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

귀족(貴族)은 정치·사회적 특권을 지니는 신분이다. 일반적으로 혈통으로 구분된다.[1]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살피면 무엇인가 모순[2]이 생길 때가 많은데, 그럴 때 귀족적 관점으로 전환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경우도 많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귀족의 탄생[편집 | 원본 편집]

인류 역사의 초창기에서는 우두머리는 존재해도 귀족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귀족은 고대에도 존재하였으나 중국 대륙[3] 같은 특이한 지역을 제외하면 유럽에서는 중세[4]에 도달해서야 간신히 완전한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사람들의 인심을 모은 사람들이 귀족[5]이 되었기에 스스로 탄생한 여성 귀족[6]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여러 원인으로 군사귀족들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귀족 가문이 남성 귀족들 위주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고대 로마 역시 시간이 지나며 평민들이 점점 귀족들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결국에는 로마식 귀족제[7]가 되었다. 예를 들자면, 한니발과의 전투에서 로마의 평민들과 그들을 지지했던 귀족들은 비참하게 패배하여 세력을 엄청나게 잃었고 파비우스, 마르켈루스, 스키피오와 같은 로마의 귀족들은 방법을 찾을 때까지 느긋하게 한니발을 연구하여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 로마의 평민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하려고 했던 정치, 경제, 군사적 시도와 도전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스의 아테네에도 귀족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민주제가 보급되면서 민중들에 비하여 세력이 많이 밀렸다. 나중에는 평민파 귀족인 클레이스테네스에게 혈연 부족을 해체당해서 사실상 망하는 치욕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아테네인들은 민중들의 내부적 한계와 모순을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귀족적 성격[8]이 있던 스파르타나 귀족들이 지배하는 마케도니아가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후에 로마에 정복을 당하고도 민주적 전통을 잊지 않았으며 그리스계 역사가였던 폴리비우스는 로마의 영광이 로마 귀족이 아닌 로마 시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책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의 이런 태도는 내심 로마 귀족들의 반발을 불렀고 평민파인 마리우스와 대립하던 귀족파인 술라는 그리스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하기도 했다. 그래서 본래 로마 귀족들이 몰락하기 전까지는 그리스인들은 그들 문명을 인정[9]받았음에도 대우[10]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강대한 능력을 가졌던 로마의 귀족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11]로 점점 약해졌다. 여기에 점점 많은 평민들이 정복지로부터 얻은 전리품과 노예로 인하여 무익한 프롤레타리우스[12]가 되었고 로마 귀족들은 국가의 몰락을 막기 위해 더 많은 힘을 소모하였으며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개방적[13]이 되었다.

그들은 정복전쟁을 거의 중단하고 국경 방비에 힘을 썼다. 평민들을 지원하기 위한 복지 정책의 일환으로 공동아파트, 공동목욕탕, 세제개혁, 곡물의 무상분배 등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귀족들의 정책으로 힘을 키운 민중이나 군인들은 오히려 귀족들을 향해 반기를 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점점 귀족들과 거의 대등한 권리를 획득했다.

로마 제국인들은 점점 명백하게 귀족들의 힘이 사라졌음을 느끼고 있었고 농민 폭동과 반란군의 출현, 게르만족의 침입과 같은 극심한 혼란이 지속되었다. 이를 주로 제국에 소속된 게르만인들이 대신 해결하기 시작하면서 무기력해진 로마 귀족들의 정체성도 점점 사라졌으며 로마 귀족들의 완전한 몰락과 함께 그들이 유지하던 제국은 더는 온전한 모습[14]으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게르만족은 로마가 쇠퇴하는 3세기경부터 점차 로마 지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샤를마뉴는 로마 교황 레오 3세와 손을 잡고 정당한 후계자가 없음을 이유로 로마 귀족들의 황제가 되었고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어 명목상으로 서로마 제국을 부활시켰다.

그래서 이미 망한 자들이긴 하나 정통성이 있던 자들에게 인정을 받은 서로마 제국인들은 로마 그 자체인 동로마를 무시하기도 했으며 그리스인들의 제국[15]으로 멸칭하기도 했다. 게르만 귀족들은 로마 귀족[16]들이 가지기도 했었던 대농장을 더욱 귀족적으로 발전시켜 장원으로 구성하였다. 게르만 귀족들에겐 영지 안에 사는 사람들을 그냥 착취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중세 농민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는 농노가 되었고 그들은 귀족들에게 인두세, 상속세, 혼인세 등 온갖 세금을 납부했다. 또한 게르만 귀족은 그들에 대한 재판권이 있었다.

귀족들이 평민들을 압도하는데 실패한 중화권[17]에서도 귀족적인 문화가 잔존했을 때는 귀족이 지배하던 다른 지역들과 비슷한 성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도 사무라이라는 군사 귀족이 탄생하였으나 그 역할을 하던 귀족이 따로 있었고 사무라이는 본래부터 귀족 출신이 아닌 탓인지 다른 귀족들과 달리 위세[18]가 그리 강하지 못하였다. 에도 막부까지 사무라이가 귀족 태생들 앞에서 무례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다이묘(아사노 나가노리)조차 할복해야 했을 정도였다.

물론 이것이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귀족들의 힘과 권위가 약해지면 사무라이가 귀족을 무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귀족 태생인 사무라이들도 있었기에 그들의 세력이 강해지면 그냥 사무라이 태생인 사무라이들은 덴노(천황)와 구게(공가)가 권력이 없어도 굴복해야 했다.

신라골품제에 의거해 귀족층을 규정했으며 고구려, 백제 역시 고추가, 막리지, 대성팔족, 좌평 등에서 귀족 의식이 나타났다. 고려와 발해는 과거 중국식 작위를 도입하여 독자적으로 개조한 후 왕작, 오등작, 군호 등을 사용하였다. 조선은 명나라의 압력과 본격적인 한족식 중화 문물 수용으로 인하여 귀족 문화가 양반 문화[19][20]로 대체되었다.

유목민들 역시 귀족들은 평민들과는 달랐다. 칭기즈 칸에게 피해를 입은 귀족들은 미래에 황금씨족에게 복수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평민들은 조상이나 부모가 과거에 무엇을 당하든 내심 관심이 없었던 것[21]으로 보이며 칭기즈 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어서 서로 다르게 대처[22][23]했다.

몰락[편집 | 원본 편집]

하지만 시대가 발전하여 귀족 세력이 민중 세력을 제압하지 못하게 되면서 지위가 흔들리게 된다. 귀족들의 수장인 역시 시대의 변화로 귀족들에게 준 각종 이권을 회수하려 들었고 귀족들은 이를 견제하며 버텼다. 그래도 그들은 몰락하기 전까지 상당히 군사적이라 평민들보다 전쟁에서 유리[24]했다. 통념과 달리 귀족들이 조직한 군대[25]는 평민들이 조직한 군대를 능가했다. 평민들이 양적으로 우세하여 평민을 지지하는 주장이 널리 퍼졌으나 문제는 귀족들[26]은 당연할 수도 있으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을 자신들이 중시하는 가치를 획득할 최고의 기회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참전한 귀족[27]들은 그 전쟁의 피해가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커져서 세력에 회복하기 힘든 손상을 입었고 자본가와 민중들과의 경쟁에서 탈락함에 따라 현재는 과거에 비해 약간의 권리와 유산만을 가진 채 살고 있다. 물론 제대로 된 자본가 계층이 등장하지 않은 나라들[28]에서는 귀족 출신들이 상대적으로 더 자본가가 되어 세력[29][30]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을 수도 있다.

각주

  1. 혈통이 좋지 않으면 일반적으로 태생적인 사람들이 인정을 하지 않아서 귀족 같은 지위를 누려도 한계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5월 2일 내용에서 근본이 천하다고 멸시를 당한 한명련이 대표적인 예이다. 물론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유목민들조차 혈통을 따져서 한족화를 수용한 수당 귀족들까지 한고조의 혈통을 근거로 자신들보다 못하다고 평하기도 했으며 금나라 귀족들은 정강의 변 당시 송의 황족이 아닌 자는 높은 지위에 있어도 생활 보장이나 처첩 등은커녕 아예 죽게 내버려 두었다. 몽골 제국 역시 자신들과 다른 사회에 회의를 열고 고민을 해서 남송 공제 같은 황족은 귀족 대접을 하기로 결정하였으나 태생적 귀족이 아닌 금이나 송의 관료들은 별로 좋은 대우를 못받았다.
  2. 예를 들어, 원나라의 신분 제도에 남송인은 4등급인데 고려사 세가 충렬왕 2년 3월 29일 등을 보면 고려 여인들을 공녀로 뽑아 선물하거나 원나라 사서에서 가난한 몽골인 등이 존재하는 이유가 몽골 귀족들이 일반적으로 자민족을 포함해 평민들을 딱히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근대 시절 기후와 땅이 유리한 일본도 한반도에 비해 인구가 잘 늘지 않았는데, 귀족들의 평민 학살도 원인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사실 유목민들도 문화나 종교 등의 영향으로 귀족들이 평민 학살을 안 하거나 줄이게 된 민족들은 인구 부양을 위해 농경화가 진행되긴 하나 민족적 인구가 상당히 증가했다.
  3. 한족의 경우 유교의 영향으로 고대 이후 혈통에 의해 그 지위를 그냥 보장받는 귀족 계층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서민들도 시험이나 추천 등을 통해 관료가 되면 귀족과 비슷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물론 지역적으로 보면 중국 대륙 역시도 유목민 귀족에 의하여 귀족 세력이 지배했던 기간이 짧지 않다.
  4. 고대에는 귀족들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했던 그리스 도시들이나 귀족 계층과 평민 계층이 대등한 수준으로 대립했던 로마가 있다.
  5. 상무적 귀족들로 유명한 게르만족도 게르마니아를 보면 제사장 등이 귀족 취급이었다.
  6. 고대 일본의 여왕 등.
  7. 로마의 귀족들은 시간이 지나며 상당히 유동적이 된다. 본래 로마 귀족들 역시 태생적인 의식이 있었으나 시간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사라졌기에 이를 막지 못했다. 사실 동로마제국과 같은 로마의 후예들을 과거 서유럽에서 별로 인정을 하지 않던 이유인데 원래 로마인들과 언어까지 다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혈통적으로는 로마인들의 후계자인 이탈리아인들조차 언어가 본래 로마어와는 차이가 있다.
  8. 귀족들이 주도하는 게루시아 등의 존재. 사실 스파르타의 1등 시민들도 말이 시민이고 실질적으론 귀족에 가까웠다.
  9. 심지어 많은 로마 귀족들에게 우수하다고 생각되었다.
  10. 그리스인들은 본래 로마 귀족들이 사라지자 동로마 지역에서는 아예 주류 민족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11. 납에 의한 중독 등이 추측되기도 한다.
  12. 이들은 결국 부도덕한 기생 집단으로 전락했다고 한다.
  13. 외부인들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14. 태생적 로마 귀족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겐 로마 제국을 유지할 이유가 되는 정체성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제국을 분할했다. 예를 들어, 하층민 설도 있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를 4등분하여 4분 체제를 도입했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이를 고평가했으나 그의 통치 시기에는 이미 게르만, 페르시아 혹은 이탈리아 등의 다른 정체성들이 탄생하거나 영향을 주고 있었고 이들은 상대적으로 본래의 로마 제국을 딱히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국의 분열은 시간문제였다.
  15. 당시에는 비잔티움 제국이란 용어가 쓰이지 않았다고 한다.
  16. 이들은 상대적으로 태생적 권리가 부족했다.
  17. 진서》를 보면 한나라 때까지는 천자부터가 검을 착용하였으며 관료들까지 심지어 궁중에서도 검을 착용하지 않은 자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한나라가 망하고 진나라 시대가 되자 진검 대신 목검을 착용했고 사회에 무예에 대한 경시가 퍼졌다고 한다. 한반도 역시 고려까지만 해도 귀족이 대놓고 무력으로 타인에게 압력을 가하는 모습이 나온다.
  18. 사무라이도 원래부터 귀족 태생인 경우는 위세가 강했다.
  19. 그러나 사실상 주요 양반 가문은 고려 귀족 출신이라 청요직인 3사에는 경화사족이 임용되었고 그보다 못하면 성균관, 그보다 못하면 교서관에 임용되는 것이 관례였다. 무과의 경우에도 한양 양반 같은 평이하게 좋은 출신은 선전관, 그보다 못한 출신은 수문청에 임용되었다.
  20. 경화사족은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사대부들이자 지연과 학연에 따라 서울 인근에서 혼맥을 구축하여 정국을 좌우하던 벌열가·세도가의 일원이다.
  21. 심지어 황금씨족에 대한 동경으로 자민족이나 자국 귀족들의 복수를 방해하기도 했다.
  22. 평민 이하의 사람들은 그 집단의 사람들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만들어도 상관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대하였으나 귀족들하고 원수가 되면 다 죽여서라도 완전히 끝장을 냈다.
  23. 여진족 귀족들 역시 과거 명나라의 정벌(네르친스크 조약…중국, 연해주는 지켰지만… - 아틀라스뉴스) 때 목숨을 살려주는 은혜를 받은 자들은 몽골이나 여진, 만주의 누르하치 등과 대적하면서 그것을 충분히 갚고 갔다. 물론 원인을 제공한 침략자라서 그런지 진짜로 충성하지는 않았다.
  24. 양반처럼 상무적인 귀족이 아닌 자들조차 전투는 몰라도 전술, 전략, 보급 같은 전쟁의 지적인 부분에 능하여 일반적으로 평민들을 압도했다.
  25. The decline and fall of the British aristocracy》에 의하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귀족들이 일반인들보다 전공이 우월함은 물론 다른 사회계층에 비해 전사비조차 2배에 가까웠다. 가치관도 평민들이 보면 전쟁광처럼 보일 정도였다.
  26. 실제로 영국은 귀족 출신이 아니면 호레이쇼 넬슨처럼 능력이 좋아도 전공과 인기에 의한 압력에 의해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달할 때까지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으며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는 내심 평민들을 쓰레기로 생각했다. 흥미롭게도 세계 대전으로 귀족들이 몰락한 후에 서구권에서 대표적으로 평민들을 지지하며 소련군보다도 막강했던 프랑스군을 독일 귀족 출신 장군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완전히 박살을 내고 갔다.
  27. 사실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던 귀족들도 있었으나 국가 군사력의 상당 부분을 그들 세력이 차지하고 있어 타국 귀족들이 진지하게 나오자 어쩔 수 없이 전력으로 싸워야 했다.
  28. 예를 들어, 인도에서는 바니야라는 자본가 계층이 귀족들 대신 부를 차지하였으나 자본가 계층이 없던 한국에서는 양반 출신들이 대신 자본가 역할을 하여 부를 차지하였다. 공산권은 귀족이든 자본가든 정체성이나 문화 등이 사라지고 진짜 망한 경우가 많다. 가끔 백두혈통 등을 오인하기도 하나 북한의 백두혈통은 근본적인 출신을 따지면 민중 출신이다.
  29. 귀족 출신 자본가들은 순수 자본가 출신들과는 사상이나 문화가 다르다. 귀족적 유산이 남아있다고 보면 된다. "민중은 개·돼지"…자유경제원 '천민민주주의'와 일맥상통 : 네이트 뉴스 이것은 이회창 같은 양반 출신 자본가들이나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하는 주장을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이나 인도의 자본가 출신들은 비슷한 주장을 하더라도 자신들을 내세우지 귀족적 정체성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30. 사실 부모 문서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평민들도 평민적 특성이 있다. 대표적으로 평민인 묘지기 출신이 세운 북한을 보면 지배층들부터가 문화 자체가 다르다. 남한에 와서야 성추행이 범죄인 줄 알았다…여성 인권 유린 심각한 北 | 한경닷컴 성폭행 후 월북…"北에선 성폭력이 범죄인 줄도 몰라" - 노컷뉴스 그래서 지배층부터가 같이 하면서 용인하고 있기에 이런 문화가 당연하고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