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

유고슬라비아는 동남부 유럽에 위치했던 나라였다. 냉전이 끝나가면서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겪으면서 북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의 6개 국가로 나뉘면서 멸망하였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성립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왕정 시대[편집 | 원본 편집]

제2차 세계 대전[편집 | 원본 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독일의 권유를 받아들어 추축동맹에 가입했으나 그 직후 쿠데타가 일어났다. 쿠데타 정부는 추축동맹의 침공을 우려, 동맹을 탈퇴하지 않겠다며 수습에 나섰으나 분노한 독일은 1941년 4월에 전면적으로 침공, 불과 1달도 지나지 않아 전 국토가 추축국에게 유린되었다.

이후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는 추축국에 대항하는 저항 조직으로 세르비아계 친왕파인 드라골류브 "드라자" 미하일로비치(Драгољуб "Дража" Михаиловић)의 체트니크와 사회주의자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계 사회주의자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체트니크와 파르티잔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추축국과 협력하는 실책을 범하였고 그에 따라 티토의 파르티잔이 연합국의 지원과 민심을 얻게 되어 유고슬라비아 지역의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후 독일이 패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독립을 재확인받고 또한 이탈리아로부터 아드리아해 동부 해안가를 모두 수복한다.

냉전[편집 | 원본 편집]

유고슬라비아 내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였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취임 이후 소련의 뜻과는 다르게 독자적으로 행동하면서 유고슬라비아의 외교와 내실을 다진다. 이후 코민테른을 탈퇴하면서 친서방·중립 정책을 펼쳤다.

유고슬라비아 내전[편집 | 원본 편집]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사망 이후, 연방을 이루던 여섯 국가의 지도자들은 연방 수반을 돌아가면서 맡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리더십의 부재, 그리고 세르비아계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의 발흥으로 인해 빠르게 분열되기 시작했다. 1991년 6월 25일에 연방을 구성하고 있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분리 독립을 선언하였다. 슬로베니아는 특히 이탈리아와 접해있었기 때문에 서구문물을 가장 빠르게 접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세르비아 중심으로만 돌아가려는 유고 연방에게 늘상 불만이 많았다.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이탈리아오스트리아와 충돌할 것을 우려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기에 이른바 10일 전쟁이라 불리는 단기전을 거쳐 1992년 1월에 EU로부터 독립을 승인을 인정받기에 이른다.

크로아티아의 경우는 아드리아 해안선 다수를 점하고 있는 지리적 요점 탓에 내륙국 고립+연방붕괴를 우려한 유고슬라비아 측에서 이를 저지하고자 군대를 보내게 된다. 이것이 유고내전의 시작이었고, 세르비아-보스니아-크로아티아 간의 치열한 전쟁으로 인해 달마티아 지역은 거의 폐허가 되었었다. 흔히 '유럽의 화약고'라 불렸던 때가 바로 이때이다. 당연히 곧장 바다 건너에 있는 이탈리아가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고, 곧바로 국제사회가 중재압박을 걸어서 세르비아측이 철수, 그렇게 1차 내전은 종식되었다. 아직 회복이 더딘 몬테네그로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쟁 피해 복구가 완료된 상태인데, 특히 꽃보다 누나에서 처음 크로아티아를 접했다면, 그곳이 한때 전쟁폐허였다는 것을 쉽게 믿지 못할 정도로 재건해냈다.

덧붙여, 북마케도니아 또한 독립을 선언했었는데, 이 지역은 크로아티아와는 달리 알바니아[1]가 세르비아계보다 다수를 차지하던 지역이었기에 세르비아와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또한 티토는 동구권에 속했던 불가리아의 견제 목적에서 마케도니아인의 독자성과 역사 교육을 인정해주었고 마케도니아 정교회도 세르비아 정교회에서 분리 독립할 수 있게끔 지원해줄 정도로 북마케도니아 지역을 특별 대우를 해주었기에 별다른 갈등 없이 조용히 독립하였다. 북마케도니아 지역은 유고슬라비아 왕정 시기에 '남세르비아(Јужна Србија)'와 '바르다르주(Вардарска бановина)'로 불릴 만큼 독립정체로서의 위상이 낮았기에, 세르비아 측에서도 이들의 독립을 그저 새로운 남부 세르비아 정부가 탄생하는 것 정도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렇게 3개국이 떨어져 나간 후, 어중간하게 남은 땅에 어중간하게 섞인 민족구성을 보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방에서 땅따먹기 싸움이 벌어졌다. 내륙부의 보스니아계+남부의 크로아티아계, 그리고 북부와 동부의 세르비아계가 뒤섞여가며 대치한 상태에서 중심부(사라예보)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죽이기 바쁜 보스니아 내전이 1992년 봄부터 1995년 겨울까지 이어졌다. 크로아티아 내전때와는 달리 외부로 개입할 요소가 별로 없었고, 어느 한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이 재림한 것마냥 장기전으로 이어졌고, 명확한 결론도 내지 못한 채 사실상 분단상태의 나라로 만들어지고 만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vs 스르프스카)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산업기반은 농경시대 수준으로 파괴되었으며[2], 경제는 장기전으로 인해 하이퍼인플레이션[3]과 더불어 나락 수준으로 떨어졌다.

6개국 중 4개국이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 유고 연방의 존속의미가 없어졌기에, 남아있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는 신유고연방(일명, '세르비아몬테네그로')을 결성하여 하나의 나라처럼 운영되었으나, 코소보의 독립 여부를 두고 세르비아계와 몬테네그로계의 생각이 상이하여, 결국 2006년 6월 5일부로 몬테네그로마저 주민투표를 통해 독립하게 되었다. 그렇게 유고연방은 완전히 지워졌다.

그럼에도 내전은 끊이지 않았다. 인구 대부분이 알바니아계인 코소보가 신유고연방 시절때 독립을 요구했으나, 코소보만큼은 크로아티아나 보스니아와는 달리 6개 유고연방 소속국이 아닌 세르비아의 한 지역에 불과했었다는 세르비아측의 입장이 있어서[4], 둘 사이의 의견을 좁히지 못한 채 1998년에 코소보 내전이 터지고 만다. 이때 세르비아측의 악명이 매우 자자했을 정도로 전쟁과정이 잔혹했었고, 이에 비해 몬테네그로측은 아무런 이득도 없이 세르비아로부터 끌려다닌 정도에 불과했기에, 훗날 세르비아의 통수를 치고 독립을 지지하는 쪽으로 바뀐 것이라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1999년 코소보 내전 종식 이후에도 사소한 충돌은 계속되었고, 2008년 코소보의 일방적인 독립선언 + 주변국 및 세계의 미적지근한 반응으로 인해 여전히 이 관계는 미묘한 상태로 남아있다.

지리[편집 | 원본 편집]

정치[편집 | 원본 편집]

경제[편집 | 원본 편집]

군사[편집 | 원본 편집]

사회[편집 | 원본 편집]

문화[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신생 마케도니아 공화국과 알바니아계의 충돌로 내전이 벌어질 정도로 알바니아계가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알바니아 소수민족과의 민족 분쟁
  2. 원래부터 보스니아 지역은 세르비아 지역 다음가는 곡창지대였긴 했지만.
  3. 짐바브웨 달러, 베네수엘라 볼리바르가 새로운 레전드를 만들어내기 전에는, 이곳의 통화인 유고슬라비아 디나르가 초인플레이션의 교과서였다.
  4. 즉, 코소보인은 코소보가 자기들의 고향이니 독립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인데, 세르비아로서는 알바니아계가 오스만 제국 지배기에 굴러들어온 돌인 주제에 갑자기 선주민의 땅을 완전히 내놓으라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으로 들린다는 것. 비유하면 한반도 일제치하 당시 부산에 일본인이 정착하였는데, 패전 후 일본으로 가지 않고 눌러앉다가, 100여년이 지난 나중이 되어서야 '부산은 우리 일본인의 고향'이라면서 한국 정부에게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꼴과 같다. 다만 코소보의 경우는 과거 유고 연방 치하에서 '자치주'로서 승격한 적이 있었기에 완전히 허무맹랑한 요구까지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