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선 방어작전

한강선 방어작전한국전쟁에서 벌어진 대한민국 측의 초기 방어 전투다.

미국의 참전[편집 | 원본 편집]

미국은 주한미국대사 무초(John J. Muccio)의 전문을 통해 한국전쟁이 시작됨을 인지한다. 미국은 개전한지 7시간 26분이 지난 후에야 전쟁 상황을 공식을 접수하였다. 이때 신성모와 채병덕은 국군 반격!, 북진! 북진! 외치고 있을 때다…….미 국무부는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비상연락계통을 이용해 전 미국 지도부에게 연락을 취한다. 당시 미국은 토요일이었고 대부분의 지도층은 휴가 중이었다. 대통령 트루먼도 미주리 주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소식으로 인해 미국 지도부는 신속히 집결한다.

미국 현지시간 6월 25일 19:40분 백악관 블레어하우스에서 회의가 진행된다. 이 회의에서 북한의 남한 침공은 “소련이 미국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거나, 남한을 정복해서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팽창을 유도하기 위한 것”[1][2]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5개의 사항을 결정하였다.

  1.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에 조사단을 파견하도록 할 것
  2.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이 제안한 군수물자를 보내게 할 것
  3. 이미 지시된 제7함대를 일본으로 파견할 것
  4. 미 공군은 극동지역에 있는 소련 공군기지를 제거할 계획을 수립할 것
  5. 소련의 다음 행동 지역이 어디인지 파악할 것

미국 현지시간 6월 26일이 되자 한국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제2차 블레어하우스 회의가 개최되지만 회의 내용은 제1차랑 대동소이 하였다.

전쟁 초기 미군의 지원은 제한적이었다. 주로 탄약 지원을 주로 하였는데, 105mm 곡사포 90문, 60mm 박격포 700문, 카빈소총 40,000정 화기와 함께 105mm 포탄 105,000발, 81mm 박격포탄 265,000발, 60mm 박격포탄 89,000발, 소총탄 2,480,000발이 주산으로 긴급 지원하였다.[3]

한편 한국 정부로 부터 올라온 전투기 지원 요청에 대해서는 나름 빠른 처리가 진행되었는데, '한국 공군에 전투기를 지원하고, 한국 공군이 전투기를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를 목적으로 하는 바우트 원 계획이 수립되어 한국 공군과의 협의하에 10기의 F-51 무스탕을 지원하기로 결정되었다. 6월 27일에 10명의 조종사가 훈련을 위해 일본으로 떠났으며, 이들은 7월 초부터 한국 전쟁에 투입되었다. 다만 이렇게 진행된 뒷사정이 좀 구릿한데, 바우트 원문서를 참고하자.문서가 없다면 좀 기다려보자.[4]

6월 29일 맥아더장군이 한국 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수원공항에 도착하였다. 수원학교에 있는 육군본부 임시거처에서 전선에 대한 상황을 브리핑 받는 중 맥아더 장군은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이 사태에 대한 건의사항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이에 채병덕 총참모장은 “2백만 남한 장정을 징집하여 침략을 격퇴하겠다.”고 말했다.[5] [6][7]

한강남안 전선을 시찰한 맥아더는 미군의 참전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맥아더는 뉴욕 해럴드 트리뷴지의 히긴스 양에게 “나에게 미군 2개 사단만 준다면 나는 한국을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8]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말해놓고 필리핀을 날려먹은 적이 있었지

맥아더 장군이 시찰보고서가 도착하자 미군은 미국 현지시간 6월 30일 새벽 4:57 2개 사단을 추가로 파병하고 그날 오전에 미군의 대규모적인 파병이 결정되었다. 또한 안보리를 통해 UN군 파병이 결정되었다.

한강선 및 김포지구 방어작전[편집 | 원본 편집]

국군 지도부는 서울 철수의 필요성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계획조차 수립하지 못했다. 당연히 철수과정은 극도로 혼란했고 피난민에 의해서 교통은 거의 마비되었다. 거기에 서울 시민들도 피난길에 오르면서 국군의 철수는 혼란이었다. 거기에 한강교를 미리 폭파시켜 야포, 차량, 박격포 등 중장비를 이동시키지 못하고 소총만 휴대하거나 또는 맨몸으로 철수하였다. 거기에 국군에게 지급하기 위해 보급품을 실고 있었던 1,318대의 차량들이 한강북쪽에 갇혀 적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국군의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국군은 병력을 수습해야하는 것과 동시에 한강선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막아야 하는 두 가지 임무를 모두 수행해야 했었다. 그러나 한강선은 전차를 앞세우는 북한군을 저지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을 쉽게 내준다면 북한군을 저지할 수 있는 곳은 딱히 없었다.[9] 특히 미국의 참전이 확실시되던 시점에서 국군이 이곳에서 시간을 벌어야만 했었다.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에 채병덕 총참모장은 한강방어를 위해 육군참모학교장인 김홍일 소장[10]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11]

시흥사령관이 된 김홍일 소장은 시흥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유재흥 준장, 이종찬 대령, 임선하 대령을 각각 혼성 7사단장, 혼성수도사단장, 혼성제2사단장에 임명하였다. 혼성이라는 명칭을 쓴 이유는 수도, 7사단, 2사단 모두 병력이 분산되어 제대로된 편제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에 남하하는 병력을 수습하여 편제나 소속 상관없이 500명이 채워지면 혼성○○대대라 칭하고 바로 한강선에 투입했다. 당연히 사단편제가 기존편제와 달랐으니 혼성이라는 명칭을 썼다. 이 말은 즉 국군그 편제조차 유지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당연히 혼성사단은 말만 사단이었지 실제병력이나 화력은 일개 연대수준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혼성사단 연대별 소유하고 있던 중화기는 박격포 2-3문, 기관총 5-6정 정도로 일개 소총부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흥사는 한강방어를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했다. 승마장에 있던 말들을 군용으로 수용하였고, 각 지역에 남아 있던 화기를 전부다 전방으로 보냈다. 또한 혼성 사단장을 임명하여 한강선을 따라 남하하는 국군을 수습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를 통해서 국군은 어느 정도 편제를 갖출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었다.

시흥사가 한강지역의 방어선을 재편하는 동안 6월 29일 맥아더 장군이 시찰을 오게 되었다. 여기서 김홍일은 맥아더에게 “지금 국군이 장비와 탄약의 절대량이 부족함을 알리고 이에 대한 시급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이후 수도사단 방어진지로 안내했다. 여기서 유명한 일화가 나왔다.[12]

맥아더가 한강선 시찰을 마치고 김홍일에게 언제까지 방어할 수 있는지 묻자, 김홍일 장군은 “적의 탱크가 도하 오는 것을 어떻게 저지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이를 위해서 미 공군이 한강철교를 완전히 파괴시켜주기를 요청했다. 한강철교가 파괴되어 적 탱크의 도하에 시일이 걸린다면 한강선에 있는 국군 2만 5천명으로 적 5만명을 10일 동안 이곳에 묶어둘 수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채병덕과 비교된다. 이에 맥아더도 김홍일 장군의 말에 동의했다고 한다. 시흥사의 가장 큰 역할은 흩어진 장병들을 수습했다는 것에 있다. 만약 시흥사가 병력을 수습하여 혼성사단이라도 만들지 않았다면 이후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할 병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시흥사가 병력을 수습하면서도 동시에 북한군을 일주일간 한강선에 묶어두면서 한국군은 미군의 지원을 받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한편 시흥사가 한강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할 쯤, 김포지역에도 북한군이 등장하였다. 제6사단은 한강 하류에서 도하하여 김포읍을 석권하고 계속 남하하고 있었다. 육군 지도부는 이미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고 한강선 방어에만 총력을 기하는데 힘든 시점이었기에 김포지역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김포읍을 빼앗기고 겨우겨우 부천으로 퇴각한 김포전투사령부는 소사읍사무소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대오를 정렬하고 있는 중에 사령관 계인주 대령이 행방불명되었음이 밝혀졌다. 이에 참모장인 최복수 중령이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6월 28일 야간 김포사부대가 소사로 집결하자 시흥사는 현지의 제3사단 참모장인 우병옥 중령을 새로이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김포비행장 탈환을 명령했다. 이는 북한군 저지 목적도 있었지만 행주에서 도하 중인 국군 제1사단의 철수로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6월 29일 새벽 김포비행장에 접근한 김포사는 북한군 기습을 위해 병력을 점검하던 중 총소리를 듣게되었다. 이 총소리는 행주나루터에 도하한 국군 제1사단 제18연대와 북한군의 접전 소리였다. 이 소리에 김포사는 즉각적으로 김포비행장을 공격했다. 그러나 화기의 차이로 인해서 김포사의 공격은 성공치 못했고, 전황이 안 좋아지자 최복수 중령[13] 이 기관총을 장착한 짚차를 몰고 활주로 돌진하여 옥쇄하였다.

결국 김포사는 공격을 멈추고 소사로 후퇴하였다. 김포사가 전열을 가다듬는 동안 국군 제1사단 제18연대는 차례대로 행주나루터로 도하하였다. 제18연대는 다른 연대와 다르게 건제를 유지하면서 철수하였다. 특히 도하도 제1대대, 제2대대, 제 3대대 건제 순으로 도하하면서 최대한 건제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도하 직후 행주나루터에서 적을 마주쳤음에도 적을 물리치면서 퇴각할 수 있었다.

그런데 김포사 사령관인 우병옥 중령이 원미산에 올라가 권총으로 자살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지휘관의 부재로 김포사가 해체될 위기에 처하자 시흥사 김홍일 소장은 제18연대장 임충식 중령에게 그 지역부대를 통합 지휘토록 하였다. 임 중령은 제18연대를 중심으로 김포사 산하 부대를 장악해 나갔다. 임충식 중령은 김포비행장 이남에서 방어선을 형성하여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의 공세를 김포사 병력만으로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6월 30일 김홍일 소장은 김포사를 지원하기 위해서 제5사단 제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을 신임 김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제5사단 병력을 수습하여 김포지역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새로 투입된 병력만으로 김포를 방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김포비행장 탈환작전은 실패하였다.

김포방면 방어작전은 매우 어려운 작전이었다. 한강선과 달리 전차를 막을 장애물이 없었고, 국군은 지휘체계나 건제가 엉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북한군을 저지한 김포사의 공헌은 매우 중요하다. 김포사 장병들이 목숨을 바쳐 이 지역을 방어했기에 한강선 방어막도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이후 김포사는 시흥사 산하로 편입되었다.

시흥사는 한강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한 다음 7월 3일 철수하기 시작했다. 7월1일에 일본에 있던 미 스미스특무부대가 부산에 상륙했고, 이에 국군은 스미스부대가 대전에서 전개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수원이북에서 방어를 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따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수원북방에서 북한군을 지연시키기 위해 축차 방어진지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병력과 장비의 열세로 방어선을 지탱하기 어려웠고, 결국 7월 4일 하루만에 수원이남으로 후퇴해야 했다. 육군본부는 차량으로 수원에서 철수해 평택에 집결하였고, 시흥사는 서해안과 국도로 분산 남하해 오산에 집결하였다. 시흥사는 오산에 미 스미스특무부대를 만나 용기를 가졌고 물품을 보급받았다. 이렇게 오산에서 방어선을 형성하려고 준비하던 중에 미군 공군기가 국군의 철수차량에 폭격하여 귀중한 보급품을 상실하였다.[14]

한강선 방어작전의 중요한 성과는 첫째, 앞에서 말했든 병력을 수습 재편했다는 것이다. 국군은 한강이북에서 대부분의 부대가 와해되어 분산 철수하였다. 이 분산된 병력을 수습하고 다시 재편은 국군이 제1군단을 편성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둘째, 이 작전을 통해 미군이 투입될 수 있는 시간을 벌었고, 이로인해 미 지상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과 공산을 확보하였다. 셋째. 국군이 북한군의 작전목표를 분쇄시켰다. 북한군은 서울에서 국군을 전멸시켜 이후 쉽게 전과확대[15]하려는 계획을 무마시켰다.

시흥사가 한강선 방어작전이 성공했던 요인으로 총 네 가지가 꼽힌다.

  1. 방어작전에서 하천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였다. 한강 철교 북안에 대해 위협사격을 실시한다든지, 적의 도하예상지점에 병력을 배치하는 등 하천의 이점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였다.
  2. 미군 공중 전력의 효과적인 활용이었다. 미 공군기가 한강 이북에서 실시한 대규모 폭격은 북한군 전력에 큰 타격을 주었고, 한강 도하작전에 큰 시간이 걸리게 만들었다. 특히 미 공군은 북한군의 주간 도하 및 기동작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3. 김포사의 성공적인 측면 방어이다. 김포사 병력은 열세한 병력과 장비를 가지고도 북한군 제6사단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였다. 만약 이를 저지하지 못해 북한군 6사단이 영등포일대로 진출했으면 한강선의 국군은 고립된 채 분쇄당했을 것이다.
  4. 김홍일 소장의 탁월한 지휘능력과 시흥사 예하 장병들의 투절한 애국심이다. 김홍일 소장은 사령관에 임명됨과 동시에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병력을 조기에 수습하여 부대를 재편성하였고, 또 신속하고 적절하게 지휘관을 임명하여 전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였다. 동시에 국군 장병들의 희생정신은 가히 경의적이라고 평가된다.[16] 국군장병들은 탄약과 장비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적을 저지하기 위해서 목숨바쳐 싸웠다. 제8연대의 경우 하루에도 수차례씩 여의도를 통해 영등포로 진출하려는 북한군 제4사단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물리쳤으며 노량진철교를 통해 적 전차가 도하하기 전까지 한번도 방어선이 돌파되지 않았다.

참고문헌[편집 | 원본 편집]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작전』

각주

  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87
  2. 참고로 이는 한국전쟁 원인의 전통주의적 입장의 시초가 된다.
  3.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p.95-96
  4. http://airwarfare.cafe24.com
  5.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103
  6. 이 논평은 들은 맥아더는 국군이 망한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참모에게 이야기했다 카더라
  7. 총참모장의 전쟁 구상이 너무 막연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김홍일 소장은 아군의 숫자와 적군의 숫자를 파악하고 이에 따라 시급한 것이 무엇이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고하였다.
  8.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104
  9. 낙동강 전선도 한강선에 비해서 그렇게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10. 김홍일 소장은 1918년 상해로 망명하여 중국 강무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으로 활동하다가 한국의용군 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1925년 중국 국민당 군에 가담하여 사단장 및 군단장 대리로 중일전쟁에 참여하여 지연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이후 광복군 참모장 겸하였다. 당시 국군에서 유일하게 사단급 이상 대부대를 지휘 경험이 있었고, 지연작전을 수행한 인물이었다. 참고로 백범일지에 나오는 윤봉길 의사에게 도시락 폭탄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국인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사실은 중국인이 아니라 김홍일 장군이다. 또한 국군 역사상 유일하게 소장으로 임관한 분이다. 후임이 왔는데 별이 두 개다.
  11. 채병덕 최고의 선택
  12. 맥아더가 혼성8연대 진지에 있는 일등중사를 보자 ‘너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거냐?"라고 물으니 중사왈 "너나 나나 군인이고 군인은 명령에 죽는거 아니겠냐? 그러니 나는 철수명령이 내려지면 철수하고 아니면 여기서 죽을 것이다."라고 대답하니 맥아더가 감동을 먹었다는 이야기
  13. 최복수 중령은 구일본군 육군사관학교 58기로 33부대를 거친 경험이 있어 정보학교인 남산학교 건립과 발전 그리고 정보장교 육성에 큰 열정이 있었다. 또한 북한군과 맞서 죽음으로 적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때 나이 겨우 28살이었다. 묵념
  14. 현재와 달리 과거는 폭격은 조종사의 육안으로 통해 이루어졌다. 해전과 달리 육전의 경우 비슷해고 당연히 오폭이 많았다.
  15. 군사용어로 적의 주력을 격퇴하고 후방의 빈 공백지를 점령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땅따먹기다.
  16.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