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다 아츠코

이케다 아츠코
池田厚子
인물 정보
다른이름 요리노미야 아츠코(결혼 전 이름)
출생 1931년 3월 7일 (93세)
일본 도쿄도 치요다구 고쿄(왕궁)
국적 일본
학력 가쿠슈인여자단기대학(문과 → 가정생활과)
직업 왕족(공주) → 일반인
종교 신토
배우자 이케다 다카마사
가족 할아버지 다이쇼 일왕, 할머니 데이메이왕후(사다코)
아버지 쇼와(히로히토) 일왕, 어머니 고준왕후(나가코)
첫째 언니 히가시쿠니 시게코, 둘째 언니 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 셋째 언니 다카츠카사 가즈코, 남동생 아키히토 상왕,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왕자, 여동생 시마즈 다카코
활동기간 1952년 결혼으로 왕족 신분 이탈
1988~2017 이세신궁 제관

일본의 前 왕족(공주). 나루히토 일왕의 넷째 고모. 오시루시는 국화벚꽃[1]이다.

출생[편집 | 원본 편집]

1931년 3월 7일, 히로히토(쇼와) 당시 일왕과 나가코 왕비(고준왕후)의 4녀로 태어났다. 어칭호는 ‘요리노미야(順宮)’, 이름은 ‘아츠코(厚子)’로 지어졌다.

요리노미야 아츠코 공주의 탄생은, 바로 위의 언니인 다카노미야 가즈코 공주의 탄생에 이어 일본 왕실과 정부에 더욱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히로히토 일왕의 부모인 다이쇼 일왕과 데이메이왕후(사다코)는 아들만 4명을 낳았으나, 그들의 맏며느리인 나가코 왕비는 첫째부터 넷째까지 줄줄이 딸만 낳았기 때문이다. 남성만이 왕이 될 수 있는 일본 왕실에서 나가코 왕비는 ‘온나바라(女腹、딸만 낳는 여자)’라고 불리며 크게 비난을 받았고, 심지어 신하들은 히로히토 일왕에게 “을 들여 아들을 낳으라”고 강력히 권유하며 실제로 구체적으로 후궁 후보들을 물색했다.

그러나 나가코 왕비와의 금슬이 좋았던 히로히토 일왕은 신하들의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신하들이 제출한 후궁 후보들의 사진을 도로 돌려주었고, 나가코 왕비에게는 “내게 남동생이 3명이나 있으니 괜찮다”고 말하며 안심시켰다. 결국 나가코 왕비는 2년 후인 1933년, 마침내 기다리고도 기다리던 귀한 아들 쓰구노미야 아키히토 왕자를 낳았다. 1935년에는 차남 요시노미야 마사히토 왕자까지 낳아, 미약하던 그녀의 입지는 강해졌고 ‘후궁 제도 부활론’도 잠잠해졌다.

성장[편집 | 원본 편집]

일본 왕실의 오랜 법도에 따라, 아츠코 공주는 친부모와 분리되어 첫째 언니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 셋째 언니 다카노미야 가즈코 공주, 1939년에 태어난 막내 여동생 스가노미야 다카코 공주와 함께 공주들을 위한 거처인 쿠레타케료(烏竹寮)에서 유모와 담당 시녀들에 의해 양육되었다.[2] 남동생들은 다른 거처에서 따로 지냈다. 히로히토 일왕 내외와 7남매는 주말에나 다함께 모일 수 있었다.

1937년 4월, 아츠코 공주는 일본 왕족과 화족(귀족) 가문의 딸들이 다니는 학교인 여자가쿠슈인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 여자가쿠슈인은 가쿠슈인 여자중등과ㆍ여자고등과ㆍ여자단기대학으로 개편되었다. 함께 학교를 다녔던 동기 중에는 배우 쿠가 요시코(久我美子)가 있다. 학창 시절 아츠코 공주는 맏언니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처럼 과학 과목을 좋아했고, 배구에도 흥미가 있었다. 또한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 어머니 나가코 왕비는, 아츠코 공주와 형제들에게 음악과 악기 연주도 열심히 가르쳤다.

태평양전쟁 당시에 일본미국유럽을 ‘귀축(鬼畜)’이라고 부르며 경멸하고 배척했지만 패전 이후로는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고, 히로히토 일왕은 미국인 엘리자베스 바이닝 부인을 장남 아키히토 왕세자의 가정교사로 초빙했다. 아키히토 왕세자뿐 아니라 나가코 왕비와 공주들도 바이닝 부인 등의 외국인 교사로부터 영어, 기독교, 서양식 예법 등을 배웠다.

바이닝 부인은 왕족들의 교육뿐 아니라 가쿠슈인 여자고등과의 영어 수업도 맡았다. 아키히토 왕세자에게 ‘지미(Jimmy)’라는 영어 이름을 주었던 것처럼 가쿠슈인 여고생들에게도 영어 시간에 사용할 영어 이름을 짓도록 했는데, 아츠코 공주의 영어 이름은 ‘패트리샤(Patricia)’였다. 바이닝 부인은 여러 여고생들의 틈에서 아츠코 공주를 보자마자 단번에 ‘아키히토 왕세자의 누나이구나!’라고 알아보았는데, 남매의 얼굴이 무척 닮았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얼마간의 신부수업을 거쳐 결혼했던 언니들과 달리, 아츠코 공주는 가쿠슈인여자단기대학(2년제)에 진학했다. 본래 문과에 입학했으나, 2학년 때 가정생활과로 전과하여 졸업했다.

결혼[편집 | 원본 편집]

1951년 7월, 20살의 아츠코 공주는 5살 연상(1926년생)인 이케다 다카마사(池田隆政)와 정식으로 약혼(노사이)을 했다. 당시는 할머니 사다코 대비가 사망한 지 고작 2달밖에 지나지 않았던 때였지만, 아버지 히로히토 일왕은 아츠코 공주의 약혼을 승인했다.

이케다 가문은 대대로 시코쿠 지역을 다스려온 다이묘 가문으로,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작위를 받아 화족이 되었으며, 패전 2년 후인 1947년의 신적강하로 인하여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1970년대 최고의 게이샤였던 이와사키 미네코의 외가인 아카마츠(赤松) 가문은 왜구와 상인을 거쳐 의사로 가업을 바꾸었는데, 이후 대대로 이케다 가문의 주치의를 맡아온 것으로 유명하다.

1952년 10월 10일 아츠코 공주는 다카마사와 결혼식을 올렸고, 왕족 신분을 이탈하여 평민 이케다 아츠코가 되었다. 어머니 나가코 왕비는 시집가는 아츠코의 혼수로 피아노를 챙겨주었다.

아츠코는 도쿄를 떠나 다카마사와 이케다 일족이 살고 있는 시코쿠 오카야마현으로 이주하여 신접살림을 차리게 되었는데, 공주가 그토록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시집가는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다카마사는 오카야마현에서 식물원동물원을 운영했다.

결혼 이후의 생활[편집 | 원본 편집]

아츠코는 (여동생 스가노미야 다카코 공주와는 대조적으로) 조용하고 수수하며 과묵한 성품의 소유자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말수도 적어서, 다른 사람들이 걸어오는 말에 대답하는 것 외에는 거의 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격 때문인지 그녀의 결혼생활은 그리 원만하지 못했다.

결혼한 지 13년이 지난 1965년 무렵에는 패혈증을 앓아 오카야마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에 장기 입원했다. 이미 히로히토 일왕과 나가코 왕비는 1928년에 차녀 사치코 공주를 잃었고, 1961년에는 장녀 히가시쿠니 시게코를 잃었기에, 아츠코마저 앞세울까봐 무척 노심초사하며 도쿄에서 오카야마까지 머나먼 길을 오가며 자주 아츠코를 문병했다. 부모의 정성 덕분인지 아츠코는 병에서 차츰 회복했지만, 끝내 아이는 낳지 못했다.

1988년에는 셋째 언니 다카츠카사 가즈코가 건강상의 이유로 이세신궁 제관(祭官)을 그만두었고, 아츠코가 뒤를 잇게 된다. (가즈코는 이듬해인 1989년에 사망했다.) 제관 외에도 일본적십자사[3] 오카야마현 지부 유공회 명예회장도 지냈다.

2006년 9월 6일, 남동생 아키히토 일왕의 차남 부부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히사히토 왕자를 낳았다. 후미히토 왕자 내외의 늦둥이일 뿐 아니라 일본 왕실로서도 ‘41년 만의 왕자 탄생’이어서, 아츠코도 평소의 성격답지 않게 이례적으로 “무사히 출산하였다니 마음이 놓입니다. 정말 축하드리며, 왕자가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랍니다.”라며 기쁘고 들뜬 마음을 공개적으로 표현했다.

2012년에는 아키히토 일왕의 2남 1녀 중 막내인 구로다 사야코가 보조 제관으로 부임하여 노쇠한 아츠코를 도왔다. 동년 7월 21일에는 남편 다카마사가 폐렴으로 오카야마현 구라시키시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85세) 2017년에 가즈코는 이세신궁 제관을 완전히 그만두었고, 보조 제관이던 사야코가 고모의 뒤를 이어 정식 제관으로 취임했다.

각주

  1. 개량벚꽃의 한 종류
  2. 둘째 언니 히사노미야 사치코(久宮祐子) 공주는 생후 6개월이던 1928년 3월에 요절했다.
  3. 아츠코의 증조할머니인 쇼켄왕후 때부터, 일본적십자사 관련 활동은 일본 왕실의 중요한 공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