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부지역 작전

본 문서는 『6.25전쟁사 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전투』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 ISSN 1739-2705
중동부지역 작전
군사 충돌 정보
북한의 기습남침
날짜 1950년 6월 25일 ~ 30일
결과 북한의 개발살 피로스의 승리[1]
북한의 전반적 전략에 대대적 차질 발생
북한 제2군단 인사체계 변경 모가지 땡강
미국의 참전
교전단체
북한 대한민국
김광협 소장
임해 소장
최인 소장
이청송 소장
김창덕 소장
전우 소장
김종오 대령
고시복 중령
병력:
36,938 명
병력:
9,338 명
손실:
사상 6,792 명
포로 122 명
손실:
사망 52 명
부상 353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중동부지역 작전은 1950년 6월 25일부터 30일까지 중동부 전선에서 한국군 제6사단이 북한군 제2군단의 제2보병사단, 제5보병사단, 제12보병사단[2], 제603부릉부릉모터사이클연대와 치른 전투다.

제2군단은 병력을 우회기동시켜 수도권에 있는 국군의 퇴로를 차단해 섬멸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6일에 걸친 전투로 북한군 2개 사단은 큰 피해를 입었고, 이로 인해 제2군단의 진출이 지연되었다. 북한은 4배의 병력과 10배의 화력을 앞세워 국군을 공격했지만 국군 제6사단은 지형지물을 이용한 효과적인 방어를 실행하였다. 결국 제6사단의 분전에 국군은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설치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었고 동부전선의 제8사단은 전력을 유지한 채 후퇴할 수 있었다.

전투전 상황[편집 | 원본 편집]

북한군[편집 | 원본 편집]

남침계획을 수립한 북한은 1950년 6월 12일 대기동작전훈련으로 가장한 부대이동을 실시, 23일까지 38도선에 전개를 완료하였다. 북한군은 소구경에서 대구경에 이르는 각종 포를 보유해 야포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화천-춘천 축선 공격을 담당한 제2보병사단은 6월 10일 함흥을 출발해 6월 17일 추곡리, 장촌리, 원천리에 집결하였다. 군단의 조공인 제2사단은 첫날 춘천-가평을 점령한 후 둘째 날 한강을 도하해 국군의 예비전력을 차단하고 제1군단의 좌측방을 엄호하기로 했다. 제2사단은 1949년부터 산악전에 중점을 둔 훈련을 받았으며 대부분 병사는 6개월의 군사훈련을 마친 상태였고 북한군 7개 사단 중 최우수사단으로 선정된 경력이 있었다.

6월 18일 원산을 떠나 23일 대목리, 선수리에 도착한 제12보병사단은 첫날 인제-홍천 축선을 공격, 둘째 날 홍천을 점령해 원주-여주를 차단하고 이천-수원으로 우회기동하는 제603모터사이클연대의 좌측을 엄호하면서 홍천-여주로 진출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기로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및 국공내전으로 다져진 제12사단은 주로 한인계 중공군 출신이며 1950년 3월 편성되었다. 비록 급편으로 인한 훈련과 협동작전 능력이 떨어졌지만 실전경험이 풍부한 병력이었으며 산악훈련을 받았다.

6월 20일 나남에서 양양으로 이동한 제2군단의 예비대 제5보병사단은 제12사단이 공격을 시작하면 뒤를 따라 홍천에 투입되어 횡성-원주로 진출하기로 하였다. 최종적으로 군단의 목표인 원주-삼척선의 점령이 이들의 임무였다.

1949년 8월 중국에서 입북한 조선의용군 출신으로 이뤄진 제603모터사이클연대는 제12사단을 따른 뒤 수원 이남으로 우회하여 수원-원주-섬척선을 점령하는 기동전을 위시하였다. 그곳에서 유격부대와 합류해 국군의 퇴로를 차단, 수원의 점령이 목표였다.

제2사단의 우측엔 포천-의정부-서울 공격과 국군 제7사단을 담당한 제2군단 제3보병사단이 배치 되었으며, 제12사단의 좌측엔 38경비 제1여단 예하 7개 대대와 제5보병사단 제10연대가 강릉의 국군 제8사단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악몽이 시작되었다. 위 계획 중 하나라도 제때 들어맞은 게 있어야지.

한국군[편집 | 원본 편집]

중동부지역 방어를 담당한 제6사단은 1949년부터 현리에서 가평에 이르는 84km의 지역을 맡고 있었다. 제6사단의 우익은 789고지를 경계로 제8사단, 좌익은 적목리를 사이로 제7사단과 연계하였다. 사단 우일선 제2연대는 홍천에서 제8연대와의 교대를 6월 22일에 완료하였고, 좌일선 제7연대는 춘천을 중심으로 방어를 담당했다. 예비대 제19연대는 원주에 위치했다.

사단 예하 연대들은 이동과 연대간 교체를 수시로 반복했는데, 제19연대는 남원에서 공비를 격퇴하고 원주에 정착, 제2연대는 옹진에서의 전투 뒤 서울로 복귀한 후 홍천으로 이동, 제7연대는 청주에서 춘천으로 이동 후 신남에서 전투를 벌이는 등 대부분이 지형을 숙지하고 실전 경험을 쌓은 상태였다.

제6사단은 만약에 대비해 북한이 침범할 시 험준한 산악지대를 이용해 유격전과 방어전투로 적을 저지하며 제7사단에 화력지원을 하여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나가도록 계획되었다. 즉 제6사단의 작전 개념은 춘천의 방어에 중점을 두고 제16야전포병대대를 춘천에 배치해 방어지역 전반에 포병 지원이 가능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기초로 적을 격파하여 38도선을 되찾는 것이었다.

제7연대 담당 지역엔 적의 예상 침투경로에 50cm 두께의 철근 콘크리트 진지를 건설하고 통나무로 유개호를 만들었으며 호와 호 사이를 교통호로 연결하였다. 추가적으로 철조망을 쌍선으로 설치하고 그 사이에 대인지뢰를 매설하는 등 큰 보강을 하였지만 여건상 종심진지 구축이 힘들었다. 반면 제2연대는 시간적인 이유로 제7연대만큼 진지를 강화할 수 없었으나 연대장의 요령으로 기존의 진지를 보강하는 임시조치를 취했다.

제6사단 특히 제7연대는 대부분의 장교들을 해당학교에 파견해 교육을 마치도록 하였으며 제16포병대대장은 포병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가혹할 정도의 주야간 훈련을 강행했으며, 심지어 군의관도 포사격이 가능하도록 교육시켰다.[3] 이렇게 대한민국 국군의 포병사랑은 시작되는데...

주요 전투[편집 | 원본 편집]

결과와 평가[편집 | 원본 편집]

국군 제6사단은 북한군 제2사단과 제12사단의 기습공격을 받았지만 철저한 전투준비와 공세적 방어 누군가가 모델 원수를 연구했나?, 지형의 적절한 사용으로 훌륭한 방어전을 펼쳤다. 또한 정찰대를 통한 높은 정보력, 육군본부의 명령을 씹으면서도 현지 지휘관의 재량으로 장병들의 외출 자체, 간부교육의 철저함과 실전경험, 우수한 포병 전개로 북한군의 전략을 5일이나 지연시켰다.

북한군은 개개인의 전투능력은 우수했지만 전투 및 전략차원에서 심각한 단점을 드러내었으며 통신장비의 부족으로 적시에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4] 게다가 주먹구구식의 진행으로 창의성이 결여되어 본래의 임무만을 수행하였다.[5] 마지막으로 국군을 얕보아 무모한 공격을 감행하다 국군의 화망에 걸려 전멸하는 경우가 잦았다.[6] 반면에 국군의 인명 피해는 적었지만 중장비의 손망실이 컸다.

물론 국군도 소양교의 중요성과 폭파 건의를 묵살하는 등 작전상 실수를 여러번 저질렀지만 그때마다 재량을 발휘해 긴급조치를 취했다.[7] 특히 제16포병대대의 김성 소령은 꼼꼼한 계획을 통해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화력을 퍼부었으며 제2연대가 불리해지자 부대의 일부를 이동배치해 지원토록 하여 소방수의 역할을 단단히 했다. 포병은 전장의 신이다.

개전 당시 제6사단은 충분한 탄약을 확보한 상태였으며 작전 중에 탄약 지원이 원활하게 이루어져 보급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전투가 벌어지자 지역주민은 적극적으로 제6사단을 지원해 탄약고가 위험해지자 다른 위치로 운반하는 등 큰 도움을 주었다.[8] 그렇게 김일성이 기대하던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창 끝이 북쪽을 향했던게 문제지. 그러나 제6사단은 차량 부족을 겪고 있었으며 전투의 우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부대 투입엔 북한군에 끌려다니는 경향이 있었다.

이후[편집 | 원본 편집]

6월 30일 제6사단의 모든 부대가 홍천에서 철수를 시작하였다. 이 무렵 서울이 합락되어 육군본부가 수원으로 이동해 강릉 방면의 제6사단과 제8사단의 지휘가 불가능해지자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이 원주에 급파되었다. 작전국장은 제6사단의 좌측인 여주의 경계지시를 내리고 제8사단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7월 1일 제6사단은 충주로 부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하였다. 원래 원주에서 제8사단의 엄호를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제8사단이 이동중이고 통신이 불가능하자 부득이하게 원주를 포기했다.

제6사단 제7연대는 제8사단에게 신림고개 저지임무를 인계하라는 명령을 받고 신림고개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북한의 정찰대가 남하하는 것을 포착하자 공격을 해 장갑차 2대와 사이드카 3대를 노획하였다.

7월 2일 제7연대는 제8사단 제10연대에게 임무를 인계하고 충주로 철수하였다.

각주

  1. 피로스의(Pyrrhic) 승리는 많은 희생을 댓가로 승리한 것을 뜻한다.
  2. 제7사단이 제12사단으로 명칭을 바꾸었다는 것이 정론이었으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제7사단 명칭 변경설은 오류고 제12사단이 맞다고 한다.
  3. 이 덕에 제16포병대대는 전역 전반에 걸쳐 골때리는 활약을 하게 된다.
  4. 춘천-가평 전투의 제12사단 제31연대 참고.
  5. 제2사단이 소양강 도하에 연속 실패하자 가평 또는 소양강 상류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묵살되었다.
  6. 피해 규모 참고. SU-76과 같은 자주포를 갖추었음에도 말문이 막힐 정도의 교전비를 보였다.
  7. 국군의 실수엔 사전 계획이 수립되지 않은 이유가 가장 컸다.
  8. 제6사단과 주민의 신뢰는 높았으며 전쟁이 일어나기 전 진지 강화에도 손을 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