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로 가는 길

중세 말 기근과 흑사병[편집 | 원본 편집]

중세 말 유럽의 큰 위기를 겪었는데, 그 이유는 급격한 인구 증가급격한 식량생산력의 하락으로 요약된다. 12세기 이후 유럽은 안정기를 맞이했다. 그렇기에 십자군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파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세 유럽은 14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안정을 유지하였고, 인구는 이때까지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삼포제와 사포제는 식량생산량을 증대시켰다. 이와 동시에 교회가 사회 구성의 핵심적 기반으로 역할을 하면서 사회체제 안정에 큰 기여를 하였다.

지속적인 인구증가는 한계에 부딪쳤는데, 그 이유는 바로 중세 유럽의 주요 농작물이 이었기 때문이다.[1]밀은 쌀에 비해 단위면적당 소모하는 질소량이 높아 땅의 지력을 쉽게 고갈시켰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도입된 것이 바로 삼포제나 사포제인 휴경제이다.

삼포제를 예로 들자면 춘경지, 추경지, 휴경지로 나누어 경작하는 것인데, 쉽게 말해서 농토의 1/3은 농사를 짓지 않아 자연스럽게 지력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문제는 이 제도는 실질 경작지 규모를 축소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유럽의 식량생산량은 한계점에 금방 도달하였다. 거기에 15세기의 경우 유럽의 기후가 농경을 짓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물론 유럽의 기후자체는 농경에 적합하지 않다. 여름에 고온다습하고 겨울에 한랭건조하는 한국의 기후와 달리 유럽의 기후는 여름에 고온건조 겨울에 한랭다습하다. 그리고 강수량도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농경하기 불리한 기후이었는데 15세기무렵 기후의 변동은 식량생산량을 급감시켰다.

사실 식량생산량만 줄어든 것이라면 중세 유럽의 증가된 인구를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식량생산량이 감소되어도 영주가 가져가는 식량의 양은 그대로였다. 장원제의 특성상 산출된 식량이 누구의 소유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장원제 그림을 보듯이 영주의 토지와 농노의 토지가 혼재되어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울타리가 쳐 있지 않았으므로 수확의 시기가 되어서 수확을 할 때, 수확량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웠기에 영주들이 농노에 비해 더 많은 식량을 가져갔다. 그러므로 식량생산량이 줄어들어도 귀족들이 가져가는 식량의 양은 전에 비해 큰 차이가 없었다. 이는 농노의 부담으로 전가되었다.

식량생산량은 줄어들었지만 귀족들이 가져가는 양은 동일했으므로 일반 농노들에게 돌아간 양은 극히 적었다. 거기에 내년 농사를 위해 종자를 남겨둔다면 실질적으로 먹을 수 있는 식량의 양은 극히 적었다. 식량의 부족은 영양부족으로 이어졌고 14-15세기 중세 유럽의 영양상태는 매우 부실하였다. 그리고 이 부실은 흑사병이 창궐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물론 지금에서도 극히 일부의 병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병은 자연치유를 통해 해결되고 있다. 그러니 병원을 가면 듣는 소리가 운동하고 밥 잘먹으라는 것이다. 괜히 기근과 역병이 같이 도는 게 아니다. 기근이 오면 영양부족으로 이어지고 이는 역병이 창궐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아무튼 14-15세기 유럽은 심각한 기근에 허덕였고, 거기에 장원제로 인해 영양상태는 심각하게 부실하였다. 이 때 흑사병이 유럽으로 유입되었고, 순식간에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최소 50%에서 최대 70%까지 죽였다고 이야기된다. 거의 전체 인구의 절반이 감소한 것이다. 인구의 급감은 장원제도와 봉건제도를 크게 흔들어버렸다. 아니 이 두 제도가 유지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많은 중세 유럽인들의 죽음은 슬픈일이었지만 농노들에게는 기회를 마련했다. 인구의 급감은 노동력 부족 문제를 야기했다. 이 노동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을 도입했다. 하나는 다른 지역의 노동력을 임금을 지불하여 고용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농노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고, 더 많은 노동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전자의 경우 서유럽에서 일어났고, 후자의 경우 동유럽에서 일어난 현상이다.

이러한 두 지역의 차이는 흑사병의 피해의 차이에 인한 것이라 추정된다. 서유럽의 경우 극심한 흑사병의 피해를 입었지만 동유럽의 경우 그렇게 많은 피해를 경험하지 않았다. 특히 폴란드의 경우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감소가 5%미만이었다. 폴란드뿐 아니라 주변 동유럽 국가들은 서유럽에 비하자면 적은 피해를 입었다. 동유럽의 장원은 이미 충분한 농노가 남아있었고, 그렇기에 농노제를 강화하는 방안으로 나아갔다.[2]

르네상스[편집 | 원본 편집]

15세기 중엽이 되면 유럽은 다시 안정을 찾는다. 식량생산량도 증가하고 인구도 증가하였다. 다시 안정을 찾은 유럽은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였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역시 르네상스라 불리는 문예부흥운동이다.

르네상스는 14-15세기 북이탈리아가 중심이 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등 다양한 가문들이 예술을 지원하면서 발전하였다. 이 가문들이 왜 예술가들을 지원했는가에 대해서 일반적인 서술은 그들(부자)이 예술을 사랑해서였다. 분명 예술을 좋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예술을 사랑했던 것은 단순히 예술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권위를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다.

메디치가의 경우, 다양한 예술작품을 통해서 자신들의 가문의 위세를 드높이려고 하였다. 특히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공화국을 뒤엎고 피렌체의 주인이 되었다. 당연히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자행되었기에 많은 비난이 뒤따랐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자신의 가문 위세를 드높일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양한 예술작품을 통해서 가문의 위세를 드높이려 한 것이다. 이는 이들이 예술작품을 만드는데 있어서 많은 것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후 예술은 교회에 의해서 다시 활성화 된다. 당시 교황청은 예술을 통해서 교회의 위세를 널리 알리고 싶어했다. 그래서 당시 유명한 예술가들에게 막대한 돈을 주고 다양한 예술품을 제작하도록 의뢰하였다.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당시에 유명한 예술가들이 바티칸 궁전에 와서 다양한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제잘하였다. 이를 통해서 교황청은 교회의 위엄을 알리려 한 것이다.

종교개혁종교전쟁[편집 | 원본 편집]

근대 유럽의 형성시기(16-18세기)의 가장 큰 키워드는 전쟁이다. 17세기에 전쟁이 없던 해는 겨우 5년에 지나지 않을 정도 미친듯이 싸웠던 시기가 이 시기이다. 그리고 그 전쟁의 시발점은 종교개혁이었다.

인쇄술의 등장[편집 | 원본 편집]

그리고 종교개혁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인쇄술의 등장을 이해해야 한다.

종교개혁[편집 | 원본 편집]

종교개혁의 일어나게 된 계기는 러쉬앤캐쉬푸거가(家)가 면벌부를 대량 찍어낸 결과였다. 교회의 면벌부는 옛날부터 전통적으로 발행한 것이다. 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독려하기 위해 많이 쓰였고, 개종시키기 위해 쓰였던 것이 면벌부이다. 이때 면벌부는 내 죄가 모두 사해진다의 개념보다는 지금까지의 죄를 사한다의 느낌이다.

문제는 푸거가에 면벌부 발행권이 넘어가면서였다. 당시 교황청은 성베드로 대성당 건축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걸 크고 아름답게 지을려고 하다보니 돈이 모잘랐다. 원래 교황령의 예산으로도 부족하고, 각 귀족들의 기부금으로도 해결되기 어렵자 최후의 수단으로 독일 대부업체 푸거가에게 큰 금액을 대출을 받고 그 대신 독일에서 푸거가에게 면벌부 발행권을 넘겨준다. 푸거가는 본전은 뽑아야지!!라는 생각에 어떻게 하면 면벌부를 더 많이 팔 것인가 생각했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면벌부를 전면사면권으로 둔갑시키는 거였다. 여기서 그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이 통에 금화를 넣으면 지옥에 고통받던 조상님도 천국으로!!! 기부금을 낸 당신도 천국으로!!

당연히 이걸 보고 있던 루터는 깊은 빡침을 느낀다.나의 예수님은 그러지 않아!!! 이에 95개조 반박문을 내 걸면서 면벌부를 까는데...

문제는 루터가 너무 나갔다는 것이다. 루터는 성경만으로도 구원 될 수 있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다. 그러니 교회 안가도 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카톨릭의 존재이유를 부정한 것이다. 교회의 존재이유는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교회의 존재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을 신부나 교황의 존재이유는 일반대중과 신과의 연결점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통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이는 교황청의 핵심적 교리, 교황무오설[3]을 까버린다.

교황청 내에서도 면벌부 발행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있었으나 루터의 반박문은 면벌부가 아니라 교황무오설을 비롯한 카톨릭 교리의 심장부를 까버린다. 믿음만 있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이 루터의 주장은 교회를 통해서만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카톨릭 교리의 핵심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교황청은 루터같은 듣보잡이 난리치는 걸 놔둘 수 없었다. 그래서 루터의 입장을 바꾸기 위해서 회유에 협박까지 하지만 루터의 고집은 옹고집이었고, 결국 교황청은 그를 파문한다.

종교적인 문제였던 이는 몇몇 독일의 제후들이 루터편을 들면서 정치적인 문제로 본격화 되었다. 특히 당시 다이아몬드 수저카를 5세가 독일 제후들을 압박하는 전제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카를 5세(또는 카를로스 1세)[4]의 전제정치에 불만을 품은 독일 제후들은 루터를 보호하면서 반황제파인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한다.

카를 5세는 자신에게 도전한 슈말칼덴을 분쇄하기 위해 제국군을 파견하지만 번번히 패퇴했다. 그에게는 아메리카의 금과 은이 있었지만 이대로는 파산할 것이 분명했고, 결국 카를 5세는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화의를 맺는다.

이로써 종교개혁은 끝이 났고, 루터파는 공인되었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불씨를 만드는 것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카톨릭과 루터파 그리고 칼뱅파는 서로가 서로를 비난했고, 서로를 악마라 간주했다. 당연히 설교에서 각 파벌이 악마며 사탄과 같은 것이라 설교했으니 일반대중들은 그를 믿고 적대감을 쌓아갔다. 이 적대감은 얼마 안가 종교전쟁으로 이어졌고 이후 유럽은 전쟁 속에 살았다.

전쟁의 시대[편집 | 원본 편집]

슈말칼덴 전쟁을 기점으로 전쟁은 지속된다.

절대왕정의 성립[편집 | 원본 편집]

절대왕정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설명은 관료층과 상비군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절대왕정을 단순히 이것으로만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당시 유럽 국가들의 절대왕정은 매우 다르게 진행되었다. 대표적으로 절대왕정을 이룩한,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 러시아, 프러시아 모두 각자 각국의 다양한 방법 속에서 성장하고 발전하였다.

영국의 경우에는 절대왕정이라는 말을 쓰기가 좀 그렇다. 먼저 엘리자베스가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녀도 결국 의회의 동의를 받아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또한 엘리자베스 이후 영국은 의회를 중심으로 하여 통치를 유지했지 왕실이 독자적인 권한을 가져 통치를 지속하지는 못하였다.

프랑스의 절대왕정은 앙리 4세가 위그노 전쟁을 겪은 이후 낭트칙령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이야기된다. 물론 위그노층의 대부분이 상공업자였지만 이것이 프랑스의 절대왕정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위그노의 권한이 확보된 것은 맞았지만 프랑스가 절대왕정을 구축한 것은 리슐리외의 등장이었다. 루이 13세의 재상 리슐리외는 왕권강화정책을 추진했는데, 특히 재판권은 왕에게 귀속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사법권이 왕에게 귀속되고, 이후 왕실의 군대를 강화하면서 중앙집권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이것은 루이14세때 큰 빛을 발해 우리가 말하는 절대왕정을 이룩하였다. 어쩌면 프랑스의 절대왕정이 절대왕정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에 가장 적합한 것일 것이다.

에스파냐의 경우에는 그냥 왕이 힘이 제일 강했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경우에는 이미 오랜역사를 지닌 가문이나 귀족들이 존재했지만 에스파냐는 그런거 없었다. 왜냐면 에스파냐의 기존의 영토의 상당수는 이슬람의 영토였고, 이 영토를 정복하면서 성장하였는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왕령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왕령이 귀족령보다 많으니 귀족들이 왕에게 대항할 수도 없었다. 또한 과거와 달리 통신과 연락망이 발전하면서 정복지를 분봉하기보다는 자신이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당연히 왕령은 크고 아름다웠다. 그러니 상공업층의 지원도 필요가 없었다. 물론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에스파냐의 재정도 점점 부족했는데.....아메리카 잭팟이 터졌다. 정말로 그냥 어떤 이탈리아 출신이 와서 탐험하게 돈 주라고 해서, 그래 해봐라 했는데....그게.....대박일줄이야......아메리카에서 들어온 금과 은은 이후 유럽 전체의 은값과 금값을 낮춰버리는 상업혁명을 일으킬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물론 아메리카는 왕령이다. 에스파냐의 전성기는 바로 이 거대하고 방대한 수입착취를 기반으로 하였고, 당연히 오랜시간 동안 유럽의 패자가 된다. 그리고 자원의 저주로 망했지...

러시아의 절대왕정은 사실 표트르대제와 후임인 엘리자베타까지 지속되고는 그 힘이 무너졌다.

러시아의 경우 표트르 대제가 정권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반란을 제압하면서 왕권이 강화되었다.

이렇게 절대왕정은 젠트리의 성장과 왕권의 협력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최근 연구결과에 의하면 상비군은 분명이 있었다. 1552년 카를 5세는 15만의 상비군을 유지했고, 17세기 말 루이 14세는 65만의 상비군을 보유하였다.[5] 그러나 이 당시 상비군은 징병제 또는 모병제를 통해 국가가 병력을 모집하는 것이 아니라 용병을 고용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국민병제가 도입된 스웨덴의 경우도 1632년 상비군 14만 명 중 1만 4천명만 국민병이었고 나머지는 용병이었다.

당연히 용병이 군사제도의 근간이었기에 엄청난 비용이 지출되었고, 이 비용의 지출은 기존의 중세적 조세제도, 통행세로만은 충당되기 어려웠고 다양한 조세제도가 등장한다. 예를 들어 화폐 주조, 후추나 소금의 독점판매권, 통행세, 관세, 관직매매, 귀족작위 매매 등이 있었다. 그래서 전쟁에 시달리지 않았던 덴마크의 경우 중세적 조세제도가 그대로 유지될어 왕실 순수입의 1/2는 왕령지에서 확보하는 등

그러나 다른 국가들은 그러지 못했다. 당연히 이는 근대적인 조세제도의 확립으로 나아갔다.

막대한 군비지출은 각 국가들의 왕들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당연히 이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세를 올리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조세를 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신분제 의회를 통해 조세를 올릴려고 하였으나 이는 쉽지 않는 일이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1신분과 제2신분에게는 면세해택을 주는 대신에 신분제 의회가 지닌 조세동의권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국왕은 신분제의회의 견제없이 세금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군비의 지출은 계속해서 지속되었다.

특히 16-17세기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군비지출은 점점 커져갔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막대한 재정이 필요로 하였다. 당시 군주들은 용병을 국민병으로 교체하는 방안이라든지 군사제도를 개편하는 방안이라든지 또는 신분제의회에서 제1신분과 제2신분에게도 과세하는 어려운 일 보다는 보다 쉬운 대출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러쉬앤캐쉬푸거가 등 대부업체들에게 미래의 조세를 담보로 대출을 받거나 또는 관직매매를 통해 파산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특히 관직매매는 관직의 양을 비대화시키게 되었다. 이 관직매매는 부르주아층이 지배층, 귀족층으로 들어가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각주

  1. 중국도 밀 농사를 지었는데, 중국의 경우 황사(지금은 원수지만)로 인해 손실된 질소를 충원해 왔기에 매년 농사가 가능했다.
  2. 동유럽이 흑사병에 피해가 적은 원인은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 동유럽의 식량여건과 동시에 추운 기후의 결과일 것이라 추정된다.
  3. 교황은 어떠한 잘못을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그 이유는 교황은 예수님의 제1제자 베드로의 후계자이므로이다.
  4. 카를 5세, 카를로스 1세는 동일인물이다. 명칭이 2개인 이유는 에스파냐에서 즉위했을 때는 카를로스 1세였고, 이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면서 전임자인 카를과 구분하기 위해 5세라 명명하였다. 에스파냐에서는 카를로스 1세라 불리고 독일에서는 카를 5세라 불렸다. 흔히 유럽사에서는 카를 5세라는 명칭을 쓰지만 이게 혼용되어 쓰이는 경우도 많다.
  5. 이영임, 주경철, 최갑수 지음, <<근대 유럽의 형성 16-18세기>>, 서울: 까치글방,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