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봉쇄

베를린 테겔 공항에서 이륙 대기중인 영국 수송기

베를린 봉쇄(Berlin Blockade)는 1948년, 소련이 서베를린을 봉쇄한 사건을 말한다.[1] 서베를린 봉쇄로 서독이나 서방 세계에서 뭔가 떡고물이 떨어질 줄 알았더니 미국의 물량전으로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독일은 불가능했지만 미국은 다르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4대 연합국들은 전범국인 독일이 다시 한번 힘을 되찾아 또 새로운 전쟁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였으며 이에 독일을 각각 일정 부분씩 나누어 관리하게 되었다. 문제는 베를린인데, 베를린은 비록 지리상으로는 소련이 담당한 독일 동부에 있었으나 오랜 기간 독일의 수도였던 만큼 영국, 프랑스, 미국도 베를린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베를린도 4등분이 되었으며 이 결과 공산주의 진영의 영역인 동독 한가운데에 자유주의 진영의 영역인 자유 베를린, 이른바 서베를린이 형성되게 된다.

결과적으로 서베를린은 지리나 다른 자연적 문제가 아닌 순 이념적 문제 때문에 고립된 지역이니만큼 여러모로 살아가기 불리했는데 일례로 물자 공급의 경우 필수적으로 동독의 도로를 이용해야만 했다. 그나마 분단 초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으나, 점차 국제정세가 변해 냉전이 도래하면서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은 실제로 한반도베트남에서 무력충돌까지 일삼는 험악한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그 여파가 바로 이 서베를린에 직격으로 불어닥치면서 결국 소련이 정치적인 이유로 서베를린을 봉쇄하기에 이른다.

발단[편집 | 원본 편집]

상술했듯 독일은 원칙적으로는 4등분 되어 있었으나, 같은 자유주의 진영 국가들이라 이해관계가 잘 맞아떨어진 영국, 프랑스, 미국은 각자의 관할 지역들을 사실상 한 나라나 다름없이 굴리고 있었다. 소련은 당연히 이에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는데, 상술했듯 독일이 겉으로만 1/4씩 4조각으로 나누어져 있을 뿐 이렇게 되면 실질적으로는 3/4(미영프) vs. 1/4(소련)이라는 불합리한 구도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결국 1948년 3월 3국이 독일 지역 내에서의 공식 화폐를 마르크 화로 통일함으로써 소련은 강한 분노를 표출하였고 이에 같은 해 6월 대군을 동원하여 서베를린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이 같은 서베를린의 봉쇄는 당시로서는 소련이 선택할 수 있었던 그나마 가장 온건한 협박 정책(...)이었다. 이미 2차 세계대전을 치룬지 얼마 되지 않아 더 이상의 전쟁은 피하되 서방 국가들을 압박하기 위해 본보기로 베를린을 쥐어짬으로써 실질적인 무력 충돌은 피하고 무력시위는 확실히 행하는 일거양득의 기회였다. 이러한 베를린 봉쇄조치로 서방 국가에서 서베를린으로 가는 물자 공급 길은 뚝 끊겼으며 마침내 서베를린은 불과 한 달여 남짓만 버틸 수 있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전개[편집 | 원본 편집]

미영프 연합국들은 당연히 이런 조치에 난색을 보였다. 잘못 건드리면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수 있어 이미 두 차례의 세계전쟁이 질릴 대로 질린 터라 공산 진영과의 전쟁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련을 설득하자니 소련은 완강하게 대화를 거부하고 있고, 종반에는 차라리 베를린을 포기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까지 공공연히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자 연합국은 두 가지 방안을 채택한다. 첫 번째는 핵무기로 위협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비행기로 물자를 공수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안은 당시 유일하게 핵무기 보유국가가 미국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미국은 봉쇄가 발생하자마자 핵무기를 런던에 재배치하고, 관련 소식을 신문기자들에게 뿌렸다. 당연히 이 사실은 특보로 나갔다. 그러나 이를 아는 사람이 적은 것처럼 효과는 미비했다.....

두 번째 안은 항공기로 물자를 공수하는 것이었다. 물론 효율성이 떨어지며, 소련의 방공 작전으로 기체와 조종사가 희생될 수 있었기 때문에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이 강하게 밀어붙였고 본 작전의 지휘관이 그 유명한 석기시대 마니아 커티스 르메이라서 우직하게 밀고 나가 결국엔 진행되었다. 이를 위해 미국은 퇴역한 노후 수송기들도 되는대로 다 끌어다 쓰고 마찬가지로 예비역으로 물러난 조종사들도 되는대로 박박 긁어모아 조종사를 모으고 모아 준비를 마치고 마침내 역사에 남을 공수전인 베를린 공수(Berlin Airlift)를 시작하게 된다.

처음 이 작전에는 석탄 등 필수 생활용품만 공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으나, 막상 공수 작전을 시작해보니 그간 비행기와 조종사를 끌어다 모은 보람이 있었는지 원래 필요한 일일 3,600톤의 보급 물량을 가뿐히 뛰어넘는 더 많은 물량(후일 조사에 따르면 일일 5,800여 톤)의 보급이 가능해져서 여유가 생김으로서 아이들을 위한 간식 같은 기호품들도 공급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긴급 공수를 받는 서베를린이 멀쩡히 공급받는 동베를린보다 더 잘 먹고 잘 사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최후[편집 | 원본 편집]

이렇게 되자 베를린 봉쇄를 통해 서방 국가들을 압박하려던 소련의 의도는 무의미해졌으며, 오히려 서방 국가들의 우월한 보급 능력만 전 세계에 선보이는 무대만 마련해준 꼴이 되어버렸고 결국 봉쇄 시행 8개월만인 1949년 5월에 공식적으로 봉쇄를 해산했다. 다만 연합국은 소련이 훼이크를 치는 것일지도 모른다며 신중히 처리해 같은 해 10월까지 비행 공수를 이어나가고 10월이 되어 공식적으로 비행 공급을 중단하고 다시 정상적으로 육로 공급을 재개함으로써 끝난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1961년 소련은 다시 한 번 더 서베를린을 봉쇄한다. 이는 동독에서 자꾸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려는 사람이 많아서 결국 탈출 시도를 막기 위해 장벽을 세워 서베를린을 봉쇄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베를린 장벽이다. 이때는 앞선 봉쇄와는 달리 단순히 동독 주민의 이탈을 막을 목적으로만 만들어진 거라 기존 도로에 검문소를 세우는 식으로 실제 길 자체는 막지 않아서 물자 공급 대란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여담으로 처음에 미국이 항공기로 공급한다고 했을 때, 스탈린은 이길 것이라 확신했다고 한다. 스탈린그라드의 경험이 있어서 미국이 제풀에 지쳐나갈 것이라 생각했다고.....미국은 다르다!!!!!!!!![2]

각주

  1. 첨언하자면 만약 이거 관련해서 논문 쓰는데 연도 표기 안 하면 탈락이다. 왜냐면 위에도 쓰여 있지만 서베를린 봉쇄는 1948년1961년 두 번 있었다.
  2.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를 무리하게 점령하려다 되려 소련군에게 역포위당하자, 당시 공군 총사령관이었던 헤르만 괴링은 수송기로 고립된 아군에게 공급이 가능할 것이라며 나름대로 공급을 시도했지만 시원하게 망했다. 하지만 알아둘 점은 이는 사실 소련이 잘나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괴링이 워낙 무능해서 그랬던 것이다. 물론 괴링이 설령 유능했다 하더라도 당시 독일은 상황이 막장이라 미국만큼 제대로 할 가능성 자체가 없었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