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경쟁

국가예산을 그럴 듯하게(?) 낭비하는 방법

우주 경쟁우주 개발 및 진출을 위한 국가간 경쟁을 말한다.

국가적으로 우주에 대한 진출을 목표로 과학과 기술을 개발하고 나서면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로는 미국의 민간 기업들이 우주로 나서고 있어, 민간 차원에서의 우주 경쟁도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이미 달 여행, 화성 여행, 소행성 채굴 등의 계획을 발표하는 회사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냉전 시기에 이루어졌던, 미국소련의 우주 개발 경쟁을 의미한다.

미국-소련의 우주 경쟁[편집 | 원본 편집]

1957년 10월 4일 스푸트니크 발사로 시작된 미국소련이 벌인 우주 경쟁으로 최초의 우주 경쟁이다. 과학적, 상업적 목적없이 순수하게 경쟁심에서 실시된, 어떻게 보면 국가 규모의 병림픽.

최초의 우주 개발인 만큼 가시적 성과가 컸고, 기본적으로 우주선 발사에 중점을 두었다. 모든 것이 최초였기에 상대보다 앞서야 했던 긴장감이 팽배했던 시기.

왜 시작되었는가?[편집 | 원본 편집]

처음에는 아무도 우주 경쟁에 목을 맬 생각이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이제 막 세계 강대국의 자리에 올라섰고 과학 기술에 있어서 일류에 도달했다. 과학 기술에서 미국에 대적할만한 국가군인 서유럽은 전후 복구에 매달리는데도 바빠서 우주 개발 같은 돈지랄에 나설 형편이 못 되었다. 당연히 미국은 여유가 넘치는 상황에서 느긋하게 우주 개발에 나서고 있었다. 우주 개발도 군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 분산되는 등 체계적이지 않고 국가적 역량이 집중되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해안경비대도 로켓 개발에 나섰었다.

소련도 막 전후 복구가 끝난 참이었고 소비에트 연방 1서기인 니키타 흐루쇼프도 우주 개발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당장 전쟁의 상처는 치유했다고 하지만 미국과의 경쟁이라는 당면한 문제가 있었고, 냉전에서 우주 개발 같은 문제의 관심 순위는 낮았다. 그러나 바로 그 냉전이었기 때문에 유사시에 미국을 타격하는 문제를 고민하던 차에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대륙간 탄도탄인 R-7을 만들어내었고, 흐루쇼프는 그때부터 장거리 발사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관심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한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평소 자신의 꿈이던 인공위성 발사를 진언했고, 당시에 미국이 장거리 발사체 분야에서 뒤쳐진 것을 기회로 흐루쇼프도 선전의 목적으로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를 승인한다.

스푸트니크의 성공과 이후에 자국 위성 발사 실패로 대단한 충격을 받은 미국은 NASA를 설립하고 국가적 역량을 기울여서 베르너 폰 브라운을 중심으로 우주 개발에 나서게 된다.베르너 : 세르게이님 감사여

왜 우주 경쟁을 선택했는가?[편집 | 원본 편집]

미국소련이 당대 최강국이자 최고의 과학 기술을 보유하기는 했지만 우주는 완전히 낯선 곳이었고 모든 것이 새로웠다. 당연히 지식적인 면만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상당한 한계가 있었고, 들어가는 자금과 자원은 미국과 소련이 아니라면 엄두도 못낼 수준이었다. 인류의 운명까지 잡아가면서 으릉렁거리던 이 시기에 이렇게 국가적 돈지랄에 나선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 국가 안보와 군비 경쟁
    소련의 로켓은 애당초 대륙간 탄도 미사일로 개발된 것이었고, R-7 로켓의 개발로 소련은 핵무기를 미국 본토에 투사할 수단을 획득하게 되었다. 소련은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여, 자신들이 인공위성 대신에 핵무기를 실어 미국으로 배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증한 것이고,[1] 당연히 그것을 인식한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충격에 빠졌다. 대기권 밖에서 떨어져내리는 미사일은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막기 어렵다. 기존에는 소련이 미국과 그 동맹국에 본토를 둘러싸인 채, 미국에 한참 뒤지는 항공전력 때문에 미국의 정찰기가 돌아다녀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소련도 직접 미국의 본토에 선빵을, 그것도 핵 선빵을 때릴 부위를 골라서 날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본적 핵전력이나 동맹 전력까지 합치면 미국이 우세했지만 소련이 원하면 얼마든지 원하면서 미국 도시를 골라서 때릴 수 있다는 것은 그런 우세를 가볍게 무시하게 할 수 있었다. 당연히 미국 역시 소련과 같은 수준의, 그리고 나아가서 소련조차 능가하는 핵무기 투발 수단을 가져야 했다.
  • 자존심
    안보 문제보다 더 큰 동기이자, 군이 아니라 우주 개발을 중심으로 나서게 된 원인이다. 미국 정부나 군부의 입장에서는 소련이 대륙간 탄도 미사일로 바로 자국을 타격할 수 있다는데 충격을 먹었지만, 일반 국민들 입장에서는 안보상 위험보다 '우리가 졌다'는 패배감이 더 피부에 와닿았다. 아직 19세기적 사고관이 남아 있던 시기에 최초의 경쟁에서 밀리고 전인미답의 영역을 개척하는데 선두를 내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을 컸고 국가적 사기가 떨어지기에 충분했다. 안보상 위협이 가시적이지 않은 이상에 받을 수 있는 가장 피해는 상처 입은 자존심 그 자체였다.
    소련도 우주 개발의 선두주자이자 우주 시대를 연 국가로써, 다른 곳도 아니고 냉전으로 한창 으르렁거리는 미국에게 밀릴 수는 없었다. 소련의 모체인 러시아가 유럽에서도 변방이었고 다소 후진국으로 비추어지던 상황에서 그런 것을 한 번에 만회한 최초의 이름을 쉽사리 내어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우주 개발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알리는 프로파간다로 사용하던 상황에서 후발주자에게, 그것도 미국에게 밀리기라도 한다면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국가를 넘어서서 공산주의 자체의 자부심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었다.
    미국의 경우,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인류의 달 착륙을 목표로 하는 아폴로 계획을 발표하자 NASA에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국가적 자존심을 드높이기 위해 자국민을 결집시키는 데에도 충분히 효과를 했다는 것이다. 아폴로 계획이 진행되면서 미국에는 우주와 관련된 요소들이 유행하기도 했었다.
  • 대리전 및 선전
    냉전 끝에 핵전쟁으로 인류가 끝장 날 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대륙간 탄도 미사일 경쟁은 미소 양국의 국민 뿐만이 아니라 그 동맹국들에게도 대단한 불안감을 주는 일이었다. 장기적이고 확고한 동맹국 뿐만 아니라 상대편의 동맴국이나 제3세계 국가들에게 공포감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미사일 경쟁은 좋은 선전거리가 아니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 같은 경우가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갔기 때문이다.
    당연히 미국은 자국을 포함한 세계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일당독재 국가인 소련 입장에서도 냉전을 심화시켜 국제적 긴장을 높이는 건 좋은 일이 아니였다. 그렇기 때문에 양국은 직접적인 대결은 철처하게 억제했고, 그 결과 미국은 베트남에서 소련의 개입 위협 때문에 직접 치고 올라가지 못했고, 소련도 미국의 존재 때문에 너무 나서서 행동할 수 없었다. 6.25 전쟁 때는 북한이 혼자 미쳐 날뛴 것이라 미군이 대대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세계전쟁으로 번질까봐, 소련에서 파병한 전투기 조종사들이 주고받는 러시아어를 감지하고도 무시했었다.
    그런 면에서 우주 경쟁은 대리전이나 선전전으로 적절했다. 자존심이 구겨진 미국으로은 상처입은 자존심을 어떻게든 회복해야 했고, 바로 그 전장이 우주가 된 것이다. 소련 역시 이 자존심을 건 전장에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세계를 양분하는 두 강대국으로써는 국가적 자존심 때문에 항상 경쟁심으로 불타올랐고, 정치, 경제, 기술, 문화, 오락, 스포츠 등의 모든 분야에서 대결하고 있었다. 무력 충돌은 인류의 운명이 걸려 있기에 못했지만, 좋은 경쟁거리가 생기기만 하면 서로 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좋은 경쟁거리가 생긴 것이다. 선전용으로도 핵무기를 싣고 날아가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인공위성을 싣고 날아가는 발사체는 느낌부터가 다르다. 전자는 엄청난 돈을 퍼부어서 당장 쓸 일도 없는 데다 돈 값을 했다가는 세계를 작살낼지 모르는 무기. 후자는 인류의 우주 진출이라는 장미빛 미래와 신세계의 개척이라는 개척주의, 그리고 인류 전체의 과학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목적을 담은 우주 발사체. 이 중에서 좋은 선전거리가 되는 쪽은 후자였다.
    실제로 소련은 유리 가가린을 여러 공산권 국가에 순방시키면서 체제 선전을 했고, 발렌티나 테리시코바라는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를 배출했으며,[2] 우주 정거장을 건설한 뒤에는 공산권 국가들에서 우주비행사를 배출시켜주는 식으로 우주 개발을 철저하게 홍보용으로 써먹었다.[3] 미국에서는 지금도 NASA가 우주와 관련된 자료를 항상 카피레프트로 공개하고 있고, 국제 우주 정거장에서 하는 과학 실험에 일반인들을 참여시키는 이벤트를 하기도 한다.

인공위성 발사 경쟁: 소련의 선공과 미국의 대패[편집 | 원본 편집]

스푸트니크 쇼크라는 말로 대표되는 일련의 과정들이다.

소련이 1957년 10월 4일 스푸트니크를 발사하면서 우주 시대를 열었고, 동시에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성공국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것만으로 미국은 참담할 지경인데, 직후에 발사한 뱅가드 로켓은 발사대도 못 떠나고 폭발하는 모습이 TV로 생중계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존심이 상처입은 미국은 상처가 벌어질대로 벌어진다.그리고 이어지는 소련의 위로 간신히 주노 1호로 발사는 성공시켰지만 스푸트니크에 비하면 미국의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는 크기도 작았고,흐루쇼프 : 작은 오렌지만하군. 무엇보다 그 때 이미 소련은 스푸트니크 1호 발사 한 달여 만에 최초로 생명체인 라이카를 태운 스푸트니크 2호를 올려보냈기 때문에 체면치레라고 할 것도 못 되었다.

미국은 패배를 만회하고 반격을 하기 위해서 우주 개발 및 발사체에 관련된 업무를 모아서 NASA를 설립하고 교육정책을 진보주의적 교육에서 본질주의적 교육으로 바꾸는 등의 재정비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국가적 역량을 기울인 대결에 나선다.

동물 날려보내기[편집 | 원본 편집]

경쟁적인 인공위성 쏘아올리기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과학위성, 통신위성, 군사위성 등등. 이후에는 우주에서 공격하기 위한 무기를 장착한 위성을 발사할 계획도 세워졌었다.

하지만 인공위성 발사는 실용적인 목적이었기에, 인류 역사상 최대의 미친 짓(물론 좋은 방향으로)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그 준비단계라고 할 수는 있었도.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두 나라가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갖춘 뒤, 그 미친 짓으로 직접 이어지는 단계는 동물의 우주비행이었다.

많이들 라이카가 최초의 우주비행 동물이라고 알지만, 실제로는 1946년에 미국이 V-2 로켓을 이용해 대기권 밖으로 날려보낸 과실파리라는 초파리의 일종이 가장 먼저 우주로 날아갔었다. 하지만 이건 큰 의미가 없다.

우주로 보내진 최초의 포유류는 당연히 1957년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2호를 타고 지구 궤도를 돌았던 개인 라이카였다. 소련은 당시 우주를 비행한 개를 회수할 기술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캡슐이 대기권에 재진입하기 전에 라이카를 약물로 안락사 시킬 예정이었다. 하지만 2002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라이카는 스트레스와 캡슐이 과열로 궤도에 도달한 직후에 죽었다. 유인 우주 비행을 준비하기 위해 많은 개를 쏘아올린 소련은 1960년 9월 18일에 스푸트니크 5호에서 벨카와 스트렐카라는 두 마리의 개 외에도 여러 마리의 쥐를 궤도에 올려 모두 무사히 지구로 귀환시키는데 성공했다.

한편, 미국도 아프리카에서 침팬지원숭이를 수입하여 훈련시킨 뒤 우주로 보냈다. 하지만 얘네들은 그렇게 알려지지 않아서 이름이 뭔지, 몇 마리가 날아갔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물론 홍보하기 좋아하는 NASA는 당시의 사진도 공개하고 있으니, 어떻게 생긴 녀석이 갔는지 궁금하다면 무인 머큐리 계획 사진 기록을 참고하라.

좀 지나서의 일이지만, 소련은 1968년 9월에 달로 발사되는 존드 5호에 거북을 탑승시켰고, 이것이 최초로 달 궤도를 비행한 생물이 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실제로 흐루쇼프는 스푸트니크 1호 발사 전에도 "우리는 수소폭탄을 실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갖고 있다."고 선전했지만, 실제로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되기 전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2. 다만 테레시코바는 그저 낙하산을 타는 취미가 있었을 뿐, 우주에는 관심이 없어서 우주비행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3. 이래서 베트남에서 한국보다 먼저 우주비행사를 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