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러시아어: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 1931년 3월 2일~ )는 소련의 제8대·9대·11대 국가수반 겸 당 서기장이자 1990년 신설된 소련의 초대 대통령이다.
초기[편집 | 원본 편집]
1931년 3월 2일 남부 러시아의 농촌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이러한 영향으로 13살때부터 농사일을 하게 되었다. 1946년 청년 동맹에 가입하고 4년동안 국영 농장에 일한 후 모스크바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1]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 대학교 재학 시절 소비에트 공산당에 입당하면서 정치 능력을 인정 받았다. 그래서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사망하자 소련공산당의 당서기장에 취임하였다.
정책노선[편집 | 원본 편집]
집권 1년 만에 병사한 체르넨코의 뒤를 이어 54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서기장으로 취임한 고르바초프는 쇠퇴해가는 소련의 회복을 위해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라고 불리는 개혁-개방정책을 펼쳤으며 기존의 외교 방침을 온화한 방향으로 수정했다. [2][3] 그래서 그는 군비경쟁을 중단하고, 핵무기 감축 과정을 시작하고 서방, 중국과의 관계도 정상화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군대를 철수해서, 많은 국지적 분쟁을 해결했다.[4] 그러나 그의 야심찬 개혁은 그 진행속도가 너무 빠른 나머지 반대세력의 성장과 국내의 경제적,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고 결정적으로 개혁을 주도해야 할 중앙정부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결국 91년에 발생한 수구파 쿠데타 사건을 전후로하여 실질적인 힘을 거의 상실해 정국의 주도권을 급진파였던 보리스 옐친에게 빼앗긴다. 그리고 1991년 12월 25일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와 함께 대통령직에서 사임한다.
퇴임 이후[편집 | 원본 편집]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가 사회적으로 혼란해지고 세계적 위상이 추락하면서 '나라를 팔아버린 지도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8년 정계에 복귀하있다. 참고로 고르바초프는 러시아의 크림 합병에 대해 지지한다.
각주
- ↑ 재미있게 읽는 그날의 역사 3월 2일 - 이종하
- ↑ 그 당시 경기침체와 외교적 고립으로 인해 1964년부터 1982년 사이 24000여개의 공장이 문을 닫고 4000명의 근로자들이 최저 생계비 이하로 살아가고 있었다.
- ↑ 글라스노스트는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는 거라면 페레스트로이카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개혁 정책을 의미한다.
- ↑ 오늘 다시 페레스트로이카를 생각한다, Russian beyond, 미하일 고르바초프, 2015. 03.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