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중동전쟁

1967년 6월 5일에서 6월 10일 사이에 벌여진 전쟁으로 6일만에 끝난 전쟁이라서 6일 전쟁으로도 유명하다. 물론 중간에 전쟁 중단을 압박 당해 일찍 끝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승리로 평화건 협정이건 뭐건 순식간에 끝나버려서 유명하다.

개요 및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수에즈 전쟁에서 패전을 겪었지만 결과적으론 승리한 나세르는 아랍 국가주의의 리더답게자칭, 근데 실제로도 그런 이미지이긴 했다 이스라엘에게 복수하기 위해 소련의 군사고문단이나 최신 장비를 받고,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후원하였다. 이런 식으로 서로 간의 긴장감이 웃돌았었다.

이때 시리아에서도 이스라엘과 여러 가지 충돌이 있었던 차인데 시리아 정부가 더 극적인 바흐티스트 정부로 바뀌자,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극에 달하기 시작하고, 이집트의 나세르는 시리아를 지키기 위해 상호방어조약을 맺게 된다. 그 이후로도 사무라는 마을이 이스라엘 (IDF)에게 습격당하고, 실제로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싸워서 시리아의 MiG Fighter 6대가 파괴되는 등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지만 나세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약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 그렇게 전쟁 없이 그냥 지나갔으면 오히려 좋았겠지만... 위기는 엉뚱하게도 소련에서 내려온다. 1967년 5월 13일, 소련은 사다트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시리아를 공격하려한다고 오보했다. (정확히 말하면 차후에 소련의 정보가 거짓이라는 것이 판명 되었고, 왜 이런 짓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저 일부에선 시리아를 도와주고 싶어하는 소련이 벌인 일이라고는 한다.) 그리하여 나세르는 5월 14일 10만 군사를 시나이 반도에 배치하고, 티란 해협에 주둔하고 있던 UNEF, UN 군사들에게 당장 자기 나라는 자기들이 지킬테니, 이집트에서 나가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UNEF는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 쪽에 주둔하여 전쟁 막이 될 수 없겠냐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멍청이가 아니면 솔직히 이쯤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어야 하지만.... 여기서 이제부터 이집트와 이스라엘 두 나라의 입장을 따로 따로 들여다 볼 수 있다.

이집트[편집 | 원본 편집]

이집트 입장에선 UNEF가 떠나게 하고 티란 해협을 닫아버리는 게 딱히 전쟁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 나세르는 단지 이스라엘 내에서의 자신의 위상을 떨치고, 정치적인 수완을 바란 거지, 딱히 전쟁을 하여 무력적인 승리를 바란 것은 전혀 아니었다. 단,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이스라엘이 공격자가 되고 이집트는 방어국이 될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소원은 이루어졌다

이스라엘[편집 | 원본 편집]

이스라엘의 외무장관인 골다 마이어 (Golda Meir)는 1957년 5월 1일 UN에서의 연설에서 공격적인 태도를 나타냈지만, 정작 이스라엘 정부 내부에선 매우 조심스러워 했다. 총리였던 레비 에시콜 (Levi Eshkol)은 대외적인 지지가 없이 싸우는 것을 꺼려했고, 미국, 프랑스, 영국에게 잠정적 군사적 행동에 대한 허가를 부탁했다. 미국의 입장에선 당연히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꺼려했다. 이유는 수에즈 전쟁을 좀 보면 알 것이다. 그리고 나세르 정부에게 어떻게든 해협을 열어주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5월 27일, 에시콜 정부는 전쟁을 아직은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2주만 더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런 소극적인 태도는 이스라엘 대중에게 좋게 비칠리가 없고, 정부에 대한 지지는 떨어지고 있었다. 또한, 장군들은 대부분 다 전쟁을 해야 한다고 난리였다. 5월 30일 이집트가 요르단이랑도 협정을 맺자, 이스라엘의 에시콜 정부도 악명 높은 모셰 다옌 (Moshe Dayen) 장군을 국방 장관으로 임명하고 전쟁은 시작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리고 6월 2일, 나세르가 미국에게 대표를 보내기로 결정했고 7일에 대표를 보내기로 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4일에 이스라엘에게 펜타곤을 거친 CIA 통보가 내려온다. 이스라엘의 공격을 허가한다

전황[편집 | 원본 편집]

1967년 6월 5일 아침 7시, 이스라엘 공군이 들이닥쳤고, 단 3시간만에 이집트 공군 전체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한 말할 것도 없이, 한 국가의 공군을 완전히 파괴하기에는 원래 3시간 이상의 시간이 걸려야 정상이다. 근데 이 3시간안에 이집트 공군만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도 아니고 시리아와 요르단이 공격 당하여 뜬금없이 공격당하는 요르단. 공군에 큰 타격을 입혀졌다. 시나이 반도를 공격한 이스라엘 공군은 이집트가 막으려 온갖 힘을 다 썼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만에 시나이 반도를 거쳐 거의 수에즈 운하까지 진격한다. 또한 웨스트 뱅크 (요르단의 입장에서 웨스트 뱅크, 이스라엘 입장에선 이스트 (동쪽) 뱅크)를 공격하여 요르단 강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 세 나라는 당연히 반격도 하였다 요르단, 이집트, 시리아가 반항하기를(을) 썼읍니다! 효과는 극히 미미했다!

이를 두고 UN 안전 보장 이사회 (Security Council)은 전쟁을 즉히 멈추라고 명했으나 아랍측에서 거절하였다. 무슨 판단이냐. 이는 아직도 전쟁에 이길 확률이 꽤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생각을 했어요

이후는 진짜 안습이다. 아카바 만과 티란 해협을 차지한 6일에는 이집트가 공세를 멈춰달라고 빌었고, 이스라엘은 당연히 이를 무시했다. 항복하기를 강요했다. 7일부터는 요르단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동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요르단 강까지 진격하자 요르단의 후세인 왕 또한 공세를 멈춰달라고 부탁한다. 공격의 포커스를 바꾸자 1일 만에 전쟁이 끝났어요. 시리아 군은 이때까지도 전황을 제대로 모르고 이집트와 요르단이 잘 싸우고 있는 줄 알고 소극적인 공격 및 기습을 골란 고원 쪽에서부터 행하였으니... 다옌 장군이 1967년 6월 9일에 시리아 쪽으로 방향을 바꾸자 하루 뒤인 6월 10일, 시리아는 공세를 멈추라고 부탁한다. 공세를 멈춰달라고 쓰고, 항복이라 읽는다

결과 및 영향[편집 | 원본 편집]

이스라엘[편집 | 원본 편집]

  • 이스라엘은 18만 제곱 킬로미터의 땅을 새로 얻었다! 그리고 이 땅의 명칭이 이때 차지한 땅(occupied land)이 되었다. 이게 어느 정도인지 알게 쉽게 설명하면 한국의 영토 넓이가 대략 10만 제곱 킬로미터이니까 한국을 하나하고 훨씬 남는 땅이며, 한반도 전체가 대략 22만 제곱 킬로미터이니 대략 한반도 하나를 얻었다고 해도 무안하지 않을 만큼의 땅 크기이다. 딱히 크게 매장된 석유도 없고, 풀 하나 못 기르는 쓸데없는 사막이라는 사실은 무시하자
  • 또한, 티란 해협은 당연히 열리게 되었다. 당연하지 자기들이 빼았아갔으니까 이로서 이스라엘의 남쪽 항구인 에일랏 항구는 세계에 열리게 되고, 수에즈 운하의 동쪽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즉, 수에즈 운하를 기준으로 한 편은 이스라엘, 한편은 이집트라고 보는 게 좋을 것이다. 동쪽 예루살렘을 차지하게 되었다.
  • 그리고 샤름-알-셰이크라는 아콰바 만과 수에즈 만을 연결하던 엄청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가 있었는데, 이가 이스라엘을 연결하게 된다. 샤름-알-셰이크가 어느 위치인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시나이 반도의 남쪽 끝이고, 아콰바 만과 수에즈 만이 갈리는 곳으로, 유럽이나 미국에서 이스라엘으로 배로 가기 위해선 꼭 지나야 하는 곳이다. 만약에 여길 못지나가게 되면, 이스라엘은 유럽과 무역은 사실상 끝나게 되는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유충지이다.
  • 동쪽에서는 골란 고원이라는 시리아의 땅을 차지해버렸는데, 여기도 시리아가 이스라엘에게 포탄을 날리면서 공격하던 군사적 유충지였다.
  • 그리고 매우 자연스럽게 동예루살렘이 이스라엘으로 합병되었다.

이집트[편집 | 원본 편집]

  • 우선, 이집트의 군사적 피해는 말할 것도 없이 컷다. 어느 매체를 통해 이 정보를 접하느냐에 따라서 숫자가 오락가락하기는 하지만, 대략 1만 8000명의 이집트인들이 죽은 반면에, 이스라엘은 1000명, 그러니까 한 5% 약간 윗도는 수준의 병사만 죽었다... 근데 명심해라, 이스라엘은 이집트'만' 싸운게 아니라 시리아, 이집트, 요르단을 거의 동시에 싸웠다!
  • 근데, 이때 나세르 대통령의 움직임이 아트이다. 나세르는 이집트 대통령으로서 사임하였으나 거의 100% 짜여진 거겠지만 이집트인들의 엄청난 성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곧 바로 대통령 직을 다시 맡았다.
  • 그러건 말건,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 전쟁을 통해 아랍의 리더로서의 구축한 이미지는 이로서 꽤 산산조각이 났고, 그의 정책들은 그릇됐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 그러고선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언젠가 꼭 복수하겠다!"라는 말을 남긴다 이게 바로 실패플래그인가요?
  • 이집트는 이 사건을 이후로 냉전 속에서 소련 쪽에 더 붙게 되고, 이스라엘을 몰아내어서 수에즈 운하의 재가동을 실행하겠다는 목표를 갖게 된다. 근데 한 10년 뒤인 1975년이 돼서야 이 일이 가능해졌다, 더 이상의 일은 10월 전쟁 참고.

그 외의 아랍 나라들[편집 | 원본 편집]

  •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미국 쪽에 달라 붙어, 웨스트 뱅크를 돌려받는데 도움을 받기를 원했다.
  • 시리아는 다른 아랍 나라들과 조차도 따로 노는 이상한 나라, 즉 개판인 나라가 되었다.
  • 이스라엘에게서 도망치거나,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난민이 된 아랍-팔레스타인 난민이 엄청 많이 생겼다. 이는 이스라엘은 이 전쟁 틈을 사 동예루살렘의 600명의 난민의 집을 쳐부수는 등 여러 더러운 일을 해서 그러한데, 물론 이스라엘 정부는 현재까지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그딴거 없다를 시전하며 어느나라훌륭하신 분특기를 시전하셨다.
  •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의 자신들만의 땅을 위한 요구는 강해졌다.
  • 또한,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이 워낙 커져서, 아랍 국가들은 평생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카르툼 결의안을 서명하였는데 이를 대략 10 년 동안 지킨다. 영어식 명칭 중 하나가 그 내용을 잘 축약한다, 카르툼의 세개의 '노', "Three No's of Khartoum"이다, 이것이 뭐냐하면,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과 평화를 이루지 않고 (No Peace), 이스라엘의 인정을 하지 않으며 (No Recognition), 이스라엘과 협상도 하지 않는다 (No Negotiation)는 내용이다, 즉 이스라엘을 투명인간 취급 하겠다는 거다. 근데 이게 오히려 큰 문제가 되는 게 어떤 나라가 싫고, 분쟁이 크게 있었다고 해서, 그 나라를 없는 나라 취급한다고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방치가 되고 악화 된다는 것이다.

소련[편집 | 원본 편집]

  • 소련에서 받은 무기 등으로 싸운 6일 전쟁에서 완벽하게 압살당한 덕분에, 아랍에서의 소련의 위치는 더 줄어들었다.
  • 잃어버린 위치를 되찾을 겸, 소련은 이집트와 시리아 군을 재건축하는데 무기를 대주는 등 일조를 하였고, 소련의 군사적 고문들을 이집트에 파견하였다. 하지만 소련의 궁극적 목적은 아랍에서 온수를 통하게 하는 파이프를 설치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었지만, 나세르 대통령은 전혀 그러고 싶어하지 않았다

미국[편집 | 원본 편집]

  • 이스라엘과의 취급이 여러 면모로 곤란해졌다. 국내에선 이스라엘에 대하여 웅호적인 여론 자본이 조성 되어 있었고, 그만큼, 이스라엘에 대하여 대외적으로도, 실제로도 우군이었지만, 문제는 이스라엘의 차지한 땅의 취급이었다. 일단 대외적으로는 미국은 이스라엘 군대가 차지한 땅에서 주둔하는 것은 동의하였으나, 미국은 중동이 소련 쪽으로 떠넘어 가는 것이나 중동에서의 소련과의 충돌을 꺼려했던 것만큼, 이스라엘이 이 전쟁을 통해 차지한 땅들은 아랍 국가들 한테 대부분 다 돌려주고, 이스라엘이 사건 이후로 차지하게 되는 땅은 매우 미미한 수준이 되기를 원했다. 실제로 미국 행정부는 이스라엘에게 기밀히 이러한 기대를 통보하였다. 근데, 이스라엘은, 당연히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싸워서 차지한 땅을 일시 보관만 하다가 옛다 하고 돌려주는 바보가 어디있겠냐?

여파[편집 | 원본 편집]

1967년 쯤은 베트남 전쟁 등이 발발하여 냉전이 한창인 때였지만, 그런 때일 수록 나라간의 평화 협정은 양쪽다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7년 7월에는 이스라엘이 차지한 땅에 대한 취급에 관한 내용이 담긴 평화 협정에 대한 원고를 작성하였고, 11월 22일 통과한 UN 안보 위원회의 결의안 242번에는 그 내용이 상당 부분 참가 되어 있다. 원고/결의안의 초안은 영국에 의하여 거절 되었고, 이 초안은 아랍 측에서는 이스라엘에게 너무 많은 혜택이 추가 되어 있다고 반발했다. 그리하여 영국 UN 대사인 캐라돈 경의 외교적 활약으로 아랍과 이스라엘의 어정쩌정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 결의안은 이스라엘, 요르단, 이집트 세 나라에 의하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 문서에서는 당연히 여러 쟁점들이 있었다. 제1 안에서 이스라엘은 최근 차지한 땅에서 모든 군사를 철회한다는 조약이 있었으나, 문제는 이 '땅' (Territory)의 정의였다. 이스라엘은 차지한 땅 중 일부만 돌려주는 것으로 해석했고, 아랍 측은 당연히 차지한 모든 영토를 돌려주기를 원했다. 근데 시리아는 당연히 이를 아예 거절하였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이 문서 내의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명이 안 적혀 있는 것에 대하여도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여러 문제 덕분에 평화 같은 것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집트-이스라엘 소모전을 유발하게 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