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쿠코 비

키쿠코
喜久子
인물 정보
다른이름 도쿠가와 키쿠코(결혼 전)
출생 1911년 12월 26일
일본 도쿄도 분쿄구
사망 2004년 12월 18일(향년 92세)
도쿄
국적 일본
학력 여자가쿠슈인
직업 왕족(왕자비)
종교 신토
배우자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왕자
가족 할아버지 도쿠가와 요시노부
외할아버지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아버지 도쿠가와 요시히사, 어머니 미에코
시아버지 다이쇼 일왕, 시어머니 데이메이왕후(사다코)
큰아주버니 쇼와(히로히토) 일왕, 큰형님 고준왕후(나가코)
작은아주버니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왕자, 작은형님 세츠코 비
시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 아랫동서 유리코 비
시조카 히가시쿠니 시게코, 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 다카츠카사 가즈코, 이케다 아츠코, 아키히토 상왕,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왕자, 시마즈 다카코, 고노에 야스코, 토모히토 왕자,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왕자, 센 마사코,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
활동기간 1930년 왕자비 책봉

일본의 왕족(왕자비). 쇼와(히로히토) 일왕의 동생인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왕자의 아내이다. 오시루시는 거북이었다가 패랭이꽃으로 바뀌었다.

출생과 가계[편집 | 원본 편집]

키쿠코의 할아버지는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이며, 아버지는 요시노부의 7남인 요시히사(慶久)이다. 대정봉환메이지유신으로 막부가 무너진 이후, 도쿠가와 가문은 화족(귀족) 작위를 받았다.

외가는 방계 왕족인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 가문으로, 마지막(10대) 당주인 다케히토(威仁)의 자녀들 중에서 차녀 미에코(實枝子)만이 살아남아 요시히사에게 출가하여 키쿠코를 낳았다.

키쿠코는 요시히사와 미에코의 차녀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의 이름에서 喜를, 아버지의 이름에서 久를 따와서 喜久子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언니 케이코(慶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죽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키쿠코가 무사히 태어나 성장하는 모습을 기뻐했다고 한다. 이후 남동생 요시미츠(慶光), 여동생 사카키바라 키사코(榊原喜佐子), 이데 쿠미코(井手久美子)가 태어났다. 여동생들에 대해서는 ‘요시히사가 시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서녀(庶女)’라는 소문도 있다.

성장[편집 | 원본 편집]

키쿠코는 왕족과 화족의 딸들이 다니는 학교인 여자가쿠슈인에 입학했다. 학창 시절 그녀는 활달하고 면학에 힘쓰는 소녀였지만 학교의 서예 수업에는 참가하지 않았는데, 집에서 서예를 따로 배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가인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에 대대로 전승된 ‘아리스가와류 서도(有栖川流書道)’라는 독특한 서법이었다.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유일한 후손인 미에코는 이 서법을 차녀 키쿠코에게 전수했고, 키쿠코가 다른 서법에 물들지 않도록 주의했다. 학교에서 서예 시간이 되면, 키쿠코는 홀로 다른 교실에서 아리스가와류 서도를 연습했다.

결혼과 불임[편집 | 원본 편집]

18살이 되던 해인 1929년, 키쿠코는 여자가쿠슈인을 졸업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0년에는 히로히토 일왕의 동생이자 다이쇼 일왕의 3남인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왕자와 결혼했다. 노부히토 왕자는 1905년생으로 키쿠코보다 6년 연상이었다.

사실 두 사람의 결혼은 훨씬 이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유서 깊은 방계 왕족인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이 절손되는 것을 다이쇼 일왕은 안타깝게 여겼다. 당시 (차남 이하의) 왕자들은 성년(만 20세)이 되면 궁호를 받아 분가(分家)했지만, 1913년 다이쇼 일왕은 고작 8살인 3남 노부히토 왕자에게 ‘다카마츠노미야’라는 궁호를 주었다. (‘다카마츠노미야’는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옛 이름이다.) 자신의 아들을 통해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을 계승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러니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후손(외손녀)인 키쿠코를 노부히토 왕자와 결혼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훗날 키쿠코 비는 회고록에서 “내가 겨우 2살이던 시절(1913년)에 결혼이 정해졌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키쿠코의 친가는 에도 막부를 통치했던 도쿠가와 가문이기에, 그녀와 노부히토 왕자의 결혼은 ‘공무합체(公武合體)’, 즉 공가(公家、왕실)와 무가(武家、막부)의 결합이 된다. 이처럼 두 사람의 결혼에는 많은 의미와 기대가 부여되었으나, 후손을 남기지는 못했다. 딱 한 번 임신했다가 유산했던 작은형님 세츠코 비와 달리 키쿠코 비는 임신조차 한 번도 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남편 노부히토 왕자에게 동성애 성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그래도 맏며느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부담은 큰형님 나가코 왕비보다 훨씬 덜했다. 시어머니 사다코 대비는 맏며느리인 나가코 왕비에게 무척 엄격했으나, 나머지 3명의 며느리들에게는 관대했다.

평민 출신 조카며느리에 대한 반대[편집 | 원본 편집]

1957년 여름, 아키히토 왕세자는 가루이자와(輕井澤)[1]에서 열린 테니스 시합에 참가했다가 쇼다 미치코라는 평민 여성을 만났다. 미치코는 대기업 닛신제분(日淸製粉)[2]의 회장인 쇼다 히데사부로(正田英三郞)의 장녀로, 비록 평민이지만 매우 부유한 환경에서 공주 못지않게 금지옥엽으로 자라났으며, 그해 3월 가톨릭계 명문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이었다. 당시 일본 여성치고는 굉장한 장신(161cm)이었으며, 굉장한 미인이기도 했다.

20대 초반의 청춘 남녀는 금방 사랑에 빠져 연애를 시작했고, 약 2년의 연애 끝에 아키히토 왕세자는 “미치코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 오랫동안 왕실의 결혼 상대는 같은 왕족 내지는 화족이었고, 어른들이 정해주는 것이 관례였다. 아키히토 왕세자의 선언은 이 모든 것을 깨뜨린 파격적인 것이었다.

세간에서는 두 사람의 결혼을 ‘아름답고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이자 ‘새로운 시대의 상징’으로 생각하며 환호했지만, 아키히토 왕세자의 어머니 나가코 왕비는 미치코가 평민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분노했다. 나가코 왕비의 아랫동서인 세츠코 비와 키쿠코 비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세츠코 비의 친정어머니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와 노부코의 언니 나시모토 이츠코(梨本伊都子)도 반대운동에 동참했다. 왕자의 장모이자 가쿠슈인의 동창회장으로써 영향력이 막강했던 노부코는 ‘미치코 반대운동’의 우두머리이자 중심으로 군림했다. 이츠코는 평생 일기를 썼는데, 당시 그녀의 일기에는 “(평민이 왕실로 시집온다니) 이제 일본도 다 끝났구나!”라며 한탄했다.

(반면 이츠코의 큰딸이자 나가코 왕비의 사촌언니인 이방자 여사, 나가코 왕비의 장녀인 히가시쿠니 시게코아키히토 왕세자와 미치코의 결혼을 응원하고 지지해주었다.)

그토록 극심한 반대에도 끝끝내 1959년 미치코가 왕실로 시집오자, 나가코 왕비를 비롯한 왕족들과 화족들은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 미치코 왕세자비를 괴롭히고 배척하며 가혹한 시집살이를 시켰다. 노부히토 왕자와 키쿠코 비 내외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치코의 친정아버지 히데사부로는 대기업 회장인데다 처가인 소에지마(副島) 가문이 옛 화족이었으므로, 왕족 및 화족들과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다. 큰딸 미치코를 왕실로 시집보낸 후였다. 큰사위 아키히토 왕세자의 숙부인 노부히토 왕자와 마주치자 히데사부로는 정중하게 인사했지만, 이전까지 인사를 잘 받아주었던 노부히토 왕자는 히데사부로의 인사를 싹 무시하여 히데사부로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평민과 인척이 되어 불쾌하다’는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또한 1960년 첫째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왕자를 낳고 2~3년 후에 다시 임신했던 미치코 왕세자비가 유산하자, 키쿠코 비는 “귀한 왕실의 후사를 잘 지키지 못하고” 운운하며 미치코 왕세자비를 비난했다. 정작 키쿠코 비는 임신조차 못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다. 너나 잘하세요 이후 미치코 왕세자비는 1965년에 둘째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왕자를, 1969년에 셋째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를 낳았다.

그러나 세츠코 비와 키쿠코 비 등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감정이 누그러져 미치코 왕세자비와도 원만하게 지내게 되었다. 반면 나가코 대비는 2000년에 향년 97세로 사망할 때까지 두고두고 큰며느리 미치코 왕비를 미워하며 괴롭혔다.

조카의 자녀들에 대한 애정[편집 | 원본 편집]

세츠코 비와 키쿠코 비는 자녀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조카 아키히토 왕세자가 낳은 3남매를 손주처럼 귀여워했다.

키쿠코 비는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왕자에게 ‘아리스가와류 서도’를 가르쳤다. 어린 후미히토 왕자는 무척 개구쟁이여서, 교본에 없는 글자를 묻기도 하는 등 종조모(작은할머니) 키쿠코 비에게 짓궂은 장난도 종종 쳤다. 하지만 서예 교습을 계기로 두 사람은 더욱 친해지게 되었다. 이후 ‘아리스가와류 서도’는 후미히토 왕자의 자녀들에게 계승되고 있다.

또한 키쿠코 비는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도 귀여워했고, 사야코 공주의 약혼과 결혼 과정도 관심 깊게 지켜보았다. 사야코 공주는 2005년에 작은오빠 후미히토 왕자의 친구인 구로다 요시키(黑田慶樹)에게 시집갔는데, 본래 좀 더 일찍 결혼할 예정이었으나 키쿠코 비의 장례 때문에 늦추어진 것이었다.

여왕 찬성[편집 | 원본 편집]

1989년, 히로히토 일왕이 죽고 아키히토 왕세자가 새 일왕으로 즉위했다. 이듬해인 1990년에는 작은아들 후미히토 왕자가 가쿠슈인대학 후배 가와시마 키코와 결혼하여 ‘아키시노노미야’라는 궁호를 받아 분가(分家)했다. 큰아들 나루히토 왕자는 1991년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993년에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로 외교관 출신 오와다 마사코와 결혼했다. 그러나 나루히토 왕세자 내외는 오랫동안 좀처럼 아이를 낳지 못했다. 일찍 결혼한 후미히토 왕자도 1991년에 장녀 마코 공주, 1994년에 차녀 카코 공주를 낳아 딸만 2명을 두고 있었다.

오랜 난임 끝에 나루히토 왕세자와 마사코 왕세자비는 결혼 8년 만인 2001년에야 겨우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를 낳았지만, 일본 왕실에서는 남성만이 국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후사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 무렵 키쿠코 비는 “여자의 왕위 계승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글을 주간지에 발표하였다. 그녀는 아이코 공주의 탄생을 축하하는 동시에 “옛날 일본에는 여왕들도 많았으니,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왕실의 어른이 여왕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내자 화제가 되었지만, 보수파들은 “키쿠코 비는 여왕을 찬성했지, 여계 후손의 즉위를 찬성한 것이 아니다”라고 애써 의미를 축소했다. 즉 ‘옛날에 있었던 여왕들은 아버지로부터 왕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녀들이기에 즉위할 수 있었지만, 왕족 여성과 일반인 남성의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이 즉위한 사례는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보수파들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키쿠코 비가 세상을 떠난 후인 2006년 9월 6일,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가 늦둥이 셋째 히사히토 왕자를 낳으면서 여왕 허용론은 오랫동안 잠잠해져 버렸다. 하지만 후미히토 왕자 일가에 대한 여론이 점점 나빠지고, 반대로 나루히토 왕세자 내외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의 이미지가 좋아지면서, 다시 ‘아이코 공주를 여왕으로 즉위시키자’는 의견도 생겨나고 있다.

사망[편집 | 원본 편집]

2004년 12월 18일 사망했다. 향년 92세로, 93세 생일을 불과 8일 앞둔 시점이었다.

각주

  1. 일본 부유층들의 여름 휴양지
  2.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큰 제분회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