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사코 비

히사코
久子
인물 정보
다른이름 돗토리 히사코(결혼 전 이름)
출생 1953년 7월 10일 (70세)
일본 도쿄 미나토구
국적 일본
학력 세이신여학원 유치원
세이신여학원 초등학교
세이신여학원 중학교
영국 The Convent of the Ladies of Mary Grammar School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직업 왕족(왕자비)
종교 신토
배우자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
가족 시할아버지 다이쇼 일왕, 시할머니 데이메이왕후(사다코)
시아버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 시어머니 유리코 비
시아주버니 토모히토 왕자, 손윗동서 노부코 비
자녀: 장녀 쓰구코 공주, 차녀 센게 노리코, 3녀 모리야 아야코
시조카 아키코 공주, 요코 공주
6촌 시조카: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 코무로 마코, 카코 공주, 히사히토]] 왕자
활동기간 1984년 왕자비 책봉

일본의 왕족. 나루히토 일왕의 5촌 당숙인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의 아내이다. 오시루시부채이다.

친정[편집 | 원본 편집]

아버지 돗토리 시게지로(鳥取滋治郞)는 실업가였고, 미쓰이(三井) 물산[1] 프랑스 지사장으로도 근무했다. 외할아버지 토모다 지로(友田二郞)도 외교관 시절 프랑스에서 일했고, 귀국 이후로는 궁내청에서도 근무했다.

어머니 후미코(二三子)는 어린 시절뿐 아니라 결혼한 후로도 프랑스에서 오래 생활했기에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화에 능숙하여, 일본에 프랑스어를 보급하는 데 기여하여 프랑스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외할머니 모리코(盛子)의 아버지 소가 스게쿠니(曾我祐邦)는 화족(귀족)으로, 일본 육군에서 복무했으며 귀족원 의원도 지냈다.

학업과 성장[편집 | 원본 편집]

히사코는 가톨릭 미션스쿨인 세이신여학원 유치원에 입학하여 초등학교중학교까지 졸업했고, 이후 영국으로 이주하여 학업을 마친다.[2] 수도원 부설학교인 The Convent of the Ladies of Mary Grammar School을 거쳐 영국의 명문대학인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진학, 고고학ㆍ인류학ㆍ중국학을 공부하여 석사학위까지 취득했다.

졸업 이후 일본으로 귀국하여 번역회사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법률을 공부하기도 했다. 영어프랑스어 능력을 바탕으로, 훗날 시아버지가 되는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가 총재를 맡은 제31회 국제 아시아ㆍ북아프리카 인문과학회의에서 통역을 맡았다. 이로 인하여 히사코는 일본 왕실과 인연을 맺게 된다.

결혼[편집 | 원본 편집]

1984년 4월, 히사코는 주일캐나다대사관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했다가 다카히토 왕자의 막내아들이자 히로히토(쇼와) 당시 일왕의 조카인 노리히토 왕자를 만났다. 만난 지 1달 만에 그는 “Will you marry me?”라며 영어로 청혼했고, 히사코는 “Yes.”라고 답한다. 그리고 동년 12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으로 인하여 노리히토 왕자는 분가(分家)하여 가장(家長)이 되었고, 히로히토 일왕은 조카에게 ‘다카마도노미야’라는 궁호를 새로이 하사했다. 이로써 방계 왕족 다카마도노미야 가문이 창설되었다.

자녀[편집 | 원본 편집]

시어머니 유리코 비가 명예총재를 맡고 있던 사회복지법인 소속의 아이이쿠병원에서 딸 3명을 낳았다. 일본 왕실에서는 남성만이 일왕이 될 수 있고, 민간과 달리 데릴사위와 외손의 계승도 불가능하므로, 딸들이 모두 시집가고 히사코 비가 사망하면 다카마도노미야 가문은 대가 끊어지게 된다.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와 히사코 비 내외는, 딸들이 장차 시집가서 평민 가정주부가 될 것임을 염두에 두고 교육했다. (스스로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상점에서 장을 보는 것 등등)

3명의 공주는 명문 사립 유치원으로 유명한 쇼토유치원을 졸업하고 왕실학교인 가쿠슈인의 초등과에 입학, 여자중등과와 여자고등과까지 졸업했다. 다만 가쿠슈인대학을 졸업한 차녀와 달리, 장녀와 3녀는 외부 대학을 졸업했다.

  • 장녀 쓰구코 공주: 1986년 3월 8일 (38세) 출생. 가쿠슈인여자대학과 영국 에든버러대학교를 중퇴하고, 와세다대학 국제교양학부를 졸업했다. 2008년 9월 쓰구코 공주가 와세다대학에 입학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 왕족들의 가쿠슈인 이탈 현상이 본격화되었다.
  • 차녀 센게 노리코: 1988년 7월 22일 (35세) 출생.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2014년 센게 구니마로(千家國麿)와 결혼하여 왕족 신분을 이탈했다.
  • 3녀 모리야 아야코: 1990년 9월 15일 (33세) 출생. 조사이(城西) 국제대학 복지종합학부와 동 대학원을 졸업, 사회복지사 자격과 보육교사 자격을 취득했다. 2018년 모리야 케이(守谷慧)와 결혼하여 왕족 신분을 이탈했다. 2019년에 장남을, 2022년에 차남을 낳았다.

활동[편집 | 원본 편집]

보수적이고 경직된 일본 왕실에서,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와 히사코 비는 개방적이고 활달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생전에 노리히토 왕자는 스포츠, 예술, 사진 등의 분야에 조예와 관심이 깊어 관련 단체들의 활동을 많이 후원했다. 일본축구협회와 일본하키협회의 명예회장을 맡았고, 캐나다에 유학했던 영향으로 일본ㆍ캐나다협회 명예회장도 맡았다.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노리히토 왕자와 히사코 비는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일본 왕족이 ‘공식적으로’ 한국을 방문한 것은 최초였다. 부부는 19개의 경기를 관람한 것 외에도 한국의 다양한 명소들을 돌아보았다. 서울특별시 남대문시장부산광역시 자갈치시장을 구경했고, 경상북도 경주시에서는 신라의 문화유산들을 감상하였으며, 일본 방계 왕족 출신인 이방자(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사가 생전에 설립했던 장애인 시설과 특수학교도 방문했다. 부부는 한국 방문에서 남겼던 사진들과 여행기를 신문에 연재하고 으로 출판했는데, 도중에 노리히토 왕자가 사망하는 바람에 마무리는 아내 히사코 비가 했다. 제목은 <다카마도노미야 전하가 본 한국>이다.

2002년 11월, 노리히토 왕자는 아내와 어린 딸들을 남기고 급성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등학생이었던 장녀 쓰구코 공주, 중학생이었던 차녀 노리코 공주, 초등학생이었던 3녀 아야코 공주가쿠슈인 교복을 입고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때 쓰구코 공주의 머리카락이 갈색으로 염색되어 있어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는데, 히사코 비가 ‘평소의 모습 그대로 아버지를 전송하게 하고 싶어서’라는 입장을 밝혔다.

남편이 사망한 후로, 히사코 비는 남편이 생전에 맡고 있었던 직책들을 물려받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한 남편의 사인(死因)을 계기로 심장질환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어, 일본심장협회와 일본AED[3]협회의 명예총재직도 맡고 있다. 딸들도 성년(만 20세)을 맞이한 이후부터 어머니를 따라 공무에 나섰고,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는 4명의 모녀가 다함께 재해지를 방문하여 위문했다.

또한 히사코 비는 외국어 실력을 활용하여 2020 도쿄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도 힘을 보탰는데, 능숙한 영어프랑스어로 연설하여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여 올림픽 유치에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 일가와의 갈등[편집 | 원본 편집]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는 큰아버지 히로히토 일왕의 장손인 나루히토 왕세자와 친했다. 5촌 당숙과 조카라지만 나이 차이가 고작 5~6년밖에 되지 않아서 친한 형제와도 같았고, 성격도 비슷하여 잘 맞았던 것이다. 나루히토 왕세자가 외교관 오와다 마사코를 사모하여 그녀와 결혼하려고 애쓸 때도, 노리히토 왕자는 두 남녀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만남의 기회를 제공하는 등의 도움을 베풀었다. (결국 나루히토 왕세자는 청혼 7년 만인 1993년에 마사코와 결혼하는 데 성공한다.)

자연히 히사코 비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나루히토 왕세자 내외와 친하게 되었다. 1994년에 마사코 왕세자비의 아랫동서 키코 비가 둘째 카코 공주를 임신하자, 히사코 비는 “큰며느리가 아직 아이를 낳지 않았는데 작은며느리가 자꾸 임신하는 것은 왕실의 위계질서에 어긋난다”며 지적했다. 표면적으로는 ‘왕실의 질서’를 이유로 내세웠지만, 키코 비와 그녀의 남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가 야심 가득한 인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루히토 왕세자 부부가 간신히 2001년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 하나만을 낳아 ‘여왕 허용론’이 논의되는 사이, 후미히토 왕자 부부는 2006년 기어이 늦둥이 셋째 히사히토 왕자를 낳고야 말았고, 이후로도 끊임없이 왕세자 일가를 공격했다.

한편 후미히토 왕자의 첫째 마코 공주는 2017년 동갑내기 남자친구[4] 코무로 케이(小室圭)와의 약혼을 발표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코무로와 그의 일가를 둘러싼 온갖 추문들이 밝혀져 구설수에 올랐다. 그럼에도 마코 공주는 결혼을 고집하며 몇 년을 버텼고, 마코 공주뿐 아니라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선뜻 결혼을 허락한 그녀의 부모와 왕실도 이미지가 하락했다. 반면 히사코 비의 막내딸 아야코 공주는 어머니의 소개로 만난 모리야 케이와 2018년 약혼을 발표했는데, 모리야 본인도 훌륭할 뿐 아니라 그의 가정도 나무랄 데 없이 반듯한데다가 사회적 지위도 높은 명문가였다. 아야코 공주의 결혼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동년 10월에 메이지신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막내딸의 결혼식에서 히사코 비는 “나는 사돈들이 어떤 분들인지, 얼마나 훌륭한 분들인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이처럼 훌륭한 부모님의 슬하에서 자란 모리야 케이 역시 훌륭한 남성일 것이라고 확신하여, 그가 나의 딸과 결혼하는 것을 환영했다. 좋은 인연을 맺게 되어 기쁘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사실상 마코 공주와 그녀의 부모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셈이다. 마코 공주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시간을 질질 끌다가, 2021년 10월에 결혼식도 지참금[5]도 없이 혼인신고만으로 코무로와 부부가 되었으며, 코무로 부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으로 이주하여 신접살림을 차렸다.

각주

  1. 미쓰이그룹의 계열사
  2. 이렇게 어린 시절을 외국에서 보낸 사람을, 일본에서는 ‘귀국자녀(歸國子女)’라고 부른다.
  3. 자동 제세동기. Automated External Defibrillator.
  4. 국제기독교대학에서 만난 캠퍼스커플이다.
  5. 일본 왕실에서는 시집가는 공주에게 거액의 지참금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