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이승만
李承晩, Syngman Rhee
Rhee Syng-Man in 1948.jpg
인물 정보
출생 1875년 03월 26일
조선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1]
사망 1965년 07월 19일 (89세)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마우타네리아 요양원
국적 대한민국
학력 배재학당
조지워싱턴대학교 철학 학사
하버드대학교 영문학 석사
프린스턴대학교 국제법 박사
직업 독립운동가, 정치인
종교 개신교 (감리회)
정당 자유당
신체 170cm, 60kg, O형
배우자 프란체스카 도너
가족 이경선, 母 김해 김씨
아들 이봉수
양자 이강석, 이인수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
임기 1948년 7월 24일 ~ 1960년 4월 26일
부통령 이시영 (1948~1951)
김성수 (1951~1952)
함태영 (1952~1956)
장면 (1956~1960)
이기붕 (1960)
후임 윤보선 (제4대)

이승만대한민국을 건국한 정치인으로,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와 마지막 대통령을 지냈다. 본관은 전주 이씨이고 호는 '우남'이다.

1954년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외교에는 귀신, 인사는 등신"이라 하였다.[2]

주요 업적으로는 미한상호방위조약 체결과 농지개혁 등이 있지만 여순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등의 폭정으로 비판받는다. 성향은 강경한 반공주의와 친 우파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대한제국 시절[편집 | 원본 편집]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 등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였다. 대한제국 말기 밀사로 도미하였다가 실패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 당시 이승만은 대한제국 정부나 황제의 대리인이 아니라 일진회의 대리인이라고 자칭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3]를 받고 이후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일본통치 한국 시절[편집 | 원본 편집]

일본통치 한국 시절에는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섰을 때 그는 한국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는데, 한국이 일본에게서 독립한다면 미국에게 넘겨주겠다고 한 의혹이 있다. 당연히 임시정부 임원들에게 대차게 까였다.[4]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국제 연맹에 위임통치를 건의 한 것을 계기로,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파면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부터 1925년 3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3년 3월 6일의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다. 이후 1933년 11월에 다시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되고 1934년 4월 2일에는 임정 외교위원에 선임되었다. 일본통치 중반에는 스위스 등을 상대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의 미국 선전포고를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일본통치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참여했으며, 반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일본 패전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편집 | 원본 편집]

1945년 12월부터 김구·조소앙·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였으며 정부수립 방법으로는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 추진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6·25 전쟁[편집 | 원본 편집]

6·25 전쟁 때는 북한군이 이미 서울 코앞까지 와 있는 상황에서 북한군을 무사 격퇴하고 있다며 서울 시민들에게 생업에 종사하라는 말을 하고서 한강 대교를 폭파하고 서울을 빠져나가 부산광역시로 도망쳤다.[5]북한군이 쉽게 진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했다고는 하지만 시민들이 고스란히 서울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폭파해 시민들도 피난가기 어렵게 만들었다. [6]

그런데 이승만은 이 6·25 전쟁을 민족통일의 절대적 호기로 받아들인다. 비록 위에 서술한 바처럼 전쟁 초기 대응이 매우 욕나오지만, 이 전쟁이 오히려 통일의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보았다. 북한의 남침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당일 오전 주한 미국대사 무초를 만나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자신은 한국을 제2의 사라예보로 만드는 것을 피하려고 노력해 왔으나, 현재의 위기가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기회를 제공해 준 것인지도 모른다.
— 이승만

사라예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시작인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의 암살이 일어난 곳이다. 즉, 이승만의 말은 북한의 남침을 기회로 하여 자유진영 대 공산진영으로 전쟁을 벌이고 이를 통해 통일을 이루고 싶다는 것이었다. 북한의 김일성도 1949년에 무력 통일을 위하여 남한의 북진 공격을 기다렸다고 하였는데, 이승만도 마찬가지로 북한의 기습남침을 통일의 기회로 삼은 것이다. 이참에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의 개입으로 북진통일을 이루고자 바랬다. 미국이 바로 참전했으니 이런 기대는 적중했다. 그리고 몇 달 동안은 이승만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갔다.

UN군은 당초 38선의 회복을 전쟁 목적으로 삼았지만 이승만은 북진을 거듭 주장했고, 결국 처음 38선을 넘은 것은 UN군이 아닌 국군이었다. 이에 북진이 전개되고 중공군이 오고 장진호 전투에서 패배한 후에는 후퇴를 거듭한다. 걸국 다시 서울을 내주고 재반격으로 38선을 회복한 후 휴전 협정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이승만은 휴전을 반대했다. 그는 미국이 협정을 체결시 UN군사령관으로부터 남한군의 지휘권을 되찾아와서 남한군만으로 전쟁을 계속하겠다며 위협했다. 이에 주한 미8군은 미 국무부의 승인 하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쿠테타를 계획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저항을 가볍게 씹은 유엔군은 6월 8일 북한군과 송환을 원하지 않은 포로를 중립국송환위원회로 넘긴다는 안에 서명한다. 이에 이승만은 6월 18일 반공포로를 석방한다. 휴전 회담이 깨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북한군은 남한군에 7월 13일 금성에 최후의 공격을 하며 보복한다. 결론적으로 사망자만 양쪽에 3만 명씩 내고 얻은 땅은 하나도 없었다. 이 전투 후의 경계선이 휴전선이 된다.

이승만이 이러하게 휴전을 막으려고 저항을 하는 것은 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안보와 재건에 대한 미국의 원조와 지원을 받기 위함이었다. 이에 미국은 한국의 안보를 보장하겠다고 하며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겠다 약속한다. 하지만, 이승만은 더 확실한 것을 원하였고 이에 이승만은 반공포로를 석방한다. 이에 놀란 미국은 한국에서 철수하겠다고 하자 이번에는 이승만 쪽이 한 발 물러선다. 그리고 이승만은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며, 정전 후의 평화를 위한 정치회담이 결렬될 경우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는 조건부하에 정전협정에 서명을 하지 않지만 유엔군의 정전 결정을 따르겠다 하였다. [7] 결국 1953년 10월 1일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된다. 이승만은 조약의 체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대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이번 공동조치는 외부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함으로써 우리의 안보를 확보해 줄 것이다.
— 이승만

다만, 6.25 전쟁 때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저질러 비판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민간인들이 빨갱이라는 이유로 군인들에게 대량 학살을 해라고 주도 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8]

제1공화국[편집 | 원본 편집]

1952년 부산정치파동에 따른 발췌개헌과 1954년희대의 반올림 사사오입 개헌 등 헌법을 두 차례 개정해 대통령을 3회 역임한다. 1958년 경향신문 폐간 사건으로 대표되는 언론탄압을 자행하였고, 진보당 사건을 통해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였다. 1960년 3.15 부정선거를 통해 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4.19혁명으로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하야하게 된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한다. 장례는 대한민국에서 가족장으로 집행되었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이승만은 초기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있으면서 독립 활동을 하고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해 국부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지나치게 친미적이고 냉전 시대 북한에 대응한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반공을 종교화 해서 기독교 우파 단체들을 지원해 독재를 정당화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9] 게다가 그는 6.25 전쟁 때 민간인 학살을 주도 했다는 점에서 더욱 비판을 받고 있다.[10]

참고 자료[편집 | 원본 편집]

  • 대한민국 역사 - 이영훈 188p~206p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
  2. 1954년 11월 27일 동아일보 1면 정치기사[1]
  3. 지도교수가 당시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이었고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우드로우 윌슨
  4. 이때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도 팔아먹는다고 이완용보다 더 한 매국노라는 소리를 들었다
  5. 중국의 병법서 《삼십육계》 맨 마지막에 소개된 36계에는 주위상계(힘이 부족할 경우 잠시 도망쳐서 후일을 도모하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다)라는 것이 등장한다. 따라서 이승만의 도망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모든 의무를 저버린 채 측근들만 데리고 튄 것과 전쟁이 나면 가볍게 북진 통일할 수 있다, ㅇㅏㄴ국군이 밀어내고 있다 등등 잘못된 사실을 전파하여 국민들이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게 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다. 특히 앞서 말했듯이 북한따위는 그냥 밀어버린다 등의 발언을 해놓고서 막상 전쟁이 터지니까 힘을 도모하기 위해 도망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
  6. 이때 폭파된 다리 위로 피난민들이 가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퓰리처상을 받았다는 잘못된 사실이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대동강 철교를 찍은 사진이다
  7. 사실 징병제는 광복 이후 이승만이 미국의 원조를 받고 싶다는 이유로 징병제를 실시 했다.
  8. http://m.nocutnews.co.kr/news/4613058#_enliple
  9. 심지어 이승만은 평화주의자, UN마저 자신의 의견에 안맞다는 이유로 이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았다
  10. 다만 한국의 극우단체인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이승만을 국부로 승격하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이는 2010년부터 제기되었는데 이후 본격적으로 세를 늘려 이승만을 국부로 칭송하자는 의견이 대두하였다. 이에 김무성, 이명박도 긍정적인 의사를 표하고 있다. 이들은 박정희 처럼 이승만의 좋은 시절만 기억 하고 악행에 대해 무시하기 때문에 저렇다. 게다가 과거 독재 정권 시절 세뇌 받은 것도 한 몫한다.
헌정체제 제1공화국 제2공화국 제3공화국 제4공화국
대선
(년도)
제1대
(1948)
제2대
(1952)
제3대
(1956)
3·15(1960)
제4대(1960)
제5대
(1963)
제6대
(1976)
제7대
(1971)
제8대
(1972)
제9대
(1978)
제10대
(1979)
당선자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헌정체제 제4공화국 제5공화국 제6공화국
대선
(년도)
제11대
(1980)
제12대
(1981)
제13대
(1987)
제14대
(1992)
제15대
(1997)
제16대
(2002)
제17대
(2007)
제18대
(2012)
제19대
(2017)
제20대
(2022)
당선자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
취소선은 무효 선거, 탄핵, 기울임체는 간접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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