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Sendai 2011 epicentre.png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東北地方太平洋沖地震(とうほくちほうたいへいようおきじしん))은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18.1초(기상청 공인), 일본 도호쿠 지방 전체에 걸쳐 발생한 대지진이다. 일본에서는 주로 동일본 대지진(東日本大地震(ひがしにほんだいじしん))이라 부른다.

당시 지진이 리히터 규모 9.0이었을 뿐더러 잇따라 들어온 대형 쓰나미로 인해 해안가 마을은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까지 터져 수많은 피해와 사상자를 발생시킨 사건이다.[1] 당시 사상자의 수는 약 25,000명에 달했고, 재산피해는 당시 기준으로 25조 엔 이상이었다.

지진이 최초로 발생한 진원지는 일본 도호쿠 지방의 산리쿠 해안으로, 그 근처에서 태평양 판이 북아메리카 판 밑으로 끼어들어가서 생긴 역단층형 지진이다.

경과[편집 | 원본 편집]

14시 45분 전진 발생
규모 7.3으로 대부분 이 지진을 본진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14시 46분 본진 발생
14시 46분 18초, 산리쿠(도호쿠 북단) 앞바다에서 해구가 뒤틀리면서 규모 9.0의 강진이 발생한다.
14시 47분 긴급지진속보 발령
이후 49분 경부터 NHK는 긴급 방송으로 전환하였으며 동시에 기상청에서 지진해일 경보를 발령했다. 도호쿠 지역의 원전 29기 중 P파를 접한 11기가 자동으로 가동을 중단했다
15시 27분 지진해일 제1파
쓰나미의 제1파가 도달했다. 최고 기록은 소마항의 파고 9.3m인데, 제1파에서 측정기구가 파손되었기 때문에 기상청에서 공식 기록으로 지정하지 않았다.
15시 35분 지진해일 제2파
쓰나미의 제2파가 도달했다. 앞선 제1파에서 측정기구가 파손된 것도 있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측정가능치를 넘는 쓰나미가 덮쳤기 때문에 사후조사를 통해 분석되었으며, 추정 파고는 40m에 달한다.
16시 44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지진해일 제2파로 인해 기능이 상실된 후쿠시마 원전에서 사고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로.

피해[편집 | 원본 편집]

Carried train in Senseki Line.JPG

당시 산리쿠 해안 근처에선 낮게는 약 3m, 높게는 약 40m 가량의 해일이 주변 지역을 덮쳤고, 그 곳에 있던 해안가의 마을들은 완전히 휩쓸려 가버렸다. 목재 주택은 말 그대로 떠내려갔고, 철근 콘크리트 건물들은 굳건히 서 있었지만 높은 쓰나미에 고층부까지 수해를 입었다. 주민들은 수칙에 맞게 건물을 포함한 고지대로 향했지만 고지대보다 더 높은 쓰나미에 쓸려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총 집계된 피해는 사망자·실종자 1만 8천여명, 재산피해 25조엔 가량이다. 사망자는 대부분 지진해일로 인한 익사가 원인이며 진원에서 가장 근접했던 미야기현이 전체 피해의 2/3 정도를 차지하고, 이와테현, 후쿠시마현이 그 뒤를 따른다. 미야기현의 경우 시체가 너무 많이 나와 처분이 어려워 밀봉하여 단기간 매장하는 임시 매장지를 운영했다.

사회 인프라의 피해도 막심했다. 재난복구에는 도가 터있는 일본이지만, 피해 지역이 광범위해지면서 이중화, 백업 등이 모두 소용없게 되었다. 통신 인프라는 NTT의 물리회선이 다 쓸려나가버리면서 빅3사가 모두 이동기지국을 전국에서 소집해 도호쿠에 투입하고, 대피소에는 무료 와이파이를 설치하는 등 통신의 부재가 없도록 만전을 기했다. 도로·철도의 파손은 말할것도 없지만, 지역 저유소 시설이 모두 파괴되면서 서일본에서 석유제품을 수급받느라 연료 부족이 장기간 지속되었다.

여파[편집 | 원본 편집]

쓰나미 침수를 기록해둔 모습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NHK의 한 리포터

긴급지진속보에서는 주민들의 안정을 유도하기 위해 "침착하라"고 하면서 안전 수칙을 안내하는데, 위와 같은 발언이 나왔다는 건 당시 상황이 얼마나 최악이었는지를 알려주는 단적인 예시이다. #경과 문단의 영상을 보면 평소와 다를 바 없던 국회도 혼란스러워 하는 분위기로 변하고, 속보 방송하는 와중에 주변에서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볼 수 있다.

피해가 너무 막심한 탓에 중앙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부흥 계획을 실행하고 있다. 우선 10년 시한부 조직인 “부흥청(復興庁)”을 총리 직속으로 설치하고, 후쿠시마 사고로 신뢰를 잃어버린 농산물의 판촉을 위해 “먹어서 응원하자” 캠페인을, JR 동일본은 관광 진흥을 위해 “가자, 도호쿠” 캠페인을 벌이는 등 현지 사회에 활력소를 불어넣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여태까지 이런 광범위한 재난이 없었기 때문에(홋카이도~도쿄 영향권) 재난준비에 대한 기저상식을 크게 비틀었다. 도시에서는 대중교통의 장기간 정지로 인한 교통마비로 인해 “귀가 곤란자”가 다수 속출했으며 이들을 수용할 대피소의 고려가 필요해졌다. 지진해일의 예상피해를 산출하는 방법의 재정립이 요구되었고, 원자력 업계는 후쿠시마 사고로 인해 크게 타격받아 전세계가 후속조치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야깃거리[편집 | 원본 편집]

  • 촌장의 지혜
    이와테 현의 후다이(普代) 마을은 진원지인 산리쿠 해안 근처에 있는 마을인데도 불구하고 실종자(1명)을 제외하곤 사망자가 단 1명도 없었다고 한다. 14m에 달하는 쓰나미가 마을 앞까지 도달했으나, 높이 15.5m, 길이 155m의 방조제와 높이 15.5m, 길이 205m의 수문에 가로막혀 마을이 지켜졌다. 당시 항구 밖에 있던 사람들이 황급하게 방조제 안으로 대피를 했는데, 그 사람은 정말 신발도 젖지 않았다고 한다. 이 방조제는 역대 촌장 중 한명이 지진해일 기록을 참고하여 사업을 추진한 것으로 막대한 예산이 들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바보짓이라 손가락질 했다고 한다.
  • 희생으로 지켜낸 인명들
    미나미산리쿠정(南三陸町)에서는 쓰나미가 덮치는 순간까지 주민들에게 "대피하라"고 방송을 했던 엔도 미키(遠藤未希)라는 읍사무소 직원이 있었다. 이 직원의 행동은 후에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2]. 여직원이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방재용 청사는 철골만 앙상한 상태로, 당시를 환기시키기 위해 보존하고 있다.
    오나가와정에서는 직원들을 대피시키고 사장 본인은 쓰나미에 희생된 안타까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직원들은 모두 중국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특히 회자되었다[3].
  • 한국 관련
    한국에서도 민간 차원에서 일본을 돕기 위해 600억원에 달하는 모금을 했었다. 그러나 일본 언론 아사히 신문은 통계에서 한국을 빼버렸고,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을 교과서에 실으면서 한일관계는 악화된다.

참고 문헌[편집 | 원본 편집]

  • 김대홍 (2012년 3월 6일). 《일본의 눈물: 대지진 현장에서 본 일본 사회의 빛과 그림자》. 올림출판사, 319쪽. ISBN 89-9302-731-5


각주

  1. 이 기사에 따르면, 이 지진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가장 큰 규모의 지진이 되었다고 한다.
  2. 그녀는 메아리가 되었다… 최후까지 대피방송한 엔도 미키, 동아일보, 2012.03.13.
  3. “외국인 근로자 살리고 자신은…” 日 ‘아름다운’ 기업주들, 경향신문, 2011.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