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 디나르

динар (키릴 문자) / Dinar (라틴 문자)

소개

유고슬라비아 디나르, 약칭 '유고 디나르'는 1943년부터 2003년까지 유고슬라비아 연방 및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통칭, '신유고')으로 있었던 당시 유통된 통화이다. 보조단위로 파라(Para, пара)가 있긴 한데 쓰여진 시기는 그다지 길지 않다. 기호는 앞에서 3글자를 따와 사용하였다.

중앙은행은 시대마다 명칭이 조금씩 다르긴 하였으나, 대개 유고국립은행(Narodna Banka Jugoslavije)으로 통칭한다.

인민공화국 시대 (1944~1963(66), 1기/YUF)

왕국 시절의 영토

1941년 4월 18일(제 2차 세계대전의 일부), 유고슬라비아 왕국추축국의 침공(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애당초 유고 왕국이 내부적으로 세르비아계 우월주의가 팽배하던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라, 세르비아계와 타 민족[1]간의 갈등이 심하여 하나의 나라로서 구심점을 모을 수 없어 고작 2주 만에 무너진 것으로, 나치 독일도 이를 깨닫고는 해방을 명목으로 세르비아로부터 나머지를 지방들을 모두 조각조각냈고, 세르비아 본토 또한 괴뢰국으로 만들어 통치하였다.

허나 추축국이 딱히 이민족 친화적이지는 않아서 유고 왕국 시절 못지 않게 (오히려 더더욱) 공포정치를 폈고, 이 점을 노린 요시프 티토를 지도자로 한 유고 해방군(파르티잔)은 1943년 11월 29일 유고민주연방(Демократска Федеративна Југославија) 건국을 선포하여 나치 독일에 저항하였다. 이에 감화한 구 유고왕국의 민족들은 다시 해방군을 구심점으로 뭉쳤으며, 1944년 10월 4일 세르비아 구국정부(나치 괴뢰국)를 무너트리고 비슷한 시기에 그 주변부(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영토도 수복함에 따라 정치적 정당성을 얻었다. 이후 해방군은 공산정당으로 발전하여 1945년 11월 11일, 티토를 수장으로 하는 새 국가인 유고연방인민공화국(Федеративна Народна Република Југославија)을 수립하였다.

유고연방(1990년까지)의 영토

파르티잔의 영토 점령 당시 세르비아 중앙은행(1944년 11월 해산)을 포함해 각 지방마다 설치되어 있던 나치 정부하의 중앙은행들은 1945년 2월까지 모두 해산조치하고 제각기 유고 연방 직할의 국립 지방 은행을 설치하였다. 중앙은행인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 공화국 국립은행(Narodna Banka Federativne Narodne Republike Jugoslavije)은 1946년에서야 다시 설치되는데, 그 사이 기간 동안은 소련 인쇄소에 발주해놓고 수입한 국가명의 발행권으로 대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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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 앞면 : 파르티잔 군인 공통 뒷면 : 유고민주연방(1943~1945)의 국장
1944년판 (총 8종) : 1РСД, 5РСД, 10РСД, 20РСД, 50РСД, 100РСД, 500РСД, 1000РСД

기존 화폐들과의 교환비는 20세르비아 디나르 = 40크로아티아 쿠나 = 1연방 디나르이고, 환율은 50디나르/USD의 고정환으로 설정하였다. 다만 고정환율 정책 쪽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으며, 실제로는 20배가 넘는 들쑥날쑥한 고무줄 환율을 보였다.

유고슬라비아 1기 디나르 시리즈 (1946 ~ 1954)
50РСД 광부 100РСД 대장장이와 농부(수확기) 500РСД 파르티잔 군인 1,000РСД 밀다발을 든 여성 로동자 100РСД (1953년판) 증기기관 기술자
벌목꾼 어부 경운기 밀 수확

국립은행은 위 1946년판 외에도 1953년까지, 신 고액권인 5,000디나르를 포함한 19종류에 달하는 지폐 샘플들을 만들었으나, 1953년판 100디나르를 제외한 나머지 18종은 모두 미발행으로 남겨두었다. 그 미발행권의 견본 및 시쇄품 등이 소량이지만 시중에 돌아다니고는 있는데, 훗날 유고연방이 붕괴되었을 당시 유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1955년에 신권※후술하는 사회주의 공화국(2기 디나르) 항목 참조이 발행되면서 동시에 금융기관 정책이 완화되었다. 투자은행이나 무역은행, 농업은행과 같은 정책은행들이 추가되었고, 1961년부터는 개별 공화국에 설치된 지방 은행도 국가 직영 체제에서 어느정도 벗어나게 된다. 중구난방이던 환율 정책도 다시 재정비되어 300디나르(55년)→750디나르(61년)/USD로 조정되었다. 제 1세계(서방권)와 제 2세계(소련권),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던 외교 정책(비동맹 주의)[2]을 이용해 자본주의공산주의절충한 정책을 채택하고, 자본에서 강점을 갖던 서방과의 교류도 적극적으로 진행하면서 미국의 원조까지 지원받는 등으로 유고연방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1963년 국명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Социјалистичка Федеративна Република Југославија)으로 변경하였고, 국립은행 또한 약칭이던 '유고국립은행(Narodna Banka Jugoslavije)'을 정식명칭으로 지정하였다.

참고로 이 시기 통화의 ISO 4217 코드(1973년 제정)인 「YUF」는 원래 쓰이던 것이 아니고, 나중에 구분용으로 부여받은 코드이다.

사회주의공화국 시대 (1966~1990, 2기/YUD)

빠른 발전의 후유증으로 1965년 경 대략 연 15~25% 수준의 인플레이션율을 보이던 유고연방은 슬슬 물가 안정을 꾀하고자 1(YUD) : 100(YUF)의 화폐개혁을 1966년 정월정일에 단행하였다. 환율 또한 12.50디나르(구권으로 1,250디나르)/USD로 조정되었다.

그러나 1970년에 닥친 오일쇼크는 무역수지에서 약점을 갖던 유고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고, 나름 장점으로 이용하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절충한 경제 정책의 이면인 단점들(자본주의의 높은 실업률 및 해고율 + 공산주의의 낮은 생산력)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1971년 유고국립은행의 정책이 중앙집권에서 각 지역별 연계형태로 바뀌어, 8개[3]의 자치권을 가진 중앙은행으로 분리되었다. 68년판 권종에서 중앙은행의 언어 종류가 늘어난 것은 이 조치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YUD195510.jpg YUD196310.jpg YUD196510.jpg YUD196810.jpg
1955년판(오리지널)
100РСД, 500РСД, 1000РСД, 5000РСД
1963년판(은행명 변경)
100РСД, 500РСД, 1000РСД, 5000РСД
1965년판(1/100 화폐개혁)
1РСД(미발행), 5РСД, 10РСД, 50РСД
1968/1978년판(체제 변경)
5РСД, 10РСД, 20РСД, 50РСД, 100РСД[4], 500РСД, 1000РСД
1955~1965년(1기) & 1966~1984년(2기)의 유고 디나르 시리즈
1РСД = 100РСД(1기)
콘블레(Konavle)[5]의 여인
5РСД(2기) = 500РСД(1기)
낫을 든 여성 농부
10РСД(2기) = 1,000РСД(1기)
아리프 헤랄리치[6]
20РСД(2기) = 2,000РСД
화물 선박
YUD196810.jpg
50РСД(2기) = 5,000РСД(1기)
코소보 서사시의 한 장면[7]
100РСД(2기)
평화의 승마상[8]
500РСД(2기)
니콜라 테슬라
1,000РСД(2기)
기계 농업과 여성 농부

또한 1971년에는 미국 경제의 금본위제 폐지(닉슨 쇼크)로 인해 전 세계의 외환시장 판도가 격변하였는데, 유고슬라비아 또한 고정환 폐지를 고려해야만 했다. 변동환 도입 직후 환율은 17디나르/USD, 인플레이션은 약 20%이었다.

1980년 정치적 지주인 요시프 티토의 사망으로 인해 대표자를 잃은 유고연방은 각 공화국에서 수장을 1년 단위로 돌아가며 선출하는 형태가 되었고, 그로 인해 더더욱 떨어지는 정부 효율과 티토의 업적이 만든 그늘 때문에 티토주의에서 더 발전할 수 없게 된 분위기로 인해, 유고의 발전 원동력은 거의 밑바닥을 쳤다. 이미 해외로 이민나간 교포가 유고로 송금하는 액수 자체가 결코 적은 값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발전하지 않는 유고슬라비아의 경제 지표는 꾸준히 악화되어갔다. 더군다나 1980년대 중반 무렵부터 세르비아계 위주로 민족주의가 싹트기 시작하였는데, 유고의 정계 또한 훗날에 학살자로 악명을 쌓게 되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물들어가게 된다.

이처럼 도저히 경제에는 신경을 쓸 틈이 없는 정세로 인해 1980년대 초에는 환율이 70년대 대비 2배로, 인플레이션은 75% 이상으로 급등하고, 1987년에 약 700디나르/USD에 150%, 1989년에는 약 2,800디나르/USD[9]800% ~ 1,950%를 달성하게 된다. 그 1989년을 기점으로 디나르화 가치의 하락 속도에 가속도가 붙어, 기하급수로 커지는 고액권을 연달아 발행하게 된다.

유고슬라비아 2기 디나르화 : 고액권 시리즈 (1985 ~ 1989년)
5,000Dn (85년 12월)
요시프 티토
20,000Dn (87년 9월)
알리야 시로타노비치[10]
50,000Dn (88년 9월)
여성(신원불명)
100,000Dn (89년 6월)
소녀(신원불명)
1,000,000Dn (89년 11월)
젊은 여성(신원불명)
500,000Dn / 2,000,000Dn (89년 8월)
혁명기념탑 (Spomenik Revoluciji, 코자라)

연방 붕괴 (1990~1993, 3~4기/YUNꞏYUR)

1980년대 중반에 정부가 물가 통제를 포기한 이래 끝이 보이지 않는 물가 폭등을 잡지 못하여 결국 1990년 정초에 1/10,000 비율의 화폐개혁(YUD→YUN)을 계획 및 일부 진행하였다. 우선적으로 유고(라고 쓰고 사실상 세르비아계)의 역사를 돌아보자는 의미인지, 과거 나치에 대항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코자라 전투(유고 파르티잔 혁명의 일부)를 기념하는 두 권종(500,000Dn 및 2,000,000Dn)의 리디노미네이션 권종(50Dn, 200Dn)이 먼저 발행되었다. 그 직후 티토를 앞면에 넣은 수체스카 전투 기념비가 들어간 권종(100Dn, 1979년 인쇄)도 발행을 계획하였으나, 어른의 사정으로 취소되었다. 그리고 3월, 6월, 9월, 11월에 나누어 나머지 권종들과 신 고액권(500Dn 및 1,000Dn)을 차례로 발행하였다.

YUNꞏYUR의 유통기간 영토변화

이듬해 1991년, 유고 연방의 대장 같은 입지였던 세르비아에 세르비아인 민족주의를 외치던 밀로셰비치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연방 내 각 공화국에 세르비아계 정계 인사의 낙하산 공수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의 꼭두각시가 되고, 알바니아계가 대다수이던 코소보는 자치권을 잃었으며,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에서는 크로아티아계에 대치하여 친세르비아계 정부를 신설을 돕는 방향으로 분열되었다.

그 전부터 1989년 동독의 어이없는 붕괴로 시작된 민주화 바람의 영향, 그리고 결정적으로 밀로셰비치의 행보로 인해 연방으로서 존속이 의심스러워지자,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 및 크로아티아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게 된다. 세르비아계는 즉각 반발하여 '반역자'를 때려잡으려 출동하여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 혼란을 틈타 마케도니아는 동년도 9월에 (나름대로) 조용히 탈퇴하였고, 슬로베니아 쪽은 세르비아측 명분의 부족으로 전쟁 발발 10일만에 독립을 따내었으나, 크로아티아계(+보스니아계)와의 분쟁은 이후 3년 넘게 지속되었다.

이 유고전쟁의 여파로 유고 연방(특히 내륙국인 세르비아에서)의 물가는 무섭게 치솟았으며, 이를 받쳐줄 화폐가 절대적으로 모자라게 되자 1991년판으로 찍힌 권종을 긴급히 풀었다. 단, 기존에 풀었던 지폐와 전체가 다른 색상으로 풀렸는데, 이 또한 세르비아 우선주의에 기반한 정책[11]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1992년에서 1993년에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유고 디나르는 자기 자신 외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르카, 크로아티아 디나르, 마케도니아 디나르, 슬로베니아 톨라, 스릅스카 디나르, 크라이나 디나르로 분열되었고, 유고 디나르 또한 1/10의 개혁(YUN→YUR)을 통해 화폐정리를 해야만 했다.

짧은 기간에 급히 뽑아낸 까닭에 종류가 매우 많지만, 다음 세대들이나 어느 대륙의 기상과는 달리 대략적인 발행 패턴을 가지고 있다. 허나 그게 역으로 작용해 팔레트 스왑처럼 되다보니 따로 놓고 보면 종류를 혼동하기 쉬워서, 아래 목록표는 특별한 단서가 없는 낱장으로도 판별이 용이하도록, 앞면 인물을 고정시킨 좌표평면 형태로 구성하였다.

적색 10만 1989년 (YUD) 녹갈색 100만
화폐개혁 (1/10000)
적색 10 자색 50
(=YUD 500,000)
1990년 (YUN) 녹갈색 100 청색 500
(=YUD 5,000,000)
갈색 1000
(=YUD 10,000,000)
Yugogirl.jpgYUD1shipman.jpg Yugoboy.jpgYUN1rose.jpg Yugowoman.jpgYUD1backman.jpg Yugoman.jpgYUN1mountain.jpg YugoTesla.jpgYUN1cheondung.jpg YugoAndric.jpgYUN2dari.jpg
보라색 10 밝은적갈색 50[12] 1991년 (YUN) 암갈색 100 갈색 500[13] 청색 1000 보라색 5000
↓ 화폐개혁 (YUR 1 = YUN 10) ↓ (※ 이 시기를 기점으로 지역별 통화 독립이 난무하였다.)
1992년 7월 (YUR) 청색 100
(=YUN 1,000)
자색 500
(=YUN 5,000)
적색 1000
(=YUN 10,000)
청록색 5000
(=YUN 50,000)
갈색 1만(92년)
(=YUN 100,000)
녹자색 5만(92년)
(=YUN 500,000)
※ 아래 1993년판(YUR 고액권 연장)은 앞면과 뒷면 매칭 및 로테이션 규칙이 깨지고 독자적 조합으로 변경된다.
단위 개혁 없이, 다음 액면인 10만부터 100억까지로 바로 이어진다. 앞면 인물은 표에 배치된 위치 그대로 유지하므로 참조.
1993년 (YUR) 10만 50만
100만 500만 1,000만
5,000만 1억
10억 5억 100억
슬로베니아
SIT103.jpg
스릅스카
BSD1 Front.jpg
1992년 유고 디나르의 분열
KSD1 Front.jpg
크라이나
↖   ↑    
← (유고슬라비아 신 디나르) →
↙   ↓   ↘
코소보/몬테네그로
DEM401.jpg
HRD105.jpg
크로아티아
BAD101.jpg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MKD102.jpg
마케도니아

신유고연방 (1993~1994, 5~7기/YUOꞏYUGꞏYUM)

YUR/YUO/YUG(짙은색) 및 관련통화(옅은색)의 유통
  • 5기 디나르 (1993 ~ 1993), YUO

이 연도 표기도 오류가 아니다. 정확하게 1993년 10월 1일부터 동년도 12월 31일까지 발행했으니까.(...) ISO 4217코드는 YUO, 구권과의 교환비는 100만 : 1이다. 그런데도 검은 대륙의 위엄 이전까지 유명세를 떨치던 "실제로 "0"이 가장 많이 박혀있는 지폐"(5천억 디나르)가 발행되는 기염을 토한 시리즈이다. 사실 도리어 2007~8년경에 그 나라가 과연 이 기록을 깰 수 있을까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이 시리즈가 조금 독특한 면이 있는데, 거의 대부분 5단위 지폐만 발행했다는 사실이다.

  • 6기 디나르 (1994 ~ 1994), YUG

연도 표기에 오류는 없다. 기간도 5기 보다 더 짧아서 고작 22일간 유통되었다. 구권과의 교환비는 아예 10억 : 1로 화끈하게 잡았다. ISO 4217코드는 YUG. 그러나 하이퍼인플레는 여전히 잡히지 않은채 계속 최악의 기록적인 가치폭락이 이어졌고, 결국 정부는 자국화폐를 반쯤 포기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1,000만 디나르권도 있는데 93년판에 1994년이라고 도장찍어서 발행했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될것 같았기 때문.
  • 7기 1차 (1994) & 7기 2차 (1994 ~ 1999)

새로운 디나르(Novi Dinar)라는 별칭을 가진 시리즈로, ISO 4217코드는 YUM. 이 시리즈는 평범한 개혁과는 달리 아예 고정환을 외환(독일 마르크)으로 묶어놓는 방식을 사용하여 통화가 줄줄 새어나가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아버리는데 주력하였다. 덕분에 통화부족으로 한동안 난리 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하이퍼인플레를 방어하는데는 성공한 시리즈가 되었다. 쉽게 표현하자면 온라인 게임 속에서 흔히 말하는 "골드" 대신에 "캐쉬"를 화폐로 삼은 셈.

일단 7기 디나르는 마르크와 1:1 페그를 설정해놓았기 때문에 환율값이 곧 구권과의 교환비가 되어 구 1300만 디나르 = 신 1 디나르가 되었다. 또한 이 시리즈의 설정 특성상, 수량이 제한적이어서 다른 시리즈에 비해 비교적 희소도도 약간 높은 편이다.

Jugoslavije 7th Dinar 1st Series 1996~1999
모습 앞면 뒷면
5РСД 니콜라 테슬라 니콜라 테슬라 박물관
10РСД 페테르 2세 = 페트로비치 녜고시 체티녜 수도원
20РСД 주라 약시치 바라체브슈니차 수도원
50РСД 밀란 오브레노비치 밀란의 저택
100РСД 도시테지 오브라도비치 호포보 수도원
200РСД

(미발행)

스테판 스토얀노비치 모크란야츠 그랜드 피아노
Jugoslavije 7th Dinar 0th Series 1994~1996
모습 앞면 뒷면
1РСД 요시프 판치치 오모리카 가문비나무

(Picea Omorika)

5РСД 니콜라 테슬라 니콜라 테슬라 박물관
10РСД 페테르 2세 = 페트로비치 녜고시 체티녜 수도원
  • 200디나라화는 인쇄까지는 마쳤으나 실제로 발행된 적은 없고, 소량 유출된 분량만이 존재한다.


  • 7기 3차 (2000 ~ 2002)

세르비아 디나르 항목을 참조. 현재(2000년대 이후) 사용중인 세르비아 디나르화의 선행판 정도에 해당한다.

KJ 디나르 (1918 ~ 1941)

항목명의 'KJ'는 Kraljevina Jugoslavija = Краљевина Југославија(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약자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유고연방)유고 디나르'와는 다른 화폐이다. 전신인 유고슬라비아 크로네와의 교환비는 4 : 1이었다.

환율은 56.4디나르/USD(1931년), 44디나르/USD(1933년)의 고정환이었다. 단, 외국인에게는 별도로 250디나르/GBP(대략 120디나르/USD, 통상의 3배수준)를 책정하는 이중환율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각주

  1. 특히 크로아티아계와 갈등이 가장 컸다.
  2. 초창기에는 같이 추축국 때려잡던 공산주의 동지로서 소련(스탈린)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으나, 날이 갈수록 군림하려는 소련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티토가 1948년부터 노선을 바꾸었다.
  3. 6개 공화국과 세르비아 내 별도로 있던 2개 자치주(보이보디나, 코소보).
  4. 1965년판으로 처음 발행했으나 형식은 이쪽을 따르고 있다.
  5. 지금의 크로아티아 동남쪽 가장 끝자락, 두브로브니크에서도 동남쪽으로 더 들억간 곳에 자리한 지역. 풍경이 좋기 때문인지 지역 소득이 꽤 높은 편으로, 부자들이 몰려오는 동네로도 유명하다.
  6. 1922년생인 금속공장의 노동자. 사회주의 국가에서 곧잘 있는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일반인 화폐모델로서 뽑힌 것인데, 정작 본인은 산업재해로 중금속 중독에 앓는 도중 극심한 가난 속에서 알코올 의존 합병증으로 1971년에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이후 구 유고국가 사이에서 "(부정적인 의미에서) 사회주의 로동자"의 아이콘처럼 여겨지고 있다.
  7. 크로아티아계 조각가인 이반 메슈트로비치(Ivan Meštrović)의 작품.
  8. 크로아티아계 조각가인 안툰 아우구스틴치치(Antun Augustinčić)의 작품.
  9. 연평균값이 그렇다는 거고, 연말 기준으로는 약 40,000~70,000디나르/USD 정도로 추산된다.
  10. 1914년생의 보스니아인 광부로, 노동자 대회에서 우수한 성과를 드러내 유고 공산당의 노동영웅훈장을 수여받았으며, 그 모범으로서 지폐 모델로 등재되었다. 구권에 등재된 아리프 헬라리치의 비참한 결말과는 달리, 알리야는 나름 명예로 둘러싸인 삶을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11. 대략 기존의 화폐를 무효화 시키기 앞서 구분지으려는 목적
  12. 취소선은 인쇄는 하였으나 미발행된 권종
  13. 원래 계획되어 있던 색상(1990년판 500디나르(갈색))을 재활용하였다.
  1. 여기에 해당하는 이전 화폐는 동전도 교환대상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