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코 공주

아키코
彬子
Mikasaakiko.jpg
인물 정보
출생 1981년 12월 20일 (42세)
일본 도쿄
국적 일본
학력 쇼토유치원
가쿠슈인 유치원
가쿠슈인 초등과
가쿠슈인 여자중등과
가쿠슈인 여자고등과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사학과
옥스퍼드대학교 대학원 미술사(석사, 박사)
직업 왕족(공주)
종교 신토
가족 증조할아버지 다이쇼 일왕, 증조할머니 데이메이왕후(사다코)
할아버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 할머니 유리코 비
아버지 토모히토 왕자, 어머니 노부코 비
숙부 카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왕자,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
큰고모 고노에 야스코, 작은고모 센 마사코
외삼촌 아소 다로
여동생 요코 공주
사촌동생 쓰구코 공주, 센게 노리코, 모리야 아야코

일본의 왕족(공주). 나루히토 일왕의 6촌 여동생. 오시루시는 눈(雪)이다.

가계[편집 | 원본 편집]

증조할아버지는 다이쇼 일왕, 할아버지는 다이쇼 일왕의 4남이자 쇼와(히로히토) 일왕의 막냇동생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 아버지는 다카히토 일왕의 장남인 토모히토 왕자이다.

다카히토 왕자는 1935년 성년(만 20세)이 되면서 분가(分家)하여 방계 미카사노미야 가문을 창설했다. 토모히토 왕자는 장남이기에 분가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미카사노미야 가문의 가장(家長)이 될 예정이었지만,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어머니 노부코 비는 일본 총리를 지낸 우익 망언 정치인 아소 다로(麻生太郞)의 여동생으로, 아소 가문은 일제강점기에 많은 한국인들을 강제로 징용하여 규슈의 탄광에서 가혹하게 혹사시켜 많은 돈을 벌어들인 악질 전범기업 가문이다.

외할머니 아소 가즈코(麻生和子)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前 일본 총리의 딸이며, 화족(귀족) 출신 정치인인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顕) 백작의 외손녀이다. 본래 노부아키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차남인데, 마키노 가문에 양자로 입양되어서 ‘마키노 노부아키’가 되었다.

노부아키의 며느리 마키노 스미코(牧野純子)는 이방자 여사의 외가인 화족 나베시마(鍋島) 가문의 딸이며, 1960년대에는 고준왕후(나가코)에 의해 왕세자궁 시녀장으로 임명되어 일하기도 했다. 나가코 왕비뿐 아니라 당시 왕족들과 화족들은 평민 출신 미치코 왕세자비를 몹시 미워하여 갖가지 기상천외한 집단 괴롭힘과 따돌림을 일삼았는데, 그랬던 나가코 왕비가 손수 임명한 시녀장이었으니 스미코 역시 마찬가지의 인물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스미코의 딸 하야시 데이코(林貞子)는 유아교육 전문가로, 1947년 도쿄도 시부야구쇼토유치원을 설립했다. 쇼토유치원은 상류층 집안의 자녀들이 많이 다니는 고급 사립 유치원이자, 원생들을 명문 사립초등학교로 많이 진학시키는 명문 유치원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2008년부터 신입생 모집을 중단했고, 2010년에는 최종 폐원되었다.

학업[편집 | 원본 편집]

아키코 공주와 여동생 요코 공주는 쇼토유치원에 입학했다. 두 공주의 어머니 노부코 비도 쇼토유치원을 졸업했고, 결혼 전에는 쇼토유치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공주는 쇼토유치원에 다니다가 왕실학교인 가쿠슈인의 유치원으로 옮겼고, 이후 가쿠슈인 초등과ㆍ여자중등과ㆍ여자고등과를 졸업했다.

아키코 공주는 2000년 4월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고, 2004년 3월 대학을 졸업한 후로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나 미술사를 공부했다. “너는 세금으로 공부하는 것이니까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아버지 토모히토 왕자의 충고대로 아키코 공주는 열심히 공부했고, 석사학위에 이어 일본 왕실의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다. 생전에 토모히토 왕자는 “왕실의 공주들 중에서 아키코가 제일 똑똑하다”며 큰딸을 자랑스러워했다.

귀국 후에는 전공을 살려 고쿠가쿠인(國學院) 대학[1] 및 여러 대학에 준교수 및 객원교수로 재직했고, 일본 전통문화 관련 단체에서도 적극 활동하고 있다. 또한 아버지 토모히토 왕자가 생전에 맡았던 일영(日英) 협회 명예총재직도 물려받아 수행하고 있다.

가족관계[편집 | 원본 편집]

할아버지, 아버지, 숙부들이 모두 사망한 후로 남자가 없는 미카사노미야 가문에서, 맏손녀인 아키코 공주는 할머니 유리코 비를 보필하며 장손 역할을 맡고 있다. 장례식에서 상주(喪主) 역할도 맡았고, 제사도 아키코 공주가 주관했다. 반면 미카사노미야 가문의 맏며느리인 어머니 노부코 비는 이러한 행사에도 좀처럼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는데, 왕실 가족들과 사이가 나쁘기 때문이다.

노부코 비는 토모히토 왕자와의 부부관계도 별로 좋지 못하여 별거했고[2], 딸들과의 만남과 대화도 거의 없을 정도이다. 어린 시절 아키코 공주와 요코 공주는 어머니로부터 조부모에 대한 험담을 들었는데, 공주들이 자라서 직접 보니 어머니가 옛날에 했던 이야기들은 사실이 아니었기에 어머니와 사이가 나빠졌다고도 한다. 노부코 비는 몸이 아플 때도 왕궁이 아니라 친정 형제들의 거처에서 요양했고, 아키코 공주와 요코 공주는 어머니와 다투다가 외삼촌 아소 다로에게 연락하여 “우리 어머니를 좀 (외가로) 데려가라”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어머니와의 불화 및 이와 대비되는 친가에 대한 애착은, 이후 서술된 아키코 공주의 독신주의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독신주의[편집 | 원본 편집]

1947년 신적강하 이후로 일본 왕실의 범위는 대폭 줄어들었다. 그리고 1965년 아키히토 당시 왕세자가 차남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왕자를 낳은 후부터 2006년 후미히토 왕자가 히사히토 왕자를 낳을 때까지, 왕실에서는 41년간 공주들만 줄줄이 태어났다. 게다가 (일본의 민간과 달리) 왕실에서는 데릴사위ㆍ처가 계승ㆍ모계 계승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공주들은 (평생 독신으로 살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결혼하여 평민이 될 수밖에 없다.

다카히토 왕자는 3명의 아들을 낳았으나, 3명 모두 아들을 낳지 못하고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차남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桂宮宜仁) 왕자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죽었다. 3남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는 딸만 3명을 두었는데, 차녀 노리코 공주와 3녀 아야코 공주는 각각 2014년과 2018년에 결혼하여 왕족 신분을 상실했다. 이대로라면 공주들이 모두 시집가고 미카사노미야 가문과 다카마도노미야 가문 모두 문을 닫게 되며, 왕실의 유일한 남자아이인 히사히토 왕자가 결혼하여 자녀를 낳아 장성시킬 때까지 공무를 수행할 왕족이 거의 없게 된다.

아키코 공주도 과거에 남자친구를 사귀었으나 결혼에까지 이르지는 못했고, 연이어 집안의 장례를 치른 후로 그녀는 ‘독신선언’을 했다. 시집가지 않고 평생 공주로서 왕실에 남아서 미카사노미야 가문을 지키고 왕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것이다. 비록 아키코 공주가 사망한 이후로는 절손되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일단 그녀가 생존해있는 동안에는 미카사노미야 가문이 존속될 수 있다.

한편 여동생 요코 공주는 언니처럼 독신선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아직 시집가지 않고 언니와 함께 왕실에 남아있다.

우익[편집 | 원본 편집]

할아버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와 정반대로, 아버지 토모히토 왕자는 우익 성향을 띤 인물이었다. 노부코 비는 남편 토모히토 왕자와 사이가 나빴지만, 그녀의 친정 아소 가문 역시 우익이라는 점에서는 토모히토 왕자와 일치했다.

아키코 공주와 요코 공주 역시 우익적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가 생전에 했던 것처럼 매년 자위대 관련 행사에 참석하여 축사(祝辭)도 하고, 야스쿠니 신사에도 참배한다. 때문에 우익들로부터 두 공주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각주

  1. 사촌동생 센게 노리코의 남편인 센게 구니마로(千家國麿)가 고쿠가쿠인대학 신토학과 출신이다.
  2. 왕족이라는 체면과 세간의 이목 때문에 이혼까지는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