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창덕궁
창덕궁-3.jpg
건축물 정보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소유 문화재청
대지면적 556,062.4 m2
문화재 정보
종목 사적 제122호
유네스코 세계유산 문화유산 816
지정일 1963년 1월 18일
1997년 (세계유산)

昌德宮 / Changdeokgung

서울특별시에 있는 조선 시대 5대 궁궐 중 하나로서, 사적 제 122호이다. 1997년 대한민국의 고궁으로는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번지이다. 창경궁과 함께 동궐(東闕)이라고도 불렀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창덕궁은 조선에서 두 번째로 지어진 궁궐로서 1404년에 짓기 시작해서 1405년(태종 5년)에 완공된다. 당시 경복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궁궐을 지은 이유는 1, 2차 왕자의 난 때문이다. 태종은 왕자의 난을 통해 경복궁에서 자신의 형제들을 죽였다. 정종은 왕자의 난 때문에 개성으로 환도를 하기도 했으며, 태종 또한 그러한 궁궐에서 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 때문에 지은 새로운 궁궐이 바로 창덕궁이다. 여기에는 경복궁이 자신의 라이벌이던 정도전의 작품이었던 점도 한몫했다.

창덕궁을 건축한 사람은 경복궁 경회루, 성균관 문묘, 청계천 공사에 참여한 박자청(朴子靑)이었다. 당시 조선 최고의 건축가였던 그는 태종의 신임을 받아 창덕궁 인정전을 세우게 된다. 창덕궁의 배치를 보면 직사각형 배치의 경복궁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자청은 풍수지리와 더불어 자연의 산세를 훼손하지 않으려 하였고, 이에 응봉과 구릉을 따라 전각을 짓게 된다. 또한 풍수지리적으로 뒤에는 북악산 매봉이 있고 앞으로는 금천이 흐르는 배산임수를 이루고 있다. 창덕궁은 주변 지형과 매우 자연스러운 곡선적인 조화를 이루는 궁궐인 것이다.

원래 태종은 창덕궁도 경복궁처럼 직사각형 형태로 지으려 했지만 박자청은 고집스럽게 계속 사다리꼴 모양대로 짓게 된다. 당시 창덕궁 모양의 궁궐 형태는 이때까지 전례없던 일이었다. 태종은 창덕궁의 배치가 맘에 들지 않았는지 1419년(세종 1년)에는 한 달동안 귀양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박자청은 계속 자신의 생각대로 궁궐을 지어나갔으며 그것이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다.

원래 공식적인 법궁은 경복궁이었지만, 조선 초기부터 많은 임금들은 경복궁을 피하고 창덕궁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한양에 있던 모든 궁궐들과 종묘, 사대문 등의 전각들이 불타 버렸다. 이때 가장 먼저 다시 지어진 것이 창덕궁이다. 왜 법궁이었던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을 먼저 지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경복궁은 규모가 매우 커서 재건하기에는 부담이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창덕궁은 재건하기가 수월하였기 때문이다. 창덕궁은 1605년(선조 38년)에 재건을 시작해 1609년(광해군 1년) 10월에 주요 전각들이 복구된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던지 이듬해 2월부터 9월까지 다시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후 창덕궁은 조선 후기의 정궁(正宮)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창덕궁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랜 기간동안 궁궐로 쓰이게 된다.

조선 말기에는 근대화에 따라 전등과 차고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1907년 순종이 즉위하고 창덕궁에 머물게 되면서 황궁의 지위를 얻게 된다.

일제강점기에는 돈화문 앞에 율곡로를 뚫으면서 창덕궁과 종묘가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창덕궁의 많은 전각들을 훼손하였으며 특히 1917년에 발생한 화재에 경복궁의 전각을 옮겨 지으면서 훼손이 심해졌다.

해방 이후 김영삼 정부가 복원 사업을 진행하였다. 일제의 훼손이 있었음에도 많은 전각들이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고 조형미와 주변환경과의 조화를 인정받아 1997년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

상세[편집 | 원본 편집]

창덕궁 관리의 위엄(...)

들어가보면 여러 모로 놀라게 된다. 우리 조상이 물려주신 것에 대해 보존해야 한다는 관념이라고는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 없는 다른 유적들과는 달리 여기는 진짜 다른 나라의 고궁들과 견주어도 거의 전혀 밀리지 않을 보존 시스템과 관리 수준을 자랑한다. 진짜 곳곳에 경비를 삼엄하게 세워놓았고 곳곳에 유네스코의 마크가 달린 설명용 표지판들, 곳곳에 달려있는 CCTV들이 숭례문 방화범 같은 놈이 와도 안심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철저하고 믿음직하게 관리하고 있다. 유네스코의 네임 클라스를 엿볼 수 있는 부분.

안에 들어가보면 가이드들이 전부 개량한복을 입고 있다. 근데 겨울일 경우 누비솜옷을 넣은 거의 패딩에 가까운 두루마기를 걸치고 있긴 한데...솔직히 추워보인다.

경복궁과의 비교[편집 | 원본 편집]

경복궁과 창덕궁을 비교하면 여러 모로 재미있는 차이점이 많은데 원래 조선의 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대신 창덕궁에서 왕이 기거하게 되고 그 오랜 기간 동안 거의 훼손없이 보존되고, 흥선대원군경복궁이 중건되어 새로 짓게 되었다가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돚거질로 상당 전각을 잃게 되고 상당 부분 훼손되는 바람에 다시 일부 건물들을 현대에 새로 지었는데 이래서인지 경복궁은 가보면 궁궐을 갓 짓고 난 후인 조선 건국 직후를 연상시키고 창덕궁은 오랜 세월의 향기가 느껴지는 대한제국 때의 개화기의 꿈과 한이라는 양면의 감정이 느껴지는 곳이다.

상술했듯 경복궁은 조선 건국 직후를 연상시키는 곳으로 건물들도 전반적으로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양식들을 연상시킨다. 이는 경복궁 중건이 개화기 이전 그 흥선대원군의 유명한쇄국 정치 시절에 지어진 건물이기 때문. 하지만 창덕궁은 말 그대로 조선 초기부터 그대로 내려온 건물로서 시대의 유행에 따라 건물 내부나 그 외의 것을 조금씩 바꿔나갔는데 이래서인지 창덕궁 내부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개화기의 고궁을 연상시킨다. 양 궁궐이 지어진 시기를 비교해 보면 아이러니.

게다가 아래 사진들을 보면 알겠지만 특이하게도 대부분의 현판들이 글씨가 황금색으로 써져 있다. 경복궁의 현판 글씨가 전부 흰색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특이한 점. 참고로 황금색은 창덕궁에 곳곳에 쓰이고 있는 색이기도 하다. 인정전 항목에서 후술.

구조[편집 | 원본 편집]

돈화문 (敦化門)[편집 | 원본 편집]

돈화문.jpg
창덕궁의 정문이다. 경복궁의 정문이 광화문이라면, 창덕궁의 정문은 돈화문인 셈.

돈화문 앞의 넓은 뜰의 끝부분에 돌계단으로 내려갈 수 있는 음푹 파인 곳이 있는데, 여기서 사진찍을때 명당이다.

창덕궁 입구3.jpg
누가 창덕궁 입구 아니랄까봐 입구부터 관리가 삼엄하다. 4개국어로 위험물품을 금지하고 있으며 수거통도 둔다. 돈화문에 있는 이 출입관리소에서 표를 끊어야 창덕궁에 입장할 수 있다.

돈화문 안에 들어가면 여러 나무들이 담을 두르고 우리를 맞이한다.

금천교 (錦川橋)[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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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에 들어가면 볼 수 있는 첫번째 수상 구조물. 1411년에 지어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궁궐 돌다리이다.

단 지금은 다리 밑에 물이 흐르지 않는다.

길이 12.9m, 폭 12.5로 국왕의 행렬이 지나갈 수 있는 넓은 규모를 하고 있다.[1]

진선문 (進善門)[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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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에서 돈화문을 통해 들어가면 볼 수 있는 두번째 문.

궐내각사 (闕內各司)[편집 | 원본 편집]

왕실 관련 집무실로, 지금의 중앙청사랑 비슷한 개념의 일을 하는 곳이다.[2] 규장각, 봉모당, 서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연하지만 종로에 있는 성균관과는 다른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없어졌지만, 창덕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이후 지속적으로 복원한 결과 2005년 거의 복원을 완료했다.[3]

창덕궁 향나무2.jpg
창덕궁 향나무2.jpg
궐내각사 안에서 자라고 있는 향나무.

봉모당 앞에는 천연기념물인 750년 넘은 창덕궁 향나무가 살고 있는데,이건 뭐 살아도 살아있는 것 같지가 않네... 궁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이 나뭇가지를 향으로 썼다고 한다.

인정전 (仁政殿)[편집 | 원본 편집]

금천교와 진선교를 통해 들어가면 왼쪽에 인정문이 보인다. 이 인정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으로 창덕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들 중에선 가장 먼저 볼 수 있다.

인정문 (仁政門)[편집 | 원본 편집]

인정문.jpg
창덕궁 외행랑채.

인정문은 인정전과 창덕궁 외행랑 뜰을 연결하는 관문이다. 외행랑의 경우 원래는 건물이 존재했으나 지금은 기둥만 남아있다.

보물 제813호이다.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로 이루어져 있다.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총 8명의 임금이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1744년(영조 20년)에 인근에 위치한 승정원에 화재가 발생하며 함께 소실되기도 했지만 이듬해 복구된다.

인정전[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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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본궁이다. 경복궁에 근정전이 있다면 창덕궁에 인정전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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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전 앞에는 경복궁 근정전과 마찬가지로 품계석이 놓여있는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근정전의 품계석은 흥선대원군 때 만들어진 것이고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애초에 품계석이란 정조가 문신과 무신이 품계의 위아래에 대한 개념없이 뒤죽박죽 개판으로 서자 이것을 정리하기 위해 최초로 세운 것으로 상술했듯이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는데 정조는 임진왜란 전의 왕이었더라, 후의 왕이었더라? 당연히 품계석을 최초로 세운 곳은 창덕궁이 되었다. 이것이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창덕궁의 것을 베껴와서 만든 것.

근데 한 가지 웃기는 점은 당연히 창덕궁의 품계석이 경복궁의 것보다 훨씬 오래되었는데 경복궁 품계석은 현장학습을 온 무개념 중학생들이 발로 차서(...) 깨지는 바람에 상당수 훼손되었는데 창덕궁의 품계석도 경복궁과 마찬가지로 일반인들이 만져볼 수 있음에도 거의 훼손이 없다시피하다. 하긴 이게 훼손되면 유네스코의 체면이 안 서긴 하겠다만…….

바닥을 보면 알겠지만 바닥을 포장할 때 박석을 쓴 경복궁과는 달리 이쪽도 상당히 고르지 못한 편이긴 하지만 비교적 사각형에 가까운 돌들로 포장해놓았다. 사진에 보이는 쇠고리는 인정전에서 행사가 있을 때 인정전 지붕에서부터 길게 늘어지는 거대한 차일(천막)을 걸어놓을 때 쓰던 고리이며 이는 경복궁 근정전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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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에는 향실이 있다.향실이 서쪽 행랑에 있는 것은 인정전 서쪽에 제례 공간인 선원전이 있기 때문이다.[4]

인정전1.jpeg 인정전2.jpg
창덕궁 인정전의 내부 모습.

위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붉은색 커튼이 쳐져있는 근정전과는 달리 황금색의 커튼이 쳐져있다. 이는 조선대한제국 때에 고종 황제가 황제를 선포하면서 여태까지 황제의 색이라서 중국 눈치보느라 쓰지 못하고 그 다음으로 가장 높은 색인 붉은색을 대신 썼었던 색인 황금색을 이제야 마음대로 썼다는 것을 시사한다. 일단 고종 황제의 곤룡포도 이전까지 왕의 곤룡포의 색인 붉은색이 아닌 황금색으로 된 곤룡포를 입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숙장문 (肅章門)[편집 | 원본 편집]

Sookchangmoon.jpg

창덕궁 외행랑 뜰에서 북쪽 인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곧장 직진해서 가면 볼 수 있는 문. 단층에 3개의 문을 두고 있다. 다포계 공포이며, 추녀마루에 잡상이 있다.

1475년(성종 6년), 좌찬성 서거정이 이름을 지었다. 동궐도에 따르면 숙장문과 진선문 사이 좌우 행랑에는 내병조, 호위청, 상서원 등이 있었다. 하지만 숙장문 주변 행각은 일제에 의해 화단으로 훼손었으며, 1996년 복원되었다. 어찌보면 조선시대 때 가장 번잡했던 곳이 지금은 쓸쓸한 곳이 된 셈.

내의원 (內醫院)[편집 | 원본 편집]

창덕궁 내의원.jpg
궁중에서 쓰이는 약을 조제하던 관청이다.

희정당 (熙政堂)[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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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 중 하나.

보물 제815호인 창덕궁 희정당은 외형은 조선 최고의 건축 양식을 담았으며 과연 그렇게 굉장히 화려한 단청을 자랑하면서도 단조롭지도 거추장스럽지도 않고 굉장히 균형잡힌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독특하게도 세세하게 뜯어보면 서양식 건축 양식을 부분부분 도입했으며 내부는 완전히 서양식 집기로 도배되어있다.

희정당의 원래 이름은 숭문당(崇文堂)이었다. 1496년 12월 연산군 때 숭문당이 소실되자 고쳐 희정당이라 칭하였으며,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다가 1917년 대화재 이후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을 이전하여 1920년 12월에 재건된다.[5]

원래 희정당은 창덕궁의 내전에 속한 건물이었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 임금의 침전이 딸린 편전으로 쓰이다가 개화기에 이르러 어전회의실로 사용하게 된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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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당의 정문에는 마차나 어차(임금이 타던 자동차)를 몰고 임금을 태운 채 직접 문 앞까지 배웅할 수 있는 일종의 차도가 있다. 여기 위에 올라서 보면 우선 처마의 화려한 단청에 감탄을 자아내게 되고, 또 이 근대 서양문물과 전통방식이 혼합된 듯한 이색적인 구조물을 보면서 진짜로 순종 황제가 금방이라도 캐딜락을 타고 나간듯한 기묘한 느낌을 받게 된다.

희정당 내부.jpg 희정당 풍금.jpg
희정당 내부의 모습. 희정당 내부에 있는 풍금.

보면 알겠지만 내부에는 서양식 집기들이 있다. 물론 왕이 사용하던 도구들로 대단히 고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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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당 오른쪽 끝에 난 작은 문을 통해 들어가면 대조전 뒷뜰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나오는데 여길 통해 들어가면 매화가 만발해 있어 굉장히 아름답다.

대조전 입구2.jpg
대조전 뒷뜰 매화밭 계단에 앉아 본 모습.

대조전 (大造殿)[편집 | 원본 편집]

대조전을 정면에서 본 모습.
대조전을 뒷뜰에서 본 모습.

희정당이 창덕궁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이라면, 이쪽은 창덕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창덕궁 대조전은 국왕과 왕비가 같이 자던쓰던 침전으로 조선 시대 내전 중 창덕궁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이며 보물 816호이다. 국왕의 침전인 강녕전과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들 별도로 두는 경복궁과는 달리 창덕궁은 대조전을 국왕과 왕비가 같이 사용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화재로 소실된 후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7]

지붕을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창덕궁, 아니 조선 시대의 모든 기와집과는 다른 특이한 점이 보이는데 지붕의 기왓장을 고정시키는 데 쓰는 회반죽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 즉 용마루가 없는 희한한 형태인데 이 양식을 '무량각 지붕'이라고 한다. 이 양식은 경복궁의 강녕전, 교태전, 그리고 창경궁의 통명전에서도 보이는 양식으로 이 전각들은 왕과 왕비의 침전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즉 조선시대의 국왕과 왕비의 침전에는 용마루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무량각 지붕을 만들기 위해서는 꼭대기에 기역자처럼 생긴 특수한 기와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만드는 데에 엄청난 돈이 든다고 한다.

궁궐 침전에 왜 용마루가 없는지는 미스테리. '으로 상징되는 왕의 침소에 용마루가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라는 설은 전해지는 속설일 뿐 확인할 길이 없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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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희정당 내부가 화려한 서양식이기로 유명하지만 대조전도 만만치 않다. 희정당처럼 대놓고 서양식은 아니지만 이쪽도 비록 한국식으로 로컬라이징되긴 했지만 서양식 집기들로 채워져있다. 벽을 뒤덮은 화려한 봉황도와 백학도는 덤.

대조전 옆.jpg
정말 쓸데없긴 하지만 옆에 난 야외 복도는 계단이 있어서 묘한 느낌을 준다.

경훈각 (景薰閣)[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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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전 뒷뜰에 들어가면 있는 건물이다. 정말 구석진 곳에 숨어있어 찾기 힘드니 주의.

경훈각 벽에 있는 아궁이.

경극문 (慶極門)[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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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전에서 서쪽으로 오가는 문이다.

경극(慶極)은 '경사가 가득하다'는 뜻이다.

그 외 건물들[편집 | 원본 편집]

대조전뒷뜰유리창.jpg 대조전뒷뜰유리창2.jpg 대조전뒷뜰유리창3.jpg

그 외에도 유리창으로 된 건물이 눈에 띈다.

대조전뒤뜰 지붕받침.jpg 대조전뒤뜰 빗물홈.jpg
독특한 지붕받침 양식. 오리부리모양의(...) 배수장치.

희한하게도 곳곳에 갈고리같이 생긴 금속으로 된 지붕받침과 오리 머리비둘기야 먹자 모양의 빗물을 흘려보내는 배수장치가 있다. 현대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원래 조선시대부터 있던 거라고...

창덕궁의 흔한 굴뚝.jpg
창덕궁을 돌아다니다 보면 벽돌로 된 굴뚝을 자주 볼 수 있어서 왠지 서양의 저택을 연상시킨다.

선정전 (宣政殿)[편집 | 원본 편집]

1804년 중건하였다. 선정문에 선정전까지 지붕으로 덮인 복도로 이어져있다.

선정문 (宣政門)[편집 | 원본 편집]

선정문.jpg
우리나라 궁궐 중에선 특이하게도 문에서 궁까지 복도로 이루어져있다. 사실 지극히 조선의 양식대로 만들었음에도 선정문에서 선정전까지 걸어가면 굉장히 이색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복도가 선정전 지붕을 가리기 때문에 선정전의 예쁜 청기와 지붕을 전부 사진에 담고 싶어도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선정전[편집 | 원본 편집]

선정전.jpg
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던 곳.

정면 3칸 측면 3칸 단층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 양식이며 창덕궁의 건물 중에선 유일하게 청기와로 지붕이 덮여있는 건물이다.[9]

청기와 지붕이라 그런지 정말 아름다우며, 미로같은 창덕궁 건물들 사이에서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건물이다.

후원 (後苑)[편집 | 원본 편집]

후원.jpg
창덕궁을 세계에 알린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대, 최고의 원림.
원래는 1405년 10월태종 때 별궁으로 지은 것인데, 이후 1592년에 임진왜란 때에 불타 없어지고, 1609년 광해군 때 중수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은 이 후원을 보고 후원의 아름다움에 핡핡대며(...) 창덕궁 후원이라는 엄밀한 이름이 존재함에도 비밀 속의 정원이라는 오그라드는 뜻인 비원(祕苑)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외국에는 이 이름을 영어로 직역한 시크릿 가든(Secret Garden)응?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했다. 이 이름은 광복한 후에도 유지되었으며, 이후 일제의 잔재를 없애자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원래의 이름인 창덕궁 후원이라는 명칭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참고로 이 후원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예약을 하여야만 한다. 창덕궁 자유관람은 별도 예약이 필요없으나 문화재 보호 및 후원 일대의 생태계 보호를 위해 일일 출입인원을 철저하게 제한하고 있는 것. 참고로 문화재 해설사가 동행하며 관람 소요 시간은 1시간 30분 가량 소요된다.

후원 관람을 예약하고 해설사의 해설 하에 이동하기 시작하면 본격적으로 후원 답사 코스의 시작이다. 우선 예약하는 장소에서 후원까지 가려면 꽤 걸어야 하는데 이때 양옆의 흙담이 눈을 끈다. 특이하게 양쪽 흙담을 장식하는 타일이 무늬가 다른데 왼쪽은 마름모무늬, 오른쪽은 정사각형무늬로 덮여있다. 원래부터 있던 길은 아니고 원래 여긴 세자가 거처하던 동궁인 중희당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10]

장락문 (長樂門)[편집 | 원본 편집]

장락문.jpg
연경당과 낙선재의 정문이다. 장락(長樂)이란 '오래도록 즐거움이 있다'는 뜻이다.

참고로 창덕궁의 장락문은 2개다(...) 낙선재의 정문 이름도 장락문이기 때문.

안 그래도 연경당이랑 낙선재가 둘다 건축 양식이 비슷해서 헷갈리는데 정문 이름까지 똑같으니 헷갈려하는 사람이 많다.

연경당 (延慶堂)[편집 | 원본 편집]

연경당의 뒷간 사진.

연경당의 정말 특이한 점을 꼽으라면 황당할 정도로 수수하게 지어졌다는 사실. 물론 일반 양반집이라 생각하면 엄청 화려한 거긴 하지만 여긴 왕궁이잖아....

이런 희한한 모습이 된 것은 재밌는 사유가 있는데 원래 왕이 연경당을 지으려 할 땐 신하들이 모두 나서서 백성들이 힘들어하는데 예산을 들여서까지 궁을 확장해야겠냐고 반대했었는데 왕이 꾀를 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해보면서 백성들을 생각하겠다고 해서 겨우 받아들여진 것. 따라서 현재 궁의 형태는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부유한 백성의 집의 형태와 거의 같다.

연경당 기둥.jpg
위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기둥이 모두 원통형인 다른 전각들과는 달리 여기는 모든 기둥을 직육면체 모양으로 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직육면체 모양의 기둥이 원통형 기둥보다 훨씬 싼 편이다. 왜냐하면 원통형 기둥을 만드려면 딱 원통형 모양의 나무를 구해서 깎아야 하기 때문에 엄청 비싼데 직육면체 모양의 기둥을 만드려면 아무 모양의 곧은 나무나 골라서 사각형으로 깎으면 되니까.

연경당 부엌.jpg
부엌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던 건물이다.

사랑채[편집 | 원본 편집]

연경당 사랑채.jpg
연경당의 사랑채의 모습.

노둣돌

사랑채에 들어가면 독특하게 생긴 계단(?)이 눈에 띄는데 사실 이건 계단이 아니고 노둣돌, 또는 하마석(下馬石)이라고 해서 말을 타고 온 사람이 말에서 내릴 때 밟는 디딤돌이다.[11]

선향재 (善香齋)[편집 | 원본 편집]

선향재.jpg
보물 제1770호이자 창덕궁에서 가장 이색적으로 생긴 건물.

딱 봐도 정말 비범하게 생긴 건물이다. 서재로 쓰이던 건물로, 특이하게도 지붕을 동판으로 했다(...)슬레이트? 그뿐만 아니라 벽돌들도 특이하게 청나라식 벽돌을 썼다.

선향재 도르래.jpg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진정한 충격은 이 지붕의 아랫쪽을 보면서 느낄 수 있다. 보이는가? 이 도르래가?(...) 이 지붕의 구조는 특이하게도 도르래식 차양을 썼다는 것인데 도르래로 차양을 접었다 폈다 하는 것이 가능해서 햇빛이나 비바람을 피하는 것이 가능하다. 안 그래도 지붕 때문에 황당한데 이것까지 보고 나면 진짜로 이국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12]

농수정 (濃繡亭)[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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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향재 사랑채에서 안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정자. 용도불명의 별 볼일없는 정자이긴 하지만 상당히 높은 계단 위에 우뚝 솟아 있어서 위압감을 준다.

우신문 (佑申門)[편집 | 원본 편집]

우신문.jpg
연경당의 사랑채와 안채는 특이하게 담장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 담장을 넘어갈 수 있는 두 개의 문이 존재하는데 사랑채 기준 왼쪽에 위치한 문은 정추문(正秋門), 오른쪽에 위치한 문은 우신문으로 상당히 낮기 때문에 가다가 머리를 박지 않도록 주의를 요한다.

이렇게 낮게 지은 이유는 안채를 오갈 때 조심스러움을 사람이 절로 느끼도록 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13]

우신(佑申)이란 '돕기를 거듭한다.'는 뜻이다.[14]

안채[편집 | 원본 편집]

연경당 안채.jpg
연경당의 안채. 상당히 넓은 뜰이 눈에 띈다.

통벽문 (通碧門)[편집 | 원본 편집]

통벽문.jpg
안채 누다락의 좌측 뒤에 있는 문.

여길 지나면 작은 울타리 속에 별채가 있다. 이것이 연경당의 부엌공간인 반비간(飯備間)이다. 단 현재는 들어갈 수 없다.

통벽(通碧)이란 `푸른 곳으로 통한다`는 뜻이다.[14]

낙선재 (樂善齋)[편집 | 원본 편집]

낙선재는 원래 창경궁 영역에 속해 있었으나 현재는 창덕궁 영역에 속해있다. <승정원일기>와 낙선재 상량문을 통해 낙선재가 헌종 13년인 1847년에 만들어졌음이 확인되었다.

1997년 낙선재에 지었던 일본식 건물을 없애고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15]

낙선재 장락문.jpg
낙선재로 들어가는 장락문.

영친왕, 이방자, 덕혜옹주가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창덕궁을 감상하면서 드는 느낌[편집 | 원본 편집]

크게 두 가지다. 이 느낌은 이 문서를 읽는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직접 가 보아서 느껴봐야 한다.

첫번째, 정말 화려하다. 이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다. 그러면서도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다. 창덕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건물도 실제로 보면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그야말로 한옥의 장점을 극대화했다는 느낌이다. 창덕궁을 실제로 답사를 가서 여러 전각들과 밑의 유네스코 마크가 달린 안내문들을 읽어보면 전세계 어딜 가나 보는 눈은 같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뿐인가? 건물 그 자체보다 자생적으로 자라는 식물들이 더 화려하다. 한반도에서 자연에 금강산이 있다면 건축물에 창덕궁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봄에는 화사한 매화들이 낙선재의 온 나무와 궁궐들을 은은한 분홍빛으로 칠하고, 여름에는 녹음이 옥류천을 시원하게 물들인다. 가을에는 부용지의 나무들이 오색빛깔로 단풍이 들며 연못에 비친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과 같으며, 겨울에는 대부분의 나무들이 앙상하게 가지만 남기고 침엽수들만이 꼿꼿하게 선 채, 평소엔 숲 속에 숨어 있던 전각들이 눈이 쌓인 새하얀 지붕을 드러내면서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준다.

두번째, 아련하다. 창덕궁을 실제로 거닐어 보면 금방이라도 왕이나 왕비가 지나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상술했지만 경복궁은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라 조선 시대 그 느낌이 나지 않는다. 솔직히 그냥 현대에 억지로 만든 건물 느낌이다. 그러나 창덕궁은 CCTV 등 온갖 최첨단 장비로 도배를 해놓았음에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 그 오랜 옛날부터 그대로 점점 개화기의 문물들을 받아들이면서 탈바꿈한 궁궐이다. 희정당 정문에선 금방이라도 순종 황제가 캐딜락을 타고 나간 듯하고, 대조전 뒷뜰에선 고종황제가 방금이라도 새소리를 듣다 나간 듯하고, 창덕궁 후원에선 명성황후가 궁녀들과 함께 금방 거닐다 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들의 정치적 행보가 옳았다고는 하기 어렵지만, 이들이 겪었던 수난을 생각하면 이들의 숨결이 남아있는 이곳은 여러모로 아련한 느낌을 준다.[16]

기타[편집 | 원본 편집]

  • 동쪽에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창경궁과 바로 닿아있다. 둘이 위치도 비슷하고 이름도 비슷하여서 헷갈려하는 사람도 꽤 있다. 이외에 북쪽 담벼락 넘어에는 성균관대학교 명륜캠퍼스가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거꾸로 이걸 이용해서 문화재청에서는 궁궐 입장권 패키지를 판매하기도 한다.
  • 애니메이션 영화 《달빛궁궐》의 무대가 되는 곳이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