인물 정보
출생 1946년 1월 5일
일본 가나가와현
사망 2012년 6월 6일 (향년 66세)
도쿄
국적 일본
학력 가쿠슈인 초등과
가쿠슈인 중등과
가쿠슈인 고등과
가쿠슈인대학 법학부 정치학과
직업 왕족(왕자)
종교 신토
배우자 노부코 비
가족 할아버지 다이쇼 일왕, 할머니 데이메이왕후(사다코)
큰아버지 쇼와 일왕,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왕자,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왕자
큰어머니 고준왕후(나가코), 세츠코 비, 키쿠코 비
아버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 어머니 유리코 비
형제: 누나 고노에 야스코, 남동생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왕자, 여동생 센 마사코, 남동생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
사촌: 누나 히가시쿠니 시게코, 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 다카츠카사 가즈코, 이케다 아츠코, 형 아키히토 상왕,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왕자, 누나 시마즈 다카코
자녀: 장녀 아키코 공주, 차녀 요코 공주
조카: 쓰구코 공주, 센게 노리코, 모리야 아야코
5촌: 나루히토 일왕,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 구로다 사야코
6촌: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 코무로 마코, 카코 공주, 히사히토 왕자

일본의 왕족(왕자). 나루히토 일왕의 5촌 당숙이다. 오시루시는 떡갈나무이다.

출생[편집 | 원본 편집]

다이쇼 일왕의 4남 중 막내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와 부인 유리코 비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장남)로 태어났다.

다카히토 왕자는 늦둥이라서 많은 귀여움을 받으며 자유분방하게 자라났다. 또한 다카히토 왕자의 둘째 형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왕자와 셋째 형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왕자에게는 자녀가 없었기에, 다카히토 왕자가 낳은 자녀들은 할머니 사다코 대비(데이메이왕후)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학업[편집 | 원본 편집]

1952년 4월, 왕실학교인 가쿠슈인의 초등과에 입학했다. 패전 이전에 있었던 “왕족이 다니는 학교는 가쿠슈인”이라는 법은 폐지되었지만, 패전 이후로도 왕족들은 암묵적인 규칙에 따라 가쿠슈인에서 공부했다. 또한 토모히토 왕자가 가쿠슈인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왕족 학생들은 특별대우를 받았다. 토모히토 왕자를 위한 신발장이 따로 설치되기도 했고, 다른 학생들은 그를 깍듯이 ‘왕자님’이라고 불렀다. 간혹 그를 친근하게 ‘토모 짱(トモちゃん)’이라고 부른 학생은, 교사로부터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학창 시절 토모히토 왕자는 공부에 그다지 열의가 없었고, 학업성적도 무척 나빴다. 하지만 아버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의 성격과 자녀교육 방침은 강압적이지 않고 자유스러웠기 때문에, 생전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 강요하거나 학업성적에 대해 잔소리하지 않았다. 덕분에 부자(父子)는 공부 때문에 갈등하는 일이 없었다.

공부는 잘하지 못했고 열의도 없었지만, 체육에는 흥미와 소질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스키를 배우기 시작하여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스키 테스트 1급 자격을 취득했고, 소프트볼도 즐겨 했다. 또한 고등학생 시절에는 응원단에서 활동했는데, 3학년 때는 응원단장까지 맡아 활약했다. 한편 이때부터 그의 상징인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토모히토 왕자는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본인이 TV 방송에 출연하여 직접 밝힌 바에 의하면, 고등학교 1학년부터 담배를 피웠으며 중학생 때부터 을 마셨다고 한다. 또한 재일조선인 학생들과 자주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가쿠슈인 중등과(남중)와 고등과(남고)를 거쳐, 1964년 4월 가쿠슈인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만 20세 생일인 1966년 1월 5일부터 성년이 되어, 본격적으로 왕실의 공무에 참석하게 되었다. 동년 9월 15일에는 시부야구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오토바이를 치는 사고를 냈는데, 오토바이 운전자가 중상을 입었고 뒷좌석에 타고 있던 소년도 경상을 입었다. 어머니 유리코 비는 토모히토 왕자로부터 “다시는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그의 운전면허증을 도쿄도 공안위원회에 반납했다.

1968년 3월 가쿠슈인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다음 달인 4월에 영국 옥스퍼드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1970년 8월까지 공부했다. 영어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정식으로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어학당에서 3개월간 영어 공부를 했다. 유학 시절에도 토모히토 왕자는 공부보다 사람들과의 사교에 치중했다. 버킹엄궁전을 방문하여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그녀의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 공, 장남 찰스 왕세자(現 찰스 3세), 장녀(고명딸) 앤 엘리자베스 앨리스 루이즈 공주와도 접견했다. 스위스오스트리아를 방문하여 좋아하는 스키를 타기도 했다.

활동[편집 | 원본 편집]

1970년 8월, 토모히토 왕자는 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1972년까지는 홋카이도 삿포로시에 거주하며 삿포로 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사무국에서 근무했다. 1975년에는 오키나와 국제해양박람회 세계해양청소년대회 사무국에서 근무하였다.

장애인 복지와 스포츠 관련 분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활동했으며, 이 2가지 분야를 결합하여 장애인 스포츠 활성화에도 힘썼다. 또한 장애인 시설의 운영에도 관여하고, 강연과 저술 등의 활동도 했다. 또한 영국 유학을 계기로 일영(日英) 협회의 명예총재로 취임했으며, 영국뿐 아니라 여러 외국과의 친선 교류도 했다.

1975년에는 닛폰방송이라는 방송국의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인 <올 나이트 닛폰>의 진행자를 맡았는데, 일본 왕족으로서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외에도 자신의 소소한 신변잡기를 다룬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결혼과 가정[편집 | 원본 편집]

1980년에 아소 노부코와 결혼했다. 아소 가문은 일본의 정치가 가문이자 악질 전범기업 가문으로, 노부코의 첫째 오빠는 훗날 제92대 일본 총리를 지낸 아소 다로(麻生太郞)이다.

토모히토 왕자는 영국 유학 중에 노부코를 만났다. 당시 노부코도 영국 Roselyn House College에서 유학 중이었다. 토모히토 왕자는 1972년에 노부코에게 청혼했지만, 토모히토 왕자보다 9살이나 어렸던 노부코는 당시 고작 17세였기 때문에 1980년에야 결혼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결혼 후로도 토모히토 왕자는 새로운 궁호를 받아 분가(分家)하지 않았는데,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의 장남으로서 미카사노미야 가문을 계승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장(家長)인 다카히토 왕자가 살아있는 동안에 차기 가장인 토모히토 왕자는 ‘미카사노미야 와카노미야(若宮)’라고 불렸고, 다카히토 왕자가 사망하면 가장이 되어 ‘미카사노미야 토모히토’라고 불릴 예정이었으나, 정작 토모히토 왕자가 아버지 다카히토 왕자보다 먼저 사망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혼 이듬해인 1981년에 장녀 아키코 공주를, 1983년에 차녀 요코 공주를 낳았다. 그러나 토모히토 왕자와 노부코 비의 부부관계는 좋지 못했다. 성격 차이도 있고, 토모히토 왕자의 알코올 중독가정폭력 때문이라고도 한다. 두 사람은 왕족이라는 신분과 체면 때문에 차마 공식적으로 이혼하지는 못했지만, 오랫동안 따로 떨어져 살았다. 사실상 이혼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자녀[편집 | 원본 편집]

  • 차녀 요코 공주: 1983년 10월 25일생(40세). 가쿠슈인여자대학 일본문화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적십자사에서 일했다. 몸이 아픈 부모와 유학 중인 언니를 대신하여 공무를 수행했다. 특기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배운 검도이다. 대학 시절에는 가쿠슈인 초등과 검도부를 지도했고, 검도 관련 공무도 꾸준히 수행했다.

토모히토 왕자는 두 딸과 돈독했고, 딸들도 어머니와 외가를 싫어하고 아버지와 친가(왕실)를 좋아했다.

여러 가지 기행들[편집 | 원본 편집]

성인이 되고 나이를 먹은 후로도 토모히토 왕자의 기행은 계속되었다.

1982년에는 “왕족 신분에서 이탈하겠다”는 발언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왕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제약이 너무 많다는 것이 이유였다. 가쿠슈인에 다니던 학창 시절부터, 겉으로는 특혜를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일반인들처럼 일하지도 않으면서 세금으로 잘먹고 잘산다”며 곱지 않은 시선도 받았던 것도 한몫을 했던 듯하다. 그의 남동생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桂宮宜仁) 왕자도 학우들로부터 비슷한 공격을 받았고, 결혼하지 않고 일생동안 독신으로 살다가 죽었다.[1] 또한 사촌 형 아키히토 상왕의 딸 구로다 사야코와 손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도 가쿠슈인에서 ‘세금도둑’이라는 폭언과 괴롭힘을 당했다. 아무튼 토모히토 왕자의 ‘왕실 이탈 선언’은 주변의 만류로 겨우 무마되었다.

아키히토 일왕의 장남 나루히토 왕세자는 열렬히 사모했던 외교관 오와다 마사코에게 7년간 간절히 청혼한 끝에 어렵게 결혼했지만, 이후 몇 차례 임신했지만 번번이 유산하며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다. 결혼 8년 만인 2001년에야 겨우 출산에 성공했지만 딸(아이코 공주)이었다. 나루히토 왕세자의 남동생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에게도 딸만 2명, 토모히토 왕자에게도 딸만 2명, 토모히토 왕자의 막냇동생인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에게도 딸만 3명이었다.

이렇게 직계와 방계를 통틀어 남자아이라고는 단 1명도 없으니, 일본의 정계와 사회에서는 “법을 바꾸어 여왕을 허용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에 대해 토모히토 왕자는 “첩(후궁)을 두어서라도 아들을 낳아, 남성만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해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발언까지 하며 반대했다. 이후 2006년 후미히토 왕자가 늦둥이 셋째 히사히토 왕자를 낳으면서, 여왕 허용론은 잠잠해져 버렸다.

그 외에도 우익적인 면모도 많이 보였다. 전쟁범죄자인 큰아버지 쇼와(히로히토) 일왕을 존경한다고 말했고, 자위대 행사에도 참석했고, 야스쿠니 신사에도 참배했다. 토모히토 왕자가 사망한 이후로는, 큰딸 아키코 공주와 작은딸 요코 공주가 아버지의 우익적 행보를 이어가며 우익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병과 사망[편집 | 원본 편집]

45세가 되던 1991년 1월에 처음 식도암으로 진단되었고, 나중에는 후두암 진단도 받았다. 2012년 사망할 때까지 21년간 계속 병원을 들락거리며 치료와 수술을 받았다.

2012년 6월 6일에 사망했다. 향년 66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와 유리코 비 내외는 2002년에 막내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를 앞세운 데 이어, 2번째로 자녀를 먼저 보냈다. 왕실 가족들과 사이가 나빴던 아내 노부코 비는 남편의 장례와 제사에도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고, 큰딸 아키코 공주가 어머니를 대신하여 장례와 제사를 주관했다.

이후 미카사노미야 가문의 계승 문제[편집 | 원본 편집]

4년 후인 2016년에는, 독신이던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왕자도 사망했다. 이렇게 다카히토 왕자의 아들들이 모두 아들을 낳지 못하고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공주들이 시집가고 유리코 비와 두 며느리 노부코 비히사코 비가 사망하면 미카사노미야 가문은 문을 닫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토모히토 왕자의 큰딸이자 미카사노미야 가문의 장손녀인 아키코 공주는 남자가 없는 미카사노미야 가문에서 장손 노릇을 도맡아 하며 가장인 할머니 유리코 비를 보필하고 있다. 데릴사위도 가능한 일본의 민간과 달리 일본 왕실공주들은 결혼하면 무조건 출가외인(出嫁外人)이 되기 때문에, 아키코 공주는 “시집가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왕실에 남아서 미카사노미야 가문과 왕실을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여동생 요코 공주는 독신 선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언니와 마찬가지로 시집가지 않고 왕실에 남아있다. 하지만 일본 왕실의 법도가 바뀌지 않는 한, 두 공주가 사망하면 결국 미카사노미야 가문은 단절될 수밖에 없다.

각주

  1. 본래 궁호는 차남 이하의 왕족이 결혼으로 분가하여 가장이 되면 받는 것이지만, 요시히토 왕자는 예외적으로 결혼하지 않고도 궁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