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

도시노미야 아이코
敬宮愛子
Princessaiko.jpg
2024년 3월 20일, 가쿠슈인대학 졸업식에서
인물 정보
출생 2001년 12월 1일 (22세)
도쿄도 치요다구 궁내청병원
국적 일본
학력 가쿠슈인 유치원
가쿠슈인 초등과
가쿠슈인 여자중등과
가쿠슈인 여자고등과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일어일문학과
직업 왕족(공주)
종교 신토
신체 165cm, 55kg, A형
가족 할아버지 아키히토 상왕, 할머니 미치코 상왕비
외할아버지 오와다 히사시, 외할머니 오와다 유미코
아버지 나루히토 일왕, 어머니 마사코 왕비
작은아버지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 작은어머니 키코 비
고모 구로다 사야코
이모 이케다 레이코, 시부야 세츠코
사촌: 언니 코무로 마코, 카코 공주, 남동생 히사히토 왕자

일본의 왕족(공주). 나루히토 일왕과 마사코 왕비의 무남독녀이다. 오시루시는 오엽철쭉.

이름과 호칭[편집 | 원본 편집]

어칭호인 ‘도시노미야(敬宮)’와 이름인 ‘아이코(愛子)’는 중국 고전 <맹자(孟子)>의 “애인자 인항애지, 경인자 인항경지(愛人者人恒愛之、敬人者人恒敬之)”에서 각각 敬과 愛를 따와서 지은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사람을 공경하는 사람은 항상 사람들로부터 공경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일본 왕실의 법도에 따라 할아버지 아키히토 일왕이 이름을 하사하는 형식을 취했으나, 부모인 나루히토 왕세자와 마사코 왕세자비의 의중이 많이 반영되어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힘겨운 탄생[편집 | 원본 편집]

부모가 왕세자와 왕세자비이던 2001년 12월 1일에 태어났다. 나루히토 왕세자와 마사코 왕세자비는 1993년에 결혼했으나, 오랫동안 난임과 몇 차례의 유산을 겪은 끝에 어렵사리 아이코 공주를 낳았다.

일본 왕실에서는 남성만이 왕이 될 수 있는데, 아이코 공주의 작은아버지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가 태어난 1965년 이래로는 계속 공주들만 태어나고 있었기에[1], 일본은 나루히토 왕세자의 득남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왕세자 부부에게서는 좀처럼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고, 비난은 마사코 왕세자비에게만 쏟아졌다. 계속 외교관으로 일하겠다며 왕세자의 청혼을 7년이나 거절하다가 “왕세자비가 되어서도 해외순방, 왕실외교, 대외활동 등으로 국가에 공헌할 수 있다.”는 설득에 마침내 청혼을 받아들인 그녀였지만, 정작 그녀가 시집온 이후로 왕실에서는 ‘아들 출산’에 전념할 것만을 요구하며 그녀의 해외순방을 막았다.[2] 왕실과의 갈등, 왕실과 국민들의 비난, 거듭되는 난임과 유산 속에서 마사코 왕세자비는 지쳐갔고, 그로 인해 왕족으로서의 공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장기간 요양하게 되었고, 이는 갈등과 비난이 더욱 심화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2001년 초반에 마사코 왕세자비는 다시 임신했고, 마침내 동년 12월 1일 궁내청병원에서 무사히 아이코 공주를 낳았다.

여왕 허용론과 좌절[편집 | 원본 편집]

어렵사리 아이코 공주를 낳은 후로도 나루히토 왕세자 부부의 고난은 계속되었다. 아키히토 일왕과 미치코 왕비 내외는 손녀의 탄생을 기뻐하긴 했지만, 이내 마사코 왕세자비에게 ‘어서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아라.’라고 요구했다.

궁내청 장관 유아사 토시오(湯淺利夫)는 2003년의 기자회견에서 나루히토 왕세자 부부에 대해 “둘째를 어서 빨리 낳길 바랍니다.”라거나, 왕세자의 남동생 후미히토 왕자에 대해 “셋째를 낳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인 큰딸 마코 공주와 3학년인 작은딸 카코 공주와의 나이 차이를 생각하면, 가능한 한 빨리 셋째를 가져야 합니다.”라고 발언했다.

물론 궁내청 장관이 왕족들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과 소망을 기자회견에서 마음대로 떠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고 불가능하니, 당연히 아키히토 일왕 부부가 궁내청 장관의 입을 빌어 자신들의 소망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빨리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나루히토 왕세자의 둘째’와 ‘후미히토 왕자의 셋째’는, 당연히 ‘공주’가 아닌 ‘왕자’였다.

그러나 아이를, 그것도 아들만을 골라서 낳는 것은 인간이 자유자재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마사코 왕세자비는 오랜 난임과 반복된 유산으로 인하여 심신의 건강이 좋지 못했다. 아이코 공주의 탄생 역시 ‘자연임신이 아니라 인공수정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의료진은 인위적으로 아들을 택하여 임신할 것을 권하기도 했으나, 왕세자 부부는 아이의 성별에 대해 ‘하늘에 맡기겠다’며 마다했다고 한다.

따라서 ‘여왕 허용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만약 여자의 왕위 계승이 허용된다면,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가 아버지 나루히토 왕세자의 뒤를 잇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왕 허용론이 논의되고 있던 2006년 초반, 아이코 공주의 작은아버지 후미히토 왕자와 작은어머니 키코 비가 ‘셋째 임신’을 발표했다. 그리고 2006년 9월 6일 남자아이인 히사히토 왕자가 태어남으로써 여왕 허용론은 잠잠해져 버렸다. 남자의 왕위 계승만을 인정하는 현재 일본의 법에 따르면, 히사히토 왕자는 큰아버지 나루히토 왕세자와 아버지 후미히토 왕자에 이어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성장[편집 | 원본 편집]

유아기[편집 | 원본 편집]

당시로서는 늦게 결혼하여[3] 아이도 늦게 간신히 낳은 나루히토 왕세자와 달리, 그의 동생 후미히토 왕자는 형보다 3년이나 먼저 결혼하여 이듬해인 1991년에 큰딸 마코 공주를, 3년 후인 1994년에 작은딸 카코 공주를 낳았다. 후미히토 왕자 내외는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자주 아키히토 일왕 내외를 방문했고, 일왕 내외는 손녀들의 재롱을 보며 즐거워하곤 했다.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는 어려서부터 자주 언론에 노출되며 카메라에 익숙하여,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부터 곧잘 사람들 앞에서 인사도 잘하고, 손도 흔들어주고, 재롱도 잘 부렸다. 반면 이러한 사촌언니들과 달리 아이코 공주는 수줍음이 많고,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카메라를 피하기도 하여, 왕세자 일가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자폐아가 아니냐?!’는 악의적인 의혹도 받았다.

이에 아버지 나루히토 왕세자는 직접 3살배기 아이코 공주가 활발하게 뛰어노는 영상을 촬영해서 공개하여, 의혹을 불식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왔다.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보통의 일본인들은 ‘평일 대낮에도 아기와 놀아줄 수 있는 아버지’와 ‘뚜렷한 병명도 없이 몇 년이고 휴식할 수 있는 어머니’를 보면서 반감을 가졌고, 왕세자 일가에 대한 이미지가 더욱 나빠졌다.

유치원~초등학교 시절[편집 | 원본 편집]

2006년 4월 아이코 공주는 전통적 왕족학교인 가쿠슈인유치원에 입학하여 2년 후인 2008년 3월에 졸업, 동년 4월에는 같은 재단의 초등학교인 가쿠슈인 초등과에 진학했다. 아이코 공주는 무사히 1학년을 마쳤고, 순조롭게 학교에 적응하는 듯했다. 그런데 2~3학년 무렵, 그녀는 동급생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했다.[4] 짓궂은 남자아이들 몇몇이 그녀를 괴롭히며, 요양하고 있는 마사코 왕세자비에 대해 “너희 어머니는 세금도둑이야!”라는 모욕적인 발언까지 했다는 것이다.

일본 왕실궁내청가쿠슈인에서는 애써 별일 아닌 것처럼 축소하려는 듯했으나, 아이코 공주는 한동안 등교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힘들어했다. ‘아이코 공주를 사립 여학교로 전학시키자’는 방안도 제기되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고, 한참 학교를 쉬던 아이코 공주는 얼마 후부터 어머니 마사코 왕세자비와 함께 다시 가쿠슈인 초등과에 등하교하기 시작했다. 당시 마사코 왕세자비는 우울증과 적응장애 등으로 칩거하고 있었지만, 어린 딸이 학교에서 어려움을 겪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녀는 매일같이 딸을 직접 등하교시키고 교실에서 수업을 참관하는 등등, 각별하게 신경을 썼다.

참고로 아이코 공주가 겪은 이지메에 대해서는 ‘작은어머니 키코 비가 사주한 것’이라는 소문도 있다. 아이코 공주를 괴롭힌 남자아이들의 부모들과 키코 비가 친한 사이라는 것이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인해 아이코 공주는 차츰 나아져 학교에 적응했다. 특히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공부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여 화제가 되었다. 2014년 3월 가쿠슈인 초등과를 졸업하고, 4월에는 같은 재단의 가쿠슈인 여자중등과로 진학했다.

중고등학교 시절[편집 | 원본 편집]

중학생이 된 후로도 아이코 공주는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다. 중학교에는 가쿠슈인 초등과 졸업생들뿐 아니라 외부 초등학교에서 시험을 치러 입학한 우등생들도 많아, 아이코 공주는 뒤처지지 않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특히 국어(일본어) 과목을 잘했고, 한자 공부에 열의를 보였다. 다른 과목들보다 조금 약하다지만 수학 성적도 우수했다. 2017년에는 가쿠슈인 여자중등과를 졸업하고 가쿠슈인 여자고등과로 진학했다.

그러나 우수한 성적과는 별개로, 중고등학교 시절 아이코 공주는 몸이 좋지 않다며 지각ㆍ조퇴ㆍ결석을 반복하여 종종 구설수에 올랐다. 그녀의 결석은 며칠을 넘어 몇 주에서 1달 가까이 되는 장기간일 때도 있었다. 몇 달 사이에 몰라보게 살이 빠져 깡마른 모습으로 변했다가, 다시 쪘다가, 또 다시 빠지는 모습이 반복되어 세간을 충격에 빠뜨리기도 했는데,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폭식증과 거식증을 오가는 섭식장애’로 추론했다.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었다. 왕실과의 갈등으로 인한 심신의 질환으로 계속 집에서 요양하고 있는 어머니 마사코 왕세자비의 무력한 모습, 왕세자 일가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인 시선과 비난, 사촌언니 마코 공주카코 공주와의 비교, 사촌동생 히사히토 왕자와의 비교 및 ‘누가 장래 왕위 계승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갑론을박, 그로 인한 아이코 공주에 대한 과도한 시선 집중에서 느끼는 부담감 등이다.

하지만 초등학생 시절과 마찬가지로, 중고등학교에서도 아이코 공주는 차츰 적응하여 나름대로 학교생활을 해나갔다. 출석 상황이 좋지 않은 가운데서도 공부는 열심히 하여, 가쿠슈인대학이나 가쿠슈인여자대학 외의 외부 명문대학 진학 가능성도 거론되었고, 특히 일본 최고의 명문인 도쿄대학 합격도 가능하다는 전망까지 있었다. 한편 아이코 공주가 학업성적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작은어머니 키코 비는 늦둥이 외아들 히사히토 왕자의 공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한다. 키코 비도 아들을 도쿄대학에 보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소문이다.

아이코 공주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2019년 5월, 할아버지 아키히토 일왕이 이례적인 ‘생전퇴임’을 하고 아버지 나루히토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했다. 이로써 아이코 공주는 ‘일왕의 무남독녀’가 되었다.

대학 진학과 성년[편집 | 원본 편집]

2021년 12월 1일, 성년식을 치르는 아이코 공주

2020년 3월 아이코 공주는 가쿠슈인 여자고등과를 졸업했다.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졸업식도 최소화되어 나루히토 일왕과 마사코 왕비는 참석하지 않았고, 아이코 공주는 마스크를 쓰고서 혼자서 가쿠슈인 여자고등과에 마지막 등하교를 했다.

다음 달인 4월에는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일어일문학과[5]에 입학했다. 아이코 공주가 외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가쿠슈인대학에 진학한 배경에 대해서는 ‘유일한 직계 왕손’이라는 특성, 그로 인한 경호 문제, 그리고 외부 대학(국제기독교대학)에서 만난 남자친구 코무로 케이(小室圭)와의 결혼 문제 때문에 2017년 이래로 줄곧 말썽을 빚고 있었던 사촌언니 마코 공주의 문제 등이 거론되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하여 정상적인 등교가 불가능하여, 아이코 공주는 주로 궁에서 온라인수업을 들으며 공부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제법 잠잠해진 4학년부터는 직접 등교하며 캠퍼스 생활을 했다. 전공인 일본문학뿐 아니라, 관심 분야인 복지 관련 수업도 수강하며 다양한 공부를 했다.

2021년 12월 1일, 아이코 공주는 성년(만 20세)을 맞이했다. 이때 ‘코로나19로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국민들을 배려한다’는 이유로 티아라(왕관)를 새로 맞춤제작하지 않고 고모 구로다 사야코에게서 빌려 사용하여, 세간으로부터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일본 왕실공주들은 하얀 드레스 차림에 티아라를 쓰고서 성년식을 치르는데, 거액의 국비로 만들어지는 이 티아라는 공주가 왕실 행사를 치를 때마다 착용하며, 시집가서 평민이 되면 왕실에 반환해야 한다. 다만 1989년 사야코의 성년식 때는 부모인 아키히토 당시 일왕 내외가 사비로 티아라를 만들어주었고, 덕분에 사야코는 2005년 시집갈 때 티아라를 가지고 갈 수 있었다. 아이코 공주는 고모에게서 빌린 티아라를 자신의 머리 크기에 맞게 조절하여 착용했고, 아이코 공주의 티아라는 나중에 (경제가 회복되면) 제작할 계획이라고 한다.

대학 졸업[편집 | 원본 편집]

2024년 3월 20일, 가쿠슈인대학을 졸업했다. 아이코 공주는 기모노 차림으로 졸업식에 참석했는데, 상의는 연분홍색 후리소데(振袖)[6], 하의는 진남색 하카마(袴)[7]였다. 그녀는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와 질문에 밝은 미소로 “사회인으로서의 자각과 책임을 가지고,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공무와 일의 양립에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밝혔다. 4월부터 어머니 마사코 왕비가 명예총재로 재임하고 있는 일본적십자사에서 비상근 직원으로 근무하며, 왕족으로서의 공무도 병행한다.

여왕 허용론의 재등장?[편집 | 원본 편집]

현재 일본의 법에 따르면, 여자인 아이코 공주는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 그녀의 아버지 나루히토 일왕의 뒤를 잇는 사람은 작은아버지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이며, 후미히토 왕자의 뒤를 잇는 사람은 그의 막내(셋째)이자 외아들인 히사히토 왕자이다. 2006년 히사히토 왕자가 태어나면서부터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는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키코 비는 히사히토 왕자를 낳기 전부터 (마사코 왕세자비와 대조적으로) 시부모의 비위를 잘 맞추고 자주 왕래하며 친분을 쌓았고, 공무도 열심히 하고, 무엇보다 ‘아들’을 낳아 칭송을 받았다.

후미히토 왕자 내외는 히사히토 왕자를 낳은 후부터 더욱 욕심을 드러내 보이며 왕세자 내외와 대립각을 세웠다. 후미히토 왕자는 ‘일왕 정년제’를 주장했다. 겉으로는 ‘고령의 노인이 국왕의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힘들어서’라는 것이 이유였지만, 사실은 왕위에 앉고 싶은 야심 때문인 것이다. 키코 비는 형님 마사코 왕세자비와 조카 아이코 공주에 대해 은근히 조롱하는 발언도 했다. 우익 세력과 궁내청도 후미히토 왕자의 편이었다. ‘대를 이을 아들도 없고, 아프다며 요양만 하고 있는 왕세자비가 장래 왕비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니, 나루히토 왕세자는 퇴위하라’며 공격했다. 2013년에는 야마오리 데쓰오(山折哲雄)라는 원로 종교학자가 월간지 <신초(新潮)> 3월호에 왕세자의 퇴위를 권유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는 차츰 인심과 신망을 잃기 시작했다. 인기가 높아지면서 그들은 교만해졌고, 특히 키코 비가 시종들에게 혹독하게 대한다는 일명 ‘갑질’ 논란이 많았다. 또한 마코 공주가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남자인 코무로 케이와의 결혼을 고집하고, 아키시노노미야 부부가 코무로에게 부당한 특혜를 베풀고 있다는 정황들도 있어서,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에 대한 이미지는 더욱 나빠졌다. 후미히토 왕자가 학창시절 공부를 못했던 것과 그의 두 딸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가 공부를 못한다는 것은 유명했지만, 두 공주의 대학입시 부정 의혹에 이어 히사히토 왕자도 유치원과 학교에 부정입학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그의 자질에 대해서도 좋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다.

그러다가 2019년, 아키히토 일왕은 이례적으로 ‘생전퇴위’를 하며 큰아들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후미히토 왕자는 그동안 왕위에 욕심을 보이며 줄기차게 형을 공격해왔지만, 결국 장남이며 왕세자인 형이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면서 ‘역시 후미히토 왕자와 히사히토 왕자는 장래 일왕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과 ‘아이코 공주가 여왕으로 즉위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들도 등장하고 있다. 실제로 예전에는 일본에도 많은 여왕들이 있었다.

문제는 아이코 공주의 후사이다. 왕자와 결혼한 평민 여성은 남편을 따라 왕족이 되고, 자녀들도 왕족이 되며, 아들은 왕위 계승권을 갖는다. 하지만 평민 남성과 결혼한 공주는 왕족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되며, 자녀들도 평민이 되며, 아들이건 딸이건 왕위 계승권은 일절 없다. 예전 여왕들의 후사들 또한, 모두들 아버지로부터 왕족 혈통을 물려받은 인물들이었다. 아이코 공주가 갓 태어났을 때, 아키히토 일왕의 셋째 숙모인 키쿠코 비가 “여자의 왕위 계승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옛날에도 여왕들이 많았으니 이상할 것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반대파들은 “키쿠코 비는 ‘(아버지로부터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여자 일왕’을 찬성한 것이지, ‘(어머니로부터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여계(女系) 일왕’을 찬성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석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고수했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왕족의 범위도 넓었고 화족(귀족)들도 있었기에 다들 끼리끼리 결혼하곤 했다. 하지만 1947년의 신적강하로 방계 왕족들과 화족들이 대거 평민으로 강등되어 왕실의 규모가 대폭 줄어들었고, 오랫동안 공주들만 줄줄이 태어났기에 왕실 내에서 근친혼을 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아이코 공주와 히사히토 왕자를 결혼시키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사촌 결혼이 법적으로 가능하다지만 현실에서 흔한 일은 아니며, 나루히토 일왕 내외와 후미히토 왕자 내외의 사이도 썩 화기애애하지 못하니, 가능성은 별로 없는 이야기이다. ‘옛 방계 왕족 가문의 아들들 중에서 신랑감을 물색하여 아이코 공주와 결혼시키자’는 방안이 좀 더 현실적이다. 이렇게 하면 ‘아버지로부터 왕족의 혈통을 물려받은 자’라는 조건을 만족하는 아이가 태어나니, 공주의 자녀라 해도 왕위 계승권을 가질 수 있다는 논리이다. 아키히토 상왕의 큰누나인 히가시쿠니 시게코의 후손들이 아이코 공주의 신랑감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각주

  1. 1969년 4월 18일 구로다 사야코(55세), 1981년 12월 20일 아키코 공주(42세), 1983년 10월 25일 요코 공주(40세), 1986년 3월 8일 쓰구코 공주(38세), 1988년 7월 22일센게 노리코(35세), 1990년 9월 15일 모리야 아야코(33세), 1991년 10월 23일 코무로 마코(32세), 1994년 12월 29일 카코 공주(29세)
  2. 해외에서 왕세자 부부를 초청했을 때도, 차남 후미히토 왕자 부부나 막내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를 대신 보냈다.
  3. 1993년 6월 결혼 당시 나루히토 왕세자는 33세(1960년 2월 23일생), 마사코 왕세자비는 29세(1963년 12월 9일생)였는데, 동시대 일본인들의 평균 결혼 연령은 20대 중반이었다.
  4. 고모 구로다 사야코가쿠슈인 초등과 시절 비슷한 경험을 했다.
  5. 사야코가 졸업한 학과이기도 하다.
  6. 미혼 여성의 예복
  7. 전통 일본식 바지. 통이 무척 넓어서 치마처럼 보인다. 남녀 모두 입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