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

중일 전쟁
中日戰爭, 八年抗戰
Second Sino-Japanese War collection.png
군사 충돌 정보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날짜 1937년 7월 7일 ~ 1945년 9월 9일
위치 중국 대륙,영국령 버마
결과 연합국의 승리, 일본 제국의 무조건 항복
교전단체
대만 중국

지원국

일본 제국

괴뢰국

중일전쟁(中日戰爭)은 일본 제국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한 1937년 7월 7일부터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발발한, 중국일본 사이의 전쟁이다. 청나라중화민국을 별로 구별하지 않는 영어권에서는 청일전쟁에 연이었다는 뜻으로 Second Sino-Japanese war, 즉 제2차 중일전쟁이라고 한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미국과 중국의 충돌 가능성은 일제의 야욕에 의해 꾸준히 증대하였다. 중국 대륙에 이해관계가 얽힌 나라는 중국과 일본으로, 일본은 중국을 발판으로 세력 확대를 꾀하며 최종적으로 세계최강국 혹은 미국으로부터 태평양의 우위를 보장받고자 했고, 국제사회의 압력에도 중국과 서태평양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맞섰다. 일단 일본은 중국을 정복하기 전에는 미국과의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인식했고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의 해군력과 충돌 가능성을 크게 낮췄다. 그것을 믿고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국인 만주국을 설립하고, 상해사변을 연달아 일으켜 중국 침략 의도를 알렸으며 국제사회가 이를 규탄하자 워싱턴 군축 조약 및 런던 군축 조약을 파기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그리고 결국 노구교 사건을 핑계로 중국을 전면 침공,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사실 일본은 중국을 정리하기 전에는 미국과 충돌을 최대한 피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파나이 호 사건처럼 최대한 저자세로 나오며 미국의 눈치를 살폈으나 일본의 대전략적 가능성과 위협을 무시할 수 없었던 미국은 일본에 계속 압력을 가했고, 그러자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추축동맹을 체결했다. 미국은 만주국의 승인을 조건으로 중국에 대한 침략행위 중단과 군의 전면적인 철수를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으로 보며 거부하고 오히려 미국으로부터 필리핀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다. 그러자 미국은 자신의 편을 드는 유럽열강과 함께 일본에 무역봉쇄를 선포했다. 소련은 일본의 무역봉쇄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딱히 일본과 무역을 증가시키지도 않았다. 사실 일본에 석유를 팔 생각도 있었으나 독소전쟁이 발발하면서 무산되었다.

전개[편집 | 원본 편집]

단기전을 생각하던 일본 제국의 망상과 달리 전선이 끝없이 확대되면서 국방비 소모가 심각하게 되었다. 중국과의 전쟁만으로도 1938년 일본의 국방비는 전체 세출의 70%에 달했다. 미군과의 전쟁에 비하면 적게 죽기는 했으나 중국 대륙에 묶인 일본군에 의한 자금 소모는 막대했다. 개전 초기부터 병력과 물자의 소모는 끝없이 늘어났지만, 일본군의 능력은 오히려 점점 떨어졌다. 초기 일일 평균 15킬로미터였던 진격 속도는 1938년에는 8킬로미터, 1939년에는 3.2킬로미터로 떨어졌고, 1940년에는 1.6킬로미터에 불과했다. 점점 일본의 재정 능력이 한계를 나타내고 있었기에 중국 대륙 곳곳에서 소모적인 전투가 반복되었으나 전체적인 전선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에 대하여 명확한 작전이 없었던 일본 제국은 강경책과 유화책[1]을 혼란스럽게 사용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학살과 약탈을 하기도 하고 근대적인 산업화와 교육 및 치안 유지를 하기도 했다. 유화책도 효과가 없지는 않아서 본토로부터 전쟁 비용이 감소하기도 했다. 일본 제국은 중국 대륙에 1939년에 80만 병력을 배치하였으나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식민지 군대를 동원하는 한편 본토에서도 소집 대상의 연령을 확대하여 병력을 늘렸다. 사관학교 학생들 역시 4백 명에서 2천 명으로 대폭 증가하였고 교육 기간으로 절반으로 축소했다. 후기에는 이조차도 점점 줄어서 나중에는 고작 2~3개월의 단기 과정을 거치면 전선에 투입하기도 했다. 중국 전선에서 단기 속성으로 배출된 하급 지휘관들은 갈수록 증가했고 그들은 급하게 뽑느라 군인이 적성에 맞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기에 명령에 대한 불복종은 물론 고생의 연속인 전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점령지도 쉽게 포기하고 후퇴했다. 심지어 전쟁 중인데 후방에서 일본군이 어렵게 준비한 훈련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한 인적, 물적 자원 소모는 답이 없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과 싸우던 해군[2]에 비하면 답이 없어 보이던 이유가 있던 셈이다.

이처럼 일본군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으나 국민당군 역시 상황이 심각했는데 전쟁의 막판인 1945년 국민당군 감사를 보면 제17군단마저 사람 숫자에 비해 소총부터가 4분의 1 수준으로 크게 부족했다. 대포 성능 역시 중국산 대포는 일부[3]를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일본산과 비교하여 10배 이상의 성능 차이가 났다. 이런 국민당군보다 상황이 심각했던 공산당은 주무기가 칼[4]이었다. 물론 공산당은 일본군과 국민당군의 보급을 털어서 후에는 국민당군 수준까지는 무장 수준[5][6]이 올라간다. 그러나 이처럼 무장 수준이 형편없었던 대신 중국군은 잠재적인 예비군[7]은 물론 공산당군까지 포함하여 숫자가 10배에 가까웠다. 그래서 밸런스가 은근히 맞았다.

각주

  1. 일본 본토가 아닌 중국 대륙으로부터 필요한 전비를 뽑아내기 위해서였다.
  2. 해군은 식민지에서도 나름대로 가려서 뽑았다. 반면 육군은 중국 공산당의 첩자도 현지 용병으로 고용하기도 했다.
  3. 중국은 26식 경기관총 같은 몇몇 최신 무기를 국산화하는데 성공하여 일본군도 중국인들로부터 기술을 획득하기도 했다.
  4. 사실 그래서 공산당의 일본군에 대한 활약은 선전선동도 있다고 보는 편도 많다. 무기가 칼이라 아무래도 총에 비해 살상력이 떨어지기 때문. 물론 보급품 털이에서는 공산당 전력이 실제로 강화된 것과 일본군 역시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자 보급 부대에 한해서 죽창 등을 애용하기도 했었기에 신뢰성이 있는 편이다.
  5. 국민당은 미국의 지원으로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 수준까지는 갔다. 그래서 육전은 공산당의 게릴라와 선전선동에 결국 패했으나 해전과 공중전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승리했다.
  6. 재미있게도 중일전쟁은 공산당의 대전략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군 보급 털기에 의해 일본인이나 자발적 혹은 강제징집된 조선인, 만주인 등에 대한 등용으로 다민족 정책이 수립되었으며 일본의 군사기술과 무기는 초기 공산군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마오쩌둥이 괜히 일본 덕분에 승리했다고 주장한 게 아니다.
  7. 좋게 생각하자면 당시 국민당의 정규군은 일본과 달리 이런 예비 전력과 차이가 별로 없어서 이들을 동원한다고 크게 마이너스가 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