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타이왕국
ราชอาณาจักรไทย
Flag of Thailand.svg
국기
Emblem of Thailand.svg
국장
Thailand (orthographic projection).svg
국가
플렝 찻
나라 정보
수도 방콕
공용어 태국어
정부유형 입헌 군주제, 의원 내각제
군주 마하 와치랄롱꼰
기타 정보
GDP GDP (명목):
전체: 달러
1인당: 7,295 달러
화폐
시간대 UTC+7
ISO 764, TH, THA
도메인 .th
국제전화 +66

태국동남아시아말레이 반도와 인도차이나반도 사이에 걸쳐 있는 나라이다. 동쪽으로 라오스캄보디아, 남쪽으로 타이 만과 말레이시아, 서쪽으로 안다만해미얀마와 접하고 있다. 바다로는 동쪽으로는 남중국해, 서쪽으로는 인도양과 접해있다. 공식 명칭은 타이왕국이나, 대한민국에서는 흔히 태국이라고 불린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고대[편집 | 원본 편집]

현대의 타이는 타이족의 국가이나 타이족은 외부에서 이주해 온 민족이며 선주민은 그들과 다르다. 중북부에는 현재 미얀마 남부에 분포하는 몬족들의 왕국 드바라바티[1], 하리푼자야[2] 등이 있었고, 동남부는 앙코르 제국을 세운 크메르족이 지배, 남부는 스리비자야가 진출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중부, 북부, 서부에 몬족이 분포하고, 동남쪽에 크메르족, 남부 말레이 반도 일대에 말레이족과 스리비자야의 영향이 공존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3세기 경에는 남부 대부분의 지역이 부남의 영향하에 있었고, 크메르족의 앙코르 제국이 전성기를 맞자 북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앙코르 제국의 영향권에 들어갔다.[3]

초기 타이왕국[편집 | 원본 편집]

타이의 주민족인 타이족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황하 상류지역에 살던 몽골족 계통으로 보고 있다.[4] 그 외에도 설이 많지만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중국의 운남성에서 동남아시아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10세기 경부터 이주의 흔적이 나타나나,[5] 본격적인 이주는 13세기 대리국몽골에 멸망한 이후였으며[6] 13세기에 쑤코타이, 란나[7] 등의 왕국이 성립되었다. 란나는 몽골의 침입을 막아내었으며 수코타이의 대왕 람캄행타이 문자를 만들고, 란나, 파야오, 쑤코타이로 대표되는 타이족 3국의 동맹[8]을 맺고 앙코르와 치열한 전쟁을 해서[9] 지금의 타이 땅에 타이족의 입지를 탄탄히 다졌다.

아유타야의 성립[편집 | 원본 편집]

1350년 우통 왕[10]이 아유타야를 세웠다. 아유타야는 그전까지 타이족을 주도하던 수코타이를 공격해 1378년에 속국으로 만들고 1438년에 완전히 병합한다. 한편 그전까지 동남아의 패자였던 캄보디아에 대한 공격도 계속하여 1431년 6개월간의 포위 끝에 앙코르를 점령하였고[11], 캄보디아는 곧 앙코르를 탈환할 수 있었지만 앙코르를 더 이상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힘듦을 깨닫고 수도를 천도한다.[12]

이후 아유타야는 발전을 계속했으나, 이웃 버마의 따웅우 왕조의 침공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는다. 1547년[13]따웅우 왕조의 따빈슈웨티의 공격으로 아유타야 왕 마하 짜크라팟은 부인 수리요타이 왕비를 잃었으며, 1563년 버인나웅의 침공[14]으로 결국 항복을 하고 속국이 되고 말았다. 왕인 마하 짜크라팟은 버마에 인질로 끌려간 의혹이 보이며[15] 북부의 중심지 피싸눌록을 지키다 버마군에 항복한 반정공신(...) 마하 탐마라차[16]는 아들 나렛 왕자[17]를 인질로 보냈다. 이 후 마하 짜크라팟과 그 아들은 다시 저항을 하나 버인나웅의 재침공을 받고 아유타야는 함락되었다. 그리고 왕은 마하 탐마라차로 교체. 하지만 그게 버마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인질생활에서 돌아온 나렛 왕자는 연이은 캄보디아의 침공을 모두 막아내었으며[18] 1581년 버인나웅이 죽고 버마가 반란에 휩싸인 틈을 타 독립을 선포한다. 그리고 연이은 버마의 침공을 모두 다 막아낸다. 그 기록은 무협지수준이다..[19] 1584년 버마의 반란을 진입하러 갔다가 수도 버고 일대를 약탈[20]하고 국경을 건너기 직전 독립선언을 하고, 그리고 쫓아온 버마군의 장군을 강 건너편에서 일상총격토(...)로 사살(...)[21] 버마의 속국이었던 란나의 침공을 연이어 격퇴. 1586~1587년 버마왕 난다버인의 친정으로 일어난 아유타야 공성전에서 직접 반격해서 칼을 입에 물고 버마의 진지를 올라갔고 이후 난다버인이 나렛 왕자를 끔살시키기 위해 보낸 장군을 일기토(...)로 죽여서 버마의 침공을 끝냈다. 1590년 나레쑤언이라는 이름으로 즉위한 나렛 왕자는 1593년 농 싸라이 전투에서 일상토(...)로 버마의 왕세자를 죽이고,[22] 그 여파로 테나세림을 점령[23] 1594년 캄보디아를 침공해 수도 로벡을 함락시켜 캄보디아를 영원한 잉여의 길에 접어들게 하였으며 1599년 란쌍 격퇴, 란나 합병. 1600년 따웅우 공성전 등으로 망하기 직전이었던 아유타야를 강대국으로 격상시켜버렸다. 이 이후 아유타야를 타이사학자 David K. Wyatt는 Ayutthaya Empire라는 장으로 구분해 버린다. 괜히 나레쑤언이 타이인에게 존경받는 것이 아니다(...)[24]

나레쑤언이 잉와 원정도중 사망하자 제위는 나레쑤언의 친동생 에까토싸롯에게 넘어갔고, 에카토싸롯은 그동안의 확장정책을 멈추고 내치에 들어간다. 하지만 나레쑤언의 팽창으로 아유타야는 대륙부 동남아시아의 최강국이 되었으며, 이웃 버마의 경우는 나레쑤언의 침공으로 분열되었고[25], 곧 통일을 했지만 그동안의 확장정책을 멈추고 고립을 택하여 아유타야는 100 여년간의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개방적인 문화성을 지녔던 아유타야는 외국과의 교류를 활발히 했으며 쏭탐왕 때는 유명한 야마다 나가마사가 활약하기도 하였다.[26] 이러한 개방정책은 계속되어 17세기 중반 나라이 왕 때는 그리스계 영국인 콘스탄틴 풀콘이 고위직에 오르고, 프랑스에 친선사절을 보냈고, 나레쑤언 왕 이후 버마에 뺏겼던 란나를 재점령 하고자 원정을 하기도 했다.[27] 하지만 지나친 개방성으로 국내의 귀족층은 반발하기 시작했고 프랑스군이 원정을 와 지금의 방콕에 성채까지 짓는 상황까지 되자 나라이 왕이 죽자마자 쿠데타가 일어나 콘스탄틴 풀콘은 살해당하고 방콕에서는 프랑스군과 아유타야군의 공성전이 일어나 프랑스군이 철군하는 상황에 이르고, 이후 100여년간 아유타야와 외국과의 교류는 예전보다 크게 줄어들었다.

그동안 캄보디아를 놓고 응우옌씨 베트남과 티격태격, 1694년 이후 분리된 란쌍을 영향력하에 두면서[28]시간을 보내다 이웃 버마가 분열 후 재통일 됨으로써 16세기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자 다시 버마와의 전면전을 벌여야 했다. 1740년 버마 남부의 몬족은 프랑스의 지원으로 독립하여 그들의 왕국 한타와디를 재건시켰고, 1752년 버마의 수도인 잉와까지 점령하여 후-따웅우 왕조를 멸망시켰으나, 꼰바웅 왕조를 세운 알라웅파야의 반격으로 1757년 다시 멸망했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는 몬족에 의한 버마족의 학살이, 그리고 그 보복과정에서 버마족에 의한 몬족의 학살이 일어나 버마 내의 민족감정은 극심해지고 몬족은 버마족의 치하에 살기를 포기하고 아유타야로의 대규모의 엑소더스를 감행하였다. 이러한 몬족을 다시 버마로 보내기 위해,[29] 그리고 몬족의 독립을 지원했던 아유타야와의 갈등으로 인해 아유타야와 버마의 전쟁은 재발했고, 1759년 그는 아유타야를 포위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유탄으로 인해 알라웅파야는 전사하고 버마군은 철수하였다.[30] 그러나 아유타야는 예전처럼 강국이 아니었다.

아유타야의 멸망[편집 | 원본 편집]

1765년 꼰바웅 왕조의 3대 왕 신뷰신은 아유타야 침공을 감행한다. 군을 2개로 나누어 한 쪽은 북쪽에서 란나를 통해서 남진, 한 쪽은 전통적인 버마의 아유타야 침입로인 삼탑로로 동진하였다. 방 라잔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수 개월 동안의 항쟁을 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31] 프라야 딱 씬[32]등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패색은 짙어져 아유타야 왕이 속국이 되겠다고 항복을 애걸하였으나 그조차도 거절되었고 1767년 아유타야는 버마군에게 함락당하고 파괴되었다. 하지만 그당시 버마는 청군의 침입을 눈앞에 두던 상황이어서 아유타야 전토의 점령은 불가능했고 그 일대에 일부의 주둔군만 남기고 모두 철퇴하였다. 하지만 중심세력을 잃은 아유타야(이하 시암으로 서술)은 사분오열되었다. 이 상황을 해결한 사람이 프라야 딱 씬(이하 탁신)이었다.

라따나꼬신 왕조의 성립[편집 | 원본 편집]

아유타야가 함락되기 직전 아유타야를 탈출한 딱씬은 시암 동남부의 짠따부리로 피신하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중국인의 지원을 받아 힘을 길러 반년 만에 아유타야를 탈환한다. 하지만 아유타야는 초토화된 상태이고 더 이상 버마군을 막기에도 적절하지 않아 수도를 현 방콕 서부인 톤부리로 했다. 톤부리-방콕은 17세기 프랑스군이 주둔했을 때 요새를 만든 곳이고, 아유타야에 비해 방어가 용이한 편이었으며, 해상으로 진출하기도 편했다. 이런 이유로 탁신은 톤부리를 수도로 정한 후, 구-아유타야에 웅거한 제세력들을 모두 통합한다.

버마의 공격을 물리치고 아유타야를 통합하고 라오스, 캄보디아를 다시 속국화한 딱씬은 말년에 정신병에 걸려 부처로 자칭하고 포악한 정치를 펼쳐 강제로 구금되었다.[33] 이 반란은 딱씬의 친우이자 딱씬과 함께 정복전을 펼치던 프라야 차크리 장군에 의해 정리되고[34] 그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했다. 유폐되었던 딱씬은 반란의 와중에 살해당했다. 차크리 장군이 세운 왕조가 현 타이의 왕조로 지금 왕조는 차크리 왕조, 락타나코신 왕조, 방콕 왕조 등으로 불린다. 라마 1세로 즉위한 프라야 차크리는 딱씬의 정복전쟁을 이어나가고 수도를 톤부리 건너편인 방콕으로 이전했다.[35]이때 구-아유타야의 폐허에서 자재를 운반하여 건설함으로써 방콕이 아유타야를 대신하는 수도를 의미를 명확히 하였다.

라마 1세의 시기 시암의 영토는 더욱 확장되어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완벽한 속국이 되었고[36]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한 란나도 복속되어 자체적으로 영토회복을 할 수 있었으며[37] 버마와의 전쟁에서 비록 테나세림의 탈환(?)에는 실패하였지만, 이후 이어진 보도파야의 144000명 규모의 5개방면 침공도 성공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라마 1세 때의 영역은 그 이전 최대규모였던 나레쑤언 시기의 영토확장을 능가하는 것으로써, 명실상부한 동남아의 패자의 위치를 재구축 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라마 1세의 유일한 실패는 바로 대-베트남 전선으로 응우옌 푹 아인의 요청을 받아 4만 여명의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떠이 썬의 응우옌 반 후에에게 대패하여 응우옌 푹 아인과 함께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응우옌 푹 아인은 방콕에서 라마 1세 밑에서 싸우다가 독자적으로 베트남으로 귀환한 후 프랑스, 라오스의 도움을 얻어 베트남을 통일하였다. 그리고 시암군이 점령하였던 하 띠엔의 반환을 요청하여 평화적으로(?) 받아내었다.[38]

라마 2세, 라마 3세 시기에도 딱씬-라마 1세 시기만큼의 영토확대는 아니었으나 계속되어서 시암의 라마 3세의 서거 무렵 시암의 영토는 역대 최대를 자랑하게 되었다. 1827년 영국군이 버마를 공격한 후 시암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믿은 위앙 쨘의 차오 아누의 공격은 순식간에 진압당해 위앙 쨘은 철저히 파괴되고 라오족들은 메콩강 서쪽으로 강제이주 당했으며,[39] 1836년 베트남에게 합병당했던 캄보디아의 저항운동을 지원하여 1845년 재독립 시키고 캄보디아를 시암의 강한 영향력 하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라마 4세가 즉위하면서 제국주의의 물결을 맞닥뜨리게 된다.

개화기[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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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헌 혁명[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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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기[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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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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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41] [42]

지리[편집 | 원본 편집]

6개 지방 이하로 77주(특별행정구역인 방콕을 포함)로 구성되어 있다. 주의 이름은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를 따서 지었는데[43] 6개 주(딱(매솟), 빠툼타니(랑싯), 쏭클라(핫야이), 촌부리(파타야), 나라티왓(쏭아이클록), 쁘라쭈압키리칸(후아힌))는 실제와 다르다.

현지어인 태국어로는 짱왓이라 부른다. 다만 명칭 앞에 붙인다. 즉, "방콕주(州)"는 "짱왓 끄룽텝 (혹은 "쾡 끄룽텝")". 짱왓 예하로 암프(District에 해당.)로 나뉘며 그 이하를 땀본으로 나눈다. 그 이하로 가장 작은 마을을 무반이라 부른다.

북부[편집 | 원본 편집]

총 9개 주가 포함된다. 미얀마라오스 북부와의 접경지대가 있는 곳으로 대표적인 주는 치앙마이이다.

북동부(이산 지방)[편집 | 원본 편집]

총 20개 주가 있다. 라오스 중부와 접하고 있는 지역. 남서쪽으로 캄보디아와도 접하며 이쪽으로 통해 가야 앙코르와트(앙코르왓) 방면으로 갈 수 있다. 지역 자체에 관광상품은 별로 발달하지 못했으나 이산 요리가 워낙 유명해서 이름은 잘 알려져 있다. 라오스족 주민이 많이 거주하는 편. 대표적인 주는 우돈타니이다.

중부[편집 | 원본 편집]

총 22개 주가 있다. 비유하자면 타이의 경기도가 되는 지역이다. 왕궁이 있는 곳이기 때문. 대표는 당연히 방콕.

동부[편집 | 원본 편집]

총 7개 주가 있다. 캄보디아와의 접경지대로 이쪽으로 통하면 프놈펜 방면으로 갈 수 있다. 대표적인 주는 촌부리(파타야)이다. 일본계 기업들이 이곳에 상당수 공장을 차렸다.

서부[편집 | 원본 편집]

총 5개 주가 속해 있다. 미얀마와 길게 마주하여 접한 주인데, 타이가 미얀마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 사이를 왕래하기엔 많이 까다로운 편이다. 대표적인 주는 깐차나부리.

남부[편집 | 원본 편집]

서부로 분류되는 쁘라추압키리칸의 남쪽 지역. 타이 지도에서 남쪽다리 밑 발부분을 생각하면 된다. 서쪽으로 약간 미얀마와 접하고 밑의 남쪽으로 말레이시아와 접한다. 서쪽과 동쪽 양쪽으로 바다와 접하고 있으면서 폭이 좁아서 이쪽으로(라농-춤폰 지역) 운하를 뚫을 계획(일명 끄라 운하)을 하고 있지만 모종의 이유로 실현되지는 못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유명한 지역은 단연 푸껫. 나라티왓, 얄라, 빠따니는 말레이계 무슬림이 대다수를 차지해 폭탄테러가 자주 일어나니 여행시 유의할 것.

경제[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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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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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편집 | 원본 편집]

하계 올림픽에서 1972년까지는 메달을 딴 적이 없으나, 1976년에 첫 메달을 딴 이후로, 1984년 이후로 꾸준히 메달을 적어도 하나는 획득하는 국가이다. 메달을 처음 딴 이후 한동안은 첫 메달을 포함하여 복싱에서만 메달을 땄으나, 이후에는 역도와 태권도에서도 메달을 따고 있으며, 이 세 종목에서 금메달을 각각 적어도 하나씩은 땄다.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은 없다. AFC 아시안컵에서는 개최국이었던 1972년에 기록한 3위가 최고 성적인데, 황당하게도 이때 본선에서 거둔 승리가 없었다. 이후 공동 개최국이었던 2007년에서야 AFC 아시안컵 본선 첫 승을 기록하였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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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왕국인지 문명인지 문화권인지는 불분명하다. 드라라바티란 이름도 드바라바티라고 적힌 동전이 발굴됨으로써 알 수 있었다.
  2. 란나에게 멸망당함으로써 알려진 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왕국의 멸망 과정은 백제개로왕과 승려 도림의 이야기와 동일하다. 란나에서 사람을 보내 하리푼자야 왕의 친우가 되게 하고 하리푼자야 왕은 사치에 빠지고 하리푼자야는 쇠약해져서 란나의 침공을 받자 순식간에 멸망했다는 줄거리다.
  3. 그리고 그 무렵 타이족의 진출에 관한 증거가 보이기 시작한다. 유명한 것이라면 12세기 중반 수르야바르만 2세가 만든 앙코르 와트의 부조에 기록된 타이족 병사들이다.
  4. 황하 상류설 이외에도 양자강 상류설, 운남성 설, 중국 강남 지방 설, 토착민 설, 해양유입설 등이 있다.
  5. 9세기 경부터 이주를 할 동기가 보인다. 9세기 경 남조는 전성기를 맞아 동남아 각지를 뒤흔들었으며 이 전쟁의 여파로 동남아 북부의 민족구성이 바뀐 듯하다. 다만 이 것은 추론의 단계이다.
  6. 대리가 타이족의 왕국이었다는 말을 많이 볼 수가 있는데 대리를 세운 민족은 바이족이다. 타이족은 대리의 한 구성원 정도로 추정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리가 멸망하기 전에 타이족이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흔적이 보인다.
  7. 이 왕국들의 성립년도는 여러 설이 있으므로 생략한다. 각 설마다 수십 년씩 차이가 나기 때문에 책마다 다들 연도가 틀리다(...)
  8. 하지만 얼마 안있어 파야오는 란나에게 멸망한다. 동맹이고 뭐시고 안습.
  9. 13세기 말 앙코르를 방문한 중국인 주달관은 그의 기록 《진랍풍토기》에서 크메르족이 섬이라고 기록된 타이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기록했다.
  10. 연대기에서는 중국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원래 다른 지역에 있던 왕국에서 아유타야로 이동해 아유타야를 건설했다고 하는데… 어차피 연대기니 완전히 믿지는 말자.
  11. 타이사 관련 책에서 이 이후 타이가 계속 앙코르를 점령하였다거나, 캄보디아가 타이의 속국이 되었다고 서술할 때가 많으나 사실이 아니다. 캄보디아는 여전히 독립국이었으며 16세기 말까지 타이에 역습한다. 완전히 속국이 된 것은 나레쑤언 왕 때다
  12. 앙코르 이후 캄보디아의 수도는 로벡, 우동, 프놈펜을 전전한다. 모두 지금의 시엠 리엡인 앙코르의 동남부에 위치한다.
  13. 동남아의 기후적인 특성으로 전쟁은 양력으로 12월경 시작해서 그담음 해 봄이 올 때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많은 책에서 년도가 1년씩 차이가 날 때가 흔하다.
  14. 이 전쟁은 흰 코끼리로 인해 일어났기 때문에 백상전쟁이라고도 불린다. 버마가 아유타야에 흰 코끼리를 요구했고 아유타야에서는 논의 끝에 주나 안주나 어차피 전쟁을 일어난다고 해서 안주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전통적인 버마의 다이렉트 침공로인 삼탑로를 집중적으로 방어했고 북쪽에는 마하 탐마라차를 보내 부족한 방어를 보완하려고 했다. 하지만 버인나웅은 예전에 점령한 란나를 통해 북쪽으로부터 침공을 했고 아유타야는 이 때문에 전쟁에 졌다.
  15. 의혹인 것이지 정설단계까지는 아니다. 이 기록은 버마측 연대기에 보인다.
  16. 마하 탐마라차는 마하 짜크라팟을 왕으로 세운 1등공신이었다. 마하 짜크라팟의 즉위과정은 어지간한 드라마를 압도하는 스케일인데 이를 확인하면: 왕의 사망 후 왕비가 섭정을 하다 그녀의 친척(...)이었던 신하와 불륜을 가졌는데, 이로 인해 왕비가 임신하고 아이를 낳는다.(!!!) 이렇게 되자 왕비와 신하는 유력한 왕자의 제거를 시도하나 실패하고 왕자는 출가하게 된다. 이러자 왕비는 새 아들을 왕으로 추대하려 시도(...)하나, 이를 보다 못한 또 다른 신하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비와 불륜상대자를 끔살히고 출가했던 왕자를 즉위시킨다. 이 왕자가 마하 짜크라팟이고 쿠데타를 주도한 신하가 마하 탐마라차이다.
  17. 이후의 나레쑤언 왕
  18. 아유타야 독립선언 이후까지 모두 환산하면 5번 침공을 했다. 이 침공을 막아낸 주역이 나레쑤언이다.
  19. 하지만 어차피 동남아사는 연대기 중심인지라 원래 무협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믿을 만큼만 믿고 끝내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괜히 말도 안 되는 것을 썼다고 우기면 피곤하다.
  20. 아유타야인 포로를 구출하기 위해서였다고도 한다.
  21. 이때 쓴 총이 2.53 미터라고 한다. 그 당시 총의 명중률 상 총이 이렇게 크고 아릅답지 않으면 강 건너편의 적을 맞출 수준이 되지 않으므로 이 사건이 실제라고 해도 템빨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22. 이때 했다고 하는 말이 간지폭풍이다. "형제여 그대는 왜 차양에 몸을 가리는가? 미래의 어떤 군주도 할 수 없는 그런 결투를 해보게나." 다만 사실과의 관계는 안드로메다일 가능성이 극히 높다.
  23. 편의상 영어발음으로 했지만 버마식 발음은 따닌다리이다. 타이와 버마가 서로 주고 받던 지역으로 결국은 버마령이 되었다.
  24. 여기에 나온 무협지스러운 일화들은 신뢰성에서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전투의 승패자체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이런 무협지적인 일화가 연이어 나온다고 해서 나레쑤언을 과장된 인물로는 결코 볼 수가 없다. 단지 동남아사가 연대기의 조합일 뿐.
  25. 이때 남부 버마는 프랑스계 포르투갈인인 필리페 드 브리투가 10여년간 장악하기도 하였다.
  26. …로 볼 수도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봉건제로 인한 친위세력의 부족이었다. 외국인의 경우 아유타야에 거주할 시 국왕의 친위군으로 병역에 임할 의무가 있었고, 이 때문에 아유타야에서는 외국인의 정계진출이 상당히 활발한 편이었다.
  27. 하지만 일시적이었다. 란나가 아유타야-시암의 영향력에 들어오게 될려면 18세기 말 탁신과 라마 1세의 시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28. 정확히 하면 루앙 프라방이 친-아유타야, 위앙 쨘이 친-버마였다. 그동안 아유타야는 영향력을 증가시키며서 영토(?)를 늘렸다. 말 그대로 영향력이다.
  29. 전통적으로 동남아시아에서는 국가의 영역은 영토보다는 인민의 지배에 가까웠다. 16세기의 버마-아유타야 전쟁의 시작도 동일한 과정이었다.
  30. 버마와 아유타야의 기록이 약간 다르다. 아유타야에서는 유탄에 전사, 버마에서는 낙마로 전사라고 주장한다.
  31. 타이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국내에서도 어떻게 하면 케이블에서 볼 수는 있는 듯?
  32. 딱의 제후 씬이라는 뜻. 이후의 탁신 대왕
  33. 딱씬이 중국계 혼혈이라는 점에서 나오는 컴플렉스나, 아유타야 구 귀족층의 반발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선교사의 기록을 보면 정신병적인 증상으로 포악한 정치를 펼쳤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34. 진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얽혔다.
  35. 현재 타이의 행정구역상 톤부리는 방콕에 포함되어 있다. 차오프라야 강을 마주하고 있으며, 배를 타고 5분이면 바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36. 왕이나 왕자가 방콕에 있어야 할 정도이니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시암의 영토로 표기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37. 란나가 처음 복속되었을 때 란나의 중심인 치앙마이도 란나의 땅이 아니었다. 하지만 란나의 영주 차오 까윌라는 시암에 의지한 후 독자적으로 구-란나의 땅을 수복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시암의 도움은 있었고, 버마의 대규모 침입 때는 차오 까윌라가 시암의 한 장군정도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구-란나의 회복은 시암의 지원을 받은 차오 까윌라의 독자적인 행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38. 평화적은 맞다. 하지만 배은망덕의 느낌이 올 뿐. 라마 1세의 사후 베트남은 캄보디아의 종주권을 두고 다시 시암과 긴장관계를 가지기 시작했다.
  39. 덕분에 현재 라오스에 사는 라오족은 300~400만 정도지만, 타이에 사는 라오족은 2000만명에 육박한다. 물론 그 이전에 평화적으로 이주한 수도 상당히 많고 영토의 상실 문제도 크지만 강제이주의 여파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타이 인구조사 통계에는 라오족은 그냥 타이족으로 분류된다는 것. 인구 5500만에 소수(?)민족이 2000만으로 분류되는 사태를 누가 원할까(...) 그리고 타이에 사는 라오족 또한 본토인 라오스가 워낙 가난하다 보니(...) 자기도 타이인으로 생각하고 살아간다. 타이인이지만 라오족입니다. 정도로.
  40. A biography of King Naresuan the Great by H.R.H. Prince Damrong Rajanunbhab ISBN 978-974-06-9716-9
  41. Thailand -A short History- by David K Wyatt
  42. 태국사 by 김영애
  43. 한국으로 비유하면 경상남도를 "부산도" 혹은 "대구도"등으로 부르는 격이다. (혹은 "경상"이 경주와 상주에서 따온것이니 "경주(州)", "상주(州)"으로 나눈 것으로도 볼 수 있는 식.) 근데 제주도는 제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