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츠코 비

세츠코
勢津子
인물 정보
다른이름 마츠다이라 세츠코(결혼 전)
출생 1909년 9월 9일
영국 런던
사망 1995년 8월 25일(향년 85세)
일본 도쿄
국적 일본
학력 미국 Sidwell Friends School
여자가쿠슈인
직업 왕족(왕자비)
종교 신토
배우자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왕자
가족 할아버지 마츠다이라 가타모리
외할아버지 나베시마 나오히로, 외할머니 히로하시 나가코
아버지 마츠다이라 츠네오, 어머니 노부코
시아버지 다이쇼 일왕, 시어머니 데이메이왕후(사다코)
이종사촌 언니 이방자
아주버니 쇼와(히로히토) 일왕, 형님 고준왕후(나가코)
시동생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왕자,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
아랫동서 키쿠코 비, 유리코 비
시조카 히가시쿠니 시게코, 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 다카츠카사 가즈코, 이케다 아츠코, 아키히토 상왕,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왕자, 시마즈 다카코, 고노에 야스코, 토모히토 왕자,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왕자, 센 마사코,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
활동기간 1928년 왕자비 책봉

일본의 왕족. 쇼와(히로히토) 일왕의 동생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왕자의 아내이며, 오시루시국화이다.

친정[편집 | 원본 편집]

할아버지 마츠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는 아이즈번(会津藩)[1]의 제9대 번주이다. 아이즈번은 메이지유신에 반대하여 일본 정부와 대립하여 전쟁까지 치렀던 지역이었기에, 오랫동안 일본 왕실 및 정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 마츠다이라 츠네오(松平恆雄)[2]와 외할아버지 나베시마 나오히로(鍋島直大)는 외교관이다. 어머니 노부코(信子)의 언니 이츠코(伊都子)는 나오히로의 부임지였던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기에 ‘이탈리아(伊)의 수도(都)에서 태어난 아이(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이츠코의 큰딸 마사코(方子)는 훗날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李垠)과 결혼한다(이방자).

출생과 성장[편집 | 원본 편집]

1909년 9월 9일, 아버지 츠네오의 부임지였던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형제로는 오빠 이치로(一郞), 여동생 도쿠가와 마사코(德川正子), 남동생 지로(二郞)가 있었으나, 지로는 요절했다.

이후 세츠코는 중국 베이징톈진을 거쳐, 미국 워싱턴 DC로 이주하여 Sidwell Friends School에 다닌다. 이 학교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과정까지 갖추고 있는 사립학교로, 미국 상류층들과 정치인들의 자녀도 많이 다닌 학교이다. 미국에서의 생활로 인해 세츠코는 영어와 서양 문화에 익숙해졌다. 이렇게 외국에서 성장기를 보낸 사람을 가리켜, 일본에서는 ‘귀국자녀(歸國子女)’라고 부른다.

일본으로 귀국한 후로는 왕족과 화족(귀족)의 딸들이 다니는 학교인 여자가쿠슈인에 입학했다. 학교에서 세츠코와 제일 친한 친구는 카바야마 아이스케(樺山愛輔) 백작의 차녀인 시라스 마사코(白洲正子)[3]였다. 마사코는 훗날 문학가가 되었고, 졸업 이후로도 평생토록 세츠코와 친하게 지냈다.

결혼[편집 | 원본 편집]

1928년 9월 28일, 세츠코는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왕자와 결혼했다. 야스히토 왕자는 세츠코보다 7년 연상인 1902년생으로, 히로히토 일왕의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

당시 일본 왕실에서 세츠코를 왕자비로 선택한 이유는 ‘아이즈번과의 화해를 위해서’였다. 메이지유신에 반대하여 정부와 전쟁까지 치렀던 아이즈번은 그때까지도 일본에서 좋지 못한 취급을 받고 있었고, 이에 아이즈번과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기 위하여 마지막 번주 가타모리의 손녀인 세츠코를 왕실의 며느리로 맞이한 것이다.

결혼하면서 세츠코는 이름의 한자를 節子에서 勢津子로 바꾸었는데, 시어머니 사다코 대비의 이름도 한자로 節子라고 썼기 때문에 며느리인 세츠코가 개명한 것이다. 세츠코의 새로운 이름자인 勢津子는 일본 왕실의 조상신 아마테라스를 모신 신사이세신궁(伊勢神宮)에서 勢를, 친정 마츠다이라 가문의 본거지인 아이즈(会津)에서 津를 따와서 지은 것이다.

원만한 고부관계[편집 | 원본 편집]

사다코 대비는 4명의 아들 중에서 차남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왕자를 제일 각별히 여겼는데, 그래서인지 야스히토 왕자의 아내인 세츠코 비도 예뻐했다. 맏며느리 나가코 왕비에게는 엄격했으나 나머지 며느리들에게는 관대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세츠코 비를 제일 총애했다고 한다.

매년 3월 3일 히나마츠리 때마다 세츠코 비는 시집올 때 친정에서 가져온 히나인형들을 장식했는데, 항상 시어머니 사다코 대비를 초대하여 함께 인형들을 감상하며 즐거워했다. 훗날 세츠코 비는 회고록 <은의 본보니엘(銀のボンボニエール、For my memoir Silver Bonbonniere)>[4]에서 “시어머니는 아들만 두셨기 때문에 (딸의 히나마츠리를 챙겨줄 일이 없었으므로) 나와 함께 보내는 히나마츠리를 즐거워했다.”고 당시를 추억했다.

불임과 조카손주들에 대한 애정[편집 | 원본 편집]

야스히토 왕자가 세츠코와 결혼하던 1928년 9월 28일, 그의 형 히로히토 일왕의 자녀로는 첫째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가 유일했다. 1년 전에 태어난 둘째 히사노미야 사치코(久宮祐子) 공주도 있었지만, 사치코 공주는 생후 6개월이던 1928년 3월에 병으로 죽었다. 1929년에는 셋째 다카노미야 가즈코 공주, 1931년에는 넷째 요리노미야 아츠코 공주가 태어났다.

이렇게 히로히토 일왕과 나가코 왕비가 줄줄이 딸만 낳자, 일본 왕실과 정치계에서는 한때 야스히토 왕자를 후계자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가코 왕비가 1933년에 다섯째로 아키히토 왕세자를 낳았고, 1935년에는 차남 요시노미야 마사히토 왕자까지 낳으면서, 야스히토 왕자가 형의 뒤를 이어 즉위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세츠코 비는 결혼 7년 만인 1935년 겨울에 딱 1차례 임신했으나, 1936년 2.26 사건 당시 유산한 이후로 다시는 임신하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조카 아키히토 왕세자의 3남매인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왕자,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왕자,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를 귀여워했다.

훗날 세츠코 비는 후미히토 왕자의 아내 키코 비에게 자신이 맡고 있던 결핵예방협회 명예총재직을 물려주었는데, 자신과 마찬가지로 귀국자녀 출신이며 둘째 왕자비인 키코 비에게 많은 동질감과 동병상련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평민 출신 조카며느리에 대한 반대[편집 | 원본 편집]

1957년 여름, 아키히토 왕세자는 가루이자와(輕井澤)[5]에서 열린 테니스 시합에 참가했다가 쇼다 미치코라는 평민 여성을 만났다. 미치코는 대기업 닛신제분(日淸製粉)[6]의 회장인 쇼다 히데사부로(正田英三郞)의 장녀로, 비록 평민이지만 매우 부유한 환경에서 공주 못지않게 금지옥엽으로 자라났고, 그해 3월 가톨릭계 명문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이었다. 당시 일본 여성치고는 상당한 장신(161cm)이었으며, 빼어난 미인이기도 했다.

20대 초반의 청춘 남녀는 금방 사랑에 빠져 연애를 시작했고, 약 2년의 연애 끝에 아키히토 왕세자는 “쇼다 미치코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 오랫동안 왕실의 결혼 상대는 같은 왕족 내지는 화족이었고, 어른들이 정해주는 것이 관례였다. 아키히토 왕세자의 선언은 이 모든 것을 깨뜨린 파격적인 것이었다.

세간에서는 두 사람의 결혼을 ‘아름답고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이자 ‘새로운 시대의 상징’으로 생각하며 환호했지만, 아키히토 왕세자의 어머니 나가코 왕비는 미치코가 평민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분노했다. 나가코 왕비의 아랫동서인 세츠코 비와 키쿠코 비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세츠코 비의 친정어머니 노부코와 이모 이츠코도 반대운동에 동참했다. 왕자의 장모이자 가쿠슈인의 동창회장으로써 영향력이 막강했던 노부코는 반대운동의 우두머리이자 중심으로 군림했다. 이츠코는 평생 일기를 썼는데, 당시 그녀의 일기에는 “(평민이 왕실로 시집온다니) 이제 일본도 다 끝났구나!”라며 한탄했다.

(반면 이츠코의 큰딸이자 나가코 왕비의 사촌언니인 이방자 여사, 나가코 왕비의 장녀인 히가시쿠니 시게코아키히토 왕세자와 미치코의 결혼을 응원하고 지지해주었다.)

그토록 극심한 반대에도 끝끝내 1959년 미치코가 왕실로 시집오자, 나가코 왕비를 비롯한 왕족들과 화족들은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 미치코 왕세자비를 괴롭히고 배척하며 가혹한 시집살이를 시켰다. 그나마 시숙모인 세츠코 비와 키쿠코 비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마음이 누그러져 미치코 왕세자비와도 원만하게 지냈고, 특히 자녀를 낳지 못한 그녀들은 미치코 왕세자비가 낳은 3남매를 손주처럼 귀여워했다. 하지만 시어머니 나가코 대비는 2000년에 향년 97세로 사망할 때까지, 두고두고 큰며느리 미치코 왕비를 미워했다.

말년과 사망[편집 | 원본 편집]

남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왕자는 1953년 1월 4일에 사망했고(향년 50세), 이후 세츠코 비는 쭉 홀로 살다가 1995년 8월 25일에 사망했다(향년 85세).

한편 후미히토 왕자는 1990년 가와시마 키코와 결혼한 이후로 셋째 고모 다카츠카사 가즈코가 생전에 살았던 집에 신접살림을 차렸고, 이 집에서 첫째 마코 공주와 둘째 카코 공주까지 낳아 길렀다. 세츠코 비가 사망하고 2년이 지난 1997년부터, 그녀가 살았던 집에는 후미히토 왕자 일가가 새로 거주하게 된다.

각주

  1. 오늘날의 후쿠시마현 서부 지역
  2. 가타모리의 6남
  3. 결혼 이후의 성씨
  4. Bonbonniere은 ‘과자 가게’, ‘과자 상자’라는 뜻의 영어 단어이다.
  5. 일본 부유층들의 여름 휴양지
  6.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큰 제분회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