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 디나르

세르비아의 화폐 (시계열상 진행 표)
유고슬라비아 크로네
(1918 ~ 1922)
유고슬라비아 왕국 디나르
(1918 ~ 1941)
나치 독일 치하
세르비아 군정청 (1941 ~ 1944)
(세르비아 위원정부/구국정부)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 디나르
(1944 ~ 2002)
세르비아 디나르
(2003 ~ 현재)
유고슬라비아 디나르
Југословенски динар 유고슬로벤츠키 디나르sr/mk
Jugoslavenski Dinarhr/bs = Jugoslovanski Dinarsl
NarodneBankeJugoslavijeCI.jpg Emblem of Yugoslavia (1963–1992).svg
중앙은행 CI 유고연방 엠블럼
화폐 정보
사용국 유고슬라비아
기호 дин
보조단위
1/100 파라[1]
중앙은행 유고국립은행 (Narodna Banka Jugoslavije)

소개[편집 | 원본 편집]

유고슬라비아 디나르, 약칭 '유고 디나르'는 1943년부터 2003년까지 유고슬라비아 연방 및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통칭, '신유고')으로 있었던 당시 유통된 통화이다. 기호는 앞에서 3글자를 따와 사용하였다.

인민공화국 시대 (1944~1963(66), 1기/YUF)[편집 | 원본 편집]

왕국 시절의 영토

1941년 4월 18일(제 2차 세계대전의 일부), 유고슬라비아 왕국추축국의 침공(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애당초 유고 왕국이 내부적으로 세르비아계 우월주의가 팽배하던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라, 세르비아계와 타 민족[2]간의 갈등이 심하여 하나의 나라로서 구심점을 모을 수 없어 고작 2주 만에 무너진 것으로, 나치 독일도 이를 깨닫고는 해방을 명목으로 세르비아로부터 나머지를 지방들을 모두 조각조각냈고, 세르비아 본토 또한 괴뢰국으로 만들어 통치하였다.

허나 추축국이 딱히 이민족 친화적이지는 않아서 유고 왕국 시절 못지 않게 (오히려 더더욱) 공포정치를 폈고, 이 점을 노린 요시프 티토를 지도자로 한 유고 해방군(파르티잔)은 1943년 11월 29일 유고민주연방(Демократска Федеративна Југославија) 건국을 선포하여 나치 독일에 저항하였다. 이에 감화한 구 유고왕국의 민족들은 다시 해방군을 구심점으로 뭉쳤으며, 1944년 10월 4일 세르비아 구국정부(나치 괴뢰국)를 무너트리고 비슷한 시기에 그 주변부(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영토도 수복함에 따라 정치적 정당성을 얻었다. 이후 해방군은 공산정당으로 발전하여 1945년 11월 11일, 티토를 수장으로 하는 새 국가인 유고연방인민공화국(Федеративна Народна Република Југославија)을 수립하였다.

유고연방(1990년까지)의 영토

파르티잔의 영토 점령 당시 세르비아 중앙은행(1944년 11월 해산)을 포함해 각 지방마다 설치되어 있던 나치 정부하의 중앙은행들은 1945년 2월까지 모두 해산조치하고 제각기 유고 연방 직할의 국립 지방 은행을 설치하였다. 중앙은행인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 공화국 국립은행(Narodna Banka Federativne Narodne Republike Jugoslavije)은 1946년에서야 다시 설치되는데, 그 사이 기간 동안은 소련 인쇄소에 발주해놓고 수입한 국가명의 발행권으로 대체하였다.

1-dinar-1944.jpg YUF102.jpg
공통 앞면 : 파르티잔 군인 공통 뒷면 : 유고민주연방(1943~1945)의 국장
1944년판 (총 8종) : 1дин, 5дин, 10дин, 20дин, 5дин, 100дин, 500дин, 1000дин

기존 화폐들과의 교환비는 20세르비아 디나르 = 40크로아티아 쿠나 = 1연방 디나르이고, 환율은 50디나르/USD의 고정환으로 설정하였다. 다만 고정환율 정책 쪽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으며, 실제로는 20배가 넘는 들쑥날쑥한 고무줄 환율을 보였다.

유고슬라비아 1기 디나르 시리즈 (1946 ~ 1954)
50дин 광부 100дин 대장장이와 농부(수확기) 500дин 파르티잔 군인 1,000дин 밀다발을 든 여성 로동자 100дин (1953년판) 증기기관 기술자
50-Dinara-1946.jpg50-Dinara-1946-reverse.jpg 100-Dinara-1946 Front.jpg100-Dinara-1946-reverse.jpg 500-Dinara-1946.jpg500-Dinara-1946-reverse.jpg 1000din-1946.jpg
벌목꾼 어부 경운기 밀 수확

국립은행은 위 1946년판 외에도 1953년까지, 신 고액권인 5,000디나르를 포함한 19종류에 달하는 지폐 샘플들을 만들었으나, 1953년판 100디나르를 제외한 나머지 18종은 모두 미발행으로 남겨두었다. 그 미발행권의 견본 및 시쇄품 등이 소량이지만 시중에 돌아다니고는 있는데, 훗날 유고연방이 붕괴되었을 당시 유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1955년에 신권※후술하는 사회주의 공화국(2기 디나르) 항목 참조이 발행되면서 동시에 금융기관 정책이 완화되었다. 투자은행이나 무역은행, 농업은행과 같은 정책은행들이 추가되었고, 1961년부터는 개별 공화국에 설치된 지방 은행도 국가 직영 체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된다. 중구난방이던 환율 정책도 다시 재정비되어 300디나르(55년)→750디나르(61년)/USD로 조정되었다. 제 1세계(서방권)와 제 2세계(소련권),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던 외교 정책(비동맹 주의)[3]을 이용해 자본주의공산주의절충한 정책을 채택하고, 자본에서 강점을 갖던 서방과의 교류도 적극적으로 진행하면서 미국의 원조까지 지원받는 등으로 유고연방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1963년 국명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Социјалистичка Федеративна Република Југославија)으로 변경하였고, 국립은행 또한 약칭이던 '유고국립은행(Narodna Banka Jugoslavije)'을 정식명칭으로 지정하였다.

참고로 이 시기 통화의 ISO 4217 코드(1973년 제정)인 「YUF」는 원래 쓰이던 것이 아니고, 나중에 구분용으로 부여받은 코드이다.

사회주의공화국 시대 (1966~1990, 2기/YUD)[편집 | 원본 편집]

빠른 발전의 후유증으로 1965년 경 대략 연 15~25% 수준의 인플레이션율을 보이던 유고연방은 슬슬 물가 안정을 꾀하고자 1(YUD) : 100(YUF)의 화폐개혁을 1966년 정월정일에 단행하였다. 환율 또한 12.50디나르(구권으로 1,250디나르)/USD로 조정되었다.

그러나 1970년에 닥친 오일쇼크는 무역수지에서 약점을 갖던 유고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고, 나름 장점으로 이용하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절충한 경제 정책의 이면인 단점들(자본주의의 높은 실업률 및 해고율 + 공산주의의 낮은 생산력)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1971년 유고국립은행의 정책이 중앙집권에서 각 지역별 연계형태로 바뀌어, 8개[4]의 자치권을 가진 중앙은행으로 분리되었다. 68년판 권종에서 중앙은행의 언어 종류가 늘어난 것은 이 조치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YUD195510.jpg YUD196310.jpg YUD196510.jpg YUD196810.jpg
1955년판(오리지널)
100дин, 500дин, 1000дин, 5000дин
1963년판(은행명 변경)
100дин, 500дин, 1000дин, 5000дин
1965년판(1/100 화폐개혁)
1дин(미발행), 5дин, 10дин, 50дин
1968/1978년판(체제 변경)
5дин, 10дин, 20дин, 50дин, 100дин[5], 500дин, 1000дин
1955~1965년(1기) & 1966~1984년(2기)의 유고 디나르 시리즈
1РСД = 100дин(1기)
콘블레(Konavle)[6]의 여인
5дин(2기) = 500дин(1기)
낫을 든 여성 농부
10дин(2기) = 1,000дин(1기)
아리프 헤랄리치[7]
20дин(2기) = 2,000РСД
화물 선박
YUD196810.jpg
50дин(2기) = 5,000дин(1기)
코소보 서사시의 한 장면[8]
100дин(2기)
평화의 승마상[9]
500дин(2기)
니콜라 테슬라
1,000дин(2기)
기계 농업과 여성 농부

또한 1971년에는 미국 경제의 금본위제 폐지(닉슨 쇼크)로 인해 전 세계의 외환시장 판도가 격변하였는데, 유고슬라비아 또한 고정환 폐지를 고려해야만 했다. 변동환 도입 직후 환율은 17디나르/USD, 인플레이션은 약 20%이었다.

1980년 정치적 지주인 요시프 티토의 사망으로 인해 대표자를 잃은 유고연방은 각 공화국에서 수장을 1년 단위로 돌아가며 선출하는 형태가 되었고, 그로 인해 더더욱 떨어지는 정부 효율과 티토의 업적이 만든 그늘 때문에 티토주의에서 더 발전할 수 없게 된 분위기로 인해, 유고의 발전 원동력은 거의 밑바닥을 쳤다. 이미 해외로 이민나간 교포가 유고로 송금하는 액수 자체가 결코 적은 값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발전하지 않는 유고슬라비아의 경제 지표는 꾸준히 악화되어갔다. 더군다나 1980년대 중반 무렵부터 세르비아계 위주로 민족주의가 싹트기 시작하였는데, 유고의 정계 또한 훗날에 학살자로 악명을 쌓게 되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물들어가게 된다.

이처럼 도저히 경제에는 신경을 쓸 틈이 없는 정세로 인해 1980년대 초에는 환율이 70년대 대비 2배로, 인플레이션은 75% 이상으로 급등하고, 1987년에 약 700디나르/USD에 150%, 1989년에는 약 2,800디나르/USD[10]800% ~ 1,950%를 달성하게 된다. 그 1989년을 기점으로 디나르화 가치의 하락 속도에 가속도가 붙어, 기하급수로 커지는 고액권을 연달아 발행하게 된다.

유고슬라비아 2기 디나르화 : 고액권 시리즈 (1985 ~ 1989년)
5,000дин (85년 12월)
요시프 티토
20,000дин (87년 9월)
알리야 시로타노비치[11]
50,000дин (88년 9월)
여성(신원불명)
100,000дин (89년 6월)
소녀(신원불명)
1,000,000дин (89년 11월)
젊은 여성(신원불명)
500,000дин / 2,000,000дин (89년 8월)
혁명기념탑 (Spomenik Revoluciji, 코자라)

연방 붕괴 (1990~1993, 3~4기/YUNꞏYUR)[편집 | 원본 편집]

1980년대 중반에 정부가 물가 통제를 포기한 이래 끝이 보이지 않는 물가 폭등을 잡지 못하여 결국 1990년 정초에 1/10,000 비율의 화폐개혁(YUD→YUN)을 계획 및 일부 진행하였다. 우선적으로 유고(라고 쓰고 사실상 세르비아계)의 역사를 돌아보자는 의미인지, 과거 나치에 대항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코자라 전투(유고 파르티잔 혁명의 일부)를 기념하는 두 권종(500,000Dn 및 2,000,000Dn)의 리디노미네이션 권종(50Dn, 200Dn)이 먼저 발행되었다. 그 직후 티토를 앞면에 넣은 수체스카 전투 기념비가 들어간 권종(100Dn, 1979년 인쇄)도 발행을 계획하였으나, 어른의 사정으로 취소되었다. 그리고 3월, 6월, 9월, 11월에 나누어 나머지 권종들과 신 고액권(500Dn 및 1,000Dn)을 차례로 발행하였다.

YUNꞏYUR의 유통기간 영토변화

이듬해 1991년, 유고 연방의 대장 같은 입지였던 세르비아에 세르비아인 민족주의를 외치던 밀로셰비치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연방 내 각 공화국에 세르비아계 정계 인사의 낙하산 공수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의 꼭두각시가 되고, 알바니아계가 대다수이던 코소보는 자치권을 잃었으며,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에서는 크로아티아계에 대치하여 친세르비아계 정부를 신설을 돕는 방향으로 분열되었다.

그 전부터 1989년 동독의 어이없는 붕괴로 시작된 민주화 바람의 영향, 그리고 결정적으로 밀로셰비치의 행보로 인해 연방으로서 존속이 의심스러워지자,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 및 크로아티아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게 된다. 세르비아계는 즉각 반발하여 '반역자'를 때려잡으려 출동하여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 혼란을 틈타 마케도니아는 동년도 9월에 (나름대로) 조용히 탈퇴하였고, 슬로베니아 쪽은 세르비아측 명분의 부족으로 전쟁 발발 10일만에 독립을 따내었으나, 크로아티아계(+보스니아계)와의 분쟁은 이후 3년 넘게 지속되었다.

이 유고전쟁의 여파로 유고 연방(특히 내륙국인 세르비아에서)의 물가는 무섭게 치솟았으며, 이를 받쳐줄 화폐가 절대적으로 모자라게 되자 1991년판으로 찍힌 권종을 긴급히 풀었다. 단, 기존에 풀었던 지폐와 전체가 다른 색상으로 풀렸는데, 이 또한 세르비아 우선주의에 기반한 정책[12]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1992년에서 1993년에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유고 디나르는 자기 자신 외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르카, 크로아티아 디나르, 마케도니아 디나르, 슬로베니아 톨라, 스릅스카 디나르, 크라이나 디나르로 분열되었고, 유고 디나르 또한 1/10의 개혁(YUN→YUR)을 통해 화폐정리를 해야만 했다.

짧은 기간에 급히 뽑아낸 까닭에 종류가 매우 많지만, 다음 세대들이나 어느 대륙의 기상과는 달리 대략적인 발행 패턴을 가지고 있다. 허나 그게 역으로 작용해 팔레트 스왑처럼 되다보니 따로 놓고 보면 종류를 혼동하기 쉬워서, 아래 목록표는 특별한 단서가 없는 낱장으로도 판별이 용이하도록, 앞면 인물을 고정시킨 좌표평면 형태로 구성하였다.

적색 10만 1989년 (YUD) 녹갈색 100만
화폐개혁 (1/10000)
적색 10 자색 50
(=YUD 500,000)
1990년 (YUN) 녹갈색 100 청색 500
(=YUD 5,000,000)
갈색 1000
(=YUD 10,000,000)
Yugogirl.jpgYUD1shipman.jpg Yugoboy.jpgYUN1rose.jpg Yugowoman.jpgYUD1backman.jpg Yugoman.jpgYUN1mountain.jpg YugoTesla.jpgYUN1cheondung.jpg YugoAndric.jpgYUN2dari.jpg
보라색 10 밝은적갈색 50[13] 1991년 (YUN) 암갈색 100 갈색 500[14] 청색 1000 보라색 5000
↓ 화폐개혁 (YUR 1 = YUN 10) ↓ (※ 이 시기를 기점으로 지역별 통화 독립이 난무하였다.)
1992년 7월 (YUR) 청색 100
(=YUN 1,000)
자색 500
(=YUN 5,000)
적색 1000
(=YUN 10,000)
청록색 5000
(=YUN 50,000)
갈색 1만(92년)
(=YUN 100,000)
녹자색 5만(92년)
(=YUN 500,000)
※ 아래 1993년판(YUR 고액권 연장)은 앞면과 뒷면 매칭 및 로테이션 규칙이 깨지고 독자적 조합으로 변경된다.
단위 개혁 없이, 다음 액면인 10만부터 100억까지로 바로 이어진다. 앞면 인물은 표에 배치된 위치 그대로 유지하므로 참조.
1993년 (YUR) 10만 50만
100만 500만 1,000만
5,000만 1억
10억 5억 100억
슬로베니아
SIT103.jpg
스릅스카
BSD1 Front.jpg
1992년 유고 디나르의 분열
KSD1 Front.jpg
크라이나
↖   ↑    
← (유고슬라비아 신 디나르) →
↙   ↓   ↘
코소보/몬테네그로
DEM401.jpg
HRD105.jpg
크로아티아
BAD101.jpg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MKD102.jpg
마케도니아

신유고연방 (1993.10~1994.01, 5ꞏ6기/YUOꞏYUG)[편집 | 원본 편집]

YUR/YUO/YUG(짙은색) 및 관련통화(옅은색)의 유통

1993년 10월, 유고 내전(중 보스니아 전쟁[15])으로 인해 물가가 기본 억단위까지 치솟자 유고 정부는 부랴부랴 1/1,000,000 규모의 화폐개혁(YUR→YUO)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개혁이었고, 새로 결성된 신유고연방이 국제사회로부터 전범으로 찍힌지라 인정받지 못한 까닭에 경제적으로 고립된 상태였으며[16], 도리어 스릅스카 및 크라이나 공화국의 지원까지 추가되었던 까닭에 재화(특히 외화) 소모는 훨씬 많아서 인플레이션은 도리어 더 가속화되어, 결국 단순한 '0'지우기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YUO는 1994년이 오기까지 약 3개월 동안 유통되었는데, 그 사이 (얼마 되지도 않지만) 예금이나 현금은 잠깐만 방치하면 그 가치가 순식간에 기화되어서 한시라도 빨리 현물로 바꿔놓는게 승자였다보니, 월급이 지급되자마자 상점이 털리는 건 예견된 일이었고, 은행은 사실상 파행하였으며, 애초에 돈을 쌓아두는 장사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서 그냥 기업 차원에서 상품으로 부(富)를 축적하고 이용하는 물물교환이 성행하게 된다.

권종된 권종은 당연하게도 전량 지폐이다. 기존 최고액권인 100억디나르(YUR)가 10,000디나르(YUO)로 변환되고, 앞뒤로 공백이던 액면은 각각 YUO 5,000디나르(YUR 50억)와 YUO 50,000디나르(YUR 500억)로 발행되었다. 특이하게도 그 이후 모든 YUO 권종은 5단위로만 발행되었는데, 액면 부풀리기를 시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끝은 검은 대륙의 위엄 이전까지 유명세를 떨치던 "실제로 "0"이 가장 많이 박혀있는 지폐"인 5천억 디나르로 종결지었다.[17]

이 시기의 지폐들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기반한 정부가 발행했기도 하거니와, 남아있는 구성국도 세르비아(+몬테네그로) 뿐이었기 때문인지, 특정 민족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던 과거와는 달리, 모든 권종에 세르비아계 인물이 들어가 있다.

5,000дин오천 
10,000дин일 만
50,000дин오 만
500,000дин오십만
5,000,000дин오백만
50,000,000дин오천만
500,000,000дин오 억
5,000,000,000дин오십억
50,000,000,000дин오백억
500,000,000,000дин오천억 신유고슬라비아연방 디나르 시리즈
(YUO, 1993년 10월 ~ 1993년 12월)

1994년 1월 1일 새해가 밝자 유고 정부는 또다시 화폐개혁(YUO→YUG)을 단행하였다. 교환비는 YUO 1,000,000,000(10억) = YUG 1로 정해졌고, 고작 23일간 유통되었다.

기존 YUO 권종의 50억, 500억, 5000억디나르의 공백을 메꾸려는 듯 YUG는 10디나르(YUO 100억디나르), 100디나르(YUO 1천억디나르), 1000디나르(YUO 1조디나르)까지 1단위값 3종 + 5천/5만/50만[18]까지 5단위값의 신 고액권 3종 = 합계 6종 구성으로 발행하였다. 중간에 YUG 10만디나르(= YUO 100조디나르) 권종도 인쇄는 하였으나, 매우 소량 유출된 것을 제외하고는 미발행으로 남겨졌다.

하지만 숫자만 개혁한다고 초인플레이션이 잡힌다는 뜻은 아니었고, 신뢰도는 바닥을 뚫다가 나락까지 떨어진 상태였는지라, 기껏 새로 찍어낸 돈이 시장에서 정상적으로 유통되는 일은 없었다. 최고액권 50만디나르도 무용지물이 되자, 당시 독일 마르크 환율에 가장 가까운 액면인 1,000만 디나르권(1993년판, YUR)에 붉은 색으로 "1994"로 첨쇄하여 배포하기에 이른다. 즉, 같은 날에 생산된 "1,000만디나르" 권종이 '1994'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그 액면 가치는 1,000,000,000,000,000배(1천조배) 차이가 난다는 의미였다.

신유고연방 디나르 최종 시리즈 (YUG, 1994년 1월 1일 ~ 1994년 1월 23일)
10дин 100дин 1,000дин 5,000дин
50,000дин 100,000дин (미발행) 500,000дин 10,000,000дин (첨쇄발행)

노비 디나르 (1994~2003, 7기/YUM)[편집 | 원본 편집]

1990년 초부터 1994년 초까지 약 4년에 걸친 갈등 과정을 거치면서 유고슬라비아(특히 세르비아계) 국민은 결과적으로 13,000,000,000,000,000,000,000배(130해배)[19]에 가까운 물가폭등을 마주하였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백만장자이든 억만장자이든, 현물 없는 현금 부자들은 모두 공평하게 개같이 멸망파산하였다.

더 이상 우리민족끼리 자력 회생을 기대할 수 없는 디나르화는 극약 처방으로서 고정환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20], 당시로서는 가장 신뢰도가 높은 독일 마르크에 가치를 고정시킨 새로운(Novi) 디나르라는 뜻의 노비디나르화로 화폐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교환비는 1노비디나르=1마르크로 적용될 수 있도록 1/13,000,000(일천삼백만)으로 정해졌다. 사실상 정화(正貨)에 가깝도록 제약을 걸어둔 형태이기 때문에 상당기간 통화부족에 허덕였으나[21], 결과적으로 초인플레이션을 저지하자는 측면에선 나름의 성과를 냈다.

1994년 1월 24일에 3종 구성(1, 5, 10노비디나르)으로 먼저 발행하였고, 같은 해 3월 3일에 일부 디자인을 개정하고 고액권 하나를 추가하여 3종(5, 10, 20노비디나르)으로 다시 발행하였다. 이때 오랫동안 써온 중앙은행의 CI[22] 대신 신 유고연방의 국장을 넣고, 기존 키릴 문자라틴 문자 병행 표기에서 키릴 문자로만 표기하도록 바뀌었다. 1996년 10월에 새 고액권 2종(50노비디나르 및 100노비디나르)가 추가되었고, 환율은 마르크당 6~7노비디나르 정도로 조정되었다.

허나 1998년에 코소보 전쟁이 터지고, 그 코소보 사태를 두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사이의 견해가 갈라져 분열의 조짐이 드러나면서 몬테네그로가 단독으로 나토(NATO)에 가입함에 따라 세르비아는 사실상 해상무역로를 잃게 된다. 이러한 악재 때문인지 2000년까지 마르크당 30노비디나르까지 큰 폭으로 재조정되었다. 그 탓인지 1999년 11월 6일부로※유고 디나르 폐지는 2000년 11월 13일부터 몬테네그로는 사실상 세르비아 디나르를 거부하고 독일 마르크로 갈아타게 된다.[23]

1999년 4월에 200노비디나르 지폐를 추가하려 하였으나, 위와 같은 환율 하락 때문에 더 이상 노비디나르의 태환 정책이 유지되기 어렵다고 판단되었는지, 변동환에 기반한 신 시리즈 계획을 서두르게 되어 미발행으로 남게 되었다. 이 지폐 또한 소량이 시중으로 유출되었다.

1РСД (선행판) 요시프 판치치 5РСД (선행판) 니콜라 테슬라 10РСД (선행판) 페테르 2세 = 페트로비치 녜고시
오모리카 가문비나무 (Picea Omorika) 니콜라 테슬라 박물관 체티녜 수도원
유고슬라비아 노비 디나르 시리즈 (YUM, 1994 ~ 1999)
5РСД (개정판) 니콜라 테슬라 10РСД (개정판) 페테르 2세 20РСД 주라 약시치
니콜라 테슬라 박물관 체티녜 수도원 바라체브슈니차 수도원
50РСД 밀란 오브레노비치 100РСД 도시테지 오브라도비치 200РСД(미발행) 스테판 스토얀노비치 모크란야츠
밀란의 저택 호포보 수도원 그랜드 피아노

뒤이어 2000년부터는 세르비아 디나르의 원조격이 되는 유고슬라비아 명의의 마지막 시리즈를 발행하였다. '새로운(노비)'를 제거하고 그냥 '디나르'로 명칭이 환원되었고, 지폐 7종(10디나르~5000디나르)과 동전 4종(50파라~5디나르)으로 발행되었다. 이 시리즈에 대한 상세 내용은 해당 항목을 참조하자.

각주

  1. Para = пара. 쓰여진 시기는 그다지 길지 않다.
  2. 특히 크로아티아계와 갈등이 가장 컸다.
  3. 초창기에는 같이 추축국 때려잡던 공산주의 동지로서 소련(스탈린)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으나, 날이 갈수록 군림하려는 소련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티토가 1948년부터 노선을 바꾸었다.
  4. 6개 공화국과 세르비아 내 별도로 있던 2개 자치주(보이보디나, 코소보).
  5. 1965년판으로 처음 발행했으나 형식은 이쪽을 따르고 있다.
  6. 지금의 크로아티아 동남쪽 가장 끝자락, 두브로브니크에서도 동남쪽으로 더 들억간 곳에 자리한 지역. 풍경이 좋기 때문인지 지역 소득이 꽤 높은 편으로, 부자들이 몰려오는 동네로도 유명하다.
  7. 1922년생인 금속공장의 노동자. 사회주의 국가에서 곧잘 있는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일반인 화폐모델로서 뽑힌 것인데, 정작 본인은 산업재해로 중금속 중독에 앓는 도중 극심한 가난 속에서 알코올 의존 합병증으로 1971년에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이후 구 유고국가 사이에서 "(부정적인 의미에서) 사회주의 로동자"의 아이콘처럼 여겨지고 있다.
  8. 크로아티아계 조각가인 이반 메슈트로비치(Ivan Meštrović)의 작품.
  9. 크로아티아계 조각가인 안툰 아우구스틴치치(Antun Augustinčić)의 작품.
  10. 연평균값이 그렇다는 거고, 연말 기준으로는 약 40,000~70,000디나르/USD 정도로 추산된다.
  11. 1914년생의 보스니아인 광부로, 노동자 대회에서 우수한 성과를 드러내 유고 공산당의 노동영웅훈장을 수여받았으며, 그 모범으로서 지폐 모델로 등재되었다. 구권에 등재된 아리프 헬라리치의 비참한 결말과는 달리, 알리야는 나름 명예로 둘러싸인 삶을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12. 대략 기존의 화폐를 무효화 시키기 앞서 구분지으려는 목적
  13. 취소선은 인쇄는 하였으나 미발행된 권종
  14. 원래 계획되어 있던 색상(1990년판 500디나르(갈색))을 재활용하였다.
  15. 대체로 현재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역, 그리고 크로아티아 동부 일부를 두고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연합과 크로아티아(독립세력) 및 보스니아 독립세력이 제각기 충돌하고{(▶세르비아몬테네그로 vs 크로아티아) + (▶세르비아몬테네그로 vs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남북을 놓고 북쪽의 보스니아 독립세력과 남쪽의 크로아티아계 세력(헤르체그보스니아)간의 충돌(▶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vs 크로아티아)이 있었다. 허허허 개판이네
  16. 2000년이 되어서야 UN에 가입되었다. 허나 이때는 코소보 전쟁을 계기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사이가 멀어져도 한참 멀어진 뒤라, 6년만에 갈라진다(...)
  17. 훗날 2007년경에 짐바브웨에서 극단적인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과연 유고슬라비아의 기록을 깰 수 있을까장안의 화제가 되었기도 했다.
  18. 각각 YUO 5조, 50조, 500조디나르에 해당
  19. 1990년 YUN 10/DM(도이치마르크) → 1994년 1월 YUG 13,000,000/DM, YUG 1 = YUN 10,000,000,000,000,000
  20. 온라인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장기간 운영하면서 게임 내 재화(흔히 말하는 "골드")가 무분별하게 발행되면서 단위값 가치가 폭락하자, 특단의 조치로 바깥세계에서 현질해야만 얻을 수 있는 "캐쉬"를 유일한 화폐로 지정한 셈이다. (※기존에 보유하던 골드는 전환 시점에서의 장터 시세로 적용하여 임의 환전.)
  21. 다시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골드'가 유통되던 당시엔 게임 내에서 파밍하면 그게 푼돈이든 아니든 얻을 수는 있었으나, '캐쉬'로 전환된 이후로는 파밍해서 얻은 물건을 현실(게임 밖)에다가 팔아 치우던지 하는 방식으로, 여튼간 바깥 세상의 재화를 가져와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 그러면 게임 내부 물가(내수 물가)는 일정 기간 동안엔 수요-공급의 불균형 때문에 무섭게 치솟게 되지만, 화폐 가치 자체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그 수요-공급만 안정화 시킨다면 물가 문제가 해결된다. (※단, 현실세계(외화)의 현금 가치가 변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함.)
  22. 대략 db를 붙여놓은 문양. 훗날 세르비아 국립은행의 CI로 승계.
  23. 2000년 전후 시점에서 몬테네그로는, 원래는 독재자 행세를 하는 세르비아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려 했으나, 그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가 실각하고 민주화가 되버리는 등으로 정세가 바뀌면서 그 독립의 명분이 옅어지게 되자 일단 연합국가라는 형태로 잔류는 하되, 그 대신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자치권을 인정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세르비아와는 별개의 경제정책을 펼 수 있었다.
  1. 여기에 해당하는 이전 화폐는 동전도 교환대상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