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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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편집 | 원본 편집]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면서 독일과 소련간의 전쟁이 마침내 끝났다. 오스트리아, 독일과 그 수도 베를린은 각자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에 의해 분할점령되었다. 그 해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일본이 항복했고, 제2차 세계대전은 마침내 끝났다. 미국은 일본에 연합국최고사령부(GHQ)를 세워 통치하였다. 미국과 소련은 일본군 무장해체를 명분으로 한국을 북위 38˚를 기준으로 분할점령하였고, 네달 뒤에 영국과 외상 회의를 열어 한국의 신탁통치, 민주적 임시정부 설립을 결정했다.

1946년, 여러가지 사건으로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점차 틀어지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국민당이 공산당에 다시 선전포고했으며, 그리스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내전을 이르켰다. 소련은 전쟁중 점령했던 동유럽 지역들을 명목상 독립시켰으나 이들의 정부수립 선거에 개입, 조작해 괴뢰정부를 세웠고, 윈스턴 처칠은 이를 두고 유럽에 철의 장막이 드리웠다고 연설했다. 북한에서는 소련의 괴뢰정부인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수립되었으며, 예정대로 미국-소련 공동 위원회가 열렸으나 양국의 대립으로 결렬되었다. 소련은 또한 전쟁 때 한 합의를 위반하고 이란에 소련군을 계속 주둔하려했으나 유엔 회의 끝에 결국 철수했다. 1947년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겠다고 선언했고, 마셜 계획으로 친미 서유럽 국가들을 지원했다.

1948년, 3년간의 신탁통치가 끝난 한국에서 대한민국이 수립되었고, 다음 달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소련은 점령지역인 독일 동부를 이용해 서베를린을 봉쇄했고, 이에 미국은 런던에 핵무기를 배치하고는 물자들을 항공수송했다. 베를린 봉쇄가 실패하자 소련은 이듬해 이를 해제했다.

1949년에는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했다. 그리스 내전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패전했으나, 국공내전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승전했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독일의 분할통치가 끝나고 서쪽에 독일연방공화국, 동쪽에 독일민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라는 동맹기구를 설립했다. 소련은 마셜 계획에 대항해 경제상호원조회의라는 기구를 설립했으며, 자국의 핵실험을 공개했다. 이는 소련이 미국에 맞먹는 강대국이 되었다는 신호이기도 하였다.

1950년,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이 남한을 기습침략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대한민국이 열세에 몰리자 미국은 유엔군을 소집해 대한민국 편으로 참가시켰다. 이후 북한이 오히려 열세에 몰리자 중화인민공화국은 100만명 가량의 중공군을 투입했고, 이후부터 전쟁은 소모전으로 변했다. 한국 전쟁에 참가한 터키그리스는 공로를 인정받아 이후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됐다. 미국의 매카시즘은 한국 전쟁의 영향으로 한동안 광풍을 불었다. 한편 중화인민공화국은 미점령 상태였던 티베트를 침공해 점령했다.

격화[편집 | 원본 편집]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3년,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했다. 이후 후임으로 취임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탈스탈린(De-Stalinization) 운동을 추진하고 일부 개혁을 했으나 동독일의 봉기를 진압하는 등 여전히 권위주의적 행태를 보였다. 인도차이나 전쟁을 겪던 프랑스는 결국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했고, 이후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이 독립했다. 이에 미국은 동남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만회하기 위해 동남아시아 조약기구를 수립했으나 별 도움이 되진 않았다. 베트남은 이념에 따라 북위 17˚를 기준으로 분단되었고, 결국 이들 간의 베트남 전쟁이 발발했다. 같은 해, 인도네시아 반둥에선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가 개최되어 29개국이 비동맹주의가 포함된 평화 10원칙을 채택했다. 이러한 제3세계의 등장은 냉전이 완화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56년, 이집트의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이스라엘, 프랑스, 영국이 이에 반발해 수에즈 전쟁을 일으켰으나 미국과 소련의 압박으로 결국 철수했다. 폴란드에서는 인민공화국 이래 최초의 시위가 벌어졌으나 진압되었다. 소련은 작년 서독일이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한 것에 대항해 바르샤바 조약기구라는 동맹기구를 설립했다. 소련의 위성국 헝가리는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했으나 이에 반발한 시민들이 혁명을 이르켜 의회를 점거하고는 바르샤바 조약기구에서 탈퇴했다. 이에 소련은 군대를 보내 헝가리를 침공하고는 다시 괴뢰정부를 세웠다. 북한에서는 8월 종파사건이 벌어져 김일성의 독재가 확고해졌다.

완화[편집 | 원본 편집]

미국은 닉슨 행정부의 등장으로 새로운 장을 맞는다. 일명 데탕트의 시대이다.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가 중심이 되어 미국은 1971년에 중화민국을 UN 상임이사국에서 퇴출시키고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손을 잡고(핑퐁 외교), 이후 소련과 회담을 하면서 우호를 증진시켜간다. 당시에는 이 데탕트의 시기를 지나 냉전이 끝날 것이라 기대하였다. 닉슨의 뒤를 이은 포드 행정부와 카터 행정부 또한 이 기조를 유지하며 소련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 간 관계가 개선되면서 냉전은 점차 대리전의 양상을 띄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신생국들은 비록 독립했으나 식민 통치 시기의 부족/지역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결국 내전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은 영향력 확대를 위해 이러한 내전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한편에 미국은 칠레의 사민주의 정권을 군부 쿠테타를 지원함으로서 전복시켰고, 이후로도 남미의 콘도르 작전을 지원하였다.

1979년 6월 18일 미국과 소련은 2차 전략 무기 제한 협상을 오스트리아 빈에서 조인하며 냉전을 끝내는 듯 했다.[1]

신냉전[편집 | 원본 편집]

그러나 그 해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며 다시 새로운 냉전으로 들어가는데 이를 신냉전이라고 한다.

종식[편집 | 원본 편집]

1985년에 소련에서 고르바초프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냉전의 완화기를 맞이하지만 소련은 예상치 못하게 급격히 붕괴하면서 냉전은 끝이 났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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