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창고개 전투

본 문서는 『6.25전쟁사 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전투』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 ISSN 1739-2705
원창고개 전투
군사 충돌 정보
중동부지역 작전
날짜 1950년 6월 28일 ~ 29일
위치 원창고개
결과 북한의 승리
교전단체
북한 대한민국
이원성 대좌
임부택 중령
김용배 소령
김종수 소령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제1대대의 춘천 전투 활약에 삐진 제2대대의 분노. 원창고개 전투는 1950년 6월 28일 ~ 29일 사이에 제1, 제2대대 주축의 제7연대가 제3대대, 제19연대, 제16포병대대 일부와 함께[1] 연대를 추격하는 북한군 제12사단 제31연대와 붙은 전투다.

전투의 정점은 제7연대 제2대대가 원창고개 진지에 남아 철수를 엄호하는 과정에서 일어났으며, 제2대대는 북한군을 격퇴하고 철수하는데 성공했다.

전투전 상황[편집 | 원본 편집]

춘천을 점령한 북한군 제12사단 제31연대는 서울로 방향을 튼 제2사단과 달리 계속해 남하하였으며 제6사단 제7연대를 포위 섬멸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27일 제31연대는 제7연대에 가까이 접근해 진지를 구축하였다.

전투[편집 | 원본 편집]

6월 28일[편집 | 원본 편집]

08:00 보전포협동을 내세운 북한군은 제7연대를 세 방면에서 포위하기 위해 자주포와 포병이 집중된 주공이 연대의 정면으로 향했고 다른 두 무리가 좌우로 기동했다. 10:00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제7연대의 최전방 제2대대가 주공을 맞아 포병의 지원하에 3시간 동안 버티는 사이 보급로의 차단을 우려한 연대장 임부택 중령이 사단장의 사전 명령에 따라 원창고개로 병력을 철수시켜 방어진지 편성을 완료하였다. 원창고개는 굴곡이 많고 관측이 양호해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다.

12:30 북한군이 원창고개로 진격하였으나 제7연대에게 격퇴되었다.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북한군은 포격을 계속하였고 임부택 중령은 사현에 다시 방어선을 확보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13:00 제2대대가 엄호를 위해 원창고개에 남은 사이 연대 주력이 철수를 시작했다.

북한군이 접근해 공격했지만 공격에 불리한 지형이라는 것을 깨닫고 포병과 자주포를 이용해 집중 포격하자 제2대대의 참호 구축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놓였다.

6월 29일[편집 | 원본 편집]

제7연대 제2대대의 병사들은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빨리 싸우게 해주세요 전투다운 전투는 커녕 계속된 철수에 불평하기 시작했으며 원창고개에서 북한군을 개발살 전멸 시키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06:00이 되자 그들의 바램대로 대규모의 북한군이 제2대대로 돌진했다. 대대장 김종수 소령은 200m 이내로 접근하기 전까지 발포를 금지시켰으며 사격권 내로 북한군이 들어온 뒤에야 사격 명령을 내렸다. 집중사격을 받은 북한군은 큰 피해를 입었으나 인민 웨이브 머릿수를 이용해 계속해서 밀어닥쳤다.

11:00 1개 대대규모의 북한군이 백기를 들고 접근, 항복이라고 판단한 제2대대는 사격을 중지하였으나 페이크다 병신들아 가까이 다가온 북한군이 숨겨둔 기관단총으로 공격을 하는 기만전술을 사용했다. 혼란과 동시에 백병전으로 전환되었으나 제2대대의 승리로 끝마치게 된다.

철수한 제2대대는 13:00 사현에서 연대 주력과 합류하였으며, 연대는 사현을 떠나 후방에 방어진지를 점령하였다.

결과와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제2대대의 큰 활약으로 북한군의 포위기동을 차단한 제7연대는 전역에서 무사히 철수가 가능했다.

그리고 북괴가 백기를 들고 접근해도 절대 믿으면 안 된다는 큰 교훈을 남겼다. 북한에선 백기를 싸우자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각주

  1. 제3대대 주력은 서울로, 제19연대와 제16포병대대 주력은 사현으로 철수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