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잔글 (코코아봇(토론)의 편집을 222.234.9.130의 마지막 판으로 되돌림)
태그: 일괄 되돌리기
 
(사용자 41명의 중간 판 398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학술 관련 정보}}
{{추천 문서}}
{{넘겨주기 있음|한국전쟁|6.25 전쟁|받침=}}
{{전쟁 정보
<big>'''Korean War'''</big>
|전쟁이름 = 6·25 전쟁
|원어이름 =
|그림    = [[파일:Korean War Montage 2.png]]
|그림설명 =
|포괄사건 = [[냉전]]
|날짜    = 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7일<ref>명색이 휴전협정이니까 지금도 전쟁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 있지만, 그 휴전협정의 정식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더불어 7월 27일 협정 이후에 일어나는 교전을 '한국전쟁'혹은 그 일부라고 지칭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de facto) 전쟁 중(=전시)이라 하지 않는다.</ref>
|위치    = [[한반도]]
|결과    = 정전 후 대치상태<br />[[DMZ]] 형성
|단체1    = {{나라|북한}}<br />{{깃발|중국}} [[중국|중공]]<ref>당시 국제적으로 공인 된 국가가 아니므로 중공으로 표기.</ref><br />{{나라|소련}}<ref>참전을 안 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군인들이 참전하였다. [[미군]]도 적군의 비행기에서 [[러시아어]] 소리가 나오는 것을 들었지만 [[제3차 세계대전]] 우려로 묵인하였다.</ref>
|지휘관1  = {{깃발|북한}} [[김일성]]<br />{{깃발|중국}} [[마오쩌둥]]<br />{{깃발|소련}} [[이오시프 스탈린]]
|병력1    = 1,636,000 명 이상
|피해1    = '''사망''' 398,000~926,000 명<br />'''부상''' 686,500 명<br />'''실종''' 145,000 명 이상
|단체2    = {{나라|대한민국}}<br />{{나라|UN}}
{{숨김 시작|title=전투지원}}
* {{나라|그리스 왕국}}
* {{나라|남아프리카 연방}}
* {{나라|네덜란드}}
* {{나라|뉴질랜드}}
* {{나라|룩셈부르크}}
* {{나라|미국}}
* {{나라|벨기에}}
* {{나라|에티오피아 제국}}
* {{나라|영국}}
* {{나라|호주}}
* {{나라|캐나다}}
* {{나라|콜롬비아}}
* {{나라|태국}}
* {{나라|터키}}
* {{나라|프랑스}}
* {{나라|필리핀}}
{{숨김 끝}}
|지휘관2  = {{깃발|한국}} [[이승만]]<br />{{깃발|미국}} [[더글라스 맥아더]]<br />{{깃발|미국}} [[매슈 리지웨이]]<br />{{깃발|미국}} [[마크 웨인 클라크]]
|병력2    = 1,719,579 명
|피해2    = '''사망''' 175,801 명<br />'''부상''' 554,202 명<br />'''실종''' 28,445 명<br />'''포로''' 14,160 명
|단체3    =
|지휘관3  =
|병력3    =
|피해3    =
|단체4    =
|지휘관4  =
|병력4    =
|피해4    =
|민간피해 = 200백만~300백만 명 추정
|비고    =
}}


[[1950년]] [[6월 25일]], [[북한]]<s>괴뢰</s>의 기습남침으로 발발한 전쟁으로 {{날짜/출력|1953-7-27}} 휴전하여 현재에 이른다. 즉,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열전으로 번진 [[냉전]]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s>북괴</s> [[북한]]선전포고 없는 기습남침으로 발발한 [[전쟁]]으로, [[1953년]] [[7월 27일]] 정전 상태로 지금까지 이어졌다. '''한국전쟁'''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냉전]]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
아직까지 정전 상태라는 이유 때문에 특히 군 관련 기관에서는 이 전쟁을 가리켜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데 확실히 '종전(=평화협정 체결)'한 건 아니니 틀린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쟁 중인 것도 아니다. 만일 정말로 휴전 상태라면 여전히 [[한반도]]는 [[국제법]]상 '''내전중'''으로 규정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ref>일반적으로 휴전은 전쟁 재정비를 위해 잠시 쉬는 것으로, 정전은 주로 합의가 보이지 않는 싸움에서 외부세력의 개입(중개)으로 이루어진다.</ref>


==개요==
[[냉전]]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무기를 들고 맞붙은 전쟁으로,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었던 만큼 <s>참전국 보면 세계대전이 맞는 것 같은데</s> 세계사, 특히 [[냉전|냉전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youtube|K1Z9DletcHU}}
== 발발 원인 ==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은 [[냉전]]의 원인과 함께 연구된다. 대체적으로 소련 및 북한괴뢰패당 짓이라고 주장하는 [[전통주의]]와 미국이나 기타 요인 탓이라고 주장하는 [[수정주의]]로 나눠져 있다. 물론 한국의 경우 전통주의 시각이 우세한 상황 속에서 수정주의 의견을 차용하고 있다.<ref> 그러나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논의의 중심은 미국이다. <s>한국전쟁이라 해서 한국이 중심이 아니다</s></ref>


참고적으로 미국에서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이라 말하는데 이는 학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된 것에 반해 일반대중들은 잘모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youtube|K1Z9DletcHU|450px|left}}


현재 한국전쟁 연구 및 냉전사 연구는 조지 워싱턴 대학의 우드로 윌슨 센터가 '''냉전사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진행하고 있다.
== 배경 ==
=== 한반도의 분단 ===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 후에도 [[일본 제국]]은 끝까지 저항을 하였으며, 이에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얻어내기 위해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한편 소련은 얄타회담에서 체결한 결의에 근거해 8월 8일 일본 제국에 <s>막타 보너스</s> 선전포고를 함과 동시 157만 명의 대군을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시켰다.<ref name=imhkoreanwar1-01>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1편 [http://www.imhc.mil.kr/user/imhc/download/war625/1K01.pdf]</ref>


===전통주의적 입장===
한반도 문제에 소련의 참여를 인정했던 미국이었지만,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에 이어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는 소련에 위기의식을 느낀 미국은 한반도의 절반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소련의 군사작전 한계선을 결정하기 시작했다. 해군부는 39도선 분할을 제시했지만 국무부와 육군부는 이미 소련이 한반도에 주둔한 시점에서 미군이 끼칠 있는 영향의 한계점이 38도선이라고 판단, 결국 트루먼 대통령이 38도선 분할안을 결재하게 되었다.<ref name=imhkoreanwar1-01></ref>
대표적으로 윌리엄 스툭(William Stueck)<ref> Stueck, William Jr. “The Korean War.” Leffler, Melvyn P. edit.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Cold War. Vol. I. 2010.</ref>이 있는데 이 사람이 보기에 한국전쟁은 국제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발한 것이다. 왜냐면 그는 한국인은 독립심이라고는 찾아볼 없는 민족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개항이후 한국역사가 친러, 친미, 친일, 친청 등 파벌로 나뉘어 싸웠던 사실과, 이승만의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을 한 사실을 가지고 한국인은 근본적으로 독립심이 없는 존재라 주장했다.<s> 미국판 식민사관</s> 그래서 한국전쟁도 김일성이 독자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소련의 계획된 전쟁이라 본다.<ref> 전형적인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반화의 오류]]이다. 독립청원이나 외교독립론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만주나 간도, 연해주로 피신하여 일본군에 대한 대규모 게릴라 전을 펼치기도 했다. </ref>


간단히 말해서 '''한국놈들 멍청해요. 그래서 전쟁 결정 못해요. 그러니 한국전쟁 소련이 일으킨 거에요.'''
미국으로부터 38도선 분할 안건을 받은 소련정부는 즉각적인 회답에서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로서 38도선을 경계로 일반명령 제1호를 통해 이북의 일본군은 소련에게, 이남의 일본군은 미국에게 항복을 받는다는 방침이 확정되었다. 이 분할점령에 의해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갈라지게 되었고 서로 다른 정치권력이 들어섰다.<ref name=imhkoreanwar1-01></ref>


국내에는 서울대 김영호 교수<ref>김영호. “한국전쟁 원인의 국제정치적 재해석: 스탈린의 롤백이론.” 『한국정치학회보』 31집. 3호. 1997. </ref>가 대표적으로 있다. 이분은 스탈린의 롤백이론을 주창하고 계시다. 그분의 주장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군정과 신탁통치 ===
1945년 9월, 미국은 남한의 군정 포고문을 발표했지만 구체적 게획이 전무한 상황인데다 정치경험이 풍부한 한인 지도자들이 많지 않았던 관계로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관리들을 그대로 유임시켰다. 이후 미군 장교들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여전히 많은 일본인들이 고문으로 활약하였으며 이는 해방을 갈망했던 한국인들의 반발을 사기 시작했다.<ref name=imhkoreanwar1-02>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2편 [http://www.imhc.mil.kr/user/imhc/download/war625/1K02.pdf]</ref>


김일성이 졸라서 전쟁이 났어도, 아무튼 전쟁을 승인한 사람이 누구냐? 스탈린 아니냐? 그러니 스탈린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최종결정권자가 스탈린이니 당연히 스탈린 책임이다.는 것
산업경제가 붕괴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남한의 행정업무를 어느 정도 파악한 미군은 10월부터 일본인 고문들을 퇴임시키고 그 자리를 한국인으로 대체해 일제의 악법들을 폐지했으며, 최종적으로 남한을 군정과 신탁통치를 거쳐 자유 민주주의 독립국가로 형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독립운동을 해왔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앙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모든 정파의 정치활동을 허용하는 법령을 공표했다. 결과 남한은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된다.<ref name=imhkoreanwar1-02></ref> <s>겉만 보면 건강하고 올바른 정치 체제인데 북괴 때문에 안 될거야 아마.</s>


===수정주의적 입장===
한편 소련은 1945년 8월 평양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38도선 일대에 초소를 건설해 남북을 왕래하는 사람들에 대한 검문을 강화하고 남북을 잇는 철도, 도로, 통신을 차단했다. 초기에는 민족주의자들의 명망과 조직을 이용해 안정화를 꾀했으며 한국인 정치인을 기용했다. 그러나 고문관에는 소련군 장교가, 실권은 소련계 한인들이 쥐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민족주의자들을 내치고 <s>토사구팽</s> 친소련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하였으며, 10월 14일 소련군 대위 <s>혹부리우스</s> 김일성을 앞에 내세워 북한의 최고 권력자로 만들었다.<ref name=imhkoreanwar1-02></ref>
수정주의 시각의 시작은 <s>우리에게는 생소한</s> 윌리엄 A. 윌리엄스의 ''The Tragedy of American Diplomacy''가 출간되면서부터였다. 윌리엄스는 냉전은 미국의 잘못된<s>멍청한</s>외교 덕분이라고 말했다. 이를 기점으로 다양한 수정주의자들이 등장하는데 한국전쟁관련 대표적인 인물은 브루스 커밍스다.<ref> 커밍스는 지금은 유명하지 않지만 8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대학생 필독서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었다. </ref> 커밍스의 등장 이후 학계에서는 수정주의자들이 득세했다. <s>본격 수정주의자들의 시대</s>  


커밍스는 한국전쟁을 일제강점기때 등장한 계급간 격차 등 다양한 사회문제가 해방 후 미소 분할점령으로 인해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게되었고 이는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근데 커밍스 주장의 문제점은 한국전쟁의 간접적인 원인(계급간 갈등 등)은 설득력이 있으나 직접적인 원인<ref>커밍스는 한국전쟁이 남한과 미국이 남침한 결과라 설명한다든지, 미국의 음모였다든지 등</ref>에 대한 설명이 미흡한 것이 문제이며 간간히 틀린 정보도 많다는 것이다.<ref>한국전쟁 이전에 남한에서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든지 등</ref>
소련은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포퓰리즘을 이용해 공산주의를 신봉하게 만들고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을 포섭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비협조자들이 숙청당하거나 남한으로 도망갔으며, 김일성은 빠른 시일에 북한의 권력을 쥐게 되었다.<ref name=imhkoreanwar1-02></ref>


시몬스의 경우 김일성이 불안정한 기반으로 시작하였고, 한반도 내에 기반이 있는 세력에 비해 힘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박헌영을 위시한 [[남로당]]계열이 대거 북한에 들어오는데 애들의 규모가 엄청난 양이었다. 그로 인해서 김일성의 권한은 더 불안해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김일성은 박헌영을 괴롭히고 힘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통받던 박헌영이 이러게 된 이상 갈때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남침'''을 건의했고, 영토야욕이 있던 김일성이 이를 수용해서 소련의 스탈린에게 달려가 전쟁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다.<s>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전쟁하게 해주세요.</s> 김일성의 부탁에 스탈린이 승인했고 이로 인해서 한국전쟁이 발발되었다고 말한다.
남북을 분할점령하던 미국과 소련은 1943년 카이로 선언을 구체화하기 위해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외무장관회의를 개최하여 한국인에 의한 한반도 정부 수립을 위해 최대 5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임을 결의했다. 신탁통치 결정이 알려지자 남북한 모두 거센 반발을 보였다. 그러나 1946년 1월 남북한 좌익세력은 입장을 바꿔 신탁통치를 지지하기 시작했으며 반탁운동을 전개하던 우익세력과 충돌을 일으켰다.<ref name=imhkoreanwar1-03>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3편 [http://www.imhc.mil.kr/user/imhc/download/war625/1K03.pdf]</ref>


=== 둘을 조합한 현재 학계 정설 ===
1946년 3월, 신탁통치의 결정을 위해 미국가 소련의 회담이 서울에서 열렸으나 양측의 입장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미국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우익을, 소련은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좌익을 협의대상으로 삼길 바랬다. 결론적으로 미국은 모두에게 신탁통치 찬성과 반대의 의사표명에 대한 권리를 보장한 반면 소련은 신탁통치를 찬성한 단체만 받아들임으로서 협상은 결렬되었다. 1947년 5월에도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한 두 국가간의 협조는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소련과의 협조를 통해 한반도 통일정부수립을 원했던 미국은 방침을 철회하고 국제 연합으로 문제를 넘겨버렸다.<ref name=imhkoreanwar1-03></ref>
<big>'''그런거 없다'''</big>


한국전쟁의 원인이 무엇이냐에 따라 냉전의 원인이 바뀐다. 예를 들어서 만약 스탈린이 전쟁을 주도했다고 본다면 냉전은 스탈린 탓이다. 그런데 만약 김일성이 주도한 것이 된다면 냉전은 스탈린 탓이라기 보다는 미국의 탓 또는 미국과 소련의 서로 간의 잘못된 오해로 인한 것이 된다. 즉 한국전쟁을 누가 주도했느냐에 따라 냉전의 책임이 결정되는 것이다.<ref>Weathersby, Kathryn.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New Evidence from Russian Archives.” 1993. [http://www.wilsoncenter.org/sites/default/files/ACFB76.pdf] (Accessed 2015. 6. 9.) p.7. </ref>그렇기에 한국전쟁 원인이 명확히 나오는 순간은 냉전의 원인에 대한 명확한 결론이 내려지게 되는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중도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전통주의와 수정주의의 입지는 아직도 강하다.
=== 남북한 독립정부 수립 ===
두 차례에 걸친 미국과 소련의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북한과 남한의 좌익세력과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남한의 우익세력간의 대립이 극심해지자 미 군정은 통일정부 수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1948년 5월 10일 소련의 반대로 UN 한국임시위원단이 들어갈 수 없는 북한을 제외한 남한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했다. 만 21세에 달하는 모든 남녀에게 선거권이 주어졌고, 선거반대가 극심했던 제주도를 뺀 남한 전역에서 후보들이 출마했으며,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개개인의 손으로 대표를 뽑는 주권을 행사했다.<ref name=imhkoreanwar1-04>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4편 [http://www.imhc.mil.kr/user/imhc/download/war625/1K04.pdf]</ref>


다만 한국 학계에서는 '''김일성 주도 스탈린 동조설'''이 중론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김일성<s>개새끼</s>가 전쟁을 원해서 스탈린에 가서 <s>빼애애애액!!!!</s>전쟁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고, 이를 요청을 스탈린이 받아들여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s> 전쟁하게 해주세요 현기증난단 말이에요!</s><ref>솔직히 국내에서는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분석은 거의 없다.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첫 논의는 [[1980년]]대에 김학준이 미국의 연구사례를 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었지 민간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연구한 분야가 아니었다. 그러니 국내의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분석은 미국의 의견을 차용하거나 미국의 의견을 기반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경우이다.</ref>
초대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을 중심으로 제헌의회가 구성되었고 7월 12일 헌법을 제정, 20일에 이승만과 이시영을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내각을 출범시킨 대한민국은 8월 15일 건국을 선포함으로서 한반도 최초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UN은 48대 6으로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했으며, 미국은 외교승인과 동시 미군정을 폐지하고 대한민국 정부에 모든 것을 이관하였다.<ref name=imhkoreanwar1-04></ref>


==북한의 기습남침과 수도 서울 함락==
처음부터 한반도 통일정부를 원치 않았던 소련은 북한을 위성국으로 만들기 위해 공동위원회가 한창 열리고 있을 무렵 김일성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책임자로 임명했으며 권력을 장악, 1946년 11월에 인민위원회 위원들을 선출하였다. 1947년 2월, 임시가 아닌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구성해 북한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만들었으며, UN에서 남한정부 수립 결의안을 채택하자마자 인민헌법을 만들고 한반도의 합법정부로 내세웠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고 같은 날 김일성이 내각수상으로 선출되었다.<ref name=imhkoreanwar1-04></ref>


===북한군의 남침계획과 기습남침===
=== 주한미군 철수 ===
[[파일:한국전쟁 직전 상황도.gif|섬네일]]
미국은 한반도 통일정부가 물건너가고 안보전략의 조정에 따라 주한미군을 철수시켰다.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가 재정의 압박으로 군축을 실시했는데 전시동원으로 1,200만 명에 달하던 병력 중 수백만이 본래의 삶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대규모의 군대를 보유한 소련이라는 존재가 있었음에도 막강한 <s>공군!</s> 공군과 <s>[[데우스 엑스 마키나]]</s> 원자폭탄이라면 충분히 상쇄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소련의 주력이 동유럽에 몰려있는 상황에서 동아시아는 비교적 위협수치가 낮았다.<ref name=imhkoreanwar1-05>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5편 [http://www.imhc.mil.kr/user/imhc/download/war625/1K05.pdf]</ref>


북한군의 남침계획은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국방부에서는 “[[1950년#6월|1950년 6월]] 말에 전면공격으로 전쟁개시 2일차에 신속히 서울을 점령하고, ‘인민봉기’를 유발하여 한국정부를 전복하는 것이었다. …중략… 이를 위해 북한군은 수도 서울을 전쟁 개시 2일차에 신속히 점령하고, 한강이북에 전개된 국군 전방사단의 주력을 격멸하도록 하는 것”<ref>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2』, 서울, 2005, p.5</ref>이라 말하고 있다.<ref>북한군의 문서고가 개방되지 않는 이상 이는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ref>
미국은 동맹국인 중화민국이 내전에서 패배할 것을 대비해 1947년부터 일본을 새로운 방파제로 삼으려는 계획을 검토하였다. 소련이 미국을 겨냥, 태평양 방면으로 침공해올 것을 상정해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잇는 방어전략을 마련했다. 소련과 전면전이 발생하면 이 지역의 해공군기지를 활용해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고 최종적으로 <s>본격 아포칼립스</s>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한반도로 소련이 진격하게 되면 전면전을 피할 수 없었거니와 지상군 작전보다 한반도를 우회한 해공군으로 적의 본거지, 소련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하였다.<ref name=imhkoreanwar1-05></ref> <s>천조국스러운 소련 평탄화작전. 그런데 적이 한반도만 노리면 어떡하지?</s>


가장 확실한 것은 북한군의 작전은 [[8월 15일]] 전에 전쟁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총 3단계의 작전을 구상한다. 1단계에서 국군 주력을 격멸하고 2단계에서 국군 증원병력 격멸 및 전과확대 마지막 3단계에서는 국군 잔적 소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을 단순히 공백지로 둘 수 없어서 이에 미국은 한국과 1948년 8월 24일 군사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군사협정에 따라 대한민국 국군이 주한미군으로부터 훈련을 받고 시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1949년 6월 30일 철수가 완료된 시점에도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이 남아 한국군의 군사원조를 지원했다. 1950년 1월 26일,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이 체결되었지만 북한의 군사침공의 대비보단 내부 치안과 경제원조에 원점을 두었다. 심지어 주한미군사고문단은 각종 항공기와 중화기의 지원을 본토에 요청하였지만 미국 정부에서 거절하였다.<ref name=imhkoreanwar1-05></ref> 북한에 4,300명의 군사고문단과 10개 이상의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각종 장비와 중화기를 제공한 소련과는 대조적인 상황이 벌어졌다.<ref name=imhkoreanwar1-06>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6편 [http://www.imhc.mil.kr/user/imhc/download/war625/1K06.pdf]</ref> 본격적인 의미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정전 후 10월 1일에 체결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파일:한국전쟁 북한군 작전도.jpg|섬네일]]
==== 미국의 대외정책의 표현, 애치슨 선언(?) ====
미국의 대외정책이 애치슨 선언<ref>Press Club Speech on the Far East 1950-01-12 [http://teachingamericanhistory.org/library/document/speech-on-the-far-east/]</ref>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되었고 이것이 한국전쟁을 야기했다는 의견이 있다. 이에 대해 애치슨 선언이 한국을 배제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한국을 지원하겠다는 의견이라 해명한 미국의 공식문서가 존재한다. 일본과 필리핀을 잇는 전략적 방어라인은 소련의 침공으로부터 미국을—당시 일본은 미군의 군정이 실시되었던 미국의 해외 영토인 반면 대한민국은 어엿한 주권국가다—지키는 관점에서 작성된 것이지, 마치 미국이 한국을 일부러 무방비상태로 두었다는 식으로 해석한 기자들을 질타한 것이다.<s>예나 지금이나 만국 공통 [[기레기]]의 존재.</s> 실제로 미국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한국을 지키기 위해 무서운 속도로 파병을 실행하고 UN을 끌어들이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다.<ref>Secretary Acheson and the Defense of Korea [http://www.trumanlibrary.org/whistlestop/study_collections/korea/large/documents/pdfs/kr-3-13.pdf]</ref> <s>그런데 이건 이거대로 미국이 노린 거라는 음모론이 존재.<ref>이것도 미국 기자인 스톤이 주장한 것. 자세한 것은 Stone, I. F. 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52. 참조</ref> 지켜줘도 뭐라 그러지 지키지 않아도 뭐라 그러지.</s>


북한군은 국군을 포위섬멸하기 위해서 포위소멸구역을 설정하고 서울을 2중, 3중으로 포위하여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주력을 격멸하고자 하였다. 먼저, 북한군은 서울을 직접 공격하는 제1, 제3, 제4보병사단으로 서울이북에서 1차 포위를 시도하고, 2차로 개성-김포로 진출하는 북한군 6보병사단과 춘천-가평-하남으로 진출하는 북한군 제2보병사단이 한강이남에서 다시 한 번 국군 주력을 포위 격멸하는 것이었다.<ref>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2』, 서울, 2005, p.13</ref> 북한군은 이러한 작전 하에 {{날짜/출력|1950-6-25}} 새벽 4시 기습 남침하였다.
또한 애치슨 선언은 오히려 국내 불안을 야기하기는커녕 다시 한국을 지키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재확인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전쟁 초기 국군의 대응===
제임스 마크레이의 [https://journals.lib.unb.ca/index.php/jcs/article/view/366/578 Dean Acheson's Press Club Speech Reexamined]에 따르면 에치슨의 연설의 주 목적은 남한을 방어선에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한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는데 일부 학자들이 애치슨의 표현인 "방어선 (defensive perimeter)"<ref>직역하자면 "방어적 주위"이다.</ref>에 집착해 애치슨 발언의 나머지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한국이나 몇몇 학자들이 아직도 애치슨 발언이 한국전쟁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ref>Some scholars have relied on the released Soviet documents to revive traditional interpretations of the Korean War. For example, Soh Jin-chull writes in a recent paper that "clearly ... the Korean War was 'initiated' and 'realized' by Stalin with the cooperation of Communist China." As part of a "collective conspiracy," he concludes, "it was the North Korean Communist counterpart who loyally obeyed and executed this War."81 Similarly, writers have attempted to attribute Stalin's decision to support an invasion of South Korea to Acheson's Press Club speech. Kim Hakjoon claims that when Stalin referred during his April meeting with Kim Il Sung to favorable changes in the international environment, he "probably had in mind the speech given ... by U.S. Secretary of State Dean Acheson three months earlier in January, 1950."82 According to James G. Hershberger, Acheson's speech "may have been seen in Moscow as lending credence to the argument that Washington would not intervene militarily to rescue South Korea from being overrun."83 "The timing of Stalin's approval," Weathersby initially concluded in 1995, "must therefore have been at least in part a response to the new defense policy ... that placed South Korea outside the American defense perimeter in the Pacific."84 But Soviet documents do not sustain this interpretation, not least because just one of them even mentions the Press Club speech. </ref> 공개된 구소련 문서에는 전쟁의 시작 원인에 애치슨 발언이 끼친 영향이 언급되지 않았다.
국군은 4시 북한군의 대대적인 공습을 국지적으로 파악했으나, 05:15 동천-포천지구에서 날라온 급보에 따라 05:30 전군에 비상령을 하달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신성모 국방장관에서 전화로 연락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아 직접 차를 몰고 장관 관사에가 7시에 적 침공상황을 보고했다. 당시 비서의 회고에 의하면, “자못 놀라고 당황하는 표정이었으며 짐작은 하였지만 적이 일요일에 기습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던 것 같았다”라고 하였다.<ref>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2』, 서울, 2005, p.58</ref><ref>당시에 북한군이 침공할 것이라고는 모두가 예상한 상황이었다. 이에 국군은 약 6개월간 비상경계령을 내렸고 개전하기 딱 이틀 전에 그 비상경계령을 해제하였다.</ref><ref>비상 경계령을 갑자기 해제한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가 당시 [[6월 25일]]이면 모내기 시즌이었다. 당시 남북한 모두 농업국가였기에 설마 모내기를 포기하겠어 라는 사고로 비상경계령을 해제했다고 한다.</ref>


개전과 동시에 국군의 전황은 좋지 않았다. 통신망 두절로 인해서 10시에 채병덕이 의정부지구 7사단을 방문한 다음에서야 이것이 단순한 국지전이 아니라 전면남침임을 파악하였다. 이에 따라 수도사단 및 서울근처에 있는 예비대를 투입하고, 후방 3개 사단<ref>제2, 제3, 제5사단으로 이 사단들은 여수 · 순천 반란사건 이후 등장한 빨치산 토벌 중에 있었다.</ref>에게 이동을 명령했다. 또한 군수지원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미 개전한지 4시간이 지났고 북한군의 빠른 진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ref> 의정부 축선만 밀렸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국군이 쳐발린거라 알고 있는데 의정부 7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사단들, 임진강의 1사단, 춘천의 6사단, 강릉의 8사단들은 밀리기는 했지만 충분히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었다. 물론 7사단이 무너지고 의정부 방면이 뚫리면서 전선이 붕괴되었지만 말이다. </ref>
또한 1950년 1월 애치슨 관련 발언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애치슨 선언으로 한국이 배제되었으니 문제가 된다는 관점의 기사가 거의 없다.


해군의 경우, 25일 9시 해군본부 작전명령 갑 제18호에 따라 전 군에 비상경계돌입과 전투준비를 하였다. 해군은 해안방어와 적 게릴라부대 공격 저지에 초점을 두었는데 특히 2함대의 경우, [[6월 25일]] 야간 대한해협에서 적 게릴라부대 600명을 태운 선박을 격침했고, 옥계 근해에서도 25,26 양일간 북한군 766 게릴라부대와 제945육전대의 상륙선박을 격침했다. 인천의 제1함대의 경우 웅진에 고립된 제17연대의 해상철수를 지원하였다.  
가장 먼저 애치슨 선언을 언급한 경향신문엔 이승만과 기자 간의 대담이 실렸는데, 여기서 이승만은 애치슨이 1월 12일 기자구락단(Press Club) 연설에서 한국에 대한 확고한 지원을 해줄 것이라 말했으니 국민들은 걱정하지 말고<ref>경향신문 1950년 1월 15일자 신문 1면 기사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0011500329201001&officeId=00032]</ref>, 트루먼과 애치슨에게 정말로 감사하다는 의견을 표명했다.<ref>Memo of Conversation, January 28, 1950. Secretary of State File, Acheson Papers [http://www.trumanlibrary.org/whistlestop/study_collections/koreanwar/documents/index.php?documentdate=1950-01-28&documentid=kr-9-15&pagenumber=1]</ref> 거기에 애치슨 선언은 한국을 확고한 방어막으로 형성한 것이라 말하고 있어 에치슨 선언의 의미는 남한을 방어하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는 의견이 있다.<ref>1950년 6월 10일자 경향신문 여적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006100032920102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6-10&officeId=00032&pageNo=1&printNo=1186&publishType=00020]</ref>


개전 당시 육군 지도부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5시에 상황을 파악하였으나 신성모 국방장관과의 연락이 두절되어 그를 찾느라 2시간을 낭비해야 했고,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과 김백일 대령은 9시가 넘어서야 육본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 보고를 받고 가장 먼저 도착한 이치업 대령이 자신들의 상관들이 부재중임을 알고, 당시 작전국 선임 장교로써 전군에 비상령을 내렸다. 이에 전군에 비상령은 당일 6시부터 7시 사이에 하달되었고, 개전 2시간이 지나서였다.  
물론 애치슨 선언에서 한국을 명시하지 않은게 문제였다는 의견도 있었다.<ref>1950년 1월 21일 경향신문 사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0012100329201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1-21&officeId=00032&pageNo=1&printNo=1060&publishType=00020]</ref>


또한 당시 국군은 23일 24:00에 비상경계가 해제되면서 장병에게 휴가와 외출 · 외박을 주었고, 대부분의 부대에는 병력이 부족하였다. 이에 육군본부는 장병소집을 위해 전화, 전령, 방송, 가두방송 등 모든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래서 25일 14:00가 넘어서야 80~90%의 장병이 소집될 수 있었다.    
== 발발 원인 ==
한국전쟁은 왜 발생했는가? 이는 [[냉전|냉전사]] 최대의 난제이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의 원인은 냉전의 원인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냉전의 원인에 대한 의견은 한국전쟁 이전, 마샬플랜이니 스탈린의 제1차 베를린 점령이니 등으로 그 모습이 드러났다고 보지만 구체적인 냉전체제가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통신망 두절로 인해서 전황을 파악하지 못했고, 거기에 6사단과 8사단과의 연락이 두절되면서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개전 이후 이승만은 신성모를 불러 “군사 경력자들의 자문을 받아 난국을 타계하라”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장관은 26일 10시에 국방부로 현역 및 재야원로 군사경력자를 불렀다.<ref> 참가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 공군 총참모장 김정렬 준장, 해군 총참모장 대리 김영철 대령, 참모학교장 김홍일 소장, 송호성 준장(전 경비대총사령관), 유동열(전 통위부 부장), [[이범석]](전 광복군참모장), 이청천(전 광복군사령관), 김석원 예비역 준장(제1사단장) 등이었다.</ref> 이 회의에서 신 장관과 채 총참모장이 설명한 전황의 요지는 “현재 군은 의정부에서 북한군을 반격하고 있으며 전황은 유리하게 진전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홍일 소장은 의정부 정면에서의 공세이전이 위험하고 한강 이남에서의 결전을 주장하였다. 이에 이범석, 김석원 두 사람도 동조하였다. 그러나 신 장관과 채 총참모장의 뜻을 꺾지 못한 채 폐회하였다.<ref>참석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석원의 경우 신 장관이 ‘동해안에서 300명의 적이 투항하였고 제17연대는 해주에 진격하고 있다.’라 낙관하고 있었고, 채 총참모장은 ‘반격, 북진한다.’고만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ref><ref> 김홍일 소장은 회의에서 '각 부대와의 통신망과 지휘체계 확립이 우선이며, 결전을 할 것이면 어느 선에서 병력을 집중할 것인지? 지연작전을 한다면 어디까지 퇴각할 것 인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묵살 당했다고 한다.</ref><ref>이종찬 대령의 경우 서울고수론을 주장하였는데, 그 이유는 UN군이 참전할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고, 한강선 철수 아니면 서울 사수 밖에 선택지가 없는데 둘 다 승산이 없는 상황에서 ‘서울시민을 돌보지 않고 퇴각하다가 결국에는 패하였다’라는 말을 듣기보다는 차라리 서울을 고수하는 것을 택한 것이라 주장하였다.</ref><ref>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2』, 서울, 2005, p.67</ref>
그렇기에 한국전쟁의 원인은 냉전의 원인과 함께 연구되어왔다. 현재 냉전사에 대한 의견은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로 나눠져 있고, 냉전사 연구 및 한국전쟁 연구를 선도하는 곳은 [http://www.wilsoncenter.org/publication-series/cwihp-bulletin 조지 워싱턴 대학의 우드로 윌슨 센터]가 있다.


군 원로회의 이후 채병덕 총참모장은 비상국무회의(26일 11시)에서도 “적을 의정부 밖으로 격퇴하였다. 3일 안으로 평양까지 점령하겠다.”라는 낙관론을 전개하였다. 26일 심야에 의정부 축선이 다급해지는 상황임을 파악하자 육해공 총참모장과 국방장관은 정부의 망명을 고려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에 있던 비상국무회의에서 신 장관과 채 총참모장은 낙관론만 전개하였다. 또 회의 이후 국회에도 참석하여 “서울만은 사수할 것이며 반격으로 전환하여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을 것이다.”라는 요지의 발언만 되풀이하였다. 이때 신성모는 국무총리 자격으로 정부의 이동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27일 05:00 신성모는 정부 이동을 명령하고 방송을 지시하였다. 전쟁 중 혼선으로 인해 6시에 방송이 나갔지만 곧 취소되고 정부가 이동하지 않는다는 정정발표가 있었다.  
===전통주의적 입장===
냉전은 소련 탓!!!! 이라 주장하는 전통주의는 기본적으로 한국전쟁도 소련 때문에 발발되었다고 주장한다.


[[6월 27일]] 09:00 전황이 좋지 않음을 알게된 신성모 장관은 수도 사수가 어렵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지만, 분위기가 싸해지자 말을 바꾸고 정부는 이동하더라도 군은 서울을 사수하자는 발언을 하였다. 그래서 정부와 국방부, 해군과 공군은 수원으로 철수하게 되었고 육군본부는 서울에 잔류하기로 하였다.
달린의 경우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기획된 음모라 보았는데, 그 이유는 스탈린이 기만질에 능통한 개새끼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자신의 영향력을 팽창시키고 싶은데,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피해가 극심해서 미국과 맞짱을 뜨기는 힘들 것이라 판단하여 다른 방안을 고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소련군이 참전하지 않고, 위성국의 군대로만 전쟁을 일으키는 방안을 세운다.<s>역시 난 천재!!!!</s> 그래서 스탈린은 어디에서 시험할까 고민하던 중에 막내 중 가장 존재감 없던 김일성을 불러서 “남침해라 물자는 지원해줄게”라 말했고, 이에 김일성이 “네 형님”하고 지시에 따랐다는 것이다.<ref>정확히 말하자면, 달린은 공산주위 진영에서 하위층에 있는 북한이 정점에 있는 소련의 지시없이 전쟁을 주도했을 리가 없다고 주장을 했다.</ref><ref>Dallin, 'Soviet Foreign Policy After Stalin', p.60.</ref>


===개전 초 정부의 대응===
서울대 김영호 교수는 롤백이론을 제시했는데 김영호의 말을 요약하자면 김일성이 졸라서 전쟁이 났다는 주장은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구소련문서가 중요한 사실을 배제하고 있고, 단순한 요약본이라는 점을 들어 이것은 러시아가 선별한 자료라 신빙성이 없다고 거부하였다. 그러면서 김영호는 설혹 김일성이 떼를 쓴 게 사실이라고 해도, 스탈린이 전쟁을 거부한 게 아니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왜냐면 1948년 베를린 봉쇄가 실패하면서 소련의 입지가 개차반이 되었는데 갑자기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자신감을 얻은 소련이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세력을 팽창하려고 하였고, 한국을 그 기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즉 스탈린은 마지못해 전쟁을 승인한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전쟁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것.<ref>김영호. “한국전쟁 원인의 국제정치적 재해석: 스탈린의 롤백이론.” 『한국정치학회보』 31집. 3호. 1997.</ref>


앞에서 서술했듯이 채병덕 총창모장은 5시에 즉시 신성모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아 직접 짚차를 타고 장관 관사에 가서 보고하였다. 이때가 25일 07:00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0:00에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총경으로부터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후 11:00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 주재 하에 임시국무회의가 열리나, 전황에 대한 정보가 없어 산회하였다. 14:00 대통령 주재 하에 속개된 국무회의에서 채 총참모장은 북한군의 침공을 국군이 반격할 수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였다. 이에 이 대통령은 긴급명령 1호(비상사태하의 범죄처단에 관한 특별조치령) 등을 공표하였으나 계엄령은 선포되지 않았다.
===수정주의적 입장===


남침상황보도는 25일 07:00 중앙방송에서 처음으로 보고하였다. 이 당시 방송의 요지는 국군이 잘 사수하고 있으니 국민들은 걱정하지 말라는 것과 휴가 중인 장병들은 긴급히 원대로 복귀하라는 것이었다. 당일 12:00 국방부 정훈국은 “북한군이 전면 남침하였지만 국군이 격퇴하고 있다”는 요지의 발표를 하였다. 이후 국방부는 “국군 17연대가 해주로 돌입하였다.”라는 오보를 냈다. 그러나 이러한 방송은 시민들이 피난민으로부터 듣는 상황과 너무나도 다른 내용이었지만 전황의 호전만을 바라는 시민들의 심리로 인해 낙관적인 보도를 믿게 되었다.  
수정주의는 냉전은 미국 탓<ref> 대표적으로 윌리엄 A. 윌리엄스의 ''The Tragedy of American Diplomacy''</ref>으로 시작했다가 냉전은 소련이외의 요소 결과라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한국전쟁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미국의 잘못된 대외정책이라는 입장에서 내인론 또는 내인론과 외인론의 결합 등으로 변화되고 있다.


26일 08:00 의정부를 탈환하고 북진중이다 라는 방송이 나갔다. 그러나 27일 06:00 갑작스런 정부의 수원이전 소식은 시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에 당황한 공보처장은 내용을 바꾸어 6시 발표내용을 취소하였다. 27일 22:00부터 23:00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녹음방송이 나갔다. “국군이 잘 버티고 있으니 국민은 참고 기다리면 된다.”라는 식의 방송이었다.
플레밍의 경우 한국전쟁의 원인은 미국의 잘못된 대외정책의 결과라 비난하면서 특히 에치슨 선언처럼 미국이 남한에 대해 소극적으로 지원한 결과라 주장했다. 플레밍은 당시 트루먼 행정부가 남한정부가 전쟁을 일으킬까 두려워 군사지원을 꺼려했고, 그 결과 남북한 간의 군사력 격차가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북한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라 보았다.<ref>D. F. Flemming, The Cold War and its Origins, Vol. II, 1950-1960, Garden City: Doubleday, 1961.</ref>


===한강교 폭파와 수도 함락===
수정주의자의 전성기를 연 브루스 커밍스의 경우 한국전쟁은 내부적 요인으로 발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커밍스는 한국은 이미 일제 통치기간에 계급 간 격차가 극심했는데 이 문제가 해방이후 미소 분할점령으로 더욱 극심화되었고 그 결과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한국전쟁의 기원』 1권을 내내 일제강점기의 계급 간 격차 및 사회문제를 설명하고 있다.<ref>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자동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1권, 서울: 일월서각, 1997.</ref> 그러나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요인을 잘못된 지식 하에서 서술했는데 뭐 남한이 북한을 도발했다든지, 남한 내에서 토지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든지 등이 있다.<ref>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자동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2권, 서울: 일월서각, 1997.</ref> 당연히 전통주의자들에게 신나게 털렸다.
한강교는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한 2시간 뒤에 한강에 있는 모든 교량을 폭파하기로 하였다. 폭파 예정시간은 27일 16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수도경비사령관 이종찬 대령<ref>서울고수론을 주장했던 인물 추가사항은 위에서 찾아보길 바람</ref>서울 시민의 피난조치도 강구하지 않고 군부가 먼저 철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더욱이 시민과 서울 북쪽에서 전투중인 국군의 유일한 퇴로인 한강교를 조기에 폭파하는 것은 안 된다며 반대하였으나, 임진강 철교 등 중요한 교량이 시기를 놓쳐 파괴되지 못했음을 전례로 들면서 한강교 파괴는 강행되었다. 파괴가 지연되기도 했으나 혼선으로 인해서 한강교를 파괴되었고 이로 인해 국군 5개 사단과 지원부대의 퇴로가 차단되었다. 이로 인해 국군의 46%인 4만 4000여 명의 병력이 흩어지게 되었다. 또한 차량 1,318대가 모두 서울에 남아 있어 국군의 기동력 상실과 북한군의 기동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  


[[6월 28일]] 한강교 폭파로 인해서 고립된 국군은 급조한 나룻배를 이용해 한강이남으로 도하하였다. 과정에서 많은 혼란이 빚어졌고, 사단과 연대 등 군사조직자체가 와해되었다. 이에 국군은 [[6월 28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신설하고 김홍일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퇴각병들의 병과와 소속을 따지지 않고 홍성부대를 편성하여 노량진부근에 투입하여 한강 방어선을 급편하였다. 이 과정에서 육군본부 참모들이 병력을 수습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이 부분을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대신하고 육군본부 참모들을 육본이 있는 수원으로 보냈다. 또한 민간인을 동원하여 안양과 시흥의 두 곳에 취사장을 설치하고, 집결된 병력을 중심으로 혼성사단을 편성하여 한강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시몬스의 경우 김일성이 불안정한 기반으로 시작하였고, 한반도 내에 기반이 있는 세력에 비해 힘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박헌영을 위시한 [[남로당]]계열이 대거 북한에 들어오는데 애들의 규모가 엄청난 양이었다. 그로 인해서 김일성의 권한은 더 불안해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김일성은 박헌영을 괴롭히고 힘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과정에서 고통받던 박헌영이 이러게 된 이상 갈때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남침'''을 건의했고, 영토야욕이 있던 김일성이 이를 수용해서 소련의 스탈린에게 달려가 전쟁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다.<s>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전쟁하게 해주세요.</s> 김일성의 부탁에 스탈린이 승인했고 이로 인해서 한국전쟁이 발발되었다고 말한다.


서울 함락 후 한국군에게 제대로 화기를 갖춘 사단은 춘천 축선에서 승리하고 퇴각하는 6사단과 강릉축선에 있던 8사단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1사단이 있기는 했지만 장비를 모두 포기하고 몸만 빼내 한강을 건넌 상태였다. 1사단만이 아니라 서울을 포기하면서 예비물자 등을 죄다 포기하고 가면서 장비와 물자를 건지지 못했다.<ref>이건 명백한 대통령 이승만의 실책. 이승만은 서울을 포기하면서 이를 정부와 협의하지 않았다. 서울이 함락 위기이니 피신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걸 아무에게도 안 알리고 도망가는 바람에 행정부도, 입법부도 붕괴할 뻔 했다. 이승만의 서울사수 방송에 일반 시민들만이 아니라 정부 고위급까지 다 속았다는 것. 이 사실이 확인된 건, 피신 다음날 아침 서울 사수 방침을 확인하려고 부통령 등이 경무대를 방문하면서였다. 이러니 장비와 인력을 동반한 조직적 철수가 될 수 있나...</ref> 그밖에 옹진에서 철수한 17연대, 지방의 소규모 병력과 경찰병력<ref>현대 한국의 치안유지 역할을 맡는 경찰을 생각하면 안된다. 당시 경찰들은 실질적으로 군병력 및 전투인원 계산시에 포함될 정도로 치안 역할보다 전투 임무가 상당했다. 물론 군처럼 전면전에 대비하는 조직은 아니었지만 일반 고지방어전이나 참호전, 후방 방어전이나 게릴라전 등에는 충분히 투입하여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ref>가 있긴 했지만 당장 숫적인 열세가 명백했다.
=== 둘을 조합한 현재 학계 정설 ===
<big>'''그런거 없다'''</big>


===평가===
{{인용문2|6·25전쟁의 원인을 규명하여 줄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가 완전하지 않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 동안 6·25 전쟁에 대한 원인과 기원에 대한 자료로 활용된 것은 주요 인사들의 회고록과 일화를 중심으로 개괄적으로 연구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회고록과 일화는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에 자기중심적으로 서술한 글로서 객관적이기보다는 자신의 일화에 대한 미화와 왜곡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가지고 있는 관계로 이러한 자료를 연구 논문의 객관적 자료로 활용되었다는 것은 연구논문에 대한 신뢰성을 보장 받을 수 없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박광득, “제1장 6.25전쟁의 기원과 원인에 관한 연구.” 『통일전략』, 10권, 1호, 2010, pp.14-16}}
최근까지 한국전쟁에서 한국군의 패배에 대한 이야기는 '국군의 장비가 열악했기 때문이다'라고 서술되어왔다. 이 설명이 틀린바는 아니지만 한국전쟁 초기에서 국군의 패퇴는 장비보다는 방어준비태세가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 컸다.  


국군은 분명히 북한보다 열악했다. 전체 벙력은 2:1로 차이가 났고, 화력면에서도 큰 차이를 내었다. 북한군은 122mm 곡사포와 76mm 곡사포, 45mm 대전차포, 82mm 박격포 120mm 중박격포 등 다양한 장비로 무장을 했고, 그에 반하여 국군은 105mm 곡사포와 37mm 대전차포, 57mm 무반동총, 2.36인치 로켓포, 60mm 박격포, 81mm 박격포만 보유한 상황이었다. 특히 국군의 57mm 대전차포나 2,36인치 로켓포는 북한의 T-34/85 전차를 격퇴하기는 부족함이 많았다. 또한 국군 공군이 보유했던 L-4/L-5는 북한군의 미그기보다 성능이 좋지 않았다.
박광득이 이야기했듯이 지금 한국전쟁 중론을 도출하기 위한 객관적인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ref>소련자료가 공개되었다는데 그것도 극히 일부고 제일 중요한 문서는 공개 되지 않았다. 이는 웨더스비도 지적한 부분이다. Kathryn Weathersby.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New Evidence from Russian Archives,” 1993, [http://www.wilsoncenter.org/sites/default/files/ACFB76.pdf] (Accessed 2015. 6. 9.) p. 9.</ref> 그래서 손경고는 한국전쟁 연구동향을 다루는 자신의 논문<ref>손경고. “최근 한국전쟁 연구동향: 2005년 이후 연구를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연구』. 56집. 봄호. 2011.</ref>에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해서 명확하게 규정내리지 않았고, 그냥 이런저런 의견이 있더라 정도로 마무리하였다. 정병준의 경우도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책 서문에서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연구가 변화되었고, 명확하게 어떤 것이라 규정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국군이 패배하게된 가장 큰 이유는 국군의 병력 및 장비면에서의 준비태세 미흡보다는 전쟁지휘 및 방어작전계획부분에서의 실책이 더욱 크다. 국군의 방어작전계획은 존재했으나 개전 1개월 전에 감행된 대대적인 인사조치<s> 왠지독소전 초기를 보는거 같냐?</s>는 국군이 방어작전계획을 숙달하는데 어려움을 만들었다. 또한 국군의 첩보원이 북한군에 침투하여 T-34/85전차를 촬영하여 보고했으며 전선에서 북한군이 증가됨을 첩보부에서 보고를 했음에도 수뇌부는 이를 단순한 병력교체로만 판단하는 실책을 범했다.  
즉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이며 이에 대한 명확한 답안이 나오지 않는 상태이다. 최근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학자로는 웨더스비, 개디스, 스툭, 정병준 등이 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전쟁지도측면에서 국군 수뇌부는 혼란만을 보여주었다. 전면남침임을 파악하는데까지 6시간이 걸렸고([[6월 25일]] 10:00에 파악) [[6월 26일]] 오후 전황이 불리한 상황임에도 반격!! 북진!! 이라는 허울뿐인 구호만 외쳤다. 결국 이 허울뿐인 구호는 방송을 통해 전파되었고 이는 수많은 서울 시민들을 한강이북에 고립시키는 문제를 만들었다.
먼저 ''웨더스비''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로 '''김일성이 소련을 설득한 결과'''라 주장했다. 웨더스비가 보기에 스탈린은 그냥 한반도에서 세력균형을 원했지 전쟁을 원한 것이 아니었고, 전쟁도 김일성이 땡깡을 심하게 부려서 어쩔 수 없이 승인해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한국전쟁은 소련에게 책임이 없고, 당연히 냉전의 책임에서 소련의 역할은 적다고 주장한다.<ref>Kathryn Weathersby.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New Evidence from Russian Archives,” 1993, [http://www.wilsoncenter.org/sites/default/files/ACFB76.pdf] (Accessed 2015. 6. 9.) pp. 8-9.</ref>


국군의 전술측면에서도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물론 국군 1, 6, 8사단은 충분히 역할을 다했으나<ref> 1사단의 경우 임진강을 이용해 방어전선을 구축하여 북한군의 진군을 저지시켰고, 중동부의 6사단의 경우 북한군 2개 사단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북한군의 작전계획에 큰 차질을 야기했다. 또한 동부 8사단의 경우 산악이라는 조건 속에서 병력이 분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였다. 또한 퇴각과정에서 질서있게 퇴각하여 전투력 손실을 최소화하였다. 개전 초기 활약했던 6사단([[김종오]] 대령)과 8사단([[이성가]] 대령)은 전투력을 거의 온존하게 보유하여 이후 지연작전에서 핵심적인 축으로 활동하게 된다.정병준은 자신의 책『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파주: 돌베게, 2006 에서 6사단이 대한민국을 구했다면서 극찬했다. 강릉의 8사단의 경우는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 발간 『6.25전쟁사』에서 한국전쟁 당시 가장 건실하고 전투력을 잘 보존한 부대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ref> 의정부의 7사단은 개전초기 북한군의 포화에 크게 당해 병력의 상당수를 상실했다. 이후 병력을 수습하고 저지하고 있었으나 북한군의 공세는 1개 사단이 막기에는 어려운 것이었다. 이에 국군 지도부는 의정부 축선에 2, 3, 5사단 총 3개 사단을 투입하였다. 그러나 투입을 동시에 한 것이 아니라 도착하는대로 투입하면서 축차투입이라는 우를 범했고, 결국 3개 사단은 모두 북한군을 저지하지 못했고 이는 의정부 방어선이 붕괴되었고, 이는 전 전선의 붕괴를 의미했다.
한편 같은 수정주의자인 ''개디스(John Lewis Gaddis)''는 미국과 소련, 남북한 모두 한국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보았는데. 개디스는 김일성이나 이승만이나 둘 다 전쟁을 원하고 있었고, 전쟁을 준비했는데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지원해줘서 북한이 침공한 것이라 주장한다. 즉 미국이 소련보다 먼저 지원했다면 이승만이 전쟁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ref>John Lewis Gaddis, We Now Know: Rethinking Cold War Histor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p.71.</ref>  


국군의 전쟁 초기 패배는 그릇된 전황파악으로 전쟁지도능력부재로 인한 것이었다.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한 이후 전면침공임을 파악하는데는 4시간이 걸렸고, 국군이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은 6월 26일 오후쯤으로 약 만 하루가 지난 다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병덕은 국군이 반격할 수 있다는 <s>헛소리</s>주장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정부관료와 사법부, 국회의원 모두 채병덕에서 서울을 사수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결국 이런 총지휘관의 잘못된 판단은 정부의 잘못된 판단을 야기시켰고, 결국에는 제대로된 퇴각작전 없이 서울을 포기하는 실책을 범하게 된다. <ref>채병덕이 전황을 잘못 파악한 것은 어쩌면 그의 경력에 의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채병덕은 일본군 조선경비대 출신으로 주로 독립군 토벌 또는 국내 도적 토벌로 공적을 쌓은 군인이었다. 당연히 전면전이나 게릴라전에 경험이 없었다. 물론 광복이후 5년에 걸친 대규모적인 게릴라전과 국지전으로 경험이 숙달되었지만 전면전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였다. 그렇기에 그는 북한군의 침공을 도적토벌이나 국지전으로 보았던 것이고, 그래서 의정부 축선에 축차투입 한 것이라 본다. 축차튑 북한군의 전면 침공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의정부 축선 방어에 병력을 축차투입하는등의 실책을 범한 것이다. 축차투입은 군사전략에서 가장 피해야할 것으로 여겨지나. 적보다 많은 병력을 보유할 경우 축차투입을 통해 아군에게는 휴식을 적군에게는 피로를 유발시켜 승리하는 전략도 있다.특히 반란군을 분쇄하는데 자주 쓰이는 방법이다.</ref>
''윌리엄 스툭(William Stueck)''의 경우, 한국전쟁은 국제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발한 것이라 주장했는데, 그 이유로 그는 한국인은 독립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민족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개항이후 한국역사가 친러, 친미, 친일, 친청 등 파벌로 나뉘어 싸웠던 사실과, 이승만의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을 한 사실을 가지고 한국인은 근본적으로 <s>답 없는</s>독립십이 없는 존재라 전쟁도 결정못한다고 주장했다.<s> 미국판 식민사관</s> 간단히 말해서 스툭의 의견은 '''한국 놈들 멍청해요. 그래서 전쟁 결정 못해요. 그러니 한국전쟁 소련이 일으킨거에요!!!'''<ref> 전형적인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반화의 오류]]이다. 독립청원이나 외교독립론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만주나 간도, 연해주로 피신하여 일본군에 대한 대규모 게릴라전을 펼치기도 했다.</ref><ref> Stueck, William Jr. “The Korean War.” Leffler, Melvyn P. edit.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Cold War. Vol. I. 2010.</ref>


또한 당시 국군의 지휘관 중에 사단급 이상 제대를 운용해 경험이 있는 사람은 김홍일 소장이 유일하였다.<ref>중일전쟁당시 중화민국군에 소속되어 중화민국군 군단을 통솔하여 일본군을 저지한 경력이 있다. 이러한 그의 업적으로 인해서 중화민국군에서 외국인신분으로 소장까지 달게된다.</ref> 이는 한국전쟁 초기에 국군의 운용상의 문제, 특히 의정부 축선에서의 연대급의 축차투입 등,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ref> 하지만 이러한 설명의 문제는 6사단장 김종오, 8사단장 이성가 모두 사단급 이상 제대를 운영해 본 적이 없음에도 북한군에게 패배를 안겨준 사실을 증명하지 못한다.</ref>
''정병준''의 경우, 한국전쟁은 1948-1949년까지 지속되는 38선의 국지전의 연장이라 보았다는 의견이 있으나 실제로는 그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것이지 연장이라 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38선 충돌이 심하기 전부터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전쟁을 요청했으며 이 때 스탈린의 개시에 따라 북한의 유도나 화전양면전술이 일어났다고 본다. 그리고 스탈린 개입을 인정하는 수준을 넘어, 오히려 스탈린의 개입이 굉장히 중요했다고 보는 사람이며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예상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스탈린의 치밀한 위장을 지적했을정도다. 정병준이 말하는 것은 38선의 국지전 과정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배경이 "형성"됐다는 것이지, 그것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다. 정병준은 전쟁의 "기원"이란 개념을 거부했고, 발발할 수 있는 배경이 "형성"할 수 는 있다고 봤다. 전쟁의 발발 자체는 분명하게 김일성과 스탈린의 탓으로 보고 있으며 그러 책에서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다만 그 전쟁이 가능한 배경형성이 좌우남북미소 대립에서 형성됐다는 것이지, 이게 곧 전쟁의 발발니란 것이 아니다. 책에선 이것을 "빅뱅"이라 비유한다.<ref>정병준.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파주: 돌베게, 2006.</ref>


==미국의 참전과 한강선 방어작전==
정병준이 말하는 바는 한국전쟁은 내부적요인과 외부적요인이 복합적으로 결합하여 발생한 것이라 본다. 정병준은 한국전쟁은 38선의 충돌의 연장이며, 이 38선의 충돌과정에서 북한이 병력과 무장을 강화하고 핵심적인 전쟁 계획과 전쟁관을 수립하였다. 정병준은 개전에서 스탈린의 역할을 강조하는 1990년대 이래 신전통주의적 입장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상호 간에 적대적이었던 남북한 간의 내전적 충동 상황을 '''중시'''하는 입장을 복합적으로 견지하고 있다.<ref>김태우, "한국전쟁 연구 동향의 변화와 과제, 1950-2015", 한국사학사학보, 제32권, 2015, 330</ref>


===미국의 참전===
정병준의 입장은 복합적인 요인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한국전쟁의 기원이 38선의 충돌로 인해 '''기인'''했다고 보는 입장이고, 이러한 입장에서 '''기원'''이라는 표현을 서술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국외적 요인에 대한 영향도 고려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미국은 주한미국대사 무초(John J. Muccio)의 전문을 통해 한국전쟁이 시작됨을 인지한다. 미국은 개전한지 7시간 26분이 지난 후에야 전쟁 상황을 공식을 접수하였다. <s>이때 신성모와 채병덕은 국군 반격!, 북진! 북진! 외치고 있을 때다......</s>미 국무부는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비상연락계통을 이용해 전 미국 지도부에게 연락을 취한다. 당시 미국은 토요일이었고 대부분의 지도층은 휴가 중이었다. 대통령 트루먼도 미주리 주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소식으로 인해 미국 지도부는 신속히 집결한다.


미국 현지시간 [[6월 25일]] 19:40분 백악관 블레어하우스에서 회의가 진행된다. 이 회의에서 북한의 남한 침공은 “소련이 미국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거나, 남한을 정복해서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팽창을 유도하기 위한 것”<ref>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87</ref><ref>참고로 이는 한국전쟁 원인의 전통주의적 입장의 시초가 된다.</ref>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5개의 사항을 결정하였다.
===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의견 ===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에 조사단을 파견하도록 할 것
앞서 말했듯이 한국 학계나 미국 학계나 중론이 없는 상황이지만 국내에서는 거의 중론으로 여겨지는 것이 있다.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이 제안한 군수물자를 보내게 할 것
#이미 지시된 제7함대를 일본으로 파견할 것
#미 공군은 극동지역에 있는 소련 공군기지를 제거할 계획을 수립할 것
#소련의 다음 행동 지역이 어디인지 파악할 것
미국 현지시간 [[6월 26일]]이 되자 한국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제2차 블레어하우스 회의가 개최되지만 회의 내용은 제1차랑 대동소이 하였다.  


전쟁 초기 미군의 지원은 제한적이었다. 주로 탄약 지원을 주로 하였는데, 105mm 곡사포 90문, 60mm 박격포 700문, 카빈소총 40,000정 화기와 함께 105mm 포탄 105,000발, 81mm 박격포탄 265,000발, 60mm 박격포탄 89,000발, 소총탄 2,480,000발이 주산으로 긴급 지원하였다.<ref>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p.95-96</ref>
바로 '''김일성 주도 스탈린 지원설'''이다.


[[6월 29일]] 맥아더장군이 한국 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수원공항에 도착하였다. 수원학교에 있는 육군본부 임시거처에서 전선에 대한 상황을 브리핑 받는 중 맥아더 장군은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이 사태에 대한 건의사항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이에 채병덕 총참모장은 “2백만 남한 장정을 징집하여 침략을 격퇴하겠다.”고 말했다.<ref>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103</ref> <ref>이 논평은 들은 맥아더는 국군이 망한 이유를 알것 같다고 참모에게 이야기했다 카더라</ref><ref>총참모장의 전쟁 구상이 너무 막연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김홍일 소장은 아군의 숫자와 적군의 숫자를 파악하고 이에 따라 시급한 것이 무엇이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고하였다.</ref>
먼저 북한, 김일성은 전쟁을 통해 통일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무력통일을 위해서는 잘 훈련된 병력, 뛰어난 무기, 그리고 후원자와 군비지원이 필수적 요건이었으나 북한이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북한은 현대적 무기생산이 불가능한데다 사단급 이상의 작전계획 수립과 전투수행 경험도 전무한 상태였다. 소련군이 남겨놓은 무기와 군사고문단의 지원이 있었지만 한반도를 통일하기엔 불충분한 상태였다.<ref name=imhkoreanwar1-18>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18편 [http://www.imhc.mil.kr/user/imhc/download/war625/1K18.pdf]</ref>


한강남안 전선을 시찰한 맥아더는 미군의 참전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맥아더는 뉴욕 해럴드 트리뷴지의 히긴스 양에게 “나에게 미군 2개 사단만 준다면 나는 한국을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ref>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104</ref><s>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말해놓고 필리핀을 날려먹은 적이 있었지</s>
이때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공)은 내전 중이라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김일성은 스탈린의 동의와 원조가 절실히 필요했다.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과 회담을 가진 스탈린은 남한의 군사력과 주한미군의 현황, 북한의 전투능력과 경제에 대한 질문을 던졌으며 다방면의 지원을 원하는 김일성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남침에 대한 승낙은 허가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 내전의 결말이 불투명했고 얄타조약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으며 미국의 개입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킬 환경이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으며 북한 단독으로 남한을 압도하리라 판단하지 않았다.<ref name=imhkoreanwar1-18></ref> 즉 시기상조라고 생각한 것이지 절대 야욕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다.<ref name=imhkoreanwar1-19>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19편 [http://www.imhc.mil.kr/user/imhc/download/war625/1K19.pdf]</ref>
맥아더 장군이 시찰보고서가 도착하자 미군은 미국 현지시간 [[6월 30일]] 새벽 4:57 2개 사단을 추가로 파병하고 그날 오전에 미군의 대규모적인 파병이 결정되었다. 또한 안보리를 통해 UN군 파병이 결정되었다.


===한강선 및 김포지구 방어작전===
시간이 흘러 1949년 8월 소련은 핵개발에 성공하였고, 그해 9월 종공이 국공내전에 승리하였다. 거기에 북한의 전쟁준비가 어느 정도 갖춰졌다고 판단한 스탈린은 1950년 1월 김일성과 만나 남침계획을 구체화했다. 소련은 중국에서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새로운 중소동맹을 체결한 상태였기에 중국을 대신할 새로운 전략지역의 획득이 필요했다. 3월에 다시 만난 <s>인간백정 두 마리</s> 두 지도자는 북한의 남침계획에 동의하였으나 스탈린은 최종결정을 <s>또 다른 인간백정</s> 마오쩌둥에게 받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5월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설득해 동의를 얻어내었으나 중국으로선 타이완을 '해방'하기도 전에 남의 전쟁을 돕는다는 것이 내키지많은 않았다. 그래도 전쟁을 결정한 이상 미군이 참전하더라도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었다.<ref name=imhkoreanwar1-18></ref>


국군 지도부는 서울 철수의 필요성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계획조차 수립하지 못했다. 당연히 철수과정은 극도로 혼란했고 피난민에 의해서 교통은 거의 마비되었다. 거기에 서울 시민들도 피난길에 오르면서 국군의 철수는 혼란이었다. 거기에 한강교를 미리 폭파시켜 야포, 차량, 박격포 등 중장비를 이동시키지 못하고 소총만 휴대하거나 또는 맨몸으로 철수하였다. 거기에 국군에게 지급하기 위해 보급품을 실고 있었던 1,318대의 차량들이 한강북쪽에 갇혀 적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국군의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중소동맹은 여러 정치적 이유를 띠고 있었지만 일본의 재침략 또는 미일 양국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침략의 대비와 전세계 공산화라는 공통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만큼<ref name=imhkoreanwar1-19></ref> 민주국가의 최전방이던 대한민국이란 눈엣가시를 제거하기로 마음먹는다.


국군은 병력을 수습해야하는 것과 동시에 한강선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막아야 하는 두 가지 임무를 모두 수행해야 했었다. 그러나 한강선은 전차를 앞세우는 북한군을 저지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을 쉽게 내준다면 북한군을 저지할 있는 곳은 딱히 없었다.<ref>낙동강 전선도 한강선에 비해서 그렇게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ref> 특히 미국의 참전이 확실시되던 시점에서 국군이 이곳에서 시간을 벌어야만 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스탈린은 신중하고 우유부단하기 까지 하여 귀가 얇아 김일성에게 휘둘리거나 김일성의 생떼에 질려서 넘어간 인물이 되나 대단히 유능한 백수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지략가요 전략가라고 할 있다. <s>그리고 중국이랑 북한이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제발 휴전하게 해주세요 라고 징징 거려도 죽을때까지 안 된다고 한다. 일타 쓰리피! 그리고 그들의 공공의 적 일본은 한국전 때문에 되려 살아난다. 지못미.</s>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에 채병덕 총참모장은 한강방어를 위해 육군참모학교장인 김홍일 소장<ref>김홍일 소장은 1918년 상해로 망명하여 중국 강무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으로 활동하다가 한국의용군 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1925년 중국 국민당 군에 가담하여 사단장 및 군단장 대리로 중일전쟁에 참여하여 지연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이후 광복군 참모장 겸하였다. 당시 국군에서 '''유일하게 사단급 이상 대부대를 지휘 경험'''이 있었고, 지연작전을 수행한 인물이었다. 참고로 백범일지에 나오는 윤봉길 의사에게 도시락 폭탄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국인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사실은 중국인이 아니라 김홍일 장군이다. 또한 국군 역사상 '''유일하게''' 소장으로 임관한 분이다. 후임이 왔는데 별이 두 개다.</ref>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ref>채병덕 최고의 선택</ref>
===한국전쟁 연구의 배경과 역사===
====한국전쟁 원인 연구의 선도, 미국====


시흥사령관이 된 김홍일 소장은 시흥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유재흥 준장, 이종찬 대령, 임선하 대령을 각각 혼성 7사단장, 혼성수도사단장, 혼성제2사단장에 임명하였다. 혼성이라는 명칭을 쓴 이유는 수도, 7사단, 2사단 모두 병력이 분산되어 제대로된 편제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에 남하하는 병력을 수습하여 편제나 소속 상관없이 500명이 채워지면 혼성ㅇㅇ대대라 칭하고 바로 한강선에 투입했다. 당연히 사단편제가 기존편제와 달랐으니 혼성이라는 명칭을 썼다. 이 말은 즉 국군그 편제조차 유지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당연히 혼성사단은 말만 사단이었지 실제병력이나 화력은 일개 연대수준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혼성사단 연대별 소유하고 있던 중화기는 박격포 2-3문, 기관총 5-6정 정도로 일개 소총부대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에 관심이 높은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한국전쟁의 원인에 따라 냉전의 책임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냉전의 책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변화하였다.


그러나 시흥사는 한강방어를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했다. 승마장에 있던 말들을 군용으로 수용하였고, 각 지역에 남아 있던 화기를 전부다 전방으로 보냈다. 또한 혼성 사단장을 임명하여 한강선을 따라 남하하는 국군을 수습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를 통해서 국군은 어느정도 편제를 갖출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었다.  
1950년대의 경우 이념의 대립이 정말 한국저리가라 할정도로 하드코어 했다. 괜히 '''메카시즘'''이라는 말이 등장한게 아니다. 그래서 당시의 학자 또는 한국전쟁 관련 서적에서는 90%가 '''소련탓'''을 한다.<ref>예외적으로 스톤이 있는데 스톤은 미국기자였다.</ref> 그래서 이 시기의 학자들을 통틀어서 전통주의자 들이라고 한다.


시흥사가 한강지역의 방어선을 재편하는 동안 [[6월 29일]] 맥아더 장군이 시찰을 오게 되었다. 여기서 김홍일은 맥아더에게 “지금 국군이 장비와 탄약의 절대량이 부족함을 알리고 이에 대한 시급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이후 수도사단 방어진지로 안내했다. 여기서 유명한 일화가 나왔다.<ref>맥아더가 혼성8연대 진지에 있는 일등중사를 보자 ‘너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거냐?"라고 물으니 중사왈 "너나 나나 군인이고 군인은 명령에 죽는거 아니겠냐? 그러니 나는 철수명령이 내려지면 철수하고 아니면 여기서 죽을 것이다."라고 대답하니 맥아더가 감동을 먹었다는 이야기</ref>
[[1960년대]] 미국은 그야말로 천지개벽했다.<ref>농담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인들의 선진화된 모습은 이런 대 변화를 경험했기에 등장한 것이다. 간단한 예로 1950년대에는 노예가 법적으로 존재했고, 흑인에 대한 인체실험도 국가적으로 행해졌었다.</ref> 이런 변화는 미국학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냉전의 책임이 미국의 잘못된 대외정책의 결과'''라 보는 관점이다. 이 들을 수정주의자라고 부른다.


맥아더가 한강선 시찰을 마치고 김홍일에게 언제까지 방어할 수 있는지 묻자, 김홍일 장군은 “적의 탱크가 도하 오는 것을 어떻게 저지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이를 위해서 미 공군이 한강철교를 완전히 파괴시켜주기를 요청했다. 한강철교가 파괴되어 적 탱크의 도하에 시일이 걸린다면 한강선에 있는 국군 2만 5천명으로 적 5만명을 10일 동안 이곳에 묶어둘 수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s>채병덕과 비교된다.</s> 이에 맥아더도 김홍일 장군의 말에 동의했다고 한다. 시흥사의 가장 큰 역할은 흩어진 장병들을 수습했다는 것에 있다. 만약 시흥사가 병력을 수습하여 혼성사단이라도 만들지 않았다면 이후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할 병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시흥사가 병력을 수습하면서도 동시에 북한군을 일주일간 한강선에 묶어두면서 한국군은 미군의 지원을 받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수정주의자들의 등장으로 인해 미국학계에서는 한국전쟁 논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정주의자들은 자료의 부족<ref>한국전쟁 관련 미국 공문서가 풀리는 1970년대 까지는 미국정부나 소련정부에서 공개한 자료에만 의존해야 했으니 전통주의자들에 비해 자료가 매우 부족했다.</ref>으로 전통주의자들에게 얻어터지기만 했다. 뭐 병신같은 주장도 있어서기도 했지만<ref>예를 들자면, 굽타의 경우 일명 "해주진공설"을 제시하였고, 콜코 부부는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이게 다 맥아더와 이승만이 전쟁을 야기했기 때문이다]]라 주장했다. 당연히 전통주의자들은 이것을 신나게 털었다.</ref>


한편 시흥사가 한강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할 쯤, 김포지역에도 북한군이 등장하였다. 제6사단은 한강 하류에서 도하하여 김포읍을 석권하고 계속 남하하고 있었다. 육군 지도부는 이미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고 한강선 방어에만 총력을 기하는데 힘든 시점이었기에 김포지역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김포읍을 빼앗기고 겨우겨우 부천으로 퇴각한 김포전투사령부는 소사읍사무소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대오를 정렬하고 있는 중에 사령관 계인주 대령이 행방불명되었음이 밝혀졌다. 이에 참모장인 최복수 중령이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미국 학계는 수정주의자가 새로운 해석을 내놓으면 전통주의자가 까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198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전통주의자들이 우세하였다. 그러다가 브루스 커밍스가 등장하면서 대세가 기울어지는데, 왜냐면 여기서 커밍스는 전쟁의 원인은 미국 탓도 소련 탓도 아닌 한국 탓!!!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6월 28일 야간 김포사부대가 소사로 집결하자 시흥사는 현지의 제3사단 참모장인 우병옥 중령을 새로이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김포비행장 탈환을 명령했다. 이는 북한군 저지 목적도 있었지만 행주에서 도하 중인 국군 제1사단의 철수로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많은 학자들이 수정주의 노선을 타게되어, 전통주의자들의 위세가 꺽였지만 그래도 그냥 살짝 꺽인거다. 굳이 수치로 표현하자면 7:3이었던 것이 한 5:5가 되었던 것이다.


6월 29일 새벽 김포비행장에 접근한 김포사는 북한군 기습을 위해 병력을 점검하던 중 총소리를 듣게되었다. 총소리는 행주나루터에 도하한 국군 제1사단 제18연대와 북한군의 접전 소리였다. 이 소리에 김포사는 즉각적으로 김포비행장을 공격했다. 그러나 화기의 차이로 인해서 김포사의 공격은 성공치 못했고, 전황이 안 좋아지자 최복수 중령<ref>최복수 중령은 구일본군 육군사관학교 58기로 33부대를 거친 경험이 있어 정보학교인 남산학교 건립과 발전 그리고 정보장교 육성에 큰 열정이 있었다. 또한 북한군과 맞서 죽음으로 적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때 나이 겨우 28살이었다. 묵념</ref> 이 기관총을 장착한 짚차를 몰고 활주로 돌진하여 옥쇄하였다.  
논쟁은 냉전이 끝났어도 이어지고 있고, 심지어 냉전이 끝난지 25년이 지난 지금(2015년)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결국 김포사는 공격을 멈추고 소사로 후퇴하였다. 김포사가 전열을 가다듬는 동안 국군 제1사단 제18연대는 차례대로 행주나루터로 도하하였다. 제18연대는 다른 연대와 다르게 건제를 유지하면서 철수하였다. 특히 도하도 제1대대, 제2대대, 제 3대대 건제 순으로 도하하면서 최대한 건제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도하 직후 행주나루터에서 적을 마주쳤음에도 적을 물리치면서 퇴각할 수 있었다.  
참고적으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를 하려고 한다면 <S>영어의 압박이 있지만</s>미국 자료를 참고해야한다. 그것도 필수적으로 해야된다. <s>위키러가 한국어로 발간된 논문으로만 참고문헌 작성했다가 교수한테 신나게 털려서 그런거 아니다.</s>


그런데 김포사 사령관인 우병옥 중령이 원미산에 올라가 권총으로 자살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지휘관의 부재로 김포사가 해체될 위기에 처하자 시흥사 김홍일 소장은 제18연대장 임충식 중령에게 그 지역부대를 통합 지휘토록 하였다. 임 중령은 제18연대를 중심으로 김포사 산하 부대를 장악해 나갔다. 임충식 중령은 김포비행장 이남에서 방어선을 형성하여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의 공세를 김포사 병력만으로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6월 30일 김홍일 소장은 김포사를 지원하기 위해서 제5사단 제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을 신임 김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제5사단 병력을 수습하여 김포지역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새로 투입된 병력만으로 김포를 방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김포비행장 탈환작전은 실패하였다.
====국내 한국전쟁 원인 연구에 대해서====


김포방면 방어작전은 매우 어려운 작전이었다. 한강선과 달리 전차를 막을 장애물이 없었고, 국군은 지휘체계나 건제가 엉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북한군을 저지한 김포사의 공헌은 매우 중요하다. 김포사 장병들이 목숨을 바쳐 지역을 방어했기에 한강선 방어막도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이후 김포사는 시흥사 산하로 편입되었다.
국내의 한국전쟁 원인 연구는 매우 상당히 늦게 시작되었다. 이는 분단의 상황이라는 환경에 기인한 것이다. 그래서 1980년대 이전에 학계에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국내에서 한국전쟁 원인의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80년]]대 말 김학준<ref>김학준. 『한국전쟁: 원인, 과정, 휴전, 영향』. 서울: 전영사. 2010.</ref><ref>책은 1980년대 낸 논문을 수정 보완 증보판이다.</ref>이 미국에서 연구된 “한국전쟁 원인”을 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시흥사는 한강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한 다음 7월 3일 철수하기 시작했다. 7월1일에 일본에 있던 미 스미스특무부대가 부산에 상륙했고, 이에 국군은 스미스부대가 대전에서 전개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수원이북에서 방어를 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따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수원북방에서 북한군을 지연시키기 위해 축차 방어진지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병력과 장비의 열세로 방어선을 지탱하기 어려웠고, 결국 7월 4일 하루만에 수원이남으로 후퇴해야 했다. 육군본부는 차량으로 수원에서 철수해 평택에 집결하였고, 시흥사는 서해안과 국도로 분산 남하해 오산에 집결하였다. 시흥사는 오산에 미 스미스특무부대를 만나 용기를 가졌고 물품을 보급받았다. 이렇게 오산에서 방어선을 형성하려고 준비하던 중에 미군 공군기가 국군의 철수차량에 폭격하여 귀중한 보급품을 상실하였다.<ref>현재와 달리 과거는 폭격은 조종사의 육안으로 통해 이루어졌다. 해전과 달리 육전의 경우 비슷해고 당연히 오폭이 많았다.</ref>
그러나 1980년대 한국사회는 1950년대 미국사회와 같이 이념의 대립이 하드코어해서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한강선 방어작전의 중요한 성과는 첫째, 앞에서 말했든 병력을 수습 재편했다는 것이다. 국군은 한강이북에서 대부분의 부대가 와해되어 분산 철수하였다. 이 분산된 병력을 수습하고 다시 재편은 국군이 제1군단을 편성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둘째, 이 작전을 통해 미군이 투입될 수 있는 시간을 벌었고, 이로인해 미 지상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과 공산을 확보하였다. 셋째. 국군이 북한군의 작전목표를 분쇄시켰다. 북한군은 서울에서 국군을 전멸시켜 이후 쉽게 전과확대<ref>군사용어로 적의 주력을 격퇴하고 후방의 빈 공백지를 점령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땅따먹기다.</ref>하려는 계획을 무마시켰다.
또 자료의 부족, 특히 북한의 문서고나 소련의 문서고가 봉쇄된 상태에서 도대체 왜 일어났는지 판단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1993년 옐친이 김영삼에게 한국전쟁 관련 구소련 문서를 넘겨준 것이다.<ref> 1993년 6월 25일 경향신문 1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62500329101008&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3-06-25&officeId=00032&pageNo=1&printNo=14794&publishType=00010]</ref>  


시흥사가 한강선 방어작전이 성공했던 요인으로 총 4가지가 꼽힌다.
당연히 한국 학계에서는 이제서야 저놈의 빨갱이(소련)의 음모가 속 시원하게 들어나겠구만이라 장담했었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옐친이 준 자료를 공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맺어<s>아 이 뭐병</s> 국내에서는 원자료를 보기 어려웠고, 오로지 국방부 발간 해석본을 참고해야하는 문제가 발생했다.<ref>국내에서 소련 공개 원문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그에 반해 우드로 윌슨센터에 가면 러시아 극비문서가 인터넷에 스캔본으로 잘 올라가져 있다.</ref><ref>이게 학문적 논문의 경우 원문에 의거 자신의 논리를 제기해야하기 때문에 해석본을 인용하는 경우 신뢰성이 떨어진다. 아 물론 이는 석박사 급 논문을 말한다.<s>그래서 한국전쟁 전문가가 적은 것일지도....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최소 3개국어는 해야되니....</s></ref>


# 방어작전에서 하천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였다. 한강 철교 북안에 대해 위협사격을 실시한다든지, 적의 도하예상지점에 병력을 배치하는 등 하천의 이점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도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를 하는 등불같은 존재들이 계신다.
# 미군 공중 전력의 효과적인 활용이었다. 미 공군기가 한강 이북에서 실시한 대규모 폭격은 북한군 전력에 큰 타격을 주었고, 한강 도하작전에 큰 시간이 걸리게 만들었다. 특히 미 공군은 북한군의 주간 도하 및 기동작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 김포사의 성공적인 측면 방어이다. 김포사 병력은 열세한 병력과 장비를 가지고도 북한군 제6사단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였다. 만약 이를 저지하지 못해 북한군 6사단이 영등포일대로 진출했으면 한강선의 국군은 고립된 채 분쇄당했을 것이다.
# 김홍일 소장의 탁월한 지휘능력과 시흥사 예하 장병들의 투절한 애국심이다. 김홍일 소장은 사령관에 임명됨과 동시에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병력을 조기에 수습하여 부대를 재편성하였고, 또 신속하고 적절하게 지휘관을 임명하여 전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였다. 동시에 국군 장병들의 희생정신은 가히 경의적이라고 평가된다.<ref>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228</ref> 국군장병들은 탄약과 장비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적을 저지하기 위해서 목숨바쳐 싸웠다. 제8연대의 경우 하루에도 수차례씩 여의도를 통해 영등포로 진출하려는 북한군 제4사단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물리쳤으며 노량진철교를 통해 적 전차가 도하하기 전까지 한번도 방어선이 돌파되지 않았다.


==국군의 재편성과 초기 지연작전==
양영조의 『남북한 군사정책과 한국전쟁,1945-1950』(2007), 정병준의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2006), 박명림의 『한국 1950: 전쟁과 평화』(2002)이 대표적인 한국전쟁 원인을 연구한 학문서적이다.


한강방어선이 붕괴한 이후 한국정부는 국군을 전면 재편하였다. 먼저 이승만은 6월 30일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을 해임하고 정일권 준장을 소장으로 진급시키고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이에 육군총참모장이 육군과 동시에 해군과 공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7월 8일 대전에서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를 제외한<s>설마 여기까지 밀리겠어?</s>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정일권은 계엄사령관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학계 내에서 한국전쟁 원인을 다루는 학자가 부족하여 자료나 신뢰성이 살짝 떨어진다. 예를 들어 본 "한국전쟁"에 대한 글도 수많은 위키러들 토론하면서 높은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토론을 하다보면 부족한 부분이 있는데 이를 상대편이 시정하는 경우도 있고, 그러다보니 글의 수준이 점차 성장하는 것이다.<s>이러다가 논문쓸 거 같다.</s>


이후 정일권은 전선부대를 재편성하였다. 먼저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1군단으로 재편하였다. 동시에 기존의 8개 사단을 편제를 5개 사단으로 재편하였다. 이 과정에서 편제가 건재한 제6사단과 8사단은 기존의 체제를 유지했고 나머지 혼성사단을 전면 재편하였다. 이를 통해 국군은 전쟁 직전 8개 사단 2개 직할연대에서 1개 군단 5개 사단 3개 독립연대로 편성되었다.
====한국전쟁의 원인 연구에 대한 평가====


{| class="wikitable"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분석은 이념과 신념 그리고 생각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예를 들어보자면 '''스탈린이 김일성의 전쟁요구를 49번이나 거부하였고, 전쟁 승인 때 마오쩌둥의 의견을 들었다는 사실이다.'''<ref>참고로 이것만 있지 회담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ref>
|- 육군 재편성 후 부대 건재(1950.7.5)
! 부대 !! 지휘관 !! 편성부대
|-
| 제1군단 || 김홍일 소장 || 수도 • 제1 • 제2 사단
|-
| 수도사단 || 이준식 준장->김석원 준장(7.7) || 제1 • 제8 • 제18연대
|-
| 제1사단 || 백선엽 대령 || 제 11 • 제12 • 제13연대
|-
| 제2사단 || 이한림 대령 || 제5 • 제16 • 제19 연대
|-
| 제6사단 || 김종오 대령 || 제2 • 제7 • 제19연대
|-
| 제8사단 || 이성가 대령 || 제10 • 제 21연대
|-
| 기갑연대 || 유흥수 대령 || 제1 • 제2 • 제3대대
|-
| 제23연대 || 김종원 중령 || 제1 • 제2 • 제3대대
|-
| 제17연대 || 김희준 중령 || 제1 • 제2 • 제3대대
|}
<ref>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257</ref>


이와 같은 육군본부의 사단재편성 명령은 7월 5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에 떨어졌다. 이에 시흥사는 평택으로 철수 및 방어진지 편성과 동시에 사단 재편을 이루었다. 사단을 재편하는 동안 김홍일 군단장은 작전참모에게 오산 북쪽 스미스부대가 있는 곳으로 파견 미군들이 2.36‘’ 로켓포로 북한군 T-34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지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미군의 2.36‘’인치 로켓포로도 북한군 T-34 전차를 파괴할 수 없었다.<ref>먼저 한국에 도착한 스미스특무부대는 북한군의 전력을 얕보았다. 자신들이 보유한 로켓포로 T-34전차를 파괴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s>T-34전차에 대한 악명이 높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s> 그러나 한국전쟁에 투입된 T-34는 개량형이었고, 과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찍어내던 질 나쁜 탱크가 아니었다. 그러니 로켓포가 안 먹히는 건 당연했다. <s>무슨 일본군 치하땅인 줄 아나</s> 결국 스미스특무부대는 경부국도방면으로 퇴각하여 국군과 함께 미24사단이 도착하기까지 시간을 버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다.</ref>
전통주의자는 이를 소련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김일성이 눈치없이 와서 한다고 하니 반려시킨 것이고, 이후 기회를 포착하자 김일성을 불러 전쟁을 승인하고 중국조차 끌어들인 것이라 보았다.<ref>대표적으로 김영호가 있다.</ref>  


한국이 지연작전을 펼치는 동안 유엔은 유엔군 창설을 결의한다.(7월 7일) 이에 최초의 유엔군이 창설된 것이다. 유엔군은 먼저 미국 대통령에게 유엔군사령관 임명에 대한 권한과 통제권을 부여하였다. 이에 미국은 당시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를 유엔군사령관으로 선임한다. 이러한 조치 속에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맥아더 장군에게 이양하는 조치를 직접 취했다. 이승만은 7월 15일 맥아더에게 보낸 개인 서신에서 ‘’‘전쟁 기간 동안 맥아더에게 한국의 육⦁해⦁공군에 대한 지휘권을 이양한다고 밝혔다.’‘’<ref>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284</ref>
수정주의자는 이를 소련은 전쟁의 의도가 없었는데 김일성이 땡깡 부려서 전쟁을 승인해 준 것이라 보았다.<ref>대표적으로 웨더스비가 있다.</reF>


이로써 육군은 초기 지연작전을 펼칠 수 있는 군사조직을 확보했고, 미국 및 유엔군의 지원이 확실화 되면서 국군의 목표도 명확히 설립되었다. 이후 국군은 미군과 협조하면서 최대한 북한군의 진군속도를 늦추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둘 중 누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왜냐 기록이 없다. 그냥 김일성이 왔는데 거부했다. 이런 정도이지 무슨 회담의 내용이 없다. 특히 스탈린과 마오쩌둥 간의 회담 내용은 공개되지도 않았다.


국군의 초기 지연작전은 경의적이었다고만 평가할 수 있다. 먼저 서울이 함락된 이후 흩어진 병력을 수습한 것도 기적이며, 동시에 철수와 계속되는 전투, 부족한 식량 속, 수면 부족 등 전투 피로도가 누적된 상황에 심지어 화기조차 부족한 상황에서도 북한군을 4일 이상 저지하는데 성공했다.<ref>7일이나 북한군이 서울에서 움직이지 않았던 3일을 제외한 수치이다.</ref> 특히 시흥사 전면은 한강이라는 천혜의 장애물이 있었으나 김포사는 평지에서 북한군 6사단과 맞서 죽음을 각오하면서 전투를 벌어야 했으며, 그 전투에서 적의 진출을 최대한 저지하여 한강선이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래서 스탈린이 처음에는 생각이 없다가 그래 한 번 해볼까? 이거일 수도 있고(전통주의 의견), 아니면 정말로 김일성이 땡깡부려서 스탈린이 귀찮아서 아 그래 전쟁 해!!! 라 한 거일 수도 있다. (수정주의 의견)


물론 국군의 이러한 방어전은 미군의 공군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점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미 공군은 국군의 부족한 화력을 메워주었다. 미 공군은 화포와 중장비를 서울에서 상실한 국군에게 단비나 마찬가지였다.<ref>물론 오인 폭격으로 인해서 국군의 군수물자를 날려버린다든가, 국군 지휘소를 폭격한다든지 등의 일이 있었지만 이 일로 미 공군의 역할과 공헌을 깎아 내릴 수 없을 정도로 초기 한국전에서 미 공군의 역할은 컸다.</ref>
'''결국 한국전쟁의 원인은 해석의 문제이고, 누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조|한국전쟁 초기 지연작전}}


==낙동강 전선==
}}
한국군은 있는 병력 없는 병력 쥐어짜내며 닥치는 대로 전선으로 보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소련군의 처절함이 느껴질 정도로, 후방에서 학도의용병들까지 모집해서 어린 학생들에게 몇 시간동안 기초훈련만 시키고 최소한의 무장만 준 채 전선에 투입했다.<ref>국방부의 공식 입장은 학도병 등의 모집에 있어 강압적 징병은 없고 모두 자원 입대이다. '''공식 입장'''일 뿐이지만.</ref> 미국도 일본에서 병력을 긁어내어 바로바로 투입했고, 본토의 예비병력을 투입시키기 시작하면서 낙동강 전선이 형성된다.


낙동강 전선에 있어 위기는 크게 세 차례 있었다. 첫번째는 [[다부동 전투]]로 1사단과 미군의 격렬한 저항, 그리고 왜관 일대에 대한 [[B-29]]의 융단폭격이 가해지면서 막아내었다. 두번째는 [[9월]] 초의 [[영천 전투]]로 [[유재흥]] 장군이 격전 끝에 북한군을 격퇴하였다. 또다른 위기로 통영 함락이 있었는데, 한국 해병대에 의한 [[통영 상륙작전]]으로 통영을 탈환하고 거제도로 가해지는 북한군의 위협을 차단하였다.
==전개 상황==
{{한국전쟁}}


북한군도 한미연합군을 바다 속으로 밀어버리기만 하면 전쟁이 끝난다는 것을 잘 알았다.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 더 이상 방어선으로 삼을 만한 지형도 없었다. 때문에 북한군도 후방의 모든 병력에 남한에서 징집한 병력까지 긁어모을 수 있는 병력을 모조리 총투입하여 공세를 강화했으나 결국 돌파구 형성에 실패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북한군의 전력은 약화되었고, 반면 미군은 병력과 물자가 빠르게 증강되어 갔다. 아울러 후방의 거점도시들과 보급거점이 맹폭격을 받으면서 전선지원이 원활하지 않아 공세한계점에 도달했고, 전선 부대도 맹공습으로 대부분의 중장비를 상실했다.<ref>대표적인 것이 T-34 전차다. T-34를 상대하기 위해 미군은 본토에서 重전차 [[M26 퍼싱]]을 급히 공수해왔으나 정작 전차전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북한군의 전차 대부분은 낙동강 전선에서 공습으로 파괴된다. 그리고 소련은 전쟁기간동안 '''추가적인 전차 지원을 하지 않았다.'''</ref>
==[[인천 상륙 작전]]==
==중국의 참전 그리고 [[1·4 후퇴]]==
==지리한 휴전협상==
==마침내 휴전 그리고==
==휴전 이후==
==전쟁의 영향==
==전쟁의 영향==
===부정적 영향===
{{본문|6·25 전쟁/영향}}
====수많은 인명피해====
전쟁이 으레 그렇듯이 6·25 전쟁 또한 한국 사회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수많은 영향을 남겼다.
당장 전투로만 유엔군과 한국군에서 18만명이 전사하였으며,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이 전사하였다. 이런 전투 외에 각종 학살과 폭격 등으로 발생한 민간인 사상자가 100만 단위에 육박하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낸 것. 이로 인한 전쟁과부와 고아의 발생은 덤이다.


====한국사회의 지독한 레드 컴플렉스====
<div align="center">
이 전쟁으로 인해 한국사회는 공산당이나 [[공산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떠는 사회가 되었다. 이후 독재정권에서 자신들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반공을 내세우며 반대파를 찍어누르는 구실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발목을 잡게 되는 원인이 된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면 '우리가 공산당에 맞서 싸운 민주주의 국가인데 뭔 소리냐! 우리를 전복시키려는거 보니 넌 빨갱이가 분명하다!'면서 무고한 시민 여럿 때려잡았다.
{| class="wikitable"
|-
|+ colspan="3" style="text-align: center;" | 한국전쟁이 남긴 영향
|-
! [[6·25 전쟁/영향#부정적인 영향|부정적인 영향]] !! [[6·25 전쟁/영향#긍정적인 영향|긍정적인 영향]]
|-
| [[6·25 전쟁/영향#수많은 인명피해|수많은 인명피해]]<br />[[6·25 전쟁/영향#지독한 사상 컴플렉스|지독한 사상 컴플렉스]] || [[6·25 전쟁/영향#남북 대결 패러다임의 변화|남북 대결 패러다임의 변화]]<br />[[6·25 전쟁/영향#완전한 계급제 철폐|완전한 계급제 철폐]]<br />[[6·25 전쟁/영향#미국과의 유대감 강화|미국과의 유대감 강화]]<br />[[6·25 전쟁/영향#몇몇 국가들의 부흥|몇몇 국가들의 부흥]]
|}
</div>


===긍정적 영향===
== UN군 ==
끔찍하기 이루말할 수 없는 전쟁으로 기왕이면 안일어나는 것이 더 좋았겠지만,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전쟁이 몰고온 긍정적인 여파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국제연합([[UN]])이 정식창설 된 지 2년여만에 전쟁을 겪었고, 이 전쟁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UN 회원국의 뜻을 모아 [[UN군]]을 창설, 한국에 파병했다. [[UN 평화유지군]]이 아닌 UN군으로서 침략자와 교전을 목적으로 한, 즉 UN이 두명의 전쟁 당사자들 중 어느 한 쪽의 편만을 일방적으로 들어준 경우는 [[2015년]] 현재까지도 때가 유일하다.


====남북 대결 패러다임의 변화====
이는 [[국제연맹]](LN)이 무력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막지 못하고 침략자에 의한 주변국 정복이 거듭된 3~40년대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국제사회의 교훈이 가져온 결과였다. 독일의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이나 일본의 중국 침공,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에 국제연맹과 국제사회 모두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결과 사상 최악의 대전쟁을 치뤘던 만큼, 침략자는 일찌감치 응징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퍼져 있었던 것이다.
사실 대한민국과 북한에는 당시 여러 호전론자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었다. 상술한 박헌영도 중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통해 서로를 흡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리낌없이 하였고, 국지전이 빈번했던 것도 이런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전쟁을 겪고 난 후 이러한 호전론자들의 상당수가 사라졌고, 전쟁은 나쁜것이라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강력하게 퍼지게 되어 남은 힘 조차 잃게 되었다. 덕분에 비록 '휴전' 관계임에도 오늘날까지 양국은 전쟁 한번 하지 않고 유지되게 되었다.
당장 [[에티오피아]]만 하더라도 이탈리아의 침략때 국제연맹을 통해 호소했지만 무시당하고 정복당한 역사가 있고, 독립을 회복한 지 10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아프리카의 빈국 에티오피아가 한국전에 참전한 것은 강자에 의한 침략이 되풀이되는 일을 막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같은 이유로 유럽권 국가들의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더불어 전쟁이 끝나고 그것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그 과정을 서로에게 과시하는 식의 새로운 대결구도가 형성, 이후 양국이 서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무의미한 손실도 매우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양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나마 대한민국은 그것을 잘 이어나갔지만 북한은 중간에 침몰하여 아직까지 밑바닥을 떠도는 중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리스]]나 [[터키]]는 공산주의 세력과의 내전을 끝내고 국가재건 및 소련과의 대치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가 필요했기에 참전한 경우이다. [[태국]]은 아예 2차대전당시 일본의 동맹국, 즉 '''추축국'''이었다. 워낙 듣보잡이라 미국이 신경도 쓰지 않은 상대였고 태국도 필사의 외교전으로 대미 선전포고를 '''취소'''하는 식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복원했지만 미국 및 영국, 프랑스로부터 추축국 낙인이 찍힌건 똑같았고 이를 타개하고 미국의 동맹국이 되겠다는 제스처로서 참전한 것이다.


====완전한 계급제 철폐====
이유가 어떻든, 모두들 위기에 처한 한국을 도와주러 온 나라들이다. 설사 정치적 이유든 금전적 이유였든 경제적 이유였든 어떤 이유에 따른 파병이더라도 그건 그 국가 정부의 입장이지, 파병된 사람들은 이역만리 타향땅에서 아무런 반대급부도 바라지 않고 피를 흘리며 싸웠다. 감사히 여기자.
사실 한반도는 상술했듯 자주적인 독립이 아닌 외세에 의한 독립을 거두었기에 사회 구조가 그대로였다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즉 일단 법으로는 모든 국민이 평등했지만, 앞집 김씨는 양반 출신 뒷집 정씨는 노비 출신 등 어디에 누가 살고 있는지는 그대로 이어졌고 이 때문에 제대로 된 '평등'이 이루어지진 못하였다.
* UN군 참전 16개국
** 북아메리카 (2)
*** {{깃발|미국}} [[미국]] - UN군의 중심
*** {{깃발|캐나다}} [[캐나다]] - 영국과 함께 ANZAC군단을 형성했다.
** 남아메리카 (1)
*** {{깃발|콜롬비아}} [[콜롬비아]]
** 유럽 (7)
*** {{깃발|영국}} [[영국]] -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남아프리카와 함께 ANZAC군단을 형성하고 해군도 파병했다.
*** {{깃발|프랑스}} [[프랑스]]
*** {{깃발|네덜란드}} [[네덜란드]]
*** {{깃발|벨기에}} [[벨기에]]
*** {{깃발|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 - 유럽의 대표적인 소국임에도 참전, 벨기에군과 같이 대대를 구성했다.
*** {{깃발|그리스}} [[그리스]]
*** {{깃발|터키}} [[터키]]
** 아프리카 (2)
*** {{깃발|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 - 어떠한 이득도 원하지 않고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황실 친위대 3,800명을 파병시켰다. 이들은 수많은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 {{깃발|남아프리카 공화국}} [[남아프리카공화국]]
** 아시아 (2)
*** {{깃발|필리핀}} [[필리핀]]
*** {{깃발|태국}} [[태국]]
** 오세아니아 (2)
*** {{깃발|호주}} [[호주]]
*** {{깃발|뉴질랜드}} [[뉴질랜드]]


하지만 전쟁으로 원래 살던 땅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전쟁의 포화를 피해 살아남기 위해 이리저리 피난을 가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서로가 어디의 누구였는지는 잊혀지고 말았다. 그 와중엔 죽어서 아예 잊혀진 사람도 있고, 살아는 남았으나 기반이 파괴되어 전후에도 돌아가지 못한 사람도 있는 등 민족이 제대로 뒤엉켜버렸다.
직접적으로 전투병을 참가시킨 국가만 위 16개국이고, 의료진을 보내거나 구호물자 등으로 지원한 나라는 더 많다. 놀랍게도 일본도 구호물자를 보내주었던 국가 중 하나에 속해있다. 물론 이는 당시 미국의 지시로 중간기지 역할을 할당받아 의무로 지원해준 케이스에 더 가깝지만.<ref>일본에 대해서 카더라성 일화로, 일본이 '병력 지원해줄까?'라고 하니 이승만이 '''필요없으니 꺼져'''쯤 되는 반응을 보였다는 소리도 있다. 하지만 상술했듯 당시 일본은 평화헌법 때문에 군사병력이 하나도 없었던 상황이니 말 그대로 카더라일 가능성이 높다.</ref>


게다가 이후 사회기반의 리셋으로 하루하루 끼니 걱정 하기도 모자랄 판국이 되어버린 탓에 먹을것을 잘 구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대접받는 사회가 되었고 이런 판국에 양반이니 노비이니 하는 출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모두의 출신성분은 서서히 잊혀졌고 결국 비참하게나마 온 국민의 평등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대중문화 속의 6·25 전쟁==
그 [[미국]]이 패하지 않은 전쟁임에도 의외로 미국이 분명하게 패한 [[소말리아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대중매체에서 다루어지는 빈도는 매우 적다. 애초에 미국 내에서 이 전쟁을 일컫는 별칭 중 하나가 '잊힌 전쟁(the Forgotten War)'<ref>미국에서 Korean War가 Forgotten War인 이유는 학계에서 특히 냉전분야에서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엄청난 이슈인데 비해 일반 대중들의 인식은 없다는 의미가 더 크다.</ref>이다. 사실 이는 확실히 이겼거나 졌다는 식으로 딱 끝을 본 게 아니라 '휴전'이라는 굉장히 애매한 수준으로 마무리 지어진 탓도 있고, 또 이 전쟁으로 미국이 딱히 사회적으로 가지게 된 변화 또한 없기 때문이다. 가령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미국은 전에 없는 호황을 누린 반면, 베트남 전쟁이나 소말리아 전쟁 등으로 인해 미국은 반정부, 자유주의 성향이 지독히 강해지는 등 괄목할만한 변화가 여럿 있었지만 한국전쟁은 그런 거 없었다.


전쟁 덕분에 평등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은 바로 이웃 국가인 일본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일본은 한국과는 달리 근대 와서 심각한 내전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누구는 화족 출신이네, 누구는 [[부라쿠민]] 출신이네 하는 것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지금까지도 민족차별이 빈번한 국가로 남아 있다.
더불어 당시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승리로 자신감이 팽배해있던 상황이였으며 한국전쟁은 바로 그 후에 치룬 전쟁이니 당시 미국인들의 입장에서 따지고 보면 '당연히 이기는 전쟁을 당연히 이긴 것이다'라는 정도의 감상밖에 안 드는게 사실이다. 한번 대회에서 [[금메달]]을 얻은 선수가 다시 금메달을 얻으면 그 때 부터는 오히려 금메달을 따는게 당연해서 감흥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 셈.


물론 그 이후에 평등화 된 사회를 지켜낸 것은 대한민국의 몫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은 신분제가 다시 등장했으니까.
미국에서 한국전쟁을 중심소재로 한 대중문화 작품으로는 희대의 괴작 《[[오! 인천]]》 뿐인데, 이조차 제작을 [[통일교]]에서 한거다.


==== 미국과의 유대감 강화====
한국 내에서는 당연히 다루는 매체가 매우 많다. 다큐멘터리, 영화, 오락 등 다양한 작품들이 이 전쟁을 소재로 만들어진다. 참전자들을 인터뷰해거나 초빙하여 행사를 갖는 등 여러 행사도 많이 한다. 하지만 한국 외의 지역에서는 글쎄올시다 라고 생각하는데 한국 전쟁에 관한 엄청난 분량의 다큐멘터리가 매년 만들어지고 있다.
전쟁을 통해 미군과 국군이 함께 싸우면서 양국의 유대감이 강화되었다는 점 또한 이점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국군은 미군과 함께 싸움으로서 미군의 최신식 장비와 그에 걸맞는 교리들을 다수 습득하여 전력이 강화되었다. 더불어 바로 실전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근 백여년간 전쟁다운 전쟁 한번 없던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교전 경험을 갖게 되어 실력 또한 향상되었다.
정확히는 한국인들이 한국전쟁에 대한 관심 자체가 적을 뿐이다. 슬프지만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국가는 북한이지 남한이 아니다. 어딜 가나 북한, 김정일은 알지만 남한이라고 이야기하면 "그게 어디에 있는 나라?"라는 답이 돌아오기 일수다. [[한류]]로 인해서 영미권의 남한에 대한 인식은 높아졌지만 그래도 매일 뉴스에 나오는 북한에 비하면야……. 당연히 전세계적으로 높은 인지도를 지닌 북한에 대해서 다양한 다큐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영미권이나 서구권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구소련권이야 같은 소련권이니 당연한 것이지만 인도나 아랍에서도 남한은 모르지만 북한은 아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한국전쟁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다큐멘터리 영상|이렇게나 많이 있다.]] 당연히 단순히 유투브에서만 검색한 것이 이정도이다.  <ref>사실 국내에서도 한국전쟁에 대한 임팩트가 강한 것도 아니다. 뭐 우리나라가 미국처럼 참전용사들 대접해 주는 것도 아니고, 6.25 참전용사라는 명칭 자체가 박정희 정권이던 [[1961년]]에서야 등장했으니…… 지금의 한국전쟁에 대한 이미지가 있는 것도 [[1961년]] 이후 교육의 힘이었다. 그 이전에는 어떠한 지원도 없었다. </ref>


이러한 전쟁의 여파를 거치면서 한국은 미국에게 있어 종전의 '일본을 처리하면서 떠안은 부산물'이라는 천덕꾸러기 취급에서 벗어나 함께 싸운 전우라는 정신적 유대감에 더불어 실제로 미국식 사회제도나 경제제도가 잘 도입되어 다른 분야에서도 미국과의 유대감이 깊어졌다. 이러한 유대감은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지금도 한국과 미국은 서로 강력한 우방국 중 하나이다.
===6·25 전쟁을 소재로 다룬 작품===


다만 한국과 미국이 강력한 우방국이라는 거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미국이 우리 편일거라고 착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도 결국 이익을 생각해서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국가이며, 이는 한국군이 하푼을 도입하려고 했을때 일본측의 로비를 받은 미국에서 하푼의 판매를 거절했었던 사실이나 M60 패튼을 대체하는 신형 전차의 도입 시도를 영 꺼림직하게 봤던 일 등에서 잘 드러난다. 따라서 미국이 한국의 우방국인 것은 맞지만, 국제 정세에 따라서는 태도가 달라지지 말라는 법이 없으므로 맹신이 아닌 적절한 외교를 통해 우방국으로서의 관계를 튼튼히 유지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 소설 ====
* [[여명의 눈동자]]
* [[태백산맥 (소설)]]


== 기타 ==
==== 만화 ====
=== UN군 ===
* [[바우트-원 (만화)]]
국제연합([[UN]])이 정식창설된지 2년여만에 전쟁을 겪었고, 이 전쟁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UN 회원국의 뜻을 모아 [[UN군]]을 창설, 한국에 파병했다. [[UN 평화유지군]]이 아닌 UN군으로서 침략자와 교전을 목적으로 한 경우는 [[2015년]] 현재까지도 이 때가 유일하다.
* [[인천상륙작전 (만화)]]


이는 [[국제연맹]](LN)이 무력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막지 못하고 침략자에 의한 주변국 정복이 거듭된 3~40년대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국제사회의 교훈이 가져온 결과였다. 독일의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이나 일본의 중국 침공,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에 국제연맹과 국제사회 모두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그 결과 사상 최악의 대전쟁을 치뤘던 만큼, 침략자는 일찌감치 응징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퍼져 있었던 것이다.
==== 영상물 ====
* [[고지전]]
* [[로드 넘버 원]] : MBC 한국 드라마다. [[소지섭]] 주연으로 [[최수종]] 전우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 [[여명의 눈동자#드라마|여명의 눈동자]]
* [[오! 인천]] <del>영화사 사상 가장 부끄러운 작품</del>
* [[인천상륙작전 (영화)]]
* [[장진호]]
* [[전송가]]
* [[태극기 휘날리며]]
* [[포화 속으로]]
* [[원한의 도곡리 다리]] : 미국에서 만든 영화로 정전 직후인 1954년에 개봉된 영화이다.
* [[국제시장 (영화)]] : 한국 전쟁 중에 일어난 흥남 철수가 초반 중요 장면으로 나오며, 부산으로 이주한 실향민 가족 영화이다.
* [[전우]] : KBS 한국 드라마다. 총 3편이 있다.
:* 1975년 작: [[나시찬]] 주연
:* 1983년 작: [[강민호]] 주연
:* 2010년 작: [[최수종]] 주연


당장 [[에티오피아]]만 하더라도 이탈리아의 침략때 국제연맹을 통해 호소했지만 무시당하고 정복당한 역사가 있고, 독립을 회복한지 10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아프리카의 빈국 에티오피아가 한국전에 참전한 것은 강자에 의한 침략이 되풀이되는 일을 막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같은 이유로 유럽권 국가들의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다큐멘터리 영상====
{{유튜브|t44SbOyjEUM}}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리스]]나 [[터키]]는 공산주의 세력과의 내전을 끝내고 국가재건 및 소련과의 대치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가 필요했기에 참전한 경우이다. [[태국]]은 아예 2차대전당시 일본의 동맹국, 즉 '''추축국'''이었다. 워낙 듣보잡이라 미국이 신경도 쓰지 않은 상대였고 태국도 필사의 외교전으로 대미 선전포고를 '''취소'''하는 식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복원했지만 미국 및 영국, 프랑스로부터 추축국 낙인이 찍힌건 똑같았고 이를 타개하고 미국의 동맹국이 되겠다는 제스처로서 참전한 것이다.
{{유튜브|TJOXI0e7zGo}}


이유가 어떻든, 모두들 위기에 처한 한국을 도와주러 온 나라들이다. 설사 정치적 이유에 따른 파병이더라도 그건 그 국가 정부의 입장이지, 파병된 사람들은 이역만리 타향땅에서 아무런 반대급부도 바라지 않고 피를 흘리며 싸웠다. 감사히 여기자.
{{유튜브|9BtUU7MtU_E}}


* UN군 참전 16개국
==[[전쟁범죄]]==
** 북아메리카 (2)
여느 전쟁과 마찬가지로 이 6·25전쟁기간에도 무수히 많은 전쟁범죄가 저질러졌다.
*** [[미국]] - UN군의 중심
*** [[캐나다]] - 영국과 함께 ANZAC군단을 형성했다.
** 남아메리카 (1)
*** [[콜롬비아]]
** 유럽 (7)
*** [[영국]] -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남아프리카와 함께 ANZAC군단을 형성하고 해군도 파병했다.
*** [[프랑스]]
*** [[네덜란드]]
*** [[벨기에]]
*** [[룩셈부르크]] - 유럽의 대표적인 소국임에도 참전, 벨기에군과 같이 대대를 구성했다.
*** [[그리스]]
*** [[터키]]
** 아프리카 (2)
*** [[에티오피아]]
*** [[남아프리카 공화국]]
** 아시아 (2)
*** [[필리핀]]
*** [[태국]]
** 오세아니아 (2)
*** [[오스트레일리아]]
*** [[뉴질랜드]]


직접적으로 전투병을 참가시킨 국가만 위 16개국이고, 의료진을 보내거나 구호물자 등으로 지원한 나라는 더 많다. 놀랍게도 일본도 구호물자를 보내주었던 국가 중 하나에 속해있다. <ref>일본에 대해서 카더라성 일화로,일본이 '병력 지원해줄까?'라고 하니 이승만이 '''필요없으니 꺼져'''쯤 되는 반응을 보였다는 소리도 있다. </ref>
===UN군(한국군 포함)에 의한 전쟁범죄===
이 경우는 아무래도 가해자가 한국(국군, 경찰, 반공 단체 등) 경우가 제일 많고 가장 대규모 전력을 투입한 미국에 의한 피해도 제법 있었다. 특히 한국전쟁 초창기 한국군의 질적인 문제로 인하여 그 정도가 심각했는데<ref>전쟁 초기에 그나마 훈련된 인원을 싹 날려먹고 마구잡이로 징집해서 제대로 훈련도 안된 인원들을 일단 숫자라도 채우자는 식으로 배치했으니 병력의 질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ref> 미국 다음으로 많은 전력을 투입한 영국이 한국측의 전쟁범죄 문제에 대해서 ‘이들의 잔혹함은 공산주의자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나마 한국측이 학살을 하려는 것을 다른 UN군이 제지하여 목숨을 건진 운좋은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 이런 학살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명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학살 대상자와 우익 단체를 마구 징집해서 전선으로 보내면서 끝나게 되었다는 웃픈 이야기가 있다.
*[[강화 양민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
*[[국민방위군사건]]
*[[노근리 학살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섯알오름|섯알오름 학살사건]](제주 예비검속자 학살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


==관련 작품==
===북한과 공산군에 의한 전쟁범죄===
* [[고지전]]
초창기 전쟁범죄는 당연히 북한군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중반 이후로는 북한군 전력 자체가 소멸하다시피 해서 거의 사라지고 중공군에 의한 범죄가 많아지게 된다. 중공군의 경우 북한군에 비하면 덜 악랄했지만 포로들을 대상으로 제대로 된 식량 배급 없이 장거리 행군을 시킨다거나, 심심하다는 이유로 쏴 죽인다거나, 부상당한 포로를 태워죽이는 등 북한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덜 악랄했을 뿐 각종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그나마 자정작용이라도 했던 UN군에 비해서 이쪽은 그런것도 없었다. 북한군의 경우 개전 초기 24사단 미군 24사단 병력<ref>[[사단장]]: [[소장]] [[윌리엄 딘]]</ref>들을 포로로 잡았는데 자기들보다 덩치가 커서 관리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손을 뒤로 묶고 총살 시켰다.[https://ko.wikipedia.org/wiki/6.25_%EC%A0%84%EC%9F%81#/media/%ED%8C%8C%EC%9D%BC:Americanexecuted1950korea.jpg #]
* [[바우트-원 (만화)]]
*'''이 전쟁 그 자체.''' 기습적 남침으로 전쟁을 시작한 것 자체가 평화에 관한 죄에 해당하며 당연히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수뇌부가 그 죄를 저지른 전범이 된다.
* [[여명의 눈동자]]
*[[인민재판]]
* [[오! 인천]]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학살사건]]
* [[인천상륙작전 (웹툰)]]
*[[함흥 학살사건]]
* [[장진호]]
* [[전송가]]
* [[태극기 휘날리며]]
* [[태백산맥(소설)]]
* [[포화속으로]]


==같이 보기==
==트리비아==
[[센추리언(전차)]]
대부분의 큰 사건이 그러하듯 여러 음모론이 끼어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남침(남쪽이 침공 당함)이 아니라 북침(북쪽이 침공 당함)했다는 주장,<ref>참고로 이건 '침(侵)'이라는 단어의 뜻을 헷갈려서 오해하는 경우도 좀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즉 남침을 '남쪽이 침공함', 북침을 '북쪽이 침공함'으로 헷갈리는 경우가 이런 경우이다. 참고로 개그콘서트 시청자 의견 코너 [[2014년]] [[11월 9일]]자 방송에서는 이걸 똥침에 빗대어 표현했는데 정리하자면 '내 손이 너의 [[똥꼬]]를 침공하면 그게 손침이냐 똥침이냐'는 내용이다(...). 좀 웃기지만 말은 맞긴 맞다. 점잖은 설명으로 하자면 '침범(侵犯, 침을 범하다 = 남의 영역에 멋대로 들어가는 일을 하다)'이나 '침략(侵掠, 침하여 약탈하다)'이라는 단어들로 연상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ref>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 등이 있다. 문제는 이 대부분의 주장들이 결과적으로는 북한은 착하게 가만히 있었는데 이용당한 것이라는 종북적 주장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중매체==
한국전쟁에 대한 음모론은 많다. 대표적으로 미국 언론인 스톤<ref>Stone, I. F. 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52.</ref>이 있다. [[1952년]]에 스톤은 한국전쟁이 리승만과 맥아더의 합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맥아더가 대통령이 되려고 전쟁을 유도했다고 말한다. <del>사실 [[일본|옆 나라]]에서 [[쇼군]]이였던 적은 있긴 했다</del>
그 [[미국]]이 패하지 않은 전쟁임에도 의외로 미국이 분명하게 패한 소말리아전이나 베트남전과는 달리 대중매체에서 다루어지는 빈도는 매우 적다. 애초에 미국 내에서 이 전쟁을 일컫는 별칭 중 하나가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ref>미국에서 Korean War가 Forgotten War인 이유는 학계에서 특히 냉전분야에서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엄청난 이슈인데 비해 일반 대중들의 인식은 없다는 의미가 더 크다.</ref>
이다. 사실 이는 '휴전'이라는 굉장히 애매한 수준으로 마무리 지어진 탓도 있고 또 이 전쟁으로 미국이 딱히 사회적으로 가지게 된 변화 또한 없기 때문이다. 가령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미국은 전에 없는 호황을 누린 반면, 베트남전이나 소말리아전 등으로 인해 미국은 반정부, 자유주의 성향이 지독히 강해지는 등 괄목할만한 변화가 여럿 있었지만 한국전쟁은 그런 거 없었다. 미국에서 한국전쟁을 중심소재로 한 대중문화작품으로는 희대의 괴작 [[오! 인천]]뿐인데, 이조차 제작을 [[통일교]]에서 한거다.


한국 내에서는 당연히 다루는 매체가 매우 많다. 다큐멘터리, 영화, 오락 등 다양한 작품들이 이 전쟁을 소재로 만들어진다. 참전자들을 인터뷰해거나 초빙하여 행사를 갖는 등 여러 행사도 많이 한다. 하지만 한국 외의 지역에서는 글쎄올시다...<ref>사실 국내에서도 한국전쟁에 대한 임팩트가 강한 것도 아니다. 뭐 우리나라가 미국처럼 참전용사들 대접해 주는 것도 아니고, 6.25 참전용사라는 명칭자체가 박정희정권이던 [[1961년]]에서야 등장했으니....지금의 한국전쟁에 대한 이미지가 있는 것도 [[1961년]] 이후 교육의 힘이었다. 그 이전에는 어떠한 지원도 없었다. </ref>
참고로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른다. 북한식으로 해설하면 '우리 민족의 남측 영토에 미제놈이 쳐들어와 일제놈들처럼 정복해버리고, 추종세력을 키워나가는 꼴을 도저히 두고 볼 수만은 없어, 그런 남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김일성 동지가 해방전쟁을 일으켰다.'라는 논리이다. <s>뭐야, 그럼 남침 맞잖아.</s> 그리고 1953년 정전협정을 '미제놈들의 야망을 굴복시키어 승리했다'고 [[정신승리]]를 하고 <s>자위</s>자부하고 있다.


==기타==
공교롭게도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과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다. 북한군이 38선을 넘어가면서 대한민국을 침공하던 그 시각 브라질에서는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을 4-0으로 이기고 있었다.
대부분의 큰 사건이 그러하듯 여러 음모론이 끼어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남침(남쪽이 침공 당함)이 아니라 북침(북쪽이 침공 당함)했다는 주장,<ref>참고로 이건 단어의 뜻을 헷갈려서 오해하는 경우도 좀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즉 남침을 '남쪽이 침공함', 북침을 '북쪽이 침공함'으로 헷갈리는 경우가 이런 경우이다. 참고로 개그콘서트 시청자 의견 코너 [[2014년]] [[11월 9일]]자 방송에서는 이걸 똥침에 빗대어 표현했는데 정리하자면 '내 손이 너의 [[똥꼬]]를 침공하면 그게 손침이냐 똥침이냐'는 내용이다(...).</ref>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 등이 있다. 문제는 이 대부분의 주장들이 결과적으로는 북한은 착하게 가만히 있었는데 이용당한 것이라는 종북적 주장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음모론은 많다. 대표적으로 처음 제시한 사람은 미국 언론인 스톤<ref>Stone, I. F. 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52.</ref>이다. [[1952년]]에 스톤은 한국전쟁이 리승만과 맥아더의 합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맥아더가 대통령이 되려고 전쟁을 유도했다고 말한다.  
==참고문헌==
 
*강석승. “‘6.25전쟁’의 발발원인에 관한 소고.” 『남북문화예술연구』 8호. 2011.
그리고 그 다음으로 콜코니 브루스 커밍스니 모두 남한이 먼저 침공했다고 주장했다.
*김진웅. “한국전쟁의 국내적 요인: 학설사적 접근.” 『환태평양연구』 vol. 3. 1990.
*김진웅.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최근의 해석.” 『역사교육논집』 26집. 2001.
*김영호. “한국전쟁 원인의 국제정치적 재해석: 스탈린의 롤백이론.” 『한국정치학회보』 31집. 3호. 1997.
*김영호. “미국의 6.25전쟁 연구 동향.” 『군사』 55호. 2005.
*김학준. 『한국전쟁: 원인, 과정, 휴전, 영향』. 서울: 전영사. 2010.
*글랜 D. 페이지 지음. 한배호 옮김. 『미국의 한국참전결정: 정책결정이론에 의한 사례연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획. 이상빈 옮김. 『르몽드 20세기사』. 휴머니스트. 2014.
*박명림.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서울: 나남출판. 2002.
*박광득. “제1장 6.25전쟁의 기원과 원인에 관한 연구.” 『통일전략』. 10권. 1호. 2010.
*베른트 슈퇴버 지음. 최승완 옮김. 『냉전이란 무엇인가: 극단의 시대 1945-1991』. 서울: 역사비평사. 2008.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자동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서울: 일월서각, 1997.
*정병준.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파주: 돌베게, 2006.
*손경고. “최근 한국전쟁 연구동향: 2005년 이후 연구를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연구』. 56집. 봄호. 2011.
*이완범. “한국전쟁 발발원인에 대한 유기적 해석: 김일성의 국제적 역학관계변화 편승과 스탈린의 동의.” 『국제정치논총』. 39집. 1호. 1999.
*이완범. 『한국전쟁: 국제전적 조망』. 백산서당. 2000.
*이완범. “한국전쟁의 국제적 기원-세계적 냉전의 동북아 침투.” 한국전쟁연구회 편. 『탈냉전시대 한국전쟁의 재조명』.  백산서당. 2000.
*이완범. “한국 국내의 6.25전쟁 연구 동향.” 『군사』. 55호. 2005.
*토니 주트 지음. 조행복 옮김. 『포스트워 1945-2005 1권』. 서울: 플래닛. 2008.
*황지환. “한반도 분단과 한국전쟁의 국제정치이론적 의미: 현상타파/현상유지 국가 논의의 재조명.” 『국제정치논총』. 52집. 3호. 2012.
*한국전략문제연구소. “Korean War Studies in the United States: Historiographical Review and Current Views.” FIFTY YEARS AFTER THE KOREAN WAR: Form Cold-War Confrontation to peaceful Coexistence. 2000. pp. 31-54.
*Chaffee, Wilbur. “Two Hypotheses of Sino-Soviet Relation as Concerns the Instigation of the Korean War.” Journal of Korean Affairs, Vol. 4. No 3/4 1976/1977.
*Cumings, Bruce. “The Cooporate State in North Korea.” Hagen Koo ed., State and Society in Comtemporary. Cornell University Press. 1993.
*Dallin, David J. Soviet Foreign Policy After Stalin. Philadelphia: J. B. Lippincott, 1961.
*Flemming, D. F. The Cold War and its Origins. Vol. II, 1950-1960. Garden City: Doubleday. 1961.
*Gaddis, John Lewis. We Now Know: Rethinking Cold War Histor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Garthoff, Raymond L. Soviet Strategy in the Nuclear Age. New York: Praeger Publishers, 1965.
*Gupta, Karunakar. “How did the Korean War begin?” China Quarterly. No. 52.1972; China Quarterly. No. 54.
*Halliday, Jon. “The Korean War: Some Notes on Evidence and Solidarity.” Bulletin of Concerned Asian Scholars, vol. 3. No. 3. July 1979.
*Heinzig, Dieter. “Stalin, Mao, kim and Korean War Origins, 1950: A Russian Documentary Discrepancy.” Cold War Intervention History Project Electronic Bulletin 8-9. Winter. 1996/1997.
*Kennan, George. Memoirs, 1950-1963. New York: Pantheon. 1972.
*Kennan, George. “Long Telegram.” 1946. [https://www.trumanlibrary.org/whistlestop/study_collections/coldwar/documents/pdf/6-6.pdf.] (Accessed 2015. 6. 9.)
*Kolko, Joyce and Gabriel. The Limits of Power: The World and United States Foreign Policy, 1945-1954. Happer & Row. 1972.
*Rees, David. Korea: The Limited War. New Delhi: Natraj Pub. 1978.
*Stueck, William Jr. “Cold War Revisionism and the Origin of the Korea Conflict: The Kolko Thesis.” Pacific Historical Review. vol. 42. November 1973.
*Stueck, William Jr. “The Korean War.” Leffler, Melvyn P. edit.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Cold War. Vol. I. 2010.
*Teodori, Massimo, ed. New Left. NY: The Bobbs-Merrill Co. 1969.
*Ulam, Adam B. Expansion and Coexistence: The History of Soviet Foreign policy, 1917-1967. New York: Praeger Publishers, 1968.
*US National Security Council. “A Report to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NSC 68.” 1950.  [http://www.trumanlibrary.org/whistlestop/study_collections/coldwar/documents/pdf/10-1.pdf.] (Accessed 2015. 6. 9.)
*Weathersby, Kathryn.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New Evidence from Russian Archives.” 1993. [http://www.wilsoncenter.org/sites/default/files/ACFB76.pdf.] (Accessed 2015. 6. 9.)
*Wolfe, Thomas W. Soviet Power and Europe, 1945-1970. Baltimore: John Hopkis University Press, 1970.
*William A. William. The Tragedy of American Diplomacy. W. W. Norton & Company. 2009.


{{각주}}
{{각주}}
 
[[분류:6·25 전쟁| ]]
[[분류:전쟁]]
[[분류:1950년 분쟁]]

2024년 4월 11일 (목) 18:37 기준 최신판

이 문서는 리브레 위키 사용자들의 추천으로 좋은 글로 인증된 문서입니다!
Ledibug-Labin-PinkTerrorBird-Featured.png
6·25 전쟁
Korean War Montage 2.png
군사 충돌 정보
냉전
날짜 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7일[1]
위치 한반도
결과 정전 후 대치상태
DMZ 형성
교전단체
북한
중국 중공[2]
소련[3]
대한민국
UN
북한 김일성
중국 마오쩌둥
소련 이오시프 스탈린
대한민국 이승만
미국 더글라스 맥아더
미국 매슈 리지웨이
미국 마크 웨인 클라크
병력:
1,636,000 명 이상
병력:
1,719,579 명
손실:
사망 398,000~926,000 명
부상 686,500 명
실종 145,000 명 이상
손실:
사망 175,801 명
부상 554,202 명
실종 28,445 명
포로 14,160 명
민간피해
200백만~300백만 명 추정

6·25 전쟁1950년 6월 25일, 북괴 북한의 선전포고 없는 기습남침으로 발발한 전쟁으로, 1953년 7월 27일 정전 상태로 지금까지 이어졌다. 한국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아직까지 정전 상태라는 이유 때문에 특히 군 관련 기관에서는 이 전쟁을 가리켜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데 확실히 '종전(=평화협정 체결)'한 건 아니니 틀린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쟁 중인 것도 아니다. 만일 정말로 휴전 상태라면 여전히 한반도국제법내전중으로 규정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4]

냉전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무기를 들고 맞붙은 전쟁으로,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었던 만큼 참전국 보면 세계대전이 맞는 것 같은데 세계사, 특히 냉전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한반도의 분단[편집 | 원본 편집]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 후에도 일본 제국은 끝까지 저항을 하였으며, 이에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얻어내기 위해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나가사키원자폭탄을 투하했다. 한편 소련은 얄타회담에서 체결한 결의에 근거해 8월 8일 일본 제국에 막타 보너스 선전포고를 함과 동시 157만 명의 대군을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시켰다.[5]

한반도 문제에 소련의 참여를 인정했던 미국이었지만,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에 이어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는 소련에 위기의식을 느낀 미국은 한반도의 절반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소련의 군사작전 한계선을 결정하기 시작했다. 해군부는 39도선 분할을 제시했지만 국무부와 육군부는 이미 소련이 한반도에 주둔한 시점에서 미군이 끼칠 수 있는 영향의 한계점이 38도선이라고 판단, 결국 트루먼 대통령이 38도선 분할안을 결재하게 되었다.[5]

미국으로부터 38도선 분할 안건을 받은 소련정부는 즉각적인 회답에서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로서 38도선을 경계로 일반명령 제1호를 통해 이북의 일본군은 소련에게, 이남의 일본군은 미국에게 항복을 받는다는 방침이 확정되었다. 이 분할점령에 의해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갈라지게 되었고 서로 다른 정치권력이 들어섰다.[5]

군정과 신탁통치[편집 | 원본 편집]

1945년 9월, 미국은 남한의 군정 포고문을 발표했지만 구체적 게획이 전무한 상황인데다 정치경험이 풍부한 한인 지도자들이 많지 않았던 관계로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관리들을 그대로 유임시켰다. 이후 미군 장교들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여전히 많은 일본인들이 고문으로 활약하였으며 이는 해방을 갈망했던 한국인들의 반발을 사기 시작했다.[6]

산업경제가 붕괴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남한의 행정업무를 어느 정도 파악한 미군은 10월부터 일본인 고문들을 퇴임시키고 그 자리를 한국인으로 대체해 일제의 악법들을 폐지했으며, 최종적으로 남한을 군정과 신탁통치를 거쳐 자유 민주주의 독립국가로 형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독립운동을 해왔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앙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모든 정파의 정치활동을 허용하는 법령을 공표했다. 결과 남한은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된다.[6] 겉만 보면 건강하고 올바른 정치 체제인데 북괴 때문에 안 될거야 아마.

한편 소련은 1945년 8월 평양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38도선 일대에 초소를 건설해 남북을 왕래하는 사람들에 대한 검문을 강화하고 남북을 잇는 철도, 도로, 통신을 차단했다. 초기에는 민족주의자들의 명망과 조직을 이용해 안정화를 꾀했으며 한국인 정치인을 기용했다. 그러나 고문관에는 소련군 장교가, 실권은 소련계 한인들이 쥐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민족주의자들을 내치고 토사구팽 친소련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하였으며, 10월 14일 소련군 대위 혹부리우스 김일성을 앞에 내세워 북한의 최고 권력자로 만들었다.[6]

소련은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포퓰리즘을 이용해 공산주의를 신봉하게 만들고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을 포섭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비협조자들이 숙청당하거나 남한으로 도망갔으며, 김일성은 빠른 시일에 북한의 권력을 쥐게 되었다.[6]

남북을 분할점령하던 미국과 소련은 1943년 카이로 선언을 구체화하기 위해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외무장관회의를 개최하여 한국인에 의한 한반도 정부 수립을 위해 최대 5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임을 결의했다. 신탁통치 결정이 알려지자 남북한 모두 거센 반발을 보였다. 그러나 1946년 1월 남북한 좌익세력은 입장을 바꿔 신탁통치를 지지하기 시작했으며 반탁운동을 전개하던 우익세력과 충돌을 일으켰다.[7]

1946년 3월, 신탁통치의 결정을 위해 미국가 소련의 회담이 서울에서 열렸으나 양측의 입장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미국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우익을, 소련은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좌익을 협의대상으로 삼길 바랬다. 결론적으로 미국은 모두에게 신탁통치 찬성과 반대의 의사표명에 대한 권리를 보장한 반면 소련은 신탁통치를 찬성한 단체만 받아들임으로서 협상은 결렬되었다. 1947년 5월에도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한 두 국가간의 협조는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소련과의 협조를 통해 한반도 통일정부수립을 원했던 미국은 방침을 철회하고 국제 연합으로 문제를 넘겨버렸다.[7]

남북한 독립정부 수립[편집 | 원본 편집]

두 차례에 걸친 미국과 소련의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북한과 남한의 좌익세력과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남한의 우익세력간의 대립이 극심해지자 미 군정은 통일정부 수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1948년 5월 10일 소련의 반대로 UN 한국임시위원단이 들어갈 수 없는 북한을 제외한 남한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했다. 만 21세에 달하는 모든 남녀에게 선거권이 주어졌고, 선거반대가 극심했던 제주도를 뺀 남한 전역에서 후보들이 출마했으며,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개개인의 손으로 대표를 뽑는 주권을 행사했다.[8]

초대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을 중심으로 제헌의회가 구성되었고 7월 12일 헌법을 제정, 20일에 이승만과 이시영을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내각을 출범시킨 대한민국은 8월 15일 건국을 선포함으로서 한반도 최초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UN은 48대 6으로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했으며, 미국은 외교승인과 동시 미군정을 폐지하고 대한민국 정부에 모든 것을 이관하였다.[8]

처음부터 한반도 통일정부를 원치 않았던 소련은 북한을 위성국으로 만들기 위해 공동위원회가 한창 열리고 있을 무렵 김일성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책임자로 임명했으며 권력을 장악, 1946년 11월에 인민위원회 위원들을 선출하였다. 1947년 2월, 임시가 아닌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구성해 북한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만들었으며, UN에서 남한정부 수립 결의안을 채택하자마자 인민헌법을 만들고 한반도의 합법정부로 내세웠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고 같은 날 김일성이 내각수상으로 선출되었다.[8]

주한미군 철수[편집 | 원본 편집]

미국은 한반도 통일정부가 물건너가고 안보전략의 조정에 따라 주한미군을 철수시켰다.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가 재정의 압박으로 군축을 실시했는데 전시동원으로 1,200만 명에 달하던 병력 중 수백만이 본래의 삶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대규모의 군대를 보유한 소련이라는 존재가 있었음에도 막강한 공군! 공군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 원자폭탄이라면 충분히 상쇄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소련의 주력이 동유럽에 몰려있는 상황에서 동아시아는 비교적 위협수치가 낮았다.[9]

미국은 동맹국인 중화민국이 내전에서 패배할 것을 대비해 1947년부터 일본을 새로운 방파제로 삼으려는 계획을 검토하였다. 소련이 미국을 겨냥, 태평양 방면으로 침공해올 것을 상정해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잇는 방어전략을 마련했다. 소련과 전면전이 발생하면 이 지역의 해공군기지를 활용해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고 최종적으로 본격 아포칼립스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한반도로 소련이 진격하게 되면 전면전을 피할 수 없었거니와 지상군 작전보다 한반도를 우회한 해공군으로 적의 본거지, 소련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하였다.[9] 천조국스러운 소련 평탄화작전. 그런데 적이 한반도만 노리면 어떡하지?

그러나 미국은 한국을 단순히 공백지로 둘 수 없어서 이에 미국은 한국과 1948년 8월 24일 군사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군사협정에 따라 대한민국 국군이 주한미군으로부터 훈련을 받고 시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1949년 6월 30일 철수가 완료된 시점에도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이 남아 한국군의 군사원조를 지원했다. 1950년 1월 26일,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이 체결되었지만 북한의 군사침공의 대비보단 내부 치안과 경제원조에 원점을 두었다. 심지어 주한미군사고문단은 각종 항공기와 중화기의 지원을 본토에 요청하였지만 미국 정부에서 거절하였다.[9] 북한에 4,300명의 군사고문단과 10개 이상의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각종 장비와 중화기를 제공한 소련과는 대조적인 상황이 벌어졌다.[10] 본격적인 의미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정전 후 10월 1일에 체결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미국의 대외정책의 표현, 애치슨 선언(?)[편집 | 원본 편집]

미국의 대외정책이 애치슨 선언[11]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되었고 이것이 한국전쟁을 야기했다는 의견이 있다. 이에 대해 애치슨 선언이 한국을 배제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한국을 지원하겠다는 의견이라 해명한 미국의 공식문서가 존재한다. 일본과 필리핀을 잇는 전략적 방어라인은 소련의 침공으로부터 미국을—당시 일본은 미군의 군정이 실시되었던 미국의 해외 영토인 반면 대한민국은 어엿한 주권국가다—지키는 관점에서 작성된 것이지, 마치 미국이 한국을 일부러 무방비상태로 두었다는 식으로 해석한 기자들을 질타한 것이다.예나 지금이나 만국 공통 기레기의 존재. 실제로 미국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한국을 지키기 위해 무서운 속도로 파병을 실행하고 UN을 끌어들이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다.[12] 그런데 이건 이거대로 미국이 노린 거라는 음모론이 존재.[13] 지켜줘도 뭐라 그러지 지키지 않아도 뭐라 그러지.

또한 애치슨 선언은 오히려 국내 불안을 야기하기는커녕 다시 한국을 지키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재확인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제임스 마크레이의 Dean Acheson's Press Club Speech Reexamined에 따르면 에치슨의 연설의 주 목적은 남한을 방어선에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한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는데 일부 학자들이 애치슨의 표현인 "방어선 (defensive perimeter)"[14]에 집착해 애치슨 발언의 나머지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한국이나 몇몇 학자들이 아직도 애치슨 발언이 한국전쟁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15] 공개된 구소련 문서에는 전쟁의 시작 원인에 애치슨 발언이 끼친 영향이 언급되지 않았다.

또한 1950년 1월 애치슨 관련 발언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애치슨 선언으로 한국이 배제되었으니 문제가 된다는 관점의 기사가 거의 없다.

가장 먼저 애치슨 선언을 언급한 경향신문엔 이승만과 기자 간의 대담이 실렸는데, 여기서 이승만은 애치슨이 1월 12일 기자구락단(Press Club) 연설에서 한국에 대한 확고한 지원을 해줄 것이라 말했으니 국민들은 걱정하지 말고[16], 트루먼과 애치슨에게 정말로 감사하다는 의견을 표명했다.[17] 거기에 애치슨 선언은 한국을 확고한 방어막으로 형성한 것이라 말하고 있어 에치슨 선언의 의미는 남한을 방어하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는 의견이 있다.[18]

물론 애치슨 선언에서 한국을 명시하지 않은게 문제였다는 의견도 있었다.[19]

발발 원인[편집 | 원본 편집]

한국전쟁은 왜 발생했는가? 이는 냉전사 최대의 난제이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의 원인은 냉전의 원인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냉전의 원인에 대한 의견은 한국전쟁 이전, 마샬플랜이니 스탈린의 제1차 베를린 점령이니 등으로 그 모습이 드러났다고 보지만 구체적인 냉전체제가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의 일이다.

그렇기에 한국전쟁의 원인은 냉전의 원인과 함께 연구되어왔다. 현재 냉전사에 대한 의견은 전통주의수정주의로 나눠져 있고, 냉전사 연구 및 한국전쟁 연구를 선도하는 곳은 조지 워싱턴 대학의 우드로 윌슨 센터가 있다.

전통주의적 입장[편집 | 원본 편집]

냉전은 소련 탓!!!! 이라 주장하는 전통주의는 기본적으로 한국전쟁도 소련 때문에 발발되었다고 주장한다.

달린의 경우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기획된 음모라 보았는데, 그 이유는 스탈린이 기만질에 능통한 개새끼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자신의 영향력을 팽창시키고 싶은데,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피해가 극심해서 미국과 맞짱을 뜨기는 힘들 것이라 판단하여 다른 방안을 고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소련군이 참전하지 않고, 위성국의 군대로만 전쟁을 일으키는 방안을 세운다.역시 난 천재!!!! 그래서 스탈린은 어디에서 시험할까 고민하던 중에 막내 중 가장 존재감 없던 김일성을 불러서 “남침해라 물자는 지원해줄게”라 말했고, 이에 김일성이 “네 형님”하고 지시에 따랐다는 것이다.[20][21]

서울대 김영호 교수는 롤백이론을 제시했는데 김영호의 말을 요약하자면 김일성이 졸라서 전쟁이 났다는 주장은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구소련문서가 중요한 사실을 배제하고 있고, 단순한 요약본이라는 점을 들어 이것은 러시아가 선별한 자료라 신빙성이 없다고 거부하였다. 그러면서 김영호는 설혹 김일성이 떼를 쓴 게 사실이라고 해도, 스탈린이 전쟁을 거부한 게 아니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왜냐면 1948년 베를린 봉쇄가 실패하면서 소련의 입지가 개차반이 되었는데 갑자기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자신감을 얻은 소련이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세력을 팽창하려고 하였고, 한국을 그 기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즉 스탈린은 마지못해 전쟁을 승인한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전쟁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것.[22]

수정주의적 입장[편집 | 원본 편집]

수정주의는 냉전은 미국 탓[23]으로 시작했다가 냉전은 소련이외의 요소 결과라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한국전쟁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미국의 잘못된 대외정책이라는 입장에서 내인론 또는 내인론과 외인론의 결합 등으로 변화되고 있다.

플레밍의 경우 한국전쟁의 원인은 미국의 잘못된 대외정책의 결과라 비난하면서 특히 에치슨 선언처럼 미국이 남한에 대해 소극적으로 지원한 결과라 주장했다. 플레밍은 당시 트루먼 행정부가 남한정부가 전쟁을 일으킬까 두려워 군사지원을 꺼려했고, 그 결과 남북한 간의 군사력 격차가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북한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라 보았다.[24]

수정주의자의 전성기를 연 브루스 커밍스의 경우 한국전쟁은 내부적 요인으로 발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커밍스는 한국은 이미 일제 통치기간에 계급 간 격차가 극심했는데 이 문제가 해방이후 미소 분할점령으로 더욱 극심화되었고 그 결과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한국전쟁의 기원』 1권을 내내 일제강점기의 계급 간 격차 및 사회문제를 설명하고 있다.[25] 그러나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요인을 잘못된 지식 하에서 서술했는데 뭐 남한이 북한을 도발했다든지, 남한 내에서 토지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든지 등이 있다.[26] 당연히 전통주의자들에게 신나게 털렸다.

시몬스의 경우 김일성이 불안정한 기반으로 시작하였고, 한반도 내에 기반이 있는 세력에 비해 힘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박헌영을 위시한 남로당계열이 대거 북한에 들어오는데 애들의 규모가 엄청난 양이었다. 그로 인해서 김일성의 권한은 더 불안해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김일성은 박헌영을 괴롭히고 힘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통받던 박헌영이 이러게 된 이상 갈때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남침을 건의했고, 영토야욕이 있던 김일성이 이를 수용해서 소련의 스탈린에게 달려가 전쟁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다.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전쟁하게 해주세요. 김일성의 부탁에 스탈린이 승인했고 이로 인해서 한국전쟁이 발발되었다고 말한다.

둘을 조합한 현재 학계 정설[편집 | 원본 편집]

그런거 없다

6·25전쟁의 원인을 규명하여 줄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가 완전하지 않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 동안 6·25 전쟁에 대한 원인과 기원에 대한 자료로 활용된 것은 주요 인사들의 회고록과 일화를 중심으로 개괄적으로 연구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회고록과 일화는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에 자기중심적으로 서술한 글로서 객관적이기보다는 자신의 일화에 대한 미화와 왜곡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가지고 있는 관계로 이러한 자료를 연구 논문의 객관적 자료로 활용되었다는 것은 연구논문에 대한 신뢰성을 보장 받을 수 없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박광득, “제1장 6.25전쟁의 기원과 원인에 관한 연구.” 『통일전략』, 10권, 1호, 2010, pp.14-16

박광득이 이야기했듯이 지금 한국전쟁 중론을 도출하기 위한 객관적인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27] 그래서 손경고는 한국전쟁 연구동향을 다루는 자신의 논문[28]에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해서 명확하게 규정내리지 않았고, 그냥 이런저런 의견이 있더라 정도로 마무리하였다. 정병준의 경우도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책 서문에서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연구가 변화되었고, 명확하게 어떤 것이라 규정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즉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이며 이에 대한 명확한 답안이 나오지 않는 상태이다. 최근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학자로는 웨더스비, 개디스, 스툭, 정병준 등이 있다.

먼저 웨더스비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로 김일성이 소련을 설득한 결과라 주장했다. 웨더스비가 보기에 스탈린은 그냥 한반도에서 세력균형을 원했지 전쟁을 원한 것이 아니었고, 전쟁도 김일성이 땡깡을 심하게 부려서 어쩔 수 없이 승인해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한국전쟁은 소련에게 책임이 없고, 당연히 냉전의 책임에서 소련의 역할은 적다고 주장한다.[29]

한편 같은 수정주의자인 개디스(John Lewis Gaddis)는 미국과 소련, 남북한 모두 한국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보았는데. 개디스는 김일성이나 이승만이나 둘 다 전쟁을 원하고 있었고, 전쟁을 준비했는데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지원해줘서 북한이 침공한 것이라 주장한다. 즉 미국이 소련보다 먼저 지원했다면 이승만이 전쟁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30]

윌리엄 스툭(William Stueck)의 경우, 한국전쟁은 국제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발한 것이라 주장했는데, 그 이유로 그는 한국인은 독립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민족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개항이후 한국역사가 친러, 친미, 친일, 친청 등 파벌로 나뉘어 싸웠던 사실과, 이승만의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을 한 사실을 가지고 한국인은 근본적으로 답 없는독립십이 없는 존재라 전쟁도 결정못한다고 주장했다. 미국판 식민사관 간단히 말해서 스툭의 의견은 한국 놈들 멍청해요. 그래서 전쟁 결정 못해요. 그러니 한국전쟁 소련이 일으킨거에요!!![31][32]

정병준의 경우, 한국전쟁은 1948-1949년까지 지속되는 38선의 국지전의 연장이라 보았다는 의견이 있으나 실제로는 그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본 것이지 연장이라 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38선 충돌이 심하기 전부터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전쟁을 요청했으며 이 때 스탈린의 개시에 따라 북한의 유도나 화전양면전술이 일어났다고 본다. 그리고 스탈린 개입을 인정하는 수준을 넘어, 오히려 스탈린의 개입이 굉장히 중요했다고 보는 사람이며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예상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스탈린의 치밀한 위장을 지적했을정도다. 정병준이 말하는 것은 38선의 국지전 과정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배경이 "형성"됐다는 것이지, 그것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다. 정병준은 전쟁의 "기원"이란 개념을 거부했고, 발발할 수 있는 배경이 "형성"할 수 는 있다고 봤다. 전쟁의 발발 자체는 분명하게 김일성과 스탈린의 탓으로 보고 있으며 그러 책에서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다만 그 전쟁이 가능한 배경형성이 좌우남북미소 대립에서 형성됐다는 것이지, 이게 곧 전쟁의 발발니란 것이 아니다. 책에선 이것을 "빅뱅"이라 비유한다.[33]

정병준이 말하는 바는 한국전쟁은 내부적요인과 외부적요인이 복합적으로 결합하여 발생한 것이라 본다. 정병준은 한국전쟁은 38선의 충돌의 연장이며, 이 38선의 충돌과정에서 북한이 병력과 무장을 강화하고 핵심적인 전쟁 계획과 전쟁관을 수립하였다. 정병준은 개전에서 스탈린의 역할을 강조하는 1990년대 이래 신전통주의적 입장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상호 간에 적대적이었던 남북한 간의 내전적 충동 상황을 중시하는 입장을 복합적으로 견지하고 있다.[34]

정병준의 입장은 복합적인 요인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한국전쟁의 기원이 38선의 충돌로 인해 기인했다고 보는 입장이고, 이러한 입장에서 기원이라는 표현을 서술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국외적 요인에 대한 영향도 고려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의견[편집 | 원본 편집]

앞서 말했듯이 한국 학계나 미국 학계나 중론이 없는 상황이지만 국내에서는 거의 중론으로 여겨지는 것이 있다.

바로 김일성 주도 스탈린 지원설이다.

먼저 북한, 김일성은 전쟁을 통해 통일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무력통일을 위해서는 잘 훈련된 병력, 뛰어난 무기, 그리고 후원자와 군비지원이 필수적 요건이었으나 북한이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북한은 현대적 무기생산이 불가능한데다 사단급 이상의 작전계획 수립과 전투수행 경험도 전무한 상태였다. 소련군이 남겨놓은 무기와 군사고문단의 지원이 있었지만 한반도를 통일하기엔 불충분한 상태였다.[35]

이때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공)은 내전 중이라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김일성은 스탈린의 동의와 원조가 절실히 필요했다.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과 회담을 가진 스탈린은 남한의 군사력과 주한미군의 현황, 북한의 전투능력과 경제에 대한 질문을 던졌으며 다방면의 지원을 원하는 김일성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남침에 대한 승낙은 허가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 내전의 결말이 불투명했고 얄타조약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으며 미국의 개입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킬 환경이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으며 북한 단독으로 남한을 압도하리라 판단하지 않았다.[35] 즉 시기상조라고 생각한 것이지 절대 야욕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다.[36]

시간이 흘러 1949년 8월 소련은 핵개발에 성공하였고, 그해 9월 종공이 국공내전에 승리하였다. 거기에 북한의 전쟁준비가 어느 정도 갖춰졌다고 판단한 스탈린은 1950년 1월 김일성과 만나 남침계획을 구체화했다. 소련은 중국에서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새로운 중소동맹을 체결한 상태였기에 중국을 대신할 새로운 전략지역의 획득이 필요했다. 3월에 다시 만난 인간백정 두 마리 두 지도자는 북한의 남침계획에 동의하였으나 스탈린은 최종결정을 또 다른 인간백정 마오쩌둥에게 받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5월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설득해 동의를 얻어내었으나 중국으로선 타이완을 '해방'하기도 전에 남의 전쟁을 돕는다는 것이 내키지많은 않았다. 그래도 전쟁을 결정한 이상 미군이 참전하더라도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었다.[35]

중소동맹은 여러 정치적 이유를 띠고 있었지만 일본의 재침략 또는 미일 양국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침략의 대비와 전세계 공산화라는 공통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만큼[36] 민주국가의 최전방이던 대한민국이란 눈엣가시를 제거하기로 마음먹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스탈린은 신중하고 우유부단하기 까지 하여 귀가 얇아 김일성에게 휘둘리거나 김일성의 생떼에 질려서 넘어간 인물이 되나 대단히 유능한 백수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지략가요 전략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이랑 북한이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제발 휴전하게 해주세요 라고 징징 거려도 죽을때까지 안 된다고 한다. 일타 쓰리피! 그리고 그들의 공공의 적 일본은 한국전 때문에 되려 살아난다. 지못미.

한국전쟁 연구의 배경과 역사[편집 | 원본 편집]

한국전쟁 원인 연구의 선도, 미국[편집 | 원본 편집]

미국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에 관심이 높은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한국전쟁의 원인에 따라 냉전의 책임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냉전의 책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변화하였다.

1950년대의 경우 이념의 대립이 정말 한국저리가라 할정도로 하드코어 했다. 괜히 메카시즘이라는 말이 등장한게 아니다. 그래서 당시의 학자 또는 한국전쟁 관련 서적에서는 90%가 소련탓을 한다.[37] 그래서 이 시기의 학자들을 통틀어서 전통주의자 들이라고 한다.

1960년대 미국은 그야말로 천지개벽했다.[38] 이런 변화는 미국학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냉전의 책임이 미국의 잘못된 대외정책의 결과라 보는 관점이다. 이 들을 수정주의자라고 부른다.

수정주의자들의 등장으로 인해 미국학계에서는 한국전쟁 논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정주의자들은 자료의 부족[39]으로 전통주의자들에게 얻어터지기만 했다. 뭐 병신같은 주장도 있어서기도 했지만[40]

미국 학계는 수정주의자가 새로운 해석을 내놓으면 전통주의자가 까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198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전통주의자들이 우세하였다. 그러다가 브루스 커밍스가 등장하면서 대세가 기울어지는데, 왜냐면 여기서 커밍스는 전쟁의 원인은 미국 탓도 소련 탓도 아닌 한국 탓!!!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많은 학자들이 수정주의 노선을 타게되어, 전통주의자들의 위세가 꺽였지만 그래도 그냥 살짝 꺽인거다. 굳이 수치로 표현하자면 7:3이었던 것이 한 5:5가 되었던 것이다.

이 논쟁은 냉전이 끝났어도 이어지고 있고, 심지어 냉전이 끝난지 25년이 지난 지금(2015년)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참고적으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를 하려고 한다면 영어의 압박이 있지만미국 자료를 참고해야한다. 그것도 필수적으로 해야된다. 위키러가 한국어로 발간된 논문으로만 참고문헌 작성했다가 교수한테 신나게 털려서 그런거 아니다.

국내 한국전쟁 원인 연구에 대해서[편집 | 원본 편집]

국내의 한국전쟁 원인 연구는 매우 상당히 늦게 시작되었다. 이는 분단의 상황이라는 환경에 기인한 것이다. 그래서 1980년대 이전에 학계에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국내에서 한국전쟁 원인의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80년대 말 김학준[41][42]이 미국에서 연구된 “한국전쟁 원인”을 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한국사회는 1950년대 미국사회와 같이 이념의 대립이 하드코어해서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또 자료의 부족, 특히 북한의 문서고나 소련의 문서고가 봉쇄된 상태에서 도대체 왜 일어났는지 판단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1993년 옐친이 김영삼에게 한국전쟁 관련 구소련 문서를 넘겨준 것이다.[43]

당연히 한국 학계에서는 이제서야 저놈의 빨갱이(소련)의 음모가 속 시원하게 들어나겠구만이라 장담했었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옐친이 준 자료를 공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맺어아 이 뭐병 국내에서는 원자료를 보기 어려웠고, 오로지 국방부 발간 해석본을 참고해야하는 문제가 발생했다.[44][45]

그러나 국내에서도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를 하는 등불같은 존재들이 계신다.

양영조의 『남북한 군사정책과 한국전쟁,1945-1950』(2007), 정병준의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2006), 박명림의 『한국 1950: 전쟁과 평화』(2002)이 대표적인 한국전쟁 원인을 연구한 학문서적이다.

그러나 한국 학계 내에서 한국전쟁 원인을 다루는 학자가 부족하여 자료나 신뢰성이 살짝 떨어진다. 예를 들어 본 "한국전쟁"에 대한 글도 수많은 위키러들 토론하면서 높은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토론을 하다보면 부족한 부분이 있는데 이를 상대편이 시정하는 경우도 있고, 그러다보니 글의 수준이 점차 성장하는 것이다.이러다가 논문쓸 거 같다.

한국전쟁의 원인 연구에 대한 평가[편집 | 원본 편집]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분석은 이념과 신념 그리고 생각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예를 들어보자면 스탈린이 김일성의 전쟁요구를 49번이나 거부하였고, 전쟁 승인 때 마오쩌둥의 의견을 들었다는 사실이다.[46]

전통주의자는 이를 소련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김일성이 눈치없이 와서 한다고 하니 반려시킨 것이고, 이후 기회를 포착하자 김일성을 불러 전쟁을 승인하고 중국조차 끌어들인 것이라 보았다.[47]

수정주의자는 이를 소련은 전쟁의 의도가 없었는데 김일성이 땡깡 부려서 전쟁을 승인해 준 것이라 보았다.[48]

둘 중 누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왜냐 기록이 없다. 그냥 김일성이 왔는데 거부했다. 이런 정도이지 무슨 회담의 내용이 없다. 특히 스탈린과 마오쩌둥 간의 회담 내용은 공개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스탈린이 처음에는 생각이 없다가 그래 한 번 해볼까? 이거일 수도 있고(전통주의 의견), 아니면 정말로 김일성이 땡깡부려서 스탈린이 귀찮아서 아 그래 전쟁 해!!! 라 한 거일 수도 있다. (수정주의 의견)

결국 한국전쟁의 원인은 해석의 문제이고, 누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

전개 상황[편집 | 원본 편집]

전쟁의 영향[편집 | 원본 편집]

전쟁이 으레 그렇듯이 6·25 전쟁 또한 한국 사회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수많은 영향을 남겼다.

UN군[편집 | 원본 편집]

국제연합(UN)이 정식창설 된 지 2년여만에 전쟁을 겪었고, 이 전쟁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UN 회원국의 뜻을 모아 UN군을 창설, 한국에 파병했다. UN 평화유지군이 아닌 UN군으로서 침략자와 교전을 목적으로 한, 즉 UN이 두명의 전쟁 당사자들 중 어느 한 쪽의 편만을 일방적으로 들어준 경우는 2015년 현재까지도 이 때가 유일하다.

이는 국제연맹(LN)이 무력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막지 못하고 침략자에 의한 주변국 정복이 거듭된 3~40년대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국제사회의 교훈이 가져온 결과였다. 독일의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이나 일본의 중국 침공,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에 국제연맹과 국제사회 모두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그 결과 사상 최악의 대전쟁을 치뤘던 만큼, 침략자는 일찌감치 응징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퍼져 있었던 것이다.

당장 에티오피아만 하더라도 이탈리아의 침략때 국제연맹을 통해 호소했지만 무시당하고 정복당한 역사가 있고, 독립을 회복한 지 10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아프리카의 빈국 에티오피아가 한국전에 참전한 것은 강자에 의한 침략이 되풀이되는 일을 막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같은 이유로 유럽권 국가들의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리스터키는 공산주의 세력과의 내전을 끝내고 국가재건 및 소련과의 대치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가 필요했기에 참전한 경우이다. 태국은 아예 2차대전당시 일본의 동맹국, 즉 추축국이었다. 워낙 듣보잡이라 미국이 신경도 쓰지 않은 상대였고 태국도 필사의 외교전으로 대미 선전포고를 취소하는 식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복원했지만 미국 및 영국, 프랑스로부터 추축국 낙인이 찍힌건 똑같았고 이를 타개하고 미국의 동맹국이 되겠다는 제스처로서 참전한 것이다.

이유가 어떻든, 모두들 위기에 처한 한국을 도와주러 온 나라들이다. 설사 정치적 이유든 금전적 이유였든 경제적 이유였든 어떤 이유에 따른 파병이더라도 그건 그 국가 정부의 입장이지, 파병된 사람들은 이역만리 타향땅에서 아무런 반대급부도 바라지 않고 피를 흘리며 싸웠다. 감사히 여기자.

직접적으로 전투병을 참가시킨 국가만 위 16개국이고, 의료진을 보내거나 구호물자 등으로 지원한 나라는 더 많다. 놀랍게도 일본도 구호물자를 보내주었던 국가 중 하나에 속해있다. 물론 이는 당시 미국의 지시로 중간기지 역할을 할당받아 의무로 지원해준 케이스에 더 가깝지만.[49]

대중문화 속의 6·25 전쟁[편집 | 원본 편집]

미국이 패하지 않은 전쟁임에도 의외로 미국이 분명하게 패한 소말리아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대중매체에서 다루어지는 빈도는 매우 적다. 애초에 미국 내에서 이 전쟁을 일컫는 별칭 중 하나가 '잊힌 전쟁(the Forgotten War)'[50]이다. 사실 이는 확실히 이겼거나 졌다는 식으로 딱 끝을 본 게 아니라 '휴전'이라는 굉장히 애매한 수준으로 마무리 지어진 탓도 있고, 또 이 전쟁으로 미국이 딱히 사회적으로 가지게 된 변화 또한 없기 때문이다. 가령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미국은 전에 없는 호황을 누린 반면, 베트남 전쟁이나 소말리아 전쟁 등으로 인해 미국은 반정부, 자유주의 성향이 지독히 강해지는 등 괄목할만한 변화가 여럿 있었지만 한국전쟁은 그런 거 없었다.

더불어 당시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승리로 자신감이 팽배해있던 상황이였으며 한국전쟁은 바로 그 후에 치룬 전쟁이니 당시 미국인들의 입장에서 따지고 보면 '당연히 이기는 전쟁을 당연히 이긴 것이다'라는 정도의 감상밖에 안 드는게 사실이다. 한번 대회에서 금메달을 얻은 선수가 다시 금메달을 얻으면 그 때 부터는 오히려 금메달을 따는게 당연해서 감흥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 셈.

미국에서 한국전쟁을 중심소재로 한 대중문화 작품으로는 희대의 괴작 《오! 인천》 뿐인데, 이조차 제작을 통일교에서 한거다.

한국 내에서는 당연히 다루는 매체가 매우 많다. 다큐멘터리, 영화, 오락 등 다양한 작품들이 이 전쟁을 소재로 만들어진다. 참전자들을 인터뷰해거나 초빙하여 행사를 갖는 등 여러 행사도 많이 한다. 하지만 한국 외의 지역에서는 글쎄올시다 라고 생각하는데 한국 전쟁에 관한 엄청난 분량의 다큐멘터리가 매년 만들어지고 있다.

정확히는 한국인들이 한국전쟁에 대한 관심 자체가 적을 뿐이다. 슬프지만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국가는 북한이지 남한이 아니다. 어딜 가나 북한, 김정일은 알지만 남한이라고 이야기하면 "그게 어디에 있는 나라?"라는 답이 돌아오기 일수다. 한류로 인해서 영미권의 남한에 대한 인식은 높아졌지만 그래도 매일 뉴스에 나오는 북한에 비하면야……. 당연히 전세계적으로 높은 인지도를 지닌 북한에 대해서 다양한 다큐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영미권이나 서구권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구소련권이야 같은 소련권이니 당연한 것이지만 인도나 아랍에서도 남한은 모르지만 북한은 아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한국전쟁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이렇게나 많이 있다. 당연히 단순히 유투브에서만 검색한 것이 이정도이다. [51]

6·25 전쟁을 소재로 다룬 작품[편집 | 원본 편집]

소설[편집 | 원본 편집]

만화[편집 | 원본 편집]

영상물[편집 | 원본 편집]

다큐멘터리 영상[편집 | 원본 편집]

전쟁범죄[편집 | 원본 편집]

여느 전쟁과 마찬가지로 이 6·25전쟁기간에도 무수히 많은 전쟁범죄가 저질러졌다.

UN군(한국군 포함)에 의한 전쟁범죄[편집 | 원본 편집]

이 경우는 아무래도 가해자가 한국(국군, 경찰, 반공 단체 등) 경우가 제일 많고 가장 대규모 전력을 투입한 미국에 의한 피해도 제법 있었다. 특히 한국전쟁 초창기 한국군의 질적인 문제로 인하여 그 정도가 심각했는데[52] 미국 다음으로 많은 전력을 투입한 영국이 한국측의 전쟁범죄 문제에 대해서 ‘이들의 잔혹함은 공산주의자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나마 한국측이 학살을 하려는 것을 다른 UN군이 제지하여 목숨을 건진 운좋은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 이런 학살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명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학살 대상자와 우익 단체를 마구 징집해서 전선으로 보내면서 끝나게 되었다는 웃픈 이야기가 있다.

북한과 공산군에 의한 전쟁범죄[편집 | 원본 편집]

초창기 전쟁범죄는 당연히 북한군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중반 이후로는 북한군 전력 자체가 소멸하다시피 해서 거의 사라지고 중공군에 의한 범죄가 많아지게 된다. 중공군의 경우 북한군에 비하면 덜 악랄했지만 포로들을 대상으로 제대로 된 식량 배급 없이 장거리 행군을 시킨다거나, 심심하다는 이유로 쏴 죽인다거나, 부상당한 포로를 태워죽이는 등 북한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덜 악랄했을 뿐 각종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그나마 자정작용이라도 했던 UN군에 비해서 이쪽은 그런것도 없었다. 북한군의 경우 개전 초기 24사단 미군 24사단 병력[53]들을 포로로 잡았는데 자기들보다 덩치가 커서 관리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손을 뒤로 묶고 총살 시켰다.#

트리비아[편집 | 원본 편집]

대부분의 큰 사건이 그러하듯 여러 음모론이 끼어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남침(남쪽이 침공 당함)이 아니라 북침(북쪽이 침공 당함)했다는 주장,[54]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 등이 있다. 문제는 이 대부분의 주장들이 결과적으로는 북한은 착하게 가만히 있었는데 이용당한 것이라는 종북적 주장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음모론은 많다. 대표적으로 미국 언론인 스톤[55]이 있다. 1952년에 스톤은 한국전쟁이 리승만과 맥아더의 합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맥아더가 대통령이 되려고 전쟁을 유도했다고 말한다. 사실 옆 나라에서 쇼군이였던 적은 있긴 했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른다. 북한식으로 해설하면 '우리 민족의 남측 영토에 미제놈이 쳐들어와 일제놈들처럼 정복해버리고, 추종세력을 키워나가는 꼴을 도저히 두고 볼 수만은 없어, 그런 남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김일성 동지가 해방전쟁을 일으켰다.'라는 논리이다. 뭐야, 그럼 남침 맞잖아. 그리고 1953년 정전협정을 '미제놈들의 야망을 굴복시키어 승리했다'고 정신승리를 하고 자위자부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과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다. 북한군이 38선을 넘어가면서 대한민국을 침공하던 그 시각 브라질에서는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을 4-0으로 이기고 있었다.

참고문헌[편집 | 원본 편집]

  • 강석승. “‘6.25전쟁’의 발발원인에 관한 소고.” 『남북문화예술연구』 8호. 2011.
  • 김진웅. “한국전쟁의 국내적 요인: 학설사적 접근.” 『환태평양연구』 vol. 3. 1990.
  • 김진웅.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최근의 해석.” 『역사교육논집』 26집. 2001.
  • 김영호. “한국전쟁 원인의 국제정치적 재해석: 스탈린의 롤백이론.” 『한국정치학회보』 31집. 3호. 1997.
  • 김영호. “미국의 6.25전쟁 연구 동향.” 『군사』 55호. 2005.
  • 김학준. 『한국전쟁: 원인, 과정, 휴전, 영향』. 서울: 전영사. 2010.
  • 글랜 D. 페이지 지음. 한배호 옮김. 『미국의 한국참전결정: 정책결정이론에 의한 사례연구』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획. 이상빈 옮김. 『르몽드 20세기사』. 휴머니스트. 2014.
  • 박명림.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서울: 나남출판. 2002.
  • 박광득. “제1장 6.25전쟁의 기원과 원인에 관한 연구.” 『통일전략』. 10권. 1호. 2010.
  • 베른트 슈퇴버 지음. 최승완 옮김. 『냉전이란 무엇인가: 극단의 시대 1945-1991』. 서울: 역사비평사. 2008.
  •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자동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서울: 일월서각, 1997.
  • 정병준.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파주: 돌베게, 2006.
  • 손경고. “최근 한국전쟁 연구동향: 2005년 이후 연구를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연구』. 56집. 봄호. 2011.
  • 이완범. “한국전쟁 발발원인에 대한 유기적 해석: 김일성의 국제적 역학관계변화 편승과 스탈린의 동의.” 『국제정치논총』. 39집. 1호. 1999.
  • 이완범. 『한국전쟁: 국제전적 조망』. 백산서당. 2000.
  • 이완범. “한국전쟁의 국제적 기원-세계적 냉전의 동북아 침투.” 한국전쟁연구회 편. 『탈냉전시대 한국전쟁의 재조명』. 백산서당. 2000.
  • 이완범. “한국 국내의 6.25전쟁 연구 동향.” 『군사』. 55호. 2005.
  • 토니 주트 지음. 조행복 옮김. 『포스트워 1945-2005 1권』. 서울: 플래닛. 2008.
  • 황지환. “한반도 분단과 한국전쟁의 국제정치이론적 의미: 현상타파/현상유지 국가 논의의 재조명.” 『국제정치논총』. 52집. 3호. 2012.
  • 한국전략문제연구소. “Korean War Studies in the United States: Historiographical Review and Current Views.” FIFTY YEARS AFTER THE KOREAN WAR: Form Cold-War Confrontation to peaceful Coexistence. 2000. pp. 31-54.
  • Chaffee, Wilbur. “Two Hypotheses of Sino-Soviet Relation as Concerns the Instigation of the Korean War.” Journal of Korean Affairs, Vol. 4. No 3/4 1976/1977.
  • Cumings, Bruce. “The Cooporate State in North Korea.” Hagen Koo ed., State and Society in Comtemporary. Cornell University Press. 1993.
  • Dallin, David J. Soviet Foreign Policy After Stalin. Philadelphia: J. B. Lippincott, 1961.
  • Flemming, D. F. The Cold War and its Origins. Vol. II, 1950-1960. Garden City: Doubleday. 1961.
  • Gaddis, John Lewis. We Now Know: Rethinking Cold War Histor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 Garthoff, Raymond L. Soviet Strategy in the Nuclear Age. New York: Praeger Publishers, 1965.
  • Gupta, Karunakar. “How did the Korean War begin?” China Quarterly. No. 52.1972; China Quarterly. No. 54.
  • Halliday, Jon. “The Korean War: Some Notes on Evidence and Solidarity.” Bulletin of Concerned Asian Scholars, vol. 3. No. 3. July 1979.
  • Heinzig, Dieter. “Stalin, Mao, kim and Korean War Origins, 1950: A Russian Documentary Discrepancy.” Cold War Intervention History Project Electronic Bulletin 8-9. Winter. 1996/1997.
  • Kennan, George. Memoirs, 1950-1963. New York: Pantheon. 1972.
  • Kennan, George. “Long Telegram.” 1946. [18] (Accessed 2015. 6. 9.)
  • Kolko, Joyce and Gabriel. The Limits of Power: The World and United States Foreign Policy, 1945-1954. Happer & Row. 1972.
  • Rees, David. Korea: The Limited War. New Delhi: Natraj Pub. 1978.
  • Stueck, William Jr. “Cold War Revisionism and the Origin of the Korea Conflict: The Kolko Thesis.” Pacific Historical Review. vol. 42. November 1973.
  • Stueck, William Jr. “The Korean War.” Leffler, Melvyn P. edit.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Cold War. Vol. I. 2010.
  • Teodori, Massimo, ed. New Left. NY: The Bobbs-Merrill Co. 1969.
  • Ulam, Adam B. Expansion and Coexistence: The History of Soviet Foreign policy, 1917-1967. New York: Praeger Publishers, 1968.
  • US National Security Council. “A Report to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NSC 68.” 1950. [19] (Accessed 2015. 6. 9.)
  • Weathersby, Kathryn.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New Evidence from Russian Archives.” 1993. [20] (Accessed 2015. 6. 9.)
  • Wolfe, Thomas W. Soviet Power and Europe, 1945-1970. Baltimore: John Hopkis University Press, 1970.
  • William A. William. The Tragedy of American Diplomacy. W. W. Norton & Company. 2009.

각주

  1. 명색이 휴전협정이니까 지금도 전쟁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 있지만, 그 휴전협정의 정식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더불어 7월 27일 협정 이후에 일어나는 교전을 '한국전쟁'혹은 그 일부라고 지칭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de facto) 전쟁 중(=전시)이라 하지 않는다.
  2. 당시 국제적으로 공인 된 국가가 아니므로 중공으로 표기.
  3. 참전을 안 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군인들이 참전하였다. 미군도 적군의 비행기에서 러시아어 소리가 나오는 것을 들었지만 제3차 세계대전 우려로 묵인하였다.
  4. 일반적으로 휴전은 전쟁 재정비를 위해 잠시 쉬는 것으로, 정전은 주로 합의가 보이지 않는 싸움에서 외부세력의 개입(중개)으로 이루어진다.
  5. 5.0 5.1 5.2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1편 [1]
  6. 6.0 6.1 6.2 6.3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2편 [2]
  7. 7.0 7.1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3편 [3]
  8. 8.0 8.1 8.2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4편 [4]
  9. 9.0 9.1 9.2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5편 [5]
  10.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6편 [6]
  11. Press Club Speech on the Far East 1950-01-12 [7]
  12. Secretary Acheson and the Defense of Korea [8]
  13. 이것도 미국 기자인 스톤이 주장한 것. 자세한 것은 Stone, I. F. 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52. 참조
  14. 직역하자면 "방어적 주위"이다.
  15. Some scholars have relied on the released Soviet documents to revive traditional interpretations of the Korean War. For example, Soh Jin-chull writes in a recent paper that "clearly ... the Korean War was 'initiated' and 'realized' by Stalin with the cooperation of Communist China." As part of a "collective conspiracy," he concludes, "it was the North Korean Communist counterpart who loyally obeyed and executed this War."81 Similarly, writers have attempted to attribute Stalin's decision to support an invasion of South Korea to Acheson's Press Club speech. Kim Hakjoon claims that when Stalin referred during his April meeting with Kim Il Sung to favorable changes in the international environment, he "probably had in mind the speech given ... by U.S. Secretary of State Dean Acheson three months earlier in January, 1950."82 According to James G. Hershberger, Acheson's speech "may have been seen in Moscow as lending credence to the argument that Washington would not intervene militarily to rescue South Korea from being overrun."83 "The timing of Stalin's approval," Weathersby initially concluded in 1995, "must therefore have been at least in part a response to the new defense policy ... that placed South Korea outside the American defense perimeter in the Pacific."84 But Soviet documents do not sustain this interpretation, not least because just one of them even mentions the Press Club speech.
  16. 경향신문 1950년 1월 15일자 신문 1면 기사 [9]
  17. Memo of Conversation, January 28, 1950. Secretary of State File, Acheson Papers [10]
  18. 1950년 6월 10일자 경향신문 여적 [11]
  19. 1950년 1월 21일 경향신문 사설 [12]
  20. 정확히 말하자면, 달린은 공산주위 진영에서 하위층에 있는 북한이 정점에 있는 소련의 지시없이 전쟁을 주도했을 리가 없다고 주장을 했다.
  21. Dallin, 'Soviet Foreign Policy After Stalin', p.60.
  22. 김영호. “한국전쟁 원인의 국제정치적 재해석: 스탈린의 롤백이론.” 『한국정치학회보』 31집. 3호. 1997.
  23. 대표적으로 윌리엄 A. 윌리엄스의 The Tragedy of American Diplomacy
  24. D. F. Flemming, The Cold War and its Origins, Vol. II, 1950-1960, Garden City: Doubleday, 1961.
  25.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자동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1권, 서울: 일월서각, 1997.
  2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자동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2권, 서울: 일월서각, 1997.
  27. 소련자료가 공개되었다는데 그것도 극히 일부고 제일 중요한 문서는 공개 되지 않았다. 이는 웨더스비도 지적한 부분이다. Kathryn Weathersby.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New Evidence from Russian Archives,” 1993, [13] (Accessed 2015. 6. 9.) p. 9.
  28. 손경고. “최근 한국전쟁 연구동향: 2005년 이후 연구를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연구』. 56집. 봄호. 2011.
  29. Kathryn Weathersby.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New Evidence from Russian Archives,” 1993, [14] (Accessed 2015. 6. 9.) pp. 8-9.
  30. John Lewis Gaddis, We Now Know: Rethinking Cold War Histor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p.71.
  31. 전형적인 일반화의 오류이다. 독립청원이나 외교독립론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만주나 간도, 연해주로 피신하여 일본군에 대한 대규모 게릴라전을 펼치기도 했다.
  32. Stueck, William Jr. “The Korean War.” Leffler, Melvyn P. edit.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Cold War. Vol. I. 2010.
  33. 정병준.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파주: 돌베게, 2006.
  34. 김태우, "한국전쟁 연구 동향의 변화와 과제, 1950-2015", 한국사학사학보, 제32권, 2015, 330
  35. 35.0 35.1 35.2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18편 [15]
  36. 36.0 36.1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19편 [16]
  37. 예외적으로 스톤이 있는데 스톤은 미국기자였다.
  38. 농담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인들의 선진화된 모습은 이런 대 변화를 경험했기에 등장한 것이다. 간단한 예로 1950년대에는 노예가 법적으로 존재했고, 흑인에 대한 인체실험도 국가적으로 행해졌었다.
  39. 한국전쟁 관련 미국 공문서가 풀리는 1970년대 까지는 미국정부나 소련정부에서 공개한 자료에만 의존해야 했으니 전통주의자들에 비해 자료가 매우 부족했다.
  40. 예를 들자면, 굽타의 경우 일명 "해주진공설"을 제시하였고, 콜코 부부는 이게 다 맥아더와 이승만이 전쟁을 야기했기 때문이다라 주장했다. 당연히 전통주의자들은 이것을 신나게 털었다.
  41. 김학준. 『한국전쟁: 원인, 과정, 휴전, 영향』. 서울: 전영사. 2010.
  42. 이 책은 1980년대 낸 논문을 수정 보완 증보판이다.
  43. 1993년 6월 25일 경향신문 1면 [17]
  44. 국내에서 소련 공개 원문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그에 반해 우드로 윌슨센터에 가면 러시아 극비문서가 인터넷에 스캔본으로 잘 올라가져 있다.
  45. 이게 학문적 논문의 경우 원문에 의거 자신의 논리를 제기해야하기 때문에 해석본을 인용하는 경우 신뢰성이 떨어진다. 아 물론 이는 석박사 급 논문을 말한다.그래서 한국전쟁 전문가가 적은 것일지도....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최소 3개국어는 해야되니....
  46. 참고로 이것만 있지 회담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47. 대표적으로 김영호가 있다.
  48. 대표적으로 웨더스비가 있다.
  49. 일본에 대해서 카더라성 일화로, 일본이 '병력 지원해줄까?'라고 하니 이승만이 필요없으니 꺼져쯤 되는 반응을 보였다는 소리도 있다. 하지만 상술했듯 당시 일본은 평화헌법 때문에 군사병력이 하나도 없었던 상황이니 말 그대로 카더라일 가능성이 높다.
  50. 미국에서 Korean War가 Forgotten War인 이유는 학계에서 특히 냉전분야에서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엄청난 이슈인데 비해 일반 대중들의 인식은 없다는 의미가 더 크다.
  51. 사실 국내에서도 한국전쟁에 대한 임팩트가 강한 것도 아니다. 뭐 우리나라가 미국처럼 참전용사들 대접해 주는 것도 아니고, 6.25 참전용사라는 명칭 자체가 박정희 정권이던 1961년에서야 등장했으니…… 지금의 한국전쟁에 대한 이미지가 있는 것도 1961년 이후 교육의 힘이었다. 그 이전에는 어떠한 지원도 없었다.
  52. 전쟁 초기에 그나마 훈련된 인원을 싹 날려먹고 마구잡이로 징집해서 제대로 훈련도 안된 인원들을 일단 숫자라도 채우자는 식으로 배치했으니 병력의 질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53. 사단장: 소장 윌리엄 딘
  54. 참고로 이건 '침(侵)'이라는 단어의 뜻을 헷갈려서 오해하는 경우도 좀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즉 남침을 '남쪽이 침공함', 북침을 '북쪽이 침공함'으로 헷갈리는 경우가 이런 경우이다. 참고로 개그콘서트 시청자 의견 코너 2014년 11월 9일자 방송에서는 이걸 똥침에 빗대어 표현했는데 정리하자면 '내 손이 너의 똥꼬를 침공하면 그게 손침이냐 똥침이냐'는 내용이다(...). 좀 웃기지만 말은 맞긴 맞다. 점잖은 설명으로 하자면 '침범(侵犯, 침을 범하다 = 남의 영역에 멋대로 들어가는 일을 하다)'이나 '침략(侵掠, 침하여 약탈하다)'이라는 단어들로 연상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55. Stone, I. F. 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