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코 상왕비

(미치코 왕비에서 넘어옴)
미치코
美智子
Shodamichiko2.jpg
인물 정보
다른이름 쇼다 미치코(결혼 전)
출생 1934년 10월 20일 (89세)
도쿄도 분쿄구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1]
국적 일본
학력 후타바여학원 유치원
후타바여학원 초등학교
세이신여학원 중학교
세이신여학원 고등학교
세이신여자대학 문학부 영어영문학과
직업 왕족(상왕비)
종교 가톨릭신토
신체 161cm
배우자 아키히토 상왕
가족 아버지 쇼다 히데사부로, 어머니 쇼다 후미코
시아버지 쇼와(히로히토) 일왕, 시어머니 고준왕후(나가코)
형제: 오빠 쇼다 이와오, 여동생 안자이 에미코, 남동생 쇼다 오사무
시동생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왕자
시누이 히가시쿠니 시게코, 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 다카츠카사 가즈코, 이케다 아츠코, 시마즈 다카코
장남 나루히토 일왕, 큰며느리 마사코 왕비
차남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 작은며느리 키코 비
구로다 사야코
손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 코무로 마코, 카코 공주
손자 히사히토 왕자
활동기간 1959년 왕세자비 책봉
1989년 왕비 즉위
2019년 퇴임(상왕비)

일본의 왕족(상왕비). 아키히토 상왕의 아내이며 나루히토 일왕,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 구로다 사야코의 어머니. 오시루시는 자작나무이다.

출생과 친정[편집 | 원본 편집]

1934년 10월 20일, 일본 도쿄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에서 아버지 쇼다 히데사부로(正田英三郞)와 어머니 후미코(富美子)의 2남 2녀 중 둘째(장녀)로 태어났다.

미치코의 친가인 쇼다 가문은 평민이지만 매우 부유한 재벌가이다. 할아버지 데이이치로(貞一郞)가 창업한 닛신제분(日淸製粉)은 아시아 최대의 제분회사로 성장했고, 아버지 히데사부로에 이어 남동생 오사무(修)가 회장직을 이어받았다. 외가인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화족(귀족)[2]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왕실로 시집간 미치코뿐 아니라 오빠 이와오(巖), 여동생 안자이 에미코(安西惠美子), 남동생 오사무도 하나같이 명문가 자제와 혼인했다.

쇼다 일가는 부유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유행과 높은 문화수준을 누리며 살았다. 이는 일찍이 독일유학했던 히데사부로의 영향이 컸다. 쇼다 일가는 벽난로, 피아노, 침대 등이 갖추어진 서양식 대저택에서 커피 등의 양식(洋食)을 먹으며 생활했다. 골프, 스키, 테니스 등의 스포츠를 즐겼고, 미국유럽 등지로의 해외여행도 즐기곤 했다. 미치코가 태어나던 1930년대부터 이미 이만한 생활을 즐기고 있던 가정이니, 쇼다 가문이 얼마나 부유하고 최신식이었는지 알 수 있다.

학창시절[편집 | 원본 편집]

쇼다 가문은 가톨릭을 믿었고, 그래서인지 미치코는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모두 가톨릭 미션스쿨에 다녔다. 유치원과 초등학교는 아기예수의 애덕교육수녀회[3]에서 운영하는 후타바여학원(雙葉女学園)에서 다녔다. 큰며느리 마사코 왕비와 그녀의 친정어머니 오와다 유미코(小和田優美子), 쌍둥이 여동생 이케다 레이코(池田禮子)ㆍ시부야 세츠코(澁谷節子)도 후타바여학원에 다녔다는 인연이 있다.

초등학교 졸업 후 ‘후타바여학원은 집에서 너무 멀다’는 할머니 키누(きぬ)[4]의 의견에 따라, 성심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세이신여자학원(聖心女子学院) 중학교에 입학했다. 세이신여중고를 졸업한 후에는 동(同) 학원의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에 진학했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굉장한 고학력이었다.

미치코는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고, 부모를 닮아[5] 당시 일본 여성치고는 키도 굉장히 컸다(161cm). 또한 공부와 운동 모두 잘했고, 그림도 잘 그렸고, 피아노하프 등의 악기도 능통하게 연주하는 등등, 못하는 것이 없는 우등생에 팔방미인이었다. 활달하고 사교적인 성품에 리더십도 뛰어나 인기도 많아, 대학 시절에는 학생회장까지 맡았다. 1957년 3월에는 세이신여대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졸업식에서 미치코는 졸업생 대표로 연설도 했다.

이토록 본인의 미모와 재능도 뛰어나고, 친가와 외가 모두 부유하고 명망 높은 가문인 만큼, 미치코는 매우 훌륭한 신붓감이었다. 그녀는 여러 명문가의 우수한 남성들과 선을 보았고[6], 몇 차례의 맞선 끝에 쇼다 가문에서는 어느 법조계 청년을 미치코의 신랑감으로 생각해두게 된다.

대학을 졸업한 미치코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집안 어른들의 뜻에 따라 본격적으로 신부수업을 받으며 결혼을 준비하게 된다. 1950년대는 일본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아직 여성의 사회진출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고, 여성에게는 ‘결혼하여 주부로서 가정에 머무르며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며 최고의 삶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7]

아키히토 왕세자와의 만남[편집 | 원본 편집]

20대 초반 시절의 미치코

23살이 되던 해인 1957년의 여름, 미치코는 일본 부유층들의 휴양지 중 하나인 가루이자와(輕井澤)에서 열린 테니스 시합에 참가했다가 아키히토 왕세자를 만났다. 그는 히로히토 일왕의 장남으로 미치코보다 1년 연상인 1933년생의 청년이었으며, 왕세자로서 장래 일왕이 되기 위하여 한창 준비하고 있었다. 그 ‘준비’에는 장래 왕비가 될 아내(왕세자비)를 맞이하여 가정을 이루고 대를 이을 아들을 얻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키히토 왕세자는 자신의 친구와 팀이 되었고, 미치코는 13살 소년과 팀이 되어, 4인 복식으로 테니스를 쳤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테니스를 배웠던 미치코는 실력도 뛰어났지만 끈기도 대단하여, 지치지 않고 상대 팀에서 날아온 공을 받아 쳐냈다. 결국 경기는 미치코 팀의 승리로 끝났고, 아키히토 왕세자는 그녀에게서 무척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렇게 미치코는 아키히토 왕세자와 즐겁게 테니스를 쳤지만, 그와 결혼한다는 것은 미치코도 쇼다 가문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일본 왕실의 결혼 상대는 같은 왕족 내지는 화족 중에서만 선발했기 때문이다. 비록 1947년의 대규모 신적강하다이쇼 일왕의 직계 자손[8]들을 제외한 방계 왕족들과 화족들은 모두 평민으로 강등되었지만, 오랫동안 높았던 그들의 콧대는 하루아침에 꺾이지 않았고, 여전히 자신들끼리만 결혼하고 있었다. 아키히토 왕세자의 첫째 누나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패전 이전에 방계 왕족에게 시집갔고[9], 셋째 누나 다카츠카사 가즈코ㆍ넷째 누나 이케다 아츠코ㆍ여동생 시마즈 다카코는 패전 이후에 옛 화족 가문의 아들에게 시집갔다. 그래서 아키히토 왕세자의 배필 역시, 옛 왕족이나 화족 가문의 딸들 중에서 뽑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였다.

실제로 미치코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왕세자비 후보로 거론되고 있던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1939년생인 기타시라카와 하츠코(北白川肇子)로, 친가인 기타시라카와 가문은 옛 방계 왕족이며, 외가인 도쿠가와(德川) 가문은 에도 막부를 통치했던 가문이자 옛 화족이다. 또한 하츠코의 할머니는 메이지 일왕의 7녀인 카네노미야 후사코(周宮房子)[10] 공주이다. 즉 하츠코는 메이지 일왕의 증손녀이며, 메이지 일왕의 증손자인 아키히토 왕세자와는 6촌이 된다. 또한 하츠코는 전통적 왕실학교인 가쿠슈인 출신이었다.[11] 이러한 혈통과 배경 덕분에 하츠코는 출생 직후부터 장래의 왕세자비 후보로 유력하게 꼽혔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아무리 부유층의 딸이라지만) 평민인 미치코가 왕세자비로 뽑힌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

태평양전쟁 종전 이후로 세계는 많은 변화와 혼란을 겪었고, 그것은 패배한 전범국인 일본과 일본의 왕실도 마찬가지였다. 연합국은 일본 왕실을 아예 없애버리지는 않았지만, 대신 일본 왕실은 실질적 권력과 통치권을 잃고 상징적인 입헌군주로 바뀌었으며,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되어 오던 일왕이 ‘인간선언’을 하여 일본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또한 해외에는 왕실이 폐지된 나라들도 많았다. 일본 왕실로서는 위기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즉 일본 왕실이 폐지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동안 살아왔던 방식들을 버리고 새롭게 바뀌어야만 했다.

아키히토 왕세자와 미치코의 결혼도 그러한 개혁정책 중 하나였던 것이다. 왕족 아버지와 화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구시대적 질서에서 전통적인 상류층으로 자라난 하츠코는, 구시대의 왕세자비로는 손색이 없었으나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왕세자비 상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개혁파들은 명문 여학교 출신들을 중심으로 하츠코와 반대되는 유형의 후보를 물색하였고, 마침내 세이신여자대학 졸업생인 미치코를 발견했다. 평민 부유층(신흥 상류층)의 딸이며, 아름답고, 총명하고,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미치코는, 그야말로 개혁파들이 찾던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왕세자비’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여성이었다.

개혁파들은 ‘자연스럽고 우연한 만남’을 가장하여 가루이자와에서 아키히토 왕세자와 미치코가 만나도록 상황을 만들었고, 두 남녀에게 서로를 소개했다. 개혁파들의 의도대로, 20대 초반의 청춘 남녀는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어 가까워졌다. 아키히토 왕세자는 손수 촬영한 미치코의 흑백사진을 ‘여자친구’라는 제목으로 궁내청 전시회에 출품했는데, 이는 ‘연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여사친’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감정은 이내 ‘우정’에서 ‘사랑’으로 발전했고, 아키히토 왕세자는 어머니 나가코 왕비 몰래 직접 쇼다 가에 전화를 걸어 미치코와 통화하곤 했다. 어쩌다 이런저런 사정들로 인해 미치코와 통화하지 못하면 아키히토 왕세자는 몹시 상심하곤 했다고. 그렇게 약 2년간의 연애 끝에, 아키히토 왕세자는 미치코에게 청혼한다. 개혁파들의 작전이 대성공한 것이다.

세기의 결혼[편집 | 원본 편집]

아키히토 왕세자가 미치코에게 청혼하자, 쇼다 일가는 무척 당황했다. 마침 좋은 도피처가 생겼는데, 바로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성심학교 총동문회였다. 성심수녀회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 41개국에서 성심학교를 운영하고 있는데, 세계 성심학교 졸업생들과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행사를 개최한 것이다. 우수한 미치코는 어렵지 않게 일본 대표로 선발되어 벨기에로 떠났고, (집안 어른들의 뜻에 따라) 벨기에뿐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을 약 2달간 여행했다.

미국에서 나이아가라폭포를 구경하던 1958년 10월 20일, 미치코는 24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큰 부담감에 억눌려 있던 그녀는, 사납게 울부짖는 거대한 폭포를 바라보면서 ‘여기서 뛰어내리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쇼다 가문은 아키히토 왕세자의 청혼을 수락한다. 아키히토 왕세자와 미치코가 서로 사랑하고 있었고, 왕족의 반복되는 청혼을 계속 ‘감히’ 끝까지 거절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12] 특히 왕실이 현대화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인지라, 당시 사람들은 오늘날 사람들보다 더욱 왕실을 어려워했다.

‘쇼다 미치코가 왕세자비로 결정되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자, 일본 전체가 미치코에게 주목했다. 장래 일왕이 될 왕세자가 ‘어른들이 골라주는 왕족 내지는 화족 가문의 자제와의 결혼’이라는 왕실의 오랜 전통을 깨뜨리고 ‘평민과 연애결혼’을 한다는 파격적인 행보와 동화 같은 이야기에 일본인들은 열광했고, 약혼 발표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미치코의 아름다운 모습 또한 큰 화제가 되었다. 미치코의 패션이 대유행하여 당시 젊은 여성들이라면 너도나도 미치코의 옷차림을 따라했고[13], 미치코가 아키히토 왕세자와 만나게 된 계기인 테니스 또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또한 최초로 왕실 결혼식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다고 하자, 당시로서는 최첨단 가전제품인 흑백텔레비전이 불티나게 팔렸다. 이렇게 미치코가 아이돌 연예인처럼 각광받은 현상을, 일명 ‘미치 붐(ミッチーㆍブーム)’이라고도 부른다.

1959년 4월 10일, 아키히토 왕세자와 미치코는 왕궁에서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린 후 6마리의 말들이 이끄는 마차를 타고 도쿄 시내를 행진했다. 거리마다 시민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했고, 밤늦도록 신나고 떠들썩한 축제가 지속되었다.

수십 년의 매운 시집살이[편집 | 원본 편집]

이렇듯 일본의 평범한 대중들로부터는 인기가 높았던 미치코 왕세자비였지만, 정작 왕실에서는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혹독한 시집살이를 당했다. 아무리 그녀가 재벌가의 딸이고, 그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혼수를 마련해왔고, 아름답고, 총명하고, 다재다능해도, 당시 왕족ㆍ옛 왕족ㆍ옛 화족들에게는 그저 ‘평민 출신’일 뿐이었다. 또한 당시 왕족들과 화족들은 모두 가쿠슈인 출신이었는데, 그중에서 유일하게 다른 학교 출신인 미치코 왕세자비는 더욱 이질적인 존재였다.

특히 시어머니 나가코 왕비가 평민 출신 큰며느리를 몹시 미워했다. 이외에도 둘째 시숙모 세츠코 비, 셋째 시숙부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왕자와 셋째 시숙모 키쿠코 비 내외, 세츠코 비의 친정어머니이자 가쿠슈인의 동창회장인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14], 노부코의 언니이자 이방자 여사의 친정어머니인 나시모토 이츠코(梨本伊都子)[15] 등등, 모두가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 미치코를 적대시하고 괴롭혔다.

심지어 시종들조차 미치코 왕세자비를 업신여기고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는데, 왕세자궁의 시녀장(侍女長)인 마키노 스미코(牧野純子)[16]는 노부코가 손수 추천한 인물이고, 나가코 왕비의 시녀장은 하츠코의 고모할머니인 호시나 다케코(保科武子)[17]였다. 다케코가 퇴임한 후에는 하츠코의 어머니인 기타시라카와 사치코(北白川祥子)가 나가코 왕비의 새로운 시녀장이 되었다. 이러니 시녀장들과 그녀들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는 말단 시종들까지 모두 미치코 왕세자비를 배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첫째 시누이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평민 출신의 큰올케를 관대하게 대해주었다. 시게코는 미치코의 왕실 입성을 환영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고, 친정 부모와 미치코 왕세자비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시게코는 미치코 왕세자비가 시집온 이듬해인 1961년, 36번째 생일을 5개월 앞둔 젊은 나이에 남편과 어린 3남 2녀를 남겨두고 병으로 사망했다.

이세신궁에서 당한 홀대[편집 | 원본 편집]

결혼을 앞둔 미치코는 아키히토 왕세자와 함께 이세신궁에 참배하러 갔다가, 제관(祭官)인 기타시라카와 후사코로부터 홀대를 당했다. 후사코는 미치코에게 밀려 왕세자비 후보에서 탈락한 하츠코의 할머니이기에, 자신의 손녀를 제치고 왕세자비가 된 미치코를 미워했던 것이다.

한편 하츠코는 시마즈 타다히로(島津忠広)에게 시집갔다. 시마즈 가문은 하츠코의 시어머니가 될 뻔했던 나가코 왕비의 외가로, 나가코 왕비의 막내(5녀)이자 하츠코와 동갑내기인 시마즈 다카코의 시가이기도 하다. 타다히로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낳았고, 2005년부터는 일본 극우들의 소굴인 야스쿠니 신사에서 직책을 맡아 일하고 있다.

장갑 사건[편집 | 원본 편집]

약혼 발표 기자회견을 앞두고, 쇼다 일가는 미치코에게 무슨 의상을 입힐지 고민하다가 무릎을 살짝 덮는 드레스를 준비했다. 그리고 이 드레스를 입은 미치코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왕실 관계자에게 보내어, 혹시 법도에 어긋남이 없을지 질문했다. 드레스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왕실 관계자는 미치코가 끼고 있던 짧은 장갑을 지적했다. 팔뚝을 덮는 긴 장갑(오페라글러브)을 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장갑은 왕족들과 화족들이나 끼는 것이었기에 평민인 쇼다 일가로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고, 결국 미치코는 왕실 관계자가 보내준 긴 장갑을 끼고서 무사히 기자회견을 마쳤다.

그런데 누군가의 실수인지 고의인지 모르겠지만, 짧은 장갑을 끼고 있는 미치코의 사진신문에 보도되었다. 이에 왕족들과 화족들은 너도나도 쇼다 가에 전화를 걸어 마구 화를 내며 강력하게 항의했고, 쇼다 일족은 아무런 변명조차 한마디 못하고 그 모든 전화에 일일이 정중히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사건의 전말은 미치코가 왕비로 즉위한 후에야 친정어머니 후미코에 의해 공개되었다. 후미코는 큰딸 미치코 왕비가 오해받는 것도 괴로웠지만, 특히 미치코 왕비의 3남매가 자신들의 어머니를 오해할까봐 걱정되어 뒤늦게라도 진실을 밝혔다고 한다.

참고로 미치코의 시어머니인 나가코 왕비도 왕세자비 시절에 장갑 관련 시집살이 일화가 있고, 훗날 미치코의 작은며느리가 된 키코 비도 시집올 때 장갑과 관련된 구설수가 있었다.

창문 사건[편집 | 원본 편집]

미치코 왕세자비는 결혼하자마자 임신하여, 1960년 2월 23일 궁내청병원에서 첫아이인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왕자를 낳았다. 갓난아이와 함께 퇴원하여 자동차를 타고 왕세자궁으로 돌아오던 길에, 기자들이 장래 일왕이 될 왕자의 사진을 찍으려고 몰려들었다. 미치코 왕세자비는 기자들을 배려하여 잠깐 창문을 열어 아기를 보여주었는데, 나가코 왕비를 비롯하여 여러 왕족들과 화족들이 “왕실의 귀한 장손이 감기에 걸리면 어쩌려고 창문을 열었느냐?!”라며 호되게 질책했다.

토카악당(桃華樂堂) 사건[편집 | 원본 편집]

왕궁에는 ‘토카악당’이라는 오페라하우스가 있는데, 히로히토 일왕이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아내 나가코 왕비에게 환갑 선물로 지어준 건물이다. ‘토카’는 ‘복숭아꽃’이라는 뜻으로, 나가코 왕비의 오시루시복숭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토카악당이 완공되자 왕실에서는 여러 왕족들과 화족들을 초대하여 기념행사를 했다. 초대된 사람들은 자신들끼리만 인사하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고, 미치코 왕세자비에게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으며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무시했다고 한다.

의상 사건[편집 | 원본 편집]

왕족들이 참석하는 행사가 있을 때마다, 미치코 왕세자비에게만 드레스코드를 알려주지 않거나 잘못 알려주어서 골탕을 먹게 했다. 이러한 유치한 괴롭힘은 여러 사진들로 증거가 남아있다. 다함께 똑같은 색깔의 옷을 입었는데 미치코 왕세자비만 혼자 다른 색의 옷을 입은 모습, 다른 사람들은 기모노를 입었는데 미치코 왕세자비 혼자서만 양장을 입은 모습 등이 있다.

(훗날 미치코 왕비의 큰며느리가 된 마사코 왕세자비도 이러한 시집살이를 당했다.)

친정아버지도 모욕당해[편집 | 원본 편집]

미치코의 아버지 히데사부로는 대기업 회장에다 처가가 옛 화족 가문인 만큼, 왕족ㆍ화족들과도 나름 친분이 있었다. 큰딸 미치코를 아키히토 왕세자에게 시집보낸 후의 일이었다. 큰사위의 작은아버지인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왕자를 만나자 히데사부로는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지만, 이전까지 인사를 잘 받아주었던 노부히토 왕자는 히데사부로의 인사를 싹 무시하며 무안을 주었다. ‘평민과 인척이 되어 불쾌하다’는 노골적인 시위였던 셈.

시숙모들[편집 | 원본 편집]

첫째 나루히토 왕자가 태어나고 몇 년이 지나자, 미치코 왕세자비는 다시 임신을 했다. 그러나 스트레스로 인하여 유산했고, 심신이 모두 좋지 않았던 그녀는 하야마(葉山)의 왕실 별장에서 한동안 요양해야 했다. 그러자 노부히토 왕자의 아내인 키쿠코 비가 ‘귀한 왕실의 후사를 잘 지키지 못하고’ 운운하며 미치코 왕세자비를 비난했다. 정작 키쿠코 비에게는 자녀가 1명도 없고, 심지어 임신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남편 노부히토 왕자에게 동성애 성향이 있어서’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나마 시숙모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마음이 누그러져, 미치코 왕세자비와도 그럭저럭 지내게 되었다. 특히 자녀가 없었던 둘째 시숙모 세츠코 비와 셋째 시숙모 키쿠코 비는, 미치코 왕세자비의 아이들을 손주처럼 귀여워했다. 막내 시숙모 유리코 비는 3남 2녀를 낳았는데, 막내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는 나루히토 왕자에게 5촌 당숙이 되지만 고작 6살 연상(1954년생)이라서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시숙모들과 달리 시어머니 나가코 왕비의 마음은 여전히 완고하고 적대적이었으며, 두고두고 큰며느리를 미워하여 호된 시집살이를 시켰다.

공항 사건[편집 | 원본 편집]

미치코 왕세자비가 일본 왕실에 시집온 지도 17년이나 지난 1976년, 히로히토 일왕과 나가코 왕비 내외가 미국을 방문할 때의 일이었다. 왕족들은 모두 일왕 내외를 배웅하러 공항까지 따라 나갔다. 나가코 왕비는 왕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큰아들 아키히토 왕세자와도 인사를 나누었지만, 큰아들의 바로 옆에 서있던 큰며느리 미치코 왕세자비의 인사는 싹 무시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문제는 이 장면이 방송으로 생중계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인들은 이 방송을 보고, 소문으로만 듣던 ‘미치코 왕세자비에 대한 왕실의 따돌림’이 사실임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경악했다. 또한 미치코 왕세자비는 왕족들과 수행원들뿐 아니라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시어머니에게 무시당하는 모욕을 겪은 것이다.

아랫동서와의 비교[편집 | 원본 편집]

1964년, 미치코 왕세자비의 시동생 요시노미야 마사히토 왕자가 결혼했다. 상대는 5년 연하(1940년생)의 츠가루 하나코(津輕華子)라는 여성으로, 어머니 나가코 왕비가 손수 정해준 신붓감이었다. 결혼으로 인해 마사히토 왕자는 출생 이후부터 사용해오던 ‘요시노미야’라는 어칭호 대신 ‘히타치노미야’라는 궁호를 새로 받아 사용하게 된다.

츠가루 가문은 화족이었고, 하나코 비는 가쿠슈인 유치원ㆍ초등과ㆍ여자중등과ㆍ여자고등과를 거쳐 가쿠슈인여자단기대학[18] 문과(영어 전공)를 졸업했다. 나가코 왕비는 평민 출신의 큰며느리를 미워했기 때문에, 작은아들까지도 평민 여자와 연애결혼을 할까봐, 그 전에 직접 나서서 왕족ㆍ화족 가문의 딸들 중에서 작은며느릿감을 골라 결혼시킨 것이었다.

다만 2남 1녀를 낳았던 미치코 왕세자비와 달리, 하나코 비는 (마사히토 왕자의 문제로) 아이를 낳지 못했다.

종교 문제[편집 | 원본 편집]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왕자는 그리스도교[19]에도 관심이 많아, 교황 바오로 6세를 알현하기도 했다. 그랬기에 마사히토 왕자는 가톨릭 가정과 학교에서 자라난 형수 미치코 왕세자비에게도 자연스레 가톨릭에 관해 이런저런 질문을 했고, 미치코 왕세자비는 대답해 주었는데, 이것을 왕실 어른들에게 들켜서 미치코 왕세자비만 또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고 한다.

아무리 ‘인간선언’을 했다지만 일왕과 왕실은 오랫동안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되어 오던 사람들이었고, 패전과 인간선언 이후로도 일본 왕실의 종교는 일본 전통의 다신교인 신토이다. 그러니 왕실의 며느리가 다른 종교, 특히 유일신교인 그리스도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좋은 트집거리가 될 수 있었다.

이후 미치코 왕비는 아키히토 일왕과 유럽으로 해외순방을 갔다가 바티칸시국에 들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한 적이 있는데, 이 때문에 반대파들로부터 욕을 먹기도 했다.

왕비가 된 후에도[편집 | 원본 편집]

1989년 시아버지 히로히토 일왕이 사망하고 남편 아키히토 왕세자가 새 일왕으로 즉위하면서, 미치코 왕세자비도 왕비가 되었다. 왕실에 시집온 지 30년 만이었다. 당시 미치코 왕비는 54세였지만, 그간 얼마나 가혹한 시집살이에 시달렸는지 마치 70대 노인처럼 보일 정도로 사정없이 폭삭 늙어버렸다.

그러나 나가코 대비와 그녀의 세력들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계속하여 지치지도 않고 미치코 왕비에게 트집과 험담을 퍼부었다. “왕비 때문에 선왕(히로히토)이 생전에 아끼던 왕궁의 이 파괴되었다”, “연회 등 각종 행사도 왕비의 승낙이 없으면 진행되지 못한다”, “왕비가 한밤중에도 과일을 깎으라거나 라면을 끓이라고 주문하는 바람에, 시종들이 쉴 틈이 없다”는 등등, 미치코 왕비를 비난하는 악의적인 소문들도 퍼뜨렸다.

24세에 시집온 이래로 온갖 기상천외한 시집살이들을 겪으며 어느덧 환갑을 앞둔 나이가 된 미치코 왕비였지만, 그런 그녀조차 견디지 못하고 쓰러질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쓰러졌다가 깨어난 그녀는 한동안 실어증 증세까지 보였다. 하지만 나가코 대비는 노환과 치매를 앓는 몸으로도 지치지 않고 미치코 왕비를 괴롭히며 97세까지 장수했고, 2000년에 나가코 대비가 사망한 후에야 미치코 왕비의 지옥 같았던 시집살이는 비로소 끝났다. (약혼 기간부터 계산하면) 무려 42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었다.

평민 출신 비(妃)의 파격[편집 | 원본 편집]

이렇게 시집살이를 당하면서도, 미치코 왕세자비는 자신의 소신대로 나름 파격적인 면모들을 많이 보였다. 그녀는 수천 년간 내려오던 일본 왕실의 오랜 관습을 깨뜨리고 새로운 생활 방식들을 택했다. 왕궁 내의 산전(産殿) 대신 병원에서 출산했고, 자녀들을 자신의 곁에 두고 손수 돌보았다. 그동안 왕실의 자녀들은 부모와 분리되어 유모와 전담 시종들에 의해 양육되는 것이 전통이었다. 하지만 미치코 왕세자비는 일반 가정에서처럼 아이들과 함께 생활했고, 유모 제도도 폐지했다. 나가코 왕비와 미치코 왕세자비 모두 직접 모유 수유를 했지만, 모유가 부족할 때 나가코 왕비는 유모의 도움을 받은 반면, 미치코 왕세자비는 유모 대신 분유로 해결했다.

또한 미치코 왕세자비는 요리도 직접 했는데, 이는 결혼 전부터 결심한 일이었다. “왕실의 전통에 따라 아주 어려서부터 부모와 떨어져 자라났고,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음식을 먹어본 적도 없다.”는 아키히토 왕세자의 이야기에 큰 놀라움과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반인들과 같은 소박한 행복을 누리는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결심했고, 약혼 발표 기자회견 때부터 “결혼하면 손수 카레라이스[20] 같은 가정식을 만들어 가족들과 함께 먹고 싶다”고 말했다. 결혼 이후 그녀는 여느 가정주부처럼 요리를 했고, 아이들의 도시락도 직접 만들었다.

미치코 왕세자비는 스스로 육아를 해내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했다. 그녀는 미국의 저명한 소아과 의사벤저민 스포크 박사의 저서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를 영어 원서로 읽으며 공부했고, 이것을 바탕으로 나름의 육아지침을 세웠다.

이 지침은 첫째 나루히토 왕자의 이름을 따서 일명 ‘나루 짱 겐뽀(ナルちゃん憲法)’라고 불렸는데, 공무에 참석하느라 아이들을 시종에게 맡길 때도 ‘나루 짱 겐뽀’에 따라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일본의 큰 인기인이었던 미치코 왕세자비인 만큼 그녀의 육아법도 무척 유명해져서,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는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에서도 불티나게 팔렸으며, 일본의 많은 부모들이 ‘나루 짱 겐뽀’에 공감하며 따라했다.

이전까지 일본 왕실은 ‘일반인들과 다른 존재’, ‘저 멀리 높은 곳에 있는 존재’, ‘살아있는 신’으로 인식되어 왔으나, 미치코 왕세자비는 이렇듯 왕실을 ‘보통 사람들과 같은 평범한 정을 나누는 가족’, ‘따뜻하고 화목하며 이상적인 가정’으로 가꾸어 일반인들에게 친근감을 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리고 그녀의 노력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자녀들[편집 | 원본 편집]

  • 장녀 구로다 사야코: 1969년 4월 18일 출생. 2005년 후미히토 왕자의 친구인 구로다 요시키(黑田慶樹)와 결혼했다. 자녀는 없다.

며느리들과의 관계[편집 | 원본 편집]

키코 비는 작은며느리이지만 형님인 마사코 왕세자비보다 3년이나 먼저 시집왔다. 그녀는 시어머니와 형님과는 달리 스스로 원해서 왕실로 시집왔고, 가쿠슈인대학에서 후미히토 왕자를 만나 사귀면서 결혼 전부터 왕실 가족들과 친했다. 키코는 장래 시누이가 된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와도 친하게 지냈고, 특히 종종 만나서 함께 케이크쿠키를 만들기도 했는데, 이 자리에 자연스레 미치코 왕비도 합류하여 어울렸다고 한다.

결혼 이후로도 키코 비는 시부모에게 잘 보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녀는 결혼하자마자 금방 두 공주를 낳았고, 남편과 함께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시부모를 자주 방문하여 손녀들의 재롱을 보여주곤 했다. 미치코 왕비는 작은며느리 키코 비를 ‘키코 짱(ちゃん)’이라고 부르며 귀여워했고, 키코 비가 임신하고 출산할 때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챙겨주었으며, 키코 비가 낳은 마코 공주카코 공주를 예뻐했다. 키코 비는 시어머니가 젊은 시절 읽었던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와 시어머니가 만든 육아지침 ‘나루 짱 겐뽀’를 읽으며 육아에 대해 공부했고, 이를 바탕으로 아이들을 양육했다.

그러나 미치코 왕비가 키코 비를 꾸중했던 일화도 있다. 결혼을 앞둔 키코가 친정어머니 가와시마 카즈요(川嶋和代)와 함께 미치코 왕비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왕궁의 시종이 다과를 내오자 카즈요는 딸의 앞에 찻잔을 놓아주었는데, 미치코 왕비가 큰 목소리로 “딸이 어머니로부터 시중을 받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 감히 어머니에게 시중을 받다니, 그래서는 안 된다!”라며 꾸짖었다고 한다.

큰며느리 마사코 왕세자비와는 고부갈등을 겪었다. 유럽미국에서 성장기의 상당 부분을 보냈던 마사코 왕세자비는, 보수적인 일본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왕실과 당연히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왕실의 종부(宗婦)인 왕세자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들 출산’이었고, 때문에 미치코 왕비는 마사코가 왕실로 시집오기로 정해지자 그녀를 담당할 산부인과 의사부터 정해놓았다. (미치코 왕비와 키코 비가 임신하고 출산할 때도 전담했던 의사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왕세자궁에 아기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왕세자 부부는 결혼한 지 8년 만에야 의학의 힘을 빌려 어렵사리[21] 아이를 낳았지만 딸이었다. 왕세자 부부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를 낳자 아키히토 일왕과 미치코 왕비는 기뻐했지만, 이내 곧 “다시 임신해서 이번에는 ‘아들’을 낳으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사코 왕세자비는 더 이상 아이를 가지지 못했고, 이 문제로 왕실 가족들과 크게 갈등했으며, 결국 2003년부터 적응장애, 대상포진, 우울증 등으로 공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10여 년간 왕세자궁에 칩거하며 요양했다. 일본에서는 그녀를 ‘세금도둑’이라며 비난했다.

큰며느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몸져누워 있으니, 작은며느리인 키코 비의 활동은 더욱 돋보였다. 이전부터 시부모에게 싹싹하게 굴고 공무에도 부지런히 임했던 키코 비는, 형님 몫의 공무까지 수행하면서 더욱 왕실과 국민들에게 얼굴도장을 찍었다. 큰딸 마코 공주와 작은딸 카코 공주도 어려서부터 부모를 따라 각종 공무에 출석하면서 ‘예쁘고 귀여운 공주들’로 대중에게 긍정적 이미지를 심었다. 특히 2006년에 키코 비가 ‘41년 만의 남자 왕손’인 히사히토 왕자를 낳자, 키코 비와 그녀의 일가에 대한 호감도가 더욱 상승했다.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는 왕세자 부부를 제치고 일왕 부부ㆍ왕실ㆍ국민들로부터 사랑받았으며, 심지어 형 나루히토 왕세자에 이어 계승서열 2위였던 후미히토 왕자는 형을 제치고 왕위에 오르려는 욕심까지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생전퇴위[편집 | 원본 편집]

2016년, 아키히토 일왕은 ‘생전퇴위’ 계획을 발표했다. 그동안 일본 왕실에서는 일왕이 사망한 후에야 왕세자가 즉위했지만, 아키히토 일왕은 ‘건강’과 ‘장례식과 즉위식을 동시에 치르는 것은 번거로워서’라는 이유를 들어 이례적으로 ‘생전퇴위’를 계획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동안 왕위를 노리며 방자하게 굴었던 차남 후미히토 왕자를 견제하고 장남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편 마사코 왕세자비는 차츰 건강이 회복되어 공무에도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아키히토 일왕이 생전퇴위 계획을 발표한 후부터, 미치코 왕비는 공식석상에서 키코 비를 제치코 마사코 왕세자비를 앞세우는 등, 큰며느리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행보를 보였다.

2019년 5월 1일, 나루히토 왕세자와 마사코 왕세자비가 새 일왕과 새 왕비로 즉위했다. 이에 따라 아키히토 일왕은 상왕이 되었고, 미치코 왕비는 상왕비가 되었다.

각주

  1. 도쿄대학병원
  2. 작위는 백작
  3. 한국에는 진출하지 않은 수도회이다.
  4. 미치코의 아버지 히데사부로를 포함하여 5남 5녀를 낳았다.
  5. 어머니 후미코는 미치코보다 더 컸고, 아버지 히데사부로는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을 보면) 180cm 이상으로 보인다. 부모가 미치코보다 더 옛날 사람임을 생각해보면, 당시에 엄청난 거인들이었던 셈이다.
  6. 그중에는 문학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도 있었다.
  7. 미국 최고의 명문 여대인 웰즐리여자대학의 1950년대 시절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2003년 미국 영화 <모나리자 스마일>을 보면, 당시 미국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여학생들조차 대학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해서는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이 정해주는 명문가의 남성과 결혼하여 가정주부가 되는 것’과 ‘좋은 아내이자 좋은 어머니(현모양처)가 되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8. 히로히토 일왕 일가와 그의 남동생 3명의 일가들.
  9. 둘째 누나 히사노미야 사치코(久宮祐子) 공주는 생후 6개월에 요절.
  10. 후사코의 차녀 히가시소노 사와코(東園佐和子)는 덕혜옹주여자가쿠슈인 동기이자, 한때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의 차남인 이우(李鍝)의 신붓감으로 거론되었던 인물이다.
  11. 도쿄학예대학 부속초등학교, 가쿠슈인 여자중등과, 가쿠슈인여자고등과를 거쳐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진학했으나, 결혼으로 인해 대학은 중퇴했다.
  12. 이러한 분위기는 훗날 미치코의 큰며느리가 된 오와다 마사코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사코는 무려 7년이나 나루히토 왕세자의 청혼을 거절하다가 결국 1993년 왕실로 시집왔다.
  13. 마사코도 패션 감각이 뛰어나 옷을 개성적으로 멋지게 입었기 때문에, 1993년 마사코가 왕세자비 후보로 발표되었을 때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났다.
  14. 1969년 향년 82세에 사망할 때까지, 두고두고 미치코 왕세자비를 미워하며 괴롭혔다.
  15. 당시 일기에 “이제 일본도 다 끝났구나!!”라고 썼다고 한다. 반면 이츠코의 큰딸이자 나가코 왕비의 사촌언니인 이방자 여사는 미치코를 응원했다.
  16. 스미코의 딸 하야시 데이코(林貞子)는 쇼토유치원의 설립자이다.
  17. 메이지 일왕의 6녀인 츠네노미야 마사코(常宮昌子) 공주의 손아래 시누이. 마사코 공주의 아들 다케다 츠네요시(竹田恒德)는 생체실험 만행으로 악명이 높은 731부대에서 복무한 전쟁범죄자이고, 츠네요시의 아들 츠네카즈(恒和)는 일본올림픽위원회 임원이었다가 2020 도쿄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물의를 일으켜(뇌물) 퇴임했다. 츠네카즈의 아들 츠네야스(恒泰)는 1975년생으로, 악질적인 망언과 망동을 일삼는 혐한ㆍ극우 인물이다.
  18. 現 가쿠슈인여자대학
  19. ‘기독교’, ‘크리스트교’라고도 부른다. 가톨릭(천주교), 정교회, 프로테스탄트(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20. 일본의 대표적인 가정식 요리이다.
  21. 자연임신이 아니라, 인공수정이나 시험관아기 같은 인위적인 시술로 임신했다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