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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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 기원전 57년 ~ 935년)

1 개요[편집]

고구려, 백제와 함께 삼국 시대의 삼국 중 하나로, 현재의 한반도의 동남부 및 한반도의 대부분대륙삼국설을 992년간 지배하였던 국가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존속했던 왕조들 중 하나에 속한다.

국호인 ‘신라(新羅)’는 ‘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서 사방을 망라한다’라는 의미로 지증왕 때에 정해졌다. '신라'라는 명칭 이전에는 서라벌, 계림 등의 명칭을 혼용해서 사용하였기에 하나로 정한 것이다. 경주 지역에서 기원전 57년 경에 건국되었으며,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국가의 틀을 세우는 데는 가장 늦었다. 6세기 경 법흥왕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백성의 단결을 꾀하였으며, 진흥왕 대에 이르러 첫 번째 전성기를 맞아 7세기경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고, 589년에 중국을 통일한 수(隨)와 그 뒤의 당(唐)과 동맹(나당 연합)을 맺어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으며, 또한 한반도를 지배하려던 야욕을 드러낸 당나라를 나당 전쟁을 통해 몰아내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고도의 중앙 집권 체계를 확립하였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 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득난세력(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나, 골품제는 유지되었고 진골귀족의 고위직 독점은 여전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섬세하고 화려한 불교 유적과 유물들이 건축 · 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 왕과 귀족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내부 분열이 이는 와중에 지방에서 자리잡고 있던 호족의 세력이 성장하여, 900년 견훤후백제를, 901년 궁예태봉을 세움과 함께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고려와 후백제의 공세에 국가의 존국이 위태로워 신라 경순왕은 935년 고려왕건에게 항복하여 56대 992년 만에 멸망했다.

2 역사[편집]

추가바람

3 역대 군주[편집]

4 신라의 심국통일 옹호[편집]

사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열띤 토론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에 대한 우호적인 입장에서는 삼국통일의 당위성을 내세운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함으로 인해, 한국계 국가의 명맥이 이어져왔다는 것이다.뭐래는 거야 중국은 위진남북조시대를 이어가다가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뭉쳐졌다. 물론 40년을 못 가고 망한 의 침입은 막을 수 있었지만, 중국이 통일되어 한반도가 위협을 받았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삼국통일은 필요하다는 것인데, 사실 당시 제일 잘 나가는 나라가 신라였던 것은 사실이고,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시빌 워를 펼쳤고, 백제는 국력이 기울어갔다. 그런 와중에 어떻게 고구려가 통일을 할 수 있었겠냐는 것이다. 또한 삼국통일을 통해 민족이 화합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후 한반도는 단일왕조를 꾸준히 이어갔다는 것이다.하지만 여기서 후삼국이 출동한다면 어떨까?물론 당나라와의 연합으로 자주성이 깨지고 영토가 줄었지만, 당과의 연합은 고구려, 백제, 왜 등과의 화친 제안이 실패한 최후의 수단이었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신라가 이후 (전)고구려와 (전)백제 지역에 힘을 실어 균형있게 국가 운영을 함으로써 통일신라가 안정되었다고 주장한다.

5 신라의 삼국통일 비판[편집]

물론 삼국통일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일단 삼국통일이라는 용어 자체가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용어라는 설이 존재하고, 신채호 같은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김춘추등의 통일의 중심이 되었던 인물들을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당에 의해 우리 민족의 자주성이 떨어지고, 한민족의 활동 범위가 줄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게다가 당시 7세기에는 전쟁이 1년에 15회 꼴로 났기 때문에 수많은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피해를 보아야 했다. 또한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도 않았다. 발해와 신라 사이에 쌓았던 3백리장성이 그 증거이다. 따라서 신라의 삼국통일은 당나라의 이이제이 정책이라고 삼국통일 비판 세력들은 주장하고 있다.

6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