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냉전은 이 한 장으로 요약된다.

냉전(冷戰, 영어: Cold War)은 20세기 후반, 소비에트 연방을 위시한 공산주의(사회주의) 진영과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자유주의) 진영이 대립하던 구도를 가리킨다.

냉전 시기는 20세기 후반 가장 격렬하게 세계가 대립했던 시기이며, 우발적 핵전쟁이 수천 번 일어날 뻔했던 시기이고,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을 지배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 미국과 소련은 세계를 두고 극한으로 대립했으나 전쟁으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물론 한국이나 베트남 등에서 열전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어원 및 개념

냉전의 어원은 1946년 미국 대통령 고문 바루크(Bernard Baruch)의 참모였던 허버트 스워프(Herbert B. Swope)로부터 유래했다.[1] 스워프의 발언으로 부터 냉전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냉전이라는 개념은 정부의 관료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어떤 시점부터 냉전이었다고 규정하기가 매우 어렵다.그냥 대충 내뱉은 말이 얻어 걸렸으니 그래서 냉전의 기간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어떤 학자는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러시아의 대결에서부터 찾기도 하고, 어떤 학자는 1917년 공산혁명 이후의 대립부터라 말하기도 한다.

흔히들 하는 말로 '얄타(1945)부터 몰타(1989)까지'라 말한다.

원인

냉전의 기원에 대해서 총 세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전통주의(Traditionalism), 수정주의(Revisionism) 그리고 후기 수정주의(Post Revisionism)이다. 전통주의는 냉전의 원인을 소련에게서 찾는다. 전통주의자들에 따르면 냉전이 발생한 것은 소련의 팽창적 행보[2]에 의한 것이라 설명한다. 전통주의자들은 냉전이 소련의 팽창적인 움직임에 미국은 당연히 맞설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서 냉전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즉, 전통주의자들은 냉전의 원인이 소련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 해석의 주요 대변자로는 캐넌(G. Kennan)과 덜레스(J. F. Dulles)가 있고, 학자로는 질라스(M. Djilas), 댈린(D. Dalin) 등이 있다.

수정주의는 전통주의 시각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났다. 수정주의 시각은 냉전의 원인이 미국에게 있다고 본다. 수정주의는 1959년에 출간한 윌리엄 A. 윌리엄스(William A. Williams)의 『미국 대외정책의 비극』이라는 책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냉전의 원인에 있어서 미국의 책임을 강조했다. 이들의 주장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미 탈탈 털린 소련이 무슨 힘으로 미국과 싸우겠냐!! 였다. 그러므로 냉전은 힘없는 소련을 과대평가한 미국에게 있다고 보았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앞서 말한 윌리엄스, 콜코(G. Kolko), 호로비츠(D. Horowitz), 가드너(L. C. Gardner)가 있다.

후기 수정주의 시각은 수정주의 시각에서 전통주의 시각을 통합하는 것이다. 이들은 수정주의와 전통주의 두 시각의 문제, 한 진영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보는 시각에서 탈피하여 이 양쪽의 책임을 강조했다. 후기 수정주의 시각에 의하면 냉전의 원인은 힘없으면서도 팽창하려는 소련과 힘없는 소련을 과대평가한 미국의 오해가 낳은 결과라 본다. 대표적인 대변자로는 로트(W. Loth), 여진(D. Yergin)이 있다.

냉전의 시작

냉전의 시작은 사실 의견이 분분하다. 왜냐면 냉전의 시작을 어떤 사건으로 잡느냐에 따라 냉전의 책임이 확연하게 갈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구권의 공산화를 냉전의 시작으로 본다면 당연히 소련이 냉전을 유발한 것이고, 반대로 마샬플랜이 냉전의 시작이라면 미국에게 냉전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는 논란이 지속되고 있으나 현재의 중론은 마셜 계획1948년 베를린 봉쇄를 시작으로 본다.

마셜 계획은 동구권의 공산화로 시작되었다.

내용

냉전의 시작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나 일반적으로 동구권의 공산화, 마셜 계획, 트루먼 독트린, 베를린 봉쇄(1947) 등이 있던 1946-48년 사이에 냉전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냉전의 전개

얄타회담의 결과 연합국(미·영·소)는 점령지역의 국가들을 민족자결주의 원칙 하에서 독립시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동구권에서 소련은 선거조작과 정치개입을 통해서 공산화시켜버린다. 이는 당연히 미국을 위시한 자유주의 진영들의 불만을 키웠다. 이 과정에서 윈스턴 처칠철의 장막 발언을 통해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했다. 그래도 루스벨트가 있는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루스벨트가 죽고, 미 대사관 참사관이던 조지 케넌이 긴 전보(1946)를 보내면서 미국의 태도는 급격히 변화된다. 트루먼 독트린은 이런 미국의 변화의 가장 상징적인 것이다. 트루먼 독트린 선포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은 대 소련 압박정책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미국과 소련의 충돌로 이어졌고, 첫 번째 충돌은 1947년 베를린 봉쇄이다. 이 베를린 봉쇄에 미국은 단호하게 대처한다. 먼저 핵무기를 전면으로 런던에 배치하고 이를 뉴욕타임스와 런던타임스에 정보를 흘려 대서특필하게 만들었다. 이는 당시 핵무기를 독점하고 있던 미국이 핵을 통해 러시아를 위협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미국은 대규모 수송기를 동원하여 서베를린에 물자를 공급한다. 약 8개월에 걸친 봉쇄는 결국 소련이 물러나면서 끝이 났다. 미국의 대량 수송기 작전에 포기한 것이었다. 역시 독일이 하면 안 되지만 미국이 하면 된다니께. 이렇게 첫 번째 대립은 조용히 무마되었다.

두 번째 대립은 한국전쟁이다. 1950년 한국전쟁은 냉전이 가장 격화되었던 시점이고, 이를 계기로 각각의 진영 내부의 결속을 다지게 되었다. 한국전쟁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다만 미국이 빠르게 참전한 이유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의 남한 침공이 소련의 팽창정책으로 보였고, 이는 미국의 의지를 시험한 것으로 판단했다. 만약 여기서 미국이 남한을 포기하면 다른 분단 국가에서도 동일한 정책을 할 것으로 생각했고, 이에 미국은 즉각적인 참전과 파병을 결의한 것이다.

이 두 사건을 기점으로 냉전의 구도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이후 국제정세는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분단되어 서로 경쟁했다. 그 경쟁은 경제, 문화, 군사, 과학기술 전반에 걸친 것이었다.

냉전의 격화

1953년에 이오시프 스탈린이 급사하고 이후 후임을 맡게 된 니티카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 정책을 폈다. 스탈린그라드 도시는 볼고그라드 도시로 재명명됐으며, 스탈린 동상들은 허물어졌고 굴라그 수용소에 감금된 수감자들은 해방됐다. 동독일, 헝가리, 폴란드 등의 동유럽 국가들은 이러한 개혁을 틈타 민주화 운동을 시도했으나 소련군에 의해 유혈진압 당한다.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은 서로 간첩들을 보내 서로를 감시하기 시작했고, 한편에서는 우주 경쟁을 벌였다. 두 국가들은 서로 원자 폭탄에서 수소 폭탄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상호 확증 파괴 이론은 갈수록 현실화되었다.

1955년에 서독일이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하자 소비에트 연방에서 이에 대항해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창설하고는 동독일 등의 위성국가들을 참가시켰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예산을 국방에 집중하자 위성국인 동독일 국민들의 삶은 궁핍해졌다. 동독일 영토인 동베를린 시민들은 이에 서독일 영토인 서베를린으로 넘어가기 시작했고, 소비에트 연방은 동독일의 경제가 악화될 것을 우려해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원래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간 협정으로 미국 외교관은 동베를린으로 왕래할 수 있었으나, 언제부턴가 동독일 병사들이 이를 거부하기 시작했고, 이 사건을 두고 1961년에 미군 탱크와 소련군 탱크가 베를린 국경검문소를 두고 몇 시간 대치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었다.

서유럽 식민제국 국가들은 붕괴된 경제 때문에 더 이상 식민지배를 유지하기 어려워졌고, 이에 따라 1950년대부터 탈식민지화가 진행되어 아프리카 17개국이 독립한 1960년에 그 정점을 찍는다. 이러한 신생국들은 1955년에 인도네시아에서 반둥 회의를 열어 반식민주의, 중립을 내세웠고 제3 세계가 형성된다.

1959년에 중남미 공산주의자들은 카스피 해의 쿠바를 공산혁명으로 차지하고는 소비에트 연방과 군사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한다. 1962년 미국은 뒤늦게 쿠바에 심각한 양의 핵 미사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발한다.

냉전의 완화

1954년에 베트남은 독립했으나 이념으로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었고, 결국 전쟁으로 번지게 된다. 남베트남은 10년 넘게 이어진 전쟁에서 열세를 굽히지 못하고 있었고, 미국은 남베트남이 적화통일 될 경우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 인도 순으로 공산주의가 확대될 것을 우려해 결국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미국은 이후로 8년 동안 베트남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나, 미군의 교착 상태, 전쟁범죄, 반전여론 등으로 결국 철군하고 만다. 남베트남이 2년 뒤 패망하고 우려했던대로 인도차이나는 공산화되나, 베트남이 얼마 안 되어 캄보디아와 중국과 전쟁을 벌이면서 내분이 일어나게 된다.

미국은 닉슨 행정부의 등장으로 새로운 장을 맞는다. 일명 데탕트의 시대이다.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가 중심이 되어 미국은 1971년에 중화민국을 UN 상임이사국에서 퇴출시키고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손을 잡고(핑퐁 외교), 이후 소련과 회담을 하면서 우호를 증진시켜간다. 당시에는 이 데탕트의 시기를 지나 냉전이 끝날 것이라 기대하였다. 닉슨의 뒤를 이은 포드 행정부와 카터 행정부 또한 이 기조를 유지하며 소련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 간 관계가 개선되면서 냉전은 점차 대리전의 양상을 띄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신생국들은 비록 독립했으나 식민 통치 시기의 부족/지역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결국 내전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은 영향력 확대를 위해 이러한 내전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한편에 미국은 칠레의 사민주의 정권을 군부 쿠테타를 지원함으로서 전복시켰고, 이후로도 남미의 콘도르 작전을 지원하였다.

1979년 6월 18일 미국과 소련은 2차 전략 무기 제한 협상을 오스트리아 빈에서 조인하며 냉전을 끝내는 듯 했다.[3]

신냉전

그러나 그 해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며 다시 새로운 냉전으로 들어가는데 이를 신냉전이라고 한다.

냉전의 종식

1985년에 소련에서 고르바초프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냉전의 완화기를 맞이하지만 소련은 예상치 못하게 급격히 붕괴하면서 냉전은 끝이 났다.

결과

국제정치학의 아버지인 케네스 월츠는 냉전의 시기를 가장 안정적인 시기라 말했다. 그에 의하면 냉전으로 인한 양극체제는 서로간의 경쟁을 통해 성장할 기회와 동시에 서로 간의 힘에 의해 전쟁을 예방하는 세력균형의 형태를 유지하기에 가장 안정적인 국제정치체제라 역설했다. 뭐 이 말은 사실 그대로 되었지만 냉전의 시기 얼마나 많은 전쟁이 일어날 뻔했으며, 핵전쟁의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을 정말로 안정적인 형태라 말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이 대립을 하지 않은 이유로 핵무기로 인한 상호확증파괴를 두려워해서 그렇다는 의견이 있다. 물론 그런 부분이 아예 없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당시 핵무기의 공포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니까 말이다. 대표적으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가 핵전쟁에 대한 공포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냉전 시기의 평화가 단순히 이것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1947년 베를린 봉쇄 당시 미국은 핵무기를 런던에 전면 재배치했다. 그 시기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는 미국뿐이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런 핵 위협도 소련의 베를린 봉쇄를 풀 수 없었다. 이 봉쇄를 푼 것은 항공기를 동원한 수송작전이었다. 또한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에도, 미국은 이미 쿠바에 핵 미사일이 배치되었음을 인지했음에도 쿠바를 봉쇄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본다면 핵 억제의 존재 및 실효성을 마냥 인정하기는 어렵다.

관련 문서

각주

  1. 베른트 슈퇴버 지음, 최승완 옮김, 『냉전이란 무엇인가』, 서울:역사비평사, 2008.
  2. 팽창적 행보의 원인으로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러시아가 보여준 팽창적 행보에 기인했다는 의견, 소련 공산주의 사상 자체가 팽창적이다는 의견, 당시 소련의 지도자인 스탈린이 히틀러와 같이 영토팽창의 야욕이 있다는 의견이 있다.
  3. http://www.state.gov/www/global/arms/treaties/salt2-1.html 미국 국무부의 요약 (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