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히토

아키히토
明仁
아키히토.jpg
인물 정보
다른이름 쓰구노미야 아키히토(왕세자 책봉 전)
헤이세이(연호)
출생 1933년 12월 23일 (90세)
일본 도쿄도 치요다구 고쿄
국적 일본
학력 가쿠슈인대학 법학부 정치학과 수료
직업 일왕
종교 신토
신체 165cm, A형
배우자 미치코 상왕비
가족 할아버지 다이쇼 일왕, 할머니 데이메이왕후(사다코)
아버지 쇼와(히로히토) 일왕, 어머니 고준왕후(나가코)
숙부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왕자,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왕자,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
숙모 세츠코 비, 키쿠코 비, 유리코 비
형제: 첫째 누나 히가시쿠니 시게코, 둘째 누나 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 셋째 누나 다카츠카사 가즈코, 넷째 누나 이케다 아츠코, 남동생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왕자, 여동생 시마즈 다카코
사촌동생: 고노에 야스코, 토모히토 왕자,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왕자, 센 마사코,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
자녀: 장남 나루히토 일왕, 차남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 장녀 구로다 사야코
며느리 마사코 왕비, 키코 비
손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 코무로 마코, 카코 공주
손자 히사히토 왕자
활동기간 1952년 왕세자 책봉
1989년 일왕 즉위
2019년 일왕 퇴임(상왕)
역대 일본 국왕
124대 쇼와 일왕 125대 아키히토 일왕 126대 나루히토 일왕
역대 일본국 국왕
1대 쇼와 일왕 2대 아키히토 일왕 3대 나루히토 일왕

소개[편집 | 원본 편집]

일본의 125대 국왕으로, 연호는 헤이세이(平成/평성)이다. 왕세자 책봉 전까지의 이름은 쓰구노미야 아키히토(繼宮明仁). 오시루시한자 榮이다.

출생과 성장[편집 | 원본 편집]

히로히토 일왕(쇼와)과 나가코 왕비(고준왕후)의 다섯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전까지 나가코 왕비는 줄줄이 딸만 4명을 낳아 ‘온나바라(女腹)’, 즉 ‘딸만 낳는 여자’라며 비난을 받고 있었으며, 심지어 신하들은 히로히토 일왕에게 “(후궁)을 들여 아들을 낳으라”고 권하며 후궁 후보들을 구체적으로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가코 왕비와의 금슬이 좋았던 히로히토 일왕은 이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이토록 애태우던 끝에 태어난 아들이니, 아키히토 왕자는 매우 귀한 아들이었다. 본래 일본 왕실의 자녀들은 갓난아기 때부터 부모와 분리되어 유모와 시종들에 의해 양육되는 것이 오랜 전통이었으나, 아키히토 왕자는 3살까지 부모의 곁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왕실의 전통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어서인지, 3살부터는 부모의 곁에서 떨어져 자라났다. 그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아키히토 왕자는 남동생 요시노미야 마사히토 왕자와 함께 거처했고, 누이들은 공주들의 거처에서 따로 양육되었다.

아키히토 왕자가 12살이 되던 1945년, 일본태평양전쟁에서 패전했고 많은 변화를 겪었다.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되던 일왕은 ‘인간선언’을 했고, 왕실은 실권을 잃고 상징적인 입헌군주로 전락했다. 또한 2년 후인 1947년, 방계 왕족들과 화족(귀족)들은 모두 평민으로 강등되었다(신적강하). 아키히토 왕자의 숙부 3명과 그의 일가들까지는 왕족 신분을 유지했지만, 그보다 더 먼 친척들은 이제 평민이 된 것이다. 방계 왕족에게 시집갔던 8살 위의 큰누나 히가시쿠니 시게코도, 이때 평민으로 강등되어 한동안 많은 고생을 했다. 그러나 오랜 특권의식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 신적강하 이후로도 옛 왕족들과 귀족들의 콧대는 높았다.

새로운 시대에 왕실이 폐지되지 않고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여러 모로 개혁이 필요했고, 히로히토 일왕은 살아남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미국영국을 적대시했던 이전과 달리, 그는 큰아들 아키히토 왕자에게 미국인 가정교사를 붙여주었다. 아키히토 왕자를 맡았던 엘리자베스 바이닝 부인은 미국인 개신교(퀘이커) 신자로, 영어, 서구식 예절, 기독교 등에 대해 가르쳤다. 영어 시간에는 아키히토 왕자에게 ‘지미(Jimmy)’라는 영어 이름을 주기도 했다. 처음에 아키히토 왕자는 거절했지만, 바이닝 부인이 거듭 권하자 받아들였다. 그리고 바이닝 부인은 아키히토 왕자에게 자립심과 독립심을 길러주기 위한 교육도 했다. 왕족으로 태어나 주변 사람들의 시중을 받는 것에 익숙하던 아키히토 왕자에게, 이는 아주 신선하고 새로운 자극이었다. 아키히토 왕자는 바이닝 부인을 은사(恩師)로서 각별히 생각하여 훗날 자신의 결혼식에도 그녀를 초대했고, 그녀가 미국으로 돌아간 후로도 해마다 그녀의 생일이면 주미일본대사관을 통하여 편지선물을 보내주곤 했다.

1952년, 아키히토 왕자는 정식으로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의 여왕 즉위식에도 참석했고, 해외 여러 나라를 순방했다. 이렇게 공무에 바쁘다 보니 등교하지 못하는 날이 많아, 가쿠슈인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수료했다.

결혼과 가정[편집 | 원본 편집]

본래 왕족의 결혼 상대는 왕족 내지는 화족뿐이었다. 아키히토 왕세자의 어머니 나가코 왕비도 방계 왕족 출신이고, 숙모들도 모두 화족 가문의 딸들이었다. 아키히토 왕세자의 첫째 누나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패전 이전에 방계 왕족에게 시집갔고[1], 셋째 누나 다카츠카사 가즈코ㆍ넷째 누나 이케다 아츠코ㆍ여동생 시마즈 다카코가 시집간 가문은 옛 화족 가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옛날처럼 ‘어른들이 정해주는 대로 왕족이나 화족과 결혼’하는 것은 새로운 왕실상에 어울리지 않았고, 특히 방계도 아니고 차기 일왕이 될 왕세자가 그렇게 해서는 더욱 곤란했다. 그래서 개혁파 인사들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왕세자비 상’에 어울리는 여성을 찾기 위하여 명문 여학교 재학생ㆍ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물색했고, 마침내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 수석 졸업생인 쇼다 미치코를 발견한다. 평민 재벌가의 딸이며, 아름답고 총명하며, 서구적이고 현대적이었던 그녀는, 그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왕세자비’에 적격인 인물이었다.

개혁파 인사들은 아키히토 왕세자와 미치코가 자연스레 만나 가까워지도록 유도한다. 1957년 가루이자와(輕井澤)[2]테니스 시합에서 만난 20대 초반의 두 청춘 남녀는, 이내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되어 연애를 시작했다. 아키히토 왕세자는 손수 찍은 미치코의 흑백사진을 왕족들의 전시회에 출품하기도 했다. 왕세자라는 신분 때문에 자유로운 만남이 쉽지 않아서 주로 전화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아키히토 왕세자는 직접 미치코의 집에 전화를 걸었고, 어쩌다 통화하지 못하면 몹시 상심했다고 한다. 이렇게 연애하다가 마침내 아키히토 왕세자는 미치코에게 청혼한다. 쇼다 집안에서는 당황하여 거절하기도 했으나 결국 청혼을 받아들였다. 대재벌가인 쇼다 집안에서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혼수를 준비하여 미치코를 왕실로 시집보냈고, 아키히토 왕세자와 미치코는 마침내 1959년 4월에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새로운 형태의 국혼에 세간은 열광했고, 특히 미치코의 대중적 인기는 굉장했다.

결혼 후로도 미치코 왕세자비일본 왕실의 낡은 전통들을 깨뜨리고 파격적인 면모를 많이 보였다. 왕궁 대신 병원에서 출산했고, 자녀들을 자신의 곁에 두고 양육했고, 손수 만든 요리를 남편과 아이들에게 먹였고, 아이들의 도시락도 직접 만들곤 했다. 연애하던 시절 아키히토 왕세자는 미치코에게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자라났고,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주신 음식을 먹어본 적도 없다”고 말했고, 이에 놀라움과 측은함을 느꼈던 미치코는 약혼 발표 기자회견 때부터 “결혼하면 직접 카레라이스 같은 가정식 요리를 만들어서 가족들과 함께 먹고 싶다”고 밝혔다. 신세대 왕세자 부부가 보여주는 새로운 왕실상, 즉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여 친근하면서도 화목하고 따뜻한 가정의 모습에, 많은 일본인들이 호감을 가졌다.

그러나 미치코 왕세자비는 왕실에서 혹독한 시집살이를 당했다. 왕족들과 화족들은 평민 출신 왕세자비를 몹시 못마땅해하여 결혼 전부터 강력하게 반대했고, 반대를 뚫고 결혼이 성사된 후로도 조직적으로 미치코 왕세자비를 괴롭혔다. 특히 시어머니 나가코 왕비가 가장 미치코 왕세자비를 미워했다. 1989년 히로히토 일왕이 죽고 아키히토 왕세자가 즉위하면서 미치코 왕세자비도 왕비가 되었지만, 왕비가 된 후로도 그녀는 오랫동안 시달렸고, 2000년 나가코 대비가 향년 97세로 사망한 후에야 겨우 그녀의 시집살이는 끝났다.

자녀[편집 | 원본 편집]

아내 미치코 상왕비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 장녀 구로다 사야코: 1969년 4월 18일 (55세) 출생. 2005년 작은오빠의 친구인 구로다 요시키(黑田慶樹)와 결혼, 왕족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되었다. 자녀는 없다.

개념인[편집 | 원본 편집]

부친인 쇼와(히로히토) 일왕과는 다르게 평화를 사랑하는 반전주의자이다. 히로히토가 얼마나 인간쓰레기였냐면, 바로 2차 세계대전을 마구 일으키고 전쟁범죄를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죽는 그 날까지 자기가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것에 대해서 전혀 사과 한 마디조차 하지 않고 지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아키히토는 자기 부친이 이런 인간쓰레기다운 짓거리를 저질렀던 것에 대해 깊은 죄의식과 반성을 하며 전범자들의 유골을 안치한 야스쿠니 신사를 단 한 번도 참배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옥음방송을 복원해서 전쟁의 참상을 잊지 말자는 강력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

아키히토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서 사죄하고 평화를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밝혔다.

생전 퇴위[편집 | 원본 편집]

본래 왕위는 사망 후 물려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런데 2016년 8월, 아키히토 일왕은 “살아있는 동안에 퇴위(생전퇴위)하고, 큰아들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의사를 일본 정부에 전했다. 문제는 일본 왕실이 ‘왕실전범’이라는 법에 기반해 돌아가는데, 법에는 ‘생전퇴위’에 대한 법조문이 없었던 것. 일본 법학계에 비상소집이 걸려서 작업을 진행했으며, 특별법을 마련해 2017년 5월 말에 통과시켰다.[3]

이 건에 대해서 평화 헌법을 망가트리려는 아베 신조 총리를 견제하려는 행동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일왕이 권한이 없다지만, 일본이 입헌군주제인 이상 일왕이 관련된 건이 올라오면 우선순위가 무조건 맨 위로 꽂히게 된다. 그 이전까지 아베 총리가 자위대의 선공격 허용을 골자로 하는 개헌을 준비해왔으나, 생전퇴위 작업이 끼어들면서 우선순위가 내려간 것. 동시기에 사학비리를 비롯해 내홍을 겪으면서 아베 총리의 레임덕이 고개를 들고, 개헌의 가능성이 낮아졌다. 일 처리가 망가진 아베 총리가 일왕에게 쓴소리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4]

또한 왕위에 대한 욕심과 야심을 드러내는 차남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를 견제하려는 행동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후미히토 왕자와 그의 아내 키코 비는 이전부터 아키히토 일왕 내외의 비위를 잘 맞추고, 공무도 부지런히 하며, 게다가 2006년 늦둥이이자 ‘41년 만의 남자 왕손’인 히사히토 왕자를 낳은 후로 칭송을 받고 있었다. 후미히토 왕자는 대놓고 ‘고령의 노인이 국왕 직무를 수행하는 것은 힘드니까’라는 구실로 ‘일왕 정년제’를 주장하며 욕심을 숨기지 않았고, 궁내청과 우익 등도 “대를 이을 아들도 없고, 아내(마사코 왕세자비)도 아프다며 요양만 하고 있어 장래에 왕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듯하니, 나루히토 왕세자는 퇴위하라”라는 목소리까지 냈다. 그러나 아키히토 일왕 내외는 결국 장남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이다.

2019년, 아키히토 일왕이 퇴임하고 나루히토 왕세자가 새 일왕으로 즉위했다.

각주

  1. 둘째 누나 사치코는 생후 6개월에 요절.
  2. 일본의 유명한 휴양지.
  3. 日 정부, 아키히토 국왕 생전퇴위 법안 확정, 노컷뉴스, 2017.05.19.
  4. 아베 측 “일왕 역할은 기도 뿐” …충격받은 일왕, YTN, 2017.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