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자

이방자
李方子
인물 정보
다른이름 결혼 전: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세례명: 마리아
호: 가혜(佳惠)
사시(私諡): 현덕정목온정자행황태자비(顯德貞穆溫靖慈行皇太子妃)
출생 1901년 11월 4일
일본 도쿄도 시부야구
사망 1989년 4월 30일 (향년 87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덕궁 낙선재
국적 일본 대한민국
학력 가쿠슈인 여학부 초등과
가쿠슈인 여학부 중등과
가쿠슈인 여학부 고등과(중퇴)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박사
대구대학교 명예박사
직업 왕족 → 일반인, 사회사업가
종교 불교, 신토가톨릭
신체 156cm, 46kg
배우자 영친왕 이은
가족 할아버지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할머니 하라다 미츠코
시할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 시할머니 여흥부대부인 민씨
아버지 나시모토 모리마사, 어머니 이츠코
시아버지 고종, 시어머니 명성황후, 순헌황귀비 엄씨
여동생 히로하시 노리코
사촌여동생 고준왕후(나가코), 세츠코 비
시아주버니 순종, 의친왕
형님 순정효황후, 김덕수
시누이 덕혜옹주
자녀: 장남 이진, 차남 이구
활동기간 1920년 결혼
1947년 왕족 신분 상실
1963년 대한민국 국적 취득

대한제국 최후의 황태자비. 일본 왕실의 방계 왕녀 출신이다. 본래 이름은 마사코(方子)였으나, 영친왕 이은(李垠)과 결혼하면서 남편의 성씨인 이(李)에 方子의 한국식 발음을 붙여 ‘이방자(李方子)’로 불리게 된다. 한국에서 장애인 복지와 교육에 힘썼다.

친정[편집 | 원본 편집]

친가[편집 | 원본 편집]

할아버지는 일본의 방계 왕족 구니노미야 아사히코(久邇宮朝彦)이며, 할머니는 아사히코의 시녀[1] 출신 측실인 하라다 미츠코(原田光枝子)이다. 아사히코는 4남이자 마사코의 아버지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 외에도 3남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 8남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朝香宮鳩彦), 9남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東久邇宮稔彦) 등을 낳았다.

구니요시의 장녀(셋째) 나가코(고준왕후)는 마사코보다 2살 어린(1903년) 사촌동생으로, 훗날 히로히토 왕세자와 결혼한다.

야스히코는 메이지 일왕의 8녀 후미노미야 노부코(富美宮允子) 공주와 결혼했고, 난징대학살을 총지휘한 악질 전쟁범죄자이다. 나루히코는 메이지 일왕의 9녀 야스노미야 도시코(泰宮聰子) 공주와 결혼했고, 패전 이후 일본 총리를 지냈으며, ‘히가시쿠니교’라는 신흥종교를 창립하여 교주가 되었다. 훗날 나가코 왕비의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는 어머니의 숙부이자 시고모부인 나루히코의 장남 모리히로(盛厚)와 결혼한다.

메이지유신 이전까지 왕족 남성들은 유서 깊은 사찰의 주지승을 지냈다. (대처승이라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그러다가 유신 이후로는 승려 대신 군인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마사코의 아버지 모리마사도 군인이 되었고, 이후에는 이세신궁의 제관(祭官)을 지내기도 했다.

모리마사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복 남동생 다카(多嘉)의 3남인 노리히코(德彦)를 양자로 들였다. 노리히코는 고준왕후의 큰오빠 구니 아사아키라(久邇朝融)의 장녀인 마사코(正子)와 결혼하여 1남 2녀를 낳았으나, 1980년 노리히코와 마사코가 이혼하면서 3남매는 어머니 마사코를 따라갔다. 이후 노리히코는 왕실과 혈연이 전혀 없는 다카오(隆夫)라는 사람을 양자로 들였고, 현재 다카오가 나시모토 가문의 당주(가장)을 맡고 있다.

외가[편집 | 원본 편집]

어머니 이츠코(伊都子)는 외교관 나베시마 나오히로(鍋島直大)와 후처 히로하시 나가코(廣橋榮子)의 차녀이다. 나오히로의 부임지였던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기에 ‘이탈리아(伊)의 수도(都)에서 태어난 아이(子)’라는 뜻의 ‘이츠코’라는 이름을 받았다.

나베시마 가문은 대대로 사가번(佐賀藩)[2]의 번주를 지내온 무사 가문으로, 임진왜란 때는 대규모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한 가문이기도 하다. 대정봉환, 메이지유신, 폐번치현(廢藩置縣)[3]으로 일본이 근대화된 이후로는 서구식ㆍ근대식 귀족제도인 화족 작위를 받았다.

높은 신분과 함께 나베시마 가문은 매우 부유했고, 차녀 이츠코를 왕족에게 시집보내면서 더욱 위상이 높아졌다. 부와 명예를 과시하기 위해 나베시마 가문은 이츠코에게 어마어마한 혼수를 준비해 주었는데, 프랑스 파리까지 하인을 보내어 각종 값비싼 보석제품을 주문제작할 정도였다.

나오히로의 4녀 노부코(信子)는 이츠코의 동복동생으로, 외교관 마츠다이라 츠네오(松平恒雄)와 결혼했다. 츠네오와 노부코의 장녀 마츠다이라 세츠코다이쇼 일왕의 차남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왕자와 결혼하여 왕자비가 되었다. 이후 노부코는 왕자의 장모이자 왕실학교인 가쿠슈인의 동창회장이라는 감투를 쓰고서, 왕실 및 화족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59년 아키히토 왕세자가 평민 재벌가의 딸 쇼다 미치코와 결혼하려 할 때는 강력한 반대운동을 펼쳤으며, 무사히 결혼이 이루어진 후로도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무리를 모아 미치코 왕세자비를 혹독하게 괴롭혔다.

나오히로의 6녀 도시코(俊子)는 측실 아사치요(朝千代) 소생으로, 일본 해군 마츠다이라 유타카(松平胖)와 결혼했다. 유타카와 도시코의 장녀 마츠다이라 요시코(松平誠子)는 (다이쇼 일왕의 아내 데이메이왕후의 주선으로) 의친왕 이강(李堈)의 장남 이건(李健)과 결혼하여 이성자(李誠子)라는 한국식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건과 이성자는 2남 1녀를 낳았으나 부부관계가 좋지 않았고, 결국 일본이 패망하고 데이메이왕후가 사망한 이후로 이혼했다. 이후 이건은 일본으로 귀화하여 ‘모모야마 켄이치(桃山虔一)’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했고, 친정으로 돌아온 이성자는 ‘마츠다이라 요시코(松平佳子)’[4]로 개명했다.

형제[편집 | 원본 편집]

마사코의 친형제는 1907년 4월 27일생인 여동생 히로하시 노리코(廣橋規子)가 유일하다.

노리코는 18세가 되던 1925년에 방계 왕족 야마시나노미야 다케히코(山階宮武彦)와 약혼했다. 다케히코는 1922년 방계 왕족 카야노미야 구니노리(賀陽宮邦憲)의 차녀인 사키코(佐紀子)와 결혼했으나, 사키코는 이듬해에 발생한 간토대지진에서 임신한 몸으로 사망했다. 다케히코는 정신적으로 크게 충격을 받아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고, 그 때문에 결국 노리코와 결혼하지 못하고 파혼했다.

이후 노리코는 1926년 외할머니 나가코의 남동생 히로하시 마사미츠(廣橋賢光)의 아들인 타다미츠(眞光) 백작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낳았으며, 1985년 8월 25일 도쿄여자의과대학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78세)

한편 노리코의 3남 요시미츠(儀光)는 한때 외가인 나시모토 가문에 양자로 입적되기도 했으나, 외할머니 이츠코와 사이가 나빠져 파양되었다. 이후 나시모토 가문은 (전술한대로) 노리히코와 다카오에 의해 계승된다.

어린 시절[편집 | 원본 편집]

1900년 결혼한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와 이츠코는 도쿄 시부야구의 저택에 신접살림을 차렸고, 이듬해에 이 신혼집에서 장녀 마사코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다. 참고로 나시모토노미야 저택을 지은 사람은 (훗날 마사코의 시할머니가 되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였다.

마사코는 활달하고 씩씩한 성격의 소녀였다. 그녀는 사내아이들처럼 전쟁놀이를 즐겼고, (아버지의 직업과 군국주의적이던 당시 시대 상황의 영향으로) 군가도 곧잘 따라 불렀다. 그녀의 적극성과 승부욕은 학교에 입학한 이후로도 계속되어, 운동 경기나 내기 같은 것을 할 때도 자신이 이길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겨루곤 했다.

1908년 4월, 마사코는 집 근처에 있는 가쿠슈인 여학부(女學部)[5] 초등과에 입학했다. 가쿠슈인은 일본 왕족과 화족의 자녀들을 위한 소수정예의 관립학교로, 남학교와 여학교로 나뉘어 있었으며, 마사코의 집에서 아주 가까웠다. 마사코와 같은 시기 가쿠슈인에 재학한 왕족으로는 메이지 일왕의 장손인 미치노미야 히로히토 왕자, 마사코의 사촌여동생인 나가코 등이 있었다. 마사코는 또래 왕족ㆍ화족 학생들과 어울려 즐겁게 학교생활을 했고, 여러 과목들 중에서 일본사와 미술을 좋아했다.

가쿠슈인 학생들은 시종들을 거느리고 등하교했는데, 학교에는 이러한 시종들을 위한 대기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왕족 시종 대기실과 화족 시종 대기실이 따로 있었고, 시종들은 온종일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쉬는 시간이면 도련님/아가씨의 머리를 새로 빗겨주거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곤 했다.

마사코가 재학하던 당시 가쿠슈인의 교장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이었다. 그는 군인 출신으로,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을 지휘하여 승리한 개선장군이었다. 훗날 마사코(이방자)는 노기와 그의 교육에 대해 “가쿠슈인은 교칙이 까다로워서, 특별한 날을 제외하면 화려한 옷과 리본 등의 장신구를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노기 장군은 무척 엄격하고 완고했다”라고 회상했다. (1984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 중에서) 그래도 마사코는 학교를 무척 좋아했고, 가쿠슈인에 다니던 학창시절을 ‘아무 걱정 없이 부모와 학교의 그늘 아래 행복하게 뛰놀던 시절’로 추억하곤 했다.

1912년 메이지 일왕이 사망하자, 오랜 기간 동안 성대하고 복잡한 장례의식이 거행되었다. 메이지 일왕의 시신은 도쿄를 떠나 교토에 묻혔다. 그런데 이때 충격적인 사건이 뒤따랐는데, 노기 마레스케와 그의 아내 시즈코(靜子)가 메이지 일왕을 따라가겠다며 동반자결한 것이다. 어른들도 무척 놀랐지만, 마사코와 가쿠슈인의 학생들은 은사(恩師)의 죽음에 더욱 충격을 받았다. 2년 후인 1914년에는 메이지 일왕의 정실 쇼켄왕후도 사망했다. 연이어진 죽음들을 보며, 마사코는 어린 나이에도 깊이 생각에 잠겼다.

초등과를 졸업한 마사코는 가쿠슈인 여학부 중등과로 진학했다. 이때부터는 교과목 외에도 여러 교양과목들을 배웠다. 와카(和歌)[6], 일본 전통악기, 프랑스어, 피아노, 꽃꽂이 등이었는데, 장래에 훌륭한 귀부인이 되기 위한 교육으로, 일종의 ‘신부수업’이었다. 마사코는 이러한 교육들도 즐겨 받았고, 어머니와 주변의 성인 여성들처럼 자신도 어느 왕족이나 화족의 아내가 되어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 왕세자와의 결혼이 결정되다[편집 | 원본 편집]

당시 일본에서는 고종의 아들 영친왕이 유학 중이었다. 1895년 명성황후 민씨가 일본에 의해 시해당한 이후로(을미사변), 조선 궁중에서는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嚴氏)가 실질적인 황후 역할을 했다.[7] 엄씨는 고종의 총애를 받아 영친왕을 낳았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사이에서 태어나 생존한 유일한 적자(嫡子)인 순종은 자녀를 낳지 못했다. 순종의 이복동생으로는 1877년생인 의친왕 이강과 1897년생인 영친왕 이은이 있었다. 의친왕의 생모인 귀인 장씨(貴人張氏)는 의친왕을 낳은 후 궁에서 쫓겨나 어렵게 살다가 죽었지만 영친왕의 생모인 엄씨는 궁중에서 세력이 있었으므로, 영친왕은 20살이나 연상인 이복형을 제치고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

1907년, 이토 히로부미는 불과 10살이던 영친왕을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강제로 데려갔다. 영친왕은 가쿠슈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육군유년학교로 옮겨졌고, 육군유년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아 군인이 되었다.

일본으로 끌려가기 직전, 영친왕은 약혼을 했다. 상대는 여흥 민씨 민영돈(閔泳敦)의 딸인 민갑완(閔甲完)으로, 영친왕과 생년월일이 같은 1897년 10월 20일생이었다. 민갑완은 정식 절차를 거쳐 간택된 신붓감이 아니었지만, 순헌황귀비 엄씨는 직접 민씨 집안에 반지 등의 약혼예물을 보내어 민갑완을 며느리로 점찍었다.[8] 하지만 일본은 영친왕과 민갑완의 약혼을 무시하고, 영친왕과 대한제국 황실을 더욱 일본화하기 위하여 일본 방계 왕녀들 중에서 영친왕의 신붓감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한편 다이쇼 일왕의 장남인 히로히토 왕세자는 1901년생으로, 그 역시 슬슬 결혼 상대를 찾아야 하는 시기였다. 일본 왕족들과 화족들의 사이에서는 ‘누가 히로히토 왕세자의 비(妃)가 될 것인가?!’가 화제로 떠올랐고, 히로히토 왕세자와 동갑내기인 마사코 역시 후보로 거론되었으며, 마사코의 아버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와 어머니 이츠코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궁중으로 불려간 모리마사는 전혀 뜻밖의 분부를 받는다. 다이쇼 일왕과 데이메이왕후 내외는 그에게 “큰딸 마사코를 조선 왕세자 이은에게 시집보내라”고 명했던 것이다. 일왕 내외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일본과 조선의 왕실을 굳건히 결합시키기 위해”라고 이유를 설명했지만 모리마사는 “왜 하필 내 딸이 그런 어려운 역할을 맡아야 하는가?!”라며 충격을 받았고, 귀가한 남편으로부터 그 소식을 들은 이츠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왕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영친왕과의 결혼[편집 | 원본 편집]

1916년 여름, 가쿠슈인 여학부 중등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마사코는 방학을 맞아 아버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어머니 이츠코, 여동생 노리코와 함께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녀는 무심코 신문을 주워들고 읽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이 조선 왕세자 이은의 신붓감으로 결정되었다는 뉴스가 대서특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무척 놀랐지만 부모와 마찬가지로 정략결혼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마사코는 신부수업을 받으면서, 동시에 한국어와 한국문화 등도 공부했다. 여름방학이 끝난 후에는 한국식으로 머리를 땋고서 등교하기도 했다. 가쿠슈인의 학우들도 마사코가 조선 왕세자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마사코의 결혼에 대하여 응원하고 지지하는 학우들도 있었지만 좋지 않게 생각하는 학우들도 있어서, 마사코는 학교에서도 다소 불편한 마음으로 지냈다. 이듬해 4월에 마사코는 가쿠슈인 여학부 고등과로 진학했으나, 결혼 준비를 위해 중퇴하는 바람에 졸업하지 못했다.[9]

한편 학교 밖에도 영친왕과 마사코의 결혼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조선에서는 장차 왕위를 이을 영친왕이 적국의 왕녀와 결혼한다는 사실에 무척 분노했고, 일본에서도 식민지 왕세자와의 결혼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때문에 두 사람의 집에는 수많은 협박전화와 편지가 날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와중에도 결혼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본래 1919년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으나 고종의 사망과 3.1 운동으로 인하여 결혼은 예정보다 늦추어졌고, 그동안 영친왕은 정기적으로 예비 처가인 나시모토노미야 일가에 드나들며 마사코와 그녀의 가족들을 만나곤 했다. 이 과정을 통해 영친왕과 마사코는 서로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1920년 4월 28일 마사코는 영친왕과 결혼식을 올렸고, 남편의 성씨에 이름 方子의 한국 한자음을 붙여 ‘이방자(李方子)’로 불리게 된다. 두 사람은 영친왕이 살고 있던 거처에 신접살림을 차렸고, 여느 신혼부부처럼 행복한 생활을 했다. 마사코는 곧 임신하여 이듬해 8월 18일 장남 이진(李晉)을 낳았다.

이진 왕자의 죽음[편집 | 원본 편집]

1922년 4월, 이방자와 이진 왕자는 영친왕을 따라 처음 조선을 방문했다. 두 사람은 조선 궁중 결혼식도 올렸고, 순종ㆍ순정효황후 윤씨ㆍ의친왕ㆍ의친왕비 김덕수(金德修)ㆍ덕혜옹주 등등 여러 조선 왕족들을 만났으며, 순헌황귀비 엄씨가 설립한 숙명여학교[10]와 진명여학교[11]도 방문했으며, 여러 행사에 참석하며 바쁜 나날들을 보냈고, 많은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즐겁기만 할 줄 알았던 첫 조선 방문에서 비극이 일어났다. 건강하던 이진 왕자가 일본으로의 출국을 앞두고 갑자기 아프기 시작하더니, 끝내 1922년 5월 11일 새벽 3시 15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12] 본래 조선 왕실에서는 아기가 죽으면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지만, 순종의 배려로 특별히 장례식을 치렀다. 장례식이 끝난 후, 이진 왕자의 묘지인 숭인원(崇仁園)은 할머니 순헌황귀비 엄씨의 묘지인 영휘원(永徽園)의 바로 옆에 조성되었다.[13]

생각지도 못한 갑작스러운 비극에, 영친왕과 이방자는 큰 슬픔에 빠져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방자의 친정 부모와 여동생 노리코도 큰 충격을 받았으며, 당시 여자가쿠슈인 재학 중이던 노리코는 학교에서의 작문에 ‘조카의 죽음’에 대해 쓰기도 했다.

이어진 비극들[편집 | 원본 편집]

이진 왕자가 사망한 이듬해인 1923년 9월 1일, 도쿄와 그 일대인 간토(關東)에서는 대지진이 일어났다. 이를 간토대지진이라고 한다. 지진이 발생한 시각이 점심시간이라서 대부분의 가정과 식당에서는 한창 불을 피워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일본의 전통가옥은 목조주택이어서, 지진도 지진이지만 화재 때문에 수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다행히 이방자와 영친왕 내외는 무사했고, 두 사람은 이방자의 친정으로 대피했다. 그러나 간신히 한숨 돌리던 것도 잠시,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다. 일본인들이 재일 한국인들을 수없이 학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거나 “한국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등등의 온갖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들이 퍼지면서,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조직하여 한국인들을 학살하고 다녔다. 영친왕은 깊은 분노와 슬픔에 잠겼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무력감을 느꼈고, 일본인인 이방자는 그런 남편을 볼 낯이 없어 괴로웠다. 그리고 일본 왕실에서 자신을 영친왕에게 시집보내면서 내세웠던 ‘양국 간의 화합과 화목을 위해’라는 명분이 거짓이라고 느껴져, 그동안 해왔던 노력이 모두 허무해졌다.

1926년 4월, 영친왕과 이방자는 다시 조선을 방문했다. 순종의 병세가 위중해졌기 때문이다. 부부는 여러 왕족들과 함께 각별히 신경을 썼지만, 결국 순종은 4월 25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편 영친왕의 이복여동생 덕혜옹주 또한 비극을 겪고 있었다. 덕혜옹주도 영친왕처럼 어린 나이에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오게 된 것이다. 이방자와 덕혜옹주는 1922년 서울에서 처음 만났고, 3년 만인 1925년에 도쿄에서 재회했다. 그 사이 10살 꼬마이던 덕혜옹주는 13살의 소녀가 되어 있었다. 이방자는 반갑게 어린 시누이를 맞이했지만, 발랄하고 천진난만했던 옹주는 눈에 띄게 소심해져 있었다. 아버지를 잃은 데 이어 어머니와도 이별하여 낯선 외국에, 그것도 아버지를 죽인 나라에 강제로 끌려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덕혜옹주는 일본 왕족과 화족(귀족)의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인 가쿠슈인에 편입되었다. 영친왕과 이방자는 옹주가 자신들의 집에 함께 살며 학교에 다니길 바랐으나, 일본은 옹주를 학교 기숙사로 보내버렸다. 어린 여동생마저 자신과 같은 고통을 당한 데 이어, 동생을 자신의 곁에 두고 돌봐주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마저 좌절되어 버리자, 영친왕은 무척 분노했다.

덕혜옹주는 자신도 아버지처럼 독살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내내 불안한 마음으로 생활했고, 17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를 잃고 장례마저 제대로 치르지 못한 후로는 더욱 상처를 받았다. 결국 옹주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고, 조발성치매증(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옹주의 이러한 사정은 아랑곳없이, 일본은 옹주를 대마도주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결혼시키려 한다. 영친왕과 이방자는 “옹주는 아직 어리고, 병을 치료해야 하며, 공부도 더 해야 한다”며 결혼을 반대했고, 당사자인 옹주도 이 결혼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일본의 압력으로 인해 결국 옹주는 1931년 5월 8일 다케유키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고 말았다.

둘째의 탄생[편집 | 원본 편집]

영친왕뿐 아니라 이방자도 덕혜옹주를 무척 가엾이 여겼고, 동시에 옹주가 처한 가혹한 환경에 화가 났다. 옹주의 결혼 전후로 이방자는 신체 이상을 느꼈는데, 처음에는 옹주의 결혼 문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줄로만 알았지만,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임신 때문이었다. 장남 이진 왕자를 잃은 후로 몇 차례 유산을 겪었던지라 이방자는 ‘제발 이번만큼은 무사히 출산하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며 각별히 조심했고, 마침내 1931년 12월 29일 차남 이구(李玖) 왕자를 낳았다. 10년 만에 둘째를 낳은 영친왕과 이방자는 무척 기뻐했고, 이구 왕자를 각별히 사랑하며 길렀다.

이구는 1930년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로 유학을 떠나 건축학을 전공했고, 1959년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줄리아 멀록과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자녀는 없고, 1982년에 이혼했다. 이구는 2005년 일본 도쿄에서, 줄리아는 2017년 미국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일본의 패전과 그 이후의 생활[편집 | 원본 편집]

1945년 8월 15일, 일본태평양전쟁에서 패전했다. 패망한 전범국인 일본은 미국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일본 사회에는 많은 변화와 혼란이 찾아왔으며, 그것은 일본 왕실화족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여러 나라들처럼 일본의 왕실도 폐지될까봐, 히로히토 일왕은 왕실을 개혁하려고 여러 시도를 한다. 패전 이전의 일본은 일왕에 대한 신격화가 국교(國敎)였지만, 히로히토 일왕은 ‘인간선언’을 하고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서민 코스프레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아버지 다이쇼 일왕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방계 왕족들과 화족들을 모두 평민으로 강등했다(신적강하). 이방자의 친가인 나시모토노미야 가문과 외가인 나베시마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하루아침에 신분과 재산을 잃은 방계 왕족들과 화족들은 경제적 어려움과 정신적 충격을 겪었다. 의친왕의 장남 이건은 식당을 차려 단팥죽 장사를 시작했는데, 영친왕과 이방자는 이건을 찾아갔다가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아서 말도 걸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아내 이성자(요시코)와 불화하던 이건은 끝내 이혼했고, 다케유키도 덕혜옹주와 이혼했다. 옹주는 외동딸 마사에(正惠)를 낳은 이후 조현병이 더욱 심해졌고, 일본의 패전 이후로 다케유키는 백작 작위와 재산을 잃어 옹주를 돌봐줄 여유가 없었다. 덕혜옹주는 도쿄도립 마츠자와(松澤)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영친왕과 이방자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옹주의 병원비를 내주었다. 덕혜옹주와 다케유키는 1955년에 이혼했는데, 정신이 온전치 못한 옹주를 대신하여 오빠 부부인 영친왕과 이방자가 다케유키와 대화하여 이혼에 협의했다.

패전 이후 영친왕과 이방자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초대 대통령이던 이승만대한제국 왕족들을 무척 경계하며 그들의 귀국을 방해했다. 결국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기 전까지, 왕족들의 한국행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영친왕은 1958년부터 뇌졸중을 앓기 시작하여 실어증 증세까지 보였으며, 이후로도 점점 건강이 나빠졌다.

한국으로의 귀국과 말년[편집 | 원본 편집]

1963년, 드디어 영친왕과 이방자는 한국 국적을 얻고 한국으로 돌아와 살게 되었다. 하지만 영친왕은 병이 깊어 의식조차 제대로 없는 상태였고, 투병 끝에 1970년 세상을 떠났다.

이방자는 병든 남편을 돌보는 한편, 이전부터 남편과 구상해왔던 장애인 복지사업을 시작했다. 1963년에는 신체장애자재활협의회 부회장에 취임했고, 1966년에는 자행회(慈行會), 1967에는 명휘원(明暉園)을 설립했다. 특수학교도 2개나 설립했다. 그녀가 1971년 설립한 자혜학교(慈惠學校)와 1982년 설립한 명혜학교(明惠學校)[14]는 오늘날까지도 장애아들을 교육하고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사회사업에 헌신했던 이방자는 한국일본 양국에서 큰 존경을 받았다. 이러한 공로로 그녀는 생전에 국민훈장모란장을, 사후에는 국민훈장무궁화장을 수훈했다. 그밖에도 여러 단체에서 상을 받았다.

사망[편집 | 원본 편집]

1989년 4월 30일, 서울 창덕궁 낙선재에서 운명하였다. 시누이 덕혜옹주가 사망한 지 불과 9일 만이었다. 이방자의 장례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영원(英園)에 영친왕과 합장되었다. 일본에서는 아키히토 당시 일왕의 막내 숙부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와 부인 유리코 비가 방한하여 조문했다.

매체[편집 | 원본 편집]

  • 2006년 11월, 일본 후지TV에서 영친왕과 이방자의 부부애를 그린 드라마 <무지개를 이은 왕비(虹を架ける王妃)>가 방영되었다. 칸노 미호(菅野美穗)가 이방자를, 오카다 준이치(岡田准一)가 영친왕을 연기했다.
  • 2016년에 개봉된 한국 영화 <덕혜옹주>에서는 토다 나호(戶田菜穗)가 이방자를 연기했다.

각주

  1. ‘뇨보(女房)’라는 지위의 시녀였다.
  2. 오늘날의 사가현(佐賀縣)
  3. 에도 막부 시절의 행정구역인 번(藩) 제도를 폐지하고 오늘날과 같은 도도부현 체제로 개편함
  4. 아키히토 일왕의 둘째 손녀인 카코 공주한자가 같다.
  5. 이후 ‘여자가쿠슈인’을 거쳐 오늘날의 가쿠슈인 여자중등과ㆍ여자고등과ㆍ여자대학으로 개편된다.
  6. 일본의 전통 시(詩)
  7. 숙종의 후궁 장희빈사약을 받아 처형된 후로, 조선 왕실에서는 후궁이 왕비로 승격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다.
  8. 이후 민갑완은 1968년 2월 19일에 향년 70세로 사망할 때까지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말년에 <백년한(百年恨)>이라는 회고록을 남겼다.
  9. 다만 이것은 그리 특별한 행보가 아니었고, 당시 가쿠슈인에는 마사코 외에도 학업을 중단하고 부모와 집안 어른들이 정해주는 대로 (정략)결혼하는 여학생들이 많았다.
  10. 現 숙명여자중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 숙명여자대학교의 전신
  11. 진명여자고등학교. 본래 진명여자중학교도 있었으나 1987년 폐교되었다.
  12. 이진 왕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린 아기가 먼 길을 너무 무리하게 여행해서’라거나 ‘우유(분유)가 잘못되어서’라는 가설 외에 ‘독살설’도 있다.
  13.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14. 1985년부터 가톨릭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에서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