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高円宮憲仁
인물 정보
다른이름 미카사노미야 노리히토(결혼 전)
출생 1954년 12월 29일[1]
일본 도쿄 시나가와구 미카사노미야 저택
사망 2002년 11월 21일(향년 47세)
도쿄 신주쿠구 게이오기주쿠대학병원
국적 일본
학력 가쿠슈인 초등과
가쿠슈인 중등과
가쿠슈인 고등과
가쿠슈인대학 법학부
캐나다 퀸스대학교 대학원
직업 왕족(왕자)
종교 신토
배우자 히사코 비
가족 할아버지 다이쇼 일왕, 할머니 데이메이왕후(사다코)
큰아버지 쇼와 일왕,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왕자,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왕자
큰어머니 고준왕후, 세츠코 비, 키쿠코 비
아버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 어머니 유리코 비
큰누나 고노에 야스코, 큰형 토모히토 왕자, 작은형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왕자, 작은누나 센 마사코
자녀: 장녀 쓰구코 공주, 차녀 센게 노리코, 3녀 모리야 아야코
조카: 아키코 공주, 요코 공주
5촌: 나루히토 일왕,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 구로다 사야코
6촌: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 코무로 마코, 카코 공주, 히사히토 왕자
활동기간 1984년 결혼으로 미카사노미야 가문에서 분가, 다카마도노미야 가문 창설

일본의 왕족(왕자). 나루히토 일왕의 5촌 당숙. 오시루시는 호랑가시나무이다.

출생과 가계[편집 | 원본 편집]

1954년 12월 29일, 다이쇼 일왕의 4남이자 히로히토(쇼와) 당시 일왕의 막내동생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 유리코 비는 귀족 다카기(高木) 가문의 딸이다. 형제로는 큰누나 고노에 야스코(近衛寗子), 큰형 토모히토 왕자, 작은형 카츠라노미야 요시히토(桂宮宜仁) 왕자, 작은누나 센 마사코(千容子)가 있다.

학업과 사회생활[편집 | 원본 편집]

여느 일본 왕족들처럼 왕실학교인 가쿠슈인 초등과, 중등과(남중), 고등과(남고)를 거쳐 1978년 3월 가쿠슈인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캐나다 퀸스대학교에 유학했고, 귀국 후에는 국제교류기금에 입사하여 직장생활도 했다. 이때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스즈키 무네오(鈴木宗男)로부터 항의전화를 받았는데, 노리히토 왕자는 고성으로 퍼부어대는 거친 항의를 묵묵히 다 들어주었다고 한다. 나중에야 자신의 전화를 받았던 사람이 왕자라는 사실을 알고, 스즈키는 무척 당황했다고.

스포츠, 사진, 예술 등의 분야에 관심과 조예가 깊어, 관련 단체들을 많이 후원했다. 또한 일본축구협회와 일본하키협회의 명예총재도 맡았다. 노리히토 왕자가 사망한 이후로는 아내 히사코 비가 명예총재직을 계승했다.

결혼[편집 | 원본 편집]

1984년 4월, 주일캐나다대사관에서 열린 연회에 참가했다가 돗토리 히사코를 만났다. 그녀는 실업가 돗토리 시게지로(鳥取滋治郞)의 딸로, 노리히토 왕자보다 1살 연상인 1953년생이었다. 도쿄에 있는 가톨릭계 명문 여학교인 세이신여학원 초등과와 중등과를 졸업한 이후 영국으로 이민하여 케임브리지대학교를 졸업한 국제파이기도 했다.

만난 지 겨우 1달 만에 노리히토 왕자는 “Will you marry me?”라며 영어로 청혼했고, 히사코도 받아들여, 두 사람은 1984년 12월에 결혼했다. 큰형 토모히토 왕자는 장남이기에 결혼해서도 분가(分家)하지 않았지만, 노리히토 왕자는 장남이 아니기에 결혼과 동시에 분가하게 되었다. 큰아버지 히로히토 일왕은 가장(家長)이 된 조카 노리히토 왕자에게 ‘다카마도노미야(高円宮)’라는 궁호를 하사했고, 이로써 방계 왕족 다카마도노미야 가문이 창설되었다.

자녀[편집 | 원본 편집]

아내 히사코 비와의 사이에서 딸 3명을 낳았다. 공주들은 모두 할머니 유리코 비가 명예총재를 맡고 있는 사회복지재단에 소속된 아이이쿠병원에서 태어났다. 일본 왕실의 법도에 따라 공주들은 왕위 계승권이 없으며, (데릴사위도 가능한 민간과 달리) 결혼하면 남편의 신분을 따라 평민이 된다. 따라서 노리히토 왕자와 히사코 비는 딸들이 언젠가는 평민 가정주부가 될 것을 염두에 두고 교육했다고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스스로 시장을 보는 등등)

  • 장녀 쓰구코 공주: 1986년 3월 8일 (38세) 출생. 가쿠슈인여자대학을 중퇴한 후 영국 에든버러대학교로 유학을 떠났으나, 그 역시 중단하고 귀국하여 2008년 9월 와세다대학 국제교양학부에 입학, 2013년 3월 졸업했다. 이후 왕족으로서의 공무를 수행하는 한편, 일본유니세프에서도 일하고 있다.
  • 차녀 센게 노리코: 1988년 7월 22일 (35세) 출생.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2014년 시마네현의 유서 깊은 신사의 제관(祭官)인 센게 구니마로(千家國麿)와 결혼, 왕족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되었다.
  • 3녀 모리야 아야코: 1990년 9월 15일 (33세) 출생. 조사이(城西) 국제대학 복지종합학부와 동(同) 대학원을 졸업했다. 2018년 모리야 케이(守谷慧)와 결혼하여 왕족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되었으며, 아이이쿠병원에서 2019년 장남 모리야 조(守谷穣)를, 2022년 차남을 낳았다.

나루히토 왕세자와의 친분[편집 | 원본 편집]

사촌형 아키히토 일왕의 장남인 나루히토 왕세자와 친했다. 나루히토 왕세자는 1960년 2월 23일생으로 노리히토 왕자와 나이 차이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5촌 당숙과 조카’라기보다 마치 ‘형과 동생’ 같은 사이였다. 나루히토 왕세자가 한창 외교관 오와다 마사코를 사모하며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쓰던 시절, 노리히토 왕자는 자신의 집에서 행사를 열고 나루히토 왕세자와 마사코를 초청하여, 나루히토 왕세자가 마사코에게 접근하여 청혼할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노리히토 왕자의 도움도 한 몫을 하여 나루히토 왕세자는 1993년 마사코와 결혼했지만, 다음 과제가 남아있었다. 왕실의 종부(宗婦)인 마사코 왕세자비에게 주어진 최우선 과제는 ‘득남’이었고, 모두들 그녀가 하루빨리 아들을 낳기만을 고대했다.

형 나루히토 왕세자보다 3년 먼저 가쿠슈인대학 후배인 가와시마 키코와 결혼한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는 이듬해에 장녀 마코 공주까지 낳았고, 형이 결혼한 이듬해인 1994년에는 차녀 카코 공주까지 낳았다. 히사코 비는 둘째를 임신한 키코 비에게 “형님이 아직 아이를 낳지 않았는데 작은며느리가 자꾸 임신하는 것은, 왕실의 위계질서에 어긋난다”며 지적하기도 했다. 왕세자 부부와 친했던 노리히토 왕자 내외로서는, 왕세자 부부를 곤란하게 만드는 후미히토 왕자 부부를 지적하고 견제하려 했던 것이다.

한국 방문[편집 | 원본 편집]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아내 히사코 비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부부는 19개의 축구 경기를 관람했고, 이외에도 다양한 활동들을 했다. 경상북도 경주시를 방문하여 신라의 문화유산들을 감상했고, 서울 남대문시장부산 자갈치시장도 둘러보았다. 일본 방계 왕족 출신인 이방자 여사가 생전에 설립하고 운영했던 특수학교와 장애인시설도 방문했다.

노리히토 왕자와 히사코 비한국에서 사진도 많이 촬영했고 기행문도 남겼는데, 이 기록들을 신문에 연재하고 으로도 출판했다. 도중에 노리히토 왕자가 사망하여, 마무리는 히사코 비가 했다. 책 제목은 <다카마도노미야 전하가 본 한국>이다.

사망[편집 | 원본 편집]

2002년 11월 21일, 주일캐나다대사관에서 스쿼시를 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다. 사인은 심근경색에 의한 심장마비였다. 평소 활달하고 건강하던 사람이 아무런 징후도 없이 세상을 떠나, 주변에서는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누군가 그를 죽인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도 있었다.

장례식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장녀 쓰구코 공주, 중학생이었던 차녀 노리코 공주, 초등학생이었던 3녀 아야코 공주가쿠슈인 교복을 입고 참석했다. 이때 쓰구코 공주의 머리카락이 연한 갈색으로 염색되어 있어 비판받기도 했는데, 히사코 비는 “평소의 모습 그대로 아버지와 작별인사를 나누게 하고 싶어서”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앞으로 장녀 쓰구코 공주까지 시집을 가고, 아내 히사코 비도 사망하면, 다카마도노미야 가문은 절손(絶孫)되어 문을 닫게 된다. 노리히토 왕자의 형들에게도 아들이 없고, 일본 왕실에 남자아이라고는 히사히토 왕자밖에 없으며, (민간과 달리) 사위와 외손자의 계승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각주

  1. 카코 공주와 생일이 같다. 카코 공주는 1994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