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문산-봉일천 전투

본 문서는 『6.25전쟁사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작전』 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 ISSN 1739-2705
개성-문산-봉일천 전투
Battle of Gaeseong-Munsan.jpg
군사 충돌 정보
서부지역 작전
날짜 1950년 6월 25일 ~ 28일
결과 북한의 승리
교전단체
북한 대한민국
미국
최광 소장
방호산 소장
최율석 대좌
백선엽 대령
최경록 대령
전성호 대령 (부상)
김점곤 중령
김익렬 대령
최영희 대령
유해준 중령
병력:
약 2만 1000명
122mm 유탄포 24문
76mm 유탄포 72문
45mm 대전차포 168문
T-34 40대
자주포 32문[1]

너무 분량이 많고 겹치는 부분이 많아 가장 오래걸리고 정성(?)이 들어갈 것 같지만 위키니트의 저력을 보여주겠습니다.

개요[편집 | 원본 편집]

개성-문산-봉일천 전투틑 북한군 제1보병사단이 25일 국군 제13연대를, 제6사단이 제12연대를 공격하며 시작되었다. 이에 국군 예비대 제11연대가 올라가 임진교를 중심으로 문산에서 방어를 하였지만, 북한군 주력이 26일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27~28일 전투로 국군의 일부가 역습에 성공하였으나 북한군이 미아리에서 서울 시내로 진출하였다는 소식이 전달되었으며, 이에 행주와 이산포 2개 지점에서 한강을 도하, 철수하였다.

국군 제1사단의 작전지역은 대체로 임진강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분리되며, 전방 38선 일대는 예성강을 중심으로 동서로 세분되었다. 지역 내에는 예성강, 사천, 사미천, 임진강, 문산천, 곡릉천 등 여러 하천이 있어 방어작전에 유리하였지만 반대로 철수작전에 큰 지장을 초래하였다. 철수를 하여 북한군의 입장이 되어보기.

전투전 상황[편집 | 원본 편집]

북한군[편집 | 원본 편집]

본래 국군 제1사단을 상대하던 북한군은 제3, 제7경비여단이었지만, 6월 23일 기동훈련을 가장한 제1보병사단이 남천에 배치되었으며, 중공군 제166사단과 독립군 제4사단이 모태인 제6보병사단이 사리원으로 이동하였다.

한국군[편집 | 원본 편집]

1950년 4월 22일 제1사단장에 부임한 백선엽 대령은 작전지역을 돌아본 방어계획을 전면 수정하였다. 유사시 개성, 연백, 청단 등 주요 지구를 포기하는 이 계획은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의 승인을 받았다. 총 3단계로 이뤄진 방어계획의 전면적 수정에 따른 재편성으로 제1사단은 6월 초까지 진지구축작업을 마치고 임진강 철교 폭파를 계획하였다.

제1사단은 중대 전술훈련을 마치고 대대 전술훈련을 하고 있었으며, 23일 비상경계가 해제된 장병들은 24일 육군본부의 명령으로 1/3이 휴가를 떠나고 남은 병력의 1/3은 외출 또는 외박 중이었다. 또한 보유차량의 대부분이 차량정비 계획에 따라 기지창으로 후송되었으며, 사단장은 6월 14일부터 보병학교 입교를 위해 자리를 비운터라 제11연대장 최경록 대령이 사단장 대행 중이었다. 추가적으로 용산의 육군회관 낙성식에 많은 고급지휘관들이 초대되어 전쟁 전 날 사단장대리 최경록 대령과 제13연대장 김익렬 대령 등 많은 장교들이 외출한 상태였다.

전투[편집 | 원본 편집]

제1차 방어선[편집 | 원본 편집]

청단-연백 전투[편집 | 원본 편집]

예성강에서 청단 서쪽의 해안까지를 담당한 제12연대 제3대대의 대대장 이무중 소령은 좌측 청단-대흥리에 제11중대, 중앙 대흥리-포운리에 제10중대, 우측 포운리에서 예성강에 제9중대를 배치하여 적의 공격을 대비토록 하였다. 대대본부는 연안에 위치하였다.

04:30 제11중대 제3소대장 박규송 소위가 기관총 소리가 들리자 각 분대장에게 경계를 강화토록 지시하였다. 얼마 후 총성이 멎더니 확성기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북한군은 의정부와 개성이 이미 점령당했고 너희들은 포위되었으니 손들고 투항하라고 헛소리 대남방송을 펼쳤다. 얼마 뒤 교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제3소대는 07:30 중대본부로 철수하였다. 제3소대는 중대장 한보석 중위로부터 대대본부가 있는 연안으로 출동하라 명령을 받았지만 이동 과정에서 철수중인 화기소대를 만나 이미 연안이 점령되었다는 말을 듣고 방향을 돌려 중대와 합류해 용정리로 철수하였다.

제9중대의 경우 03:00 예성강에 보낸 정찰대로부터 북한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으며, 04:30 제2소대로부터 적의 포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에 중대장 김두열 대위가 예비소대를 치악산 방면으로 파견했지만 이미 치악산을 선점한 북한군의 박격포 공격에 철수하였다.

날이 밝자 중대장은 백천서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데 "인민군이 내려왔으니 다같이 항복합시다"였다. 그 말을 들은 중대장은 "개소리 그만하라 빨갱이 새끼야"라고 했다 카더라. 이후에 알게 되었지만 북한군이 백천경찰서를 점령하고 서장을 사칭해 건 전화였다. 빨갱이 맞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제3대대 부대대장 박관영 소령은 제9중대에게 강화도로 철수하라 명령을 하달했다. 철수 과정에서 예상강 교량의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

연안의 제3대대 본부와 제10중대는 적침보고에 따라 비상령을 하달하고, 연안서와 협조해 사이렌을 울려 영외 거주 장병, 외출 방병, 그리고 비번 근무중인 경찰까지 빠르게 소집하였다. 제10중대장 조기백 중위는 05:00 제1소대를 출동시켰지만, 전방의 207, 209고지를 선점하고 있던 제2, 제3소대는 이미 북한군의 포격과 공세로 인해 그곳을 넘겨주어야 했다.

제3대대장은 민관의 철수를 위해 비봉산을 장악하여 시간을 벌려고 하였지만 이미 북한군의 수중에 들은 후였다. 10:00 대대는 철수를 시작하였고, 13:00에 석포에 도착하여 어선으로 강화도로 철수하였다. 제11중대는 교동도로 철수하였으며 대대의 일부 병력은 인천으로 철수하였다.

개성 전투[편집 | 원본 편집]

제12연대 제2대대는 예성강 동안에서 제13연대가 있는 대원리까지의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제5, 제6, 제7중대 순서로 배치된 상태였다. 04:00 포성에 잠을 깬 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작전장교에게 교전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대대장은 먼저 연대장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각 중대장에게 현 진지 고수명령을 내렸다. 이때 개성시내에서도 포탄이 낙하되어 시내가 혼란에 휩싸였다.

지역 내 주요 도로를 담당했던 제5중대는 1개 대대규모의 북한군에게 기습을 받아 분산되고 연락선이 차단되었다.

송악산에 배치된 제6중대는 집중 포화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고, 통신기기가 파괴되었으며 안개로 인한 시계제한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거기에 중대장이 백원담 중위가 사망하면서 중대는 와해되었다.

제7중대장 김영선 중위는 03:00 비둘기고지에서 총격전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고 현황을 살펴보았다.[2] 중대장이 돌아서려고 할 때, 북한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중대장은 지휘를 위해 관측소로 향했지만 이미 북한군이 인공기를 꽂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에 중대장이 본부요원에게 철수를 준비시키고 대대본부에 보고하자 대대본부가 위치한 자남산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07:00 중대가 자남산에 이르자 북한군이 밀려들고 있었기에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송악산 지역 고수에 실패하고 철수중인 대대장과 일부 병력은 문산으로 이동중인 제5중대와 만났다. 대대장은 낙오병과 함께 연대본부로 이동했으나 이미 본부 방향에서 화염이 치솟고 있어 다시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예비대인 제1대대는 24일 오후부터 장병들의 외출 외박으로 일부만이 남고 거의 비어 있었는데, 25일 아침 연병장에 포탄이 떨어지자 연대장 전성호 대령이 제1대대의 잔여병력과 본부병력을 고남리에 배치하여 공격에 대비시켰다. 그러나 멀지 않아 연대장이 연대참모를 집합시켜 철수준비를 지시하고 불필요한 물자는 파기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참모들이 연대장에게 군인가족을 빨리 남하시키자고 하자 우리 가족이라도 살려요!! 연대장은 "개성시민 피난 대책도 없는데 군인가족이라고 부족한 차량을 주냐"라고 대노했다고 한다. 진정한 군인

연대장 전성호 대령의 과거를 소개하자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일본 제국군과 맞서 싸운 독립투사였고, 1945년 해방 때 귀국해 53세라는 나이에 소령으로 임관하였다. 군대 두 번 다녀오기. 이후 제18연대 부연대장을 거쳐 제12연대장으로 임관해 서부의 요충지인 개성의 경비를 맡았다. 국K-1들 보고 있냐?

고남리 부근에서 제2대대의 철수병력과 만난 연대장은 제1, 제2대대장과 함께 사후대책을 논의하였고 개성시내에 있는 북한군을 역습하기로 결정했다. 제2대대장 한순화 소령이 제1중대와 특공대를 이끌고 10:00 개성시 남대문까지 전진하여 대열을 정비중인 북한군을 기습,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곧바로 북한군의 반격에 버티지 못하고 철수하게 되었다. 이들은 17:00 영정포에 도착하여 어선으로 19:00 김포로 도하 퇴각하였다.

연대본부와 제1대대는 문산으로 후퇴하였다.

고랑포 전투[편집 | 원본 편집]

고랑포에서 대원리간의 경비임무를 맡은 제13연대 제3대대는 지휘소를 아곡동에 두고 제11중대를 좌측, 제10중대를 우측, 제9중대를 예비대로 두었다.

제11중대는 04:30 부터 전투를 시작하여 전방 소대들이 북한군 일부를 격퇴하고 이후 공격에 대비하였으나 이미 북한군의 주력은 대덕산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전방 소대는 임진강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고 장단을 우회해 오후에 임진강을 도하하였다.

동일한 시각 제10중대장 박형수 중위는 112고지의 제1소대장 장재만 중위에게 1개 중대가 진지에 올라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이후 연락이 끊어졌다. 대대장 유재성 소령으로부터 고랑포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은 중대장은 제1소대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갔지만 북한군 선두부대가 사격을 집중하자 방향을 틀어 임진강 남쪽의 59고지에 부대를 배치했다. 북한군이 임진강을 도하를 시도하자 우선적으로 이미 임진강 남쪽 53고지를 점령한 북한군에게 화력을 집중해 분산시킨 뒤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포격전을 벌였다. 06:00 중대의 포탄이 바닥나자 북한군이 자하리쪽으로 남하했다. 북한군이 대대본부까지 다다랐을 것이라 판단한 중대장은 석포로 철수를 명령했다.

대대장은 북한군을 지연시키면서 철수해 금곡리 부근에 집결하라는 지시를 받고 각 중대에 하달하려 했지만 이미 통신이 차단된 상태였다. 대대장은 전방중대가 여의치 않은 사태에 직면했다고 판단, 91고지와 무명고지를 점령해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기로 했다.

06:00 포탄이 숙영지 주위에 떨어지며 전차 7대가 남하하자 대대장은 제9, 제12중대의 중화기를 도로변에 배치시켰다. 장단경찰서의 경비주임 김기태 경위가 탑승한 차량을 파괴한 전차가 잠시 멈추자 바주카와 박격포 사격 명령을 내렸지만 파괴에 실패하고 오히려 역습을 당했다. 대대장은 제9중대 제1소대장 장두철 중위를 포함한 8명의 특공대를 선발하여 저지시키려 했지만 모두 전사하고 실패했다. 이어 화기중대의 김일하 병장 등 7명이 특공대를 자청해 전차의 측면에 수류탄을 투척했으나 실패하고 되돌아왔다.

대대장은 현 위치 사수가 불가능하자 남쪽 85고지로 철수시켰다. 17:00 제10중대와 합류하고 강을 건너 22:30 금곡리에 집결했다.

사령부 상황과 증원[편집 | 원본 편집]

25일 07:00 보병학교에서 교육중이던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으로부터 북한군이 남침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사단장은 급히 차편을 얻어 용산의 육군본부에 출두하였다.

사단장은 미 고문관 로크월 중령과 제11연대장 최경록 대령과 함께 수색에 위치한 사단사령부에 돌아와 1/3의 병력이 자리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사단장은 최경록 대령에게 병력이 집결되는대로 전방에 투입시키도록 지시를 내렸고, 참모장 석주암 대령에게 문산에 사단 지휘소를 설치하도록 하였으며, 다시 정오에 파주로 지휘소를 옮겼다.

14:00 제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이 부상을 입은 채 사단 본부에 돌아와 기습공격으로 연대가 조기에 와해되고 제3대대의 상황을 알 길이 없다고 하자 사단장은 전 대령을 후송 조치하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의 명령을 받고 보병학교와 육군사관학교의 병력으로 편성된 서울특별연대가 증원병력으로 때마침 도착하였다.

사단장은 육사교도대를 제13연대에, 보병학교 교도대를 제11연대에 재배속시켰다. 그리고 조금 뒤 역시 총참모장의 명령을 받은 제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이 예하 제3대대의 지원 소식을 알렸다. 당시 전주에 있던 제3대대는 이동 도중 전투기의 공격을 받자 열차에서 내려 금촌 북쪽까지 행군하였다.

사단장은 우일선은 파평산을 확보해 저지할 수 있지만 좌일선의 경우 문산 돌출부라는 조건 때문에 서측방의 위협이 증대될 것이며 도하를 시작하면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제15연대 제3대대에게 금촌 북쪽의 고지군을 점령해 방어하도록 명령하였다.

16:30 제1사단 지역으로 도착한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대전차포 1개 중대를 문산에 배치하고 장갑소대에게 정찰임무를 전담시켰다.[3]

17:00 백선엽 사단장의 명령을 받은 제15연대 제3대대가 용산까지 진출했다.

한편 광주에 위치한 제20연대는 백운산의 공비토벌 명령을 받고 이동중인 예하 제3대대를 서울로 돌렸으며, 제3대대는 26일 문산에 도착하게 되었다.

임진강 철교 폭파[편집 | 원본 편집]

제1사단 공병대대장 장치은 소령은 사단장의 철교폭파 준비명령이 내려지자 대대 작전과장 정극서 대위로 하여금 폭파계획을 시행하도록 지시했다. 정대위는 제3중대의 주둔지로 이동해 중대장 김동일 대위를 찾았으나 행방이 묘연하자 직접 폭파를 지휘하기로 했다.

정대위가 교각에 폭약을 장전하고 대기하였는데 대대장 장소령이 차안쪽이 아니라 대안쪽에 설치하라고 명령하여 다시 대안쪽 교각에 장전을 마치고 명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사단이나 대대로부터 폭파명령이 오지 않자 제12연대의 철수 후 폭파하기로 결정했다. 그 뒤 제12연대의 주력이 통과하자 폭파 시기가 왔다고 믿고 폭파조에게 남쪽 쳘고인 경의선 철도를 폭파하도록 명령했다. 남쪽 교량을 성공적으로 폭파하고 북쪽 교량을 폭파하려고 했으나 배선이 끊어졌는지 실패했다. 정대위는 폭파병에게 다시 배선을 연결하고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폭파 과정에서 북한군의 사격을 받자 정대위와 폭파조는 폭파 상황을 확인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후 북한군이 교량을 이용한 것을 보아 완파시키지 못했다고 이후 판단되었다.

제2차 방어선[편집 | 원본 편집]

문산 전투[편집 | 원본 편집]

25일 북한군이 고랑포-청단의 국군 제1사단 지역을 전차와 함께 2개 사단으로 돌파하자 제1사단의 방어지역이 90km에서 임진강 방어선인 20km로 줄어들었다. 북한군 제1사단은 임진강 상류의 국군 제13연대를 공격하였으며 북한군 제6사단은 국군 제13연대 제2대대를 추격해 개성 남쪽으로 향했다.

수색에 위치한 국군 제11연대는 08:30 대대별로 군장검사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이 나타나 연대장을 찾았다. 그러나 연대장이 아직 사단에서 돌아오지 않아 대신 인사주임 김정렬 대위가 총참모장을 맞이했으며, 총참모장은 용감하게 싸우라며 격려하였다.

문산에 지휘소를 설치한 연대장은 제12연대의 엄호와 경계를 위해 제2대대 제7중대를 임진강 북쪽에 배치하였다. 15:00 북한군 기마대가 접근하자 100m 이내까지 기다렸다 급습해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곧 대규모의 적이 접근하자 본진으로 철수하였다.

문산 돌출부 최선단에 진지를 점령한 제1대대는 국도의 좌측에 제2중대, 우측에 제1중대를 배치하고 제3중대를 예비대로 삼았는데 자정이 지나고 26일이 되자 전방 초소로부터 임진강 철교를 통해 북한군이 넘어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대대장 고한조 대위는 5대의 전차가 접근하자 최대한 끌어들인 다음 사격 명령을 내렸으나 격파에 실패했다. 곧이어 북한군이 밀려오자 제1대대는 밀리게 되었다.

연대장은 제1대대 주진지가 무너지자 역습명령을 내렸다. 이에 제3대대가 제1대대와 합류해 역습을 감행했는데, 제1대대장이 지금 상황으론 역습이 불가능하다고 반발하며 연대본부로 내려가는 명령 불복종 사태가 발생하자 부대대장 고임현 대위가 제1대대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13:00 제1, 제3대대가 어느 정도 역습에 성공했지만 제3대대 좌측 방면으로 새롭게 북한군이 나타나자 연대장이 보병학교 교도대에게 가담하라고 지시하였다. 교도대대는 단기간에 제3대대의 위협을 제거, 전선을 유지시켰다.

파평산 전투[편집 | 원본 편집]

후방에서 대대 기동훈련 중이던 제13연대 제1대대는 25일 04:30 고랑포 방면에서 들려오는 포성에 "괴뢰군들이 또 지랄 시작이구나"고 하며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 그러나 연대와의 통신이 여의치 않자 대대장 김진위 소령은 연대와의 연락망을 복구시키고 각 중대에게 준비명령을 내렸다.

얼마 뒤 북쪽에서 많은 병력이 내려온다는 보고가 전달되자 대대장은 각 중대를 진지에 투입시켰으며, 우연히 문산우체국과 연결이 되자 제1대대에 탄약을 공급 해달라는 내용을 연대본부에 전해달라고 말했다.

10:30 탄약보급이 끝나자 고랑포-자하리 지역에서 침공한 북한군 1개 대대규모가 제1대대의 정면에 공격을 시작했다. 북한군은 320번 도로를 횡단하며 우측의 제3중대와 중앙의 제1중대에 사격을 하며 동서로 흐르는 냇가에 접근했다. 대대장은 냇가를 건너오기 전에 사격을 하지 말라고 지시하며 포격 요청을 하였다. 국군의 포격이 집중되자 밀집대형으로 몰려오던 북한군이 큰 타격을 입었으며, 간신히 냇가를 건넌 무리는 각 중대의 집중사격을 받아 전멸하다시피 했다.

정오 제13연대의 좌일선 제2대대는 대대장과 장교들의 복귀에 따라 개석동 남쪽으로부터 임진강변에 연하여 남서 방향 사선으로 진지를 편성하였다.

14:00 적성쪽에서 전차가 제1대대 방향에 나타나 포격을 시작했다. 대대장은 전차들의 측방이 노출되었음을 목격하고 제1, 제3중대장에게 측면을 공격하라 명령했다. 그러나 0.5km 정도의 거리 때문에 명중률이 낮았으며, 명중 했더라도 파괴엔 실패했다. 전차가 끄떡도 하지 않는 모습에 병사들이 겁을 먹기 시작하자 대대장은 각 중대에 연락해 특공대 지원자를 선발했다.

대대 좌익의 제2중대가 중화기로 전차를 때리기 시작하자 전차 승무원들이 포탑 덮개를 닫고 전차포로 응사했다. 이 틈에 특공대가 가까이 접근해 공격했으며 총 5대의 전차의 궤도를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전차병들이 전차를 버리고 도망가자 안에 있던 물건을 노획하고 진지로 돌아왔다.

얼마 뒤 대대규모의 북한군이 둘로 나뉘어 다시 공격을 재개하였는데 대대가 연대의 모든 포병 화력을 쏟아부어 한 쪽을 30분만에 격퇴시키는 사이 다른 쪽이 냇물을 건너 무명고지를 점령하였다. 이에 무명고지에 포격을 집중 시켰으나 인접부대인 제7사단 제1연대가 동두천-의정부쪽으로 이동해 측면이 노출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14:40 제1대대가 전차를 상대로 전투를 치르고 있을 무렵 제2대대 제5중대가 중대규모의 북한군을 발견하였다. 중대는 장마루까지 접근하기를 기다렸다가 15분의 집중 사격으로 격퇴하였다. 그러나 15:00 북한군이 다시 장마루로 접근해 다시 교전이 시작되었다.

제2대대는 고랑포쪽에서 임진강을 도하한 대대규모의 북한군을 맞았다. 북한군은 1번 도로를 따라 전차와 더불어 대대 중앙을 공격하였다. 북한의 전차가 대전차포를 뚫고 접근해 사격을 하자 병사들이 대오를 이탈하였고 우일선 중대가 분산되면서 우측 제1대대와의 사이가 벌어졌다. 보고를 받은 연대본부는 금곡리에 집결한 제3대대로 역습을 감행하도록 명령했다. 밤새도록 이어진 전투는 새벽이 되어서야 진정되었다.

26일 서울특별연대 예하 육사교도대가 문산에서 밤새 행군해 파평산 우측에 도착하였다. 잠깐의 휴식 뒤 제1대대 우측을 보호하기 위해 357고지를 점령하려 했으나 이미 점령에 성공한 북한군에게 사격을 받았다. 이에 교도대는 목표를 바꿔 바로 아래쪽 무명고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상호간의 통신 부재로 357고지 점령에 실패한 육사교도대가 후퇴했다고 오판한 연대본부는 연대의 우측을 방어하기 위해 연대 직할대를 동원하기로 했다. 10:00 전 헌병대장 유중수 대위가 이끄는 연대직할대 병력이 교도대 후방에 위치한 211고지에 배치되었는데, 12:00 북한군의 공격을 받은 교도대가 물러나면서 연대직할대 또한 곡사포를 놔두고 철수하게 되었다.

교도대장 김응용 소령이 실종되고 교도대 제1중대 선임장교 최재균 중위가 출혈과다로 전사하자 육사 중대장 김철수 대위가 대신 중대를 이끌고 봉일천으로 철수하였다. 제13연대의 제2포중대장 전남식 중위는 포를 잃은 자책으로 자살했다.

13:00 또다시 대대규모의 북한군이 제1대대의 우일선 제3중대를 집중 공격했지만 중대장 백남원 대위가 포격 지원을 요청해 격퇴시켰다. 포격과 함께 파평산의 가파른 지형에 북한군은 제대로 공격할 수 없었다.

17:00 북한군이 이번에는 중앙의 제1중대를 공격하자 박격포와 곡사포를 이용해 방어하였지만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이에 제1중대장 장덕수 대위가 수류탄을 던지며 진두지휘 하여 북한군이 물러나게 하였다.

결국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집단이 1번 도로를 따라 제2대대를 횡단하며 남하해 연대의 퇴로가 차단 될 위협에 직면하자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사단을 최후저항선으로 철수시키로 했다. 비록 제11연대가 성공적으로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었지만 제13연대의 방어선이 뚫리게 되면 제11연대는 고립되어 포위되므로 두 연대를 동시에 철수시켜야 했다.

제1사단은 병력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야간철수를 계획했다. 전성호 대령 후임으로 온 김점곤 중령이 제12연대를 이끌고 사단 직할대와 제11연대를 엄호했다. 제13연대는 제2, 제3대대가 먼저 퇴각하고 여전히 전투 중이던 제1대대는 27일이 되어서야 철수를 시작했다.

철수 과정에서 임진강 철교를 건너 공격을 했던 제11연대와 보병학교 교도대대엔 차질이 있었다. 특히 보병학교 교도대대엔 철수명령이 너무 늦게 전달되어 철수시기를 놓쳤고, 그 과정에서 병력이 외해되어 전투능력을 상실하였다. 반면 제13연대는 비교적 손실 없이 철수가 가능했다.

제3차 최후 방어선[편집 | 원본 편집]

봉일천 전투[편집 | 원본 편집]

26일 철수를 개시한 국군 제1사단은 27일 아침 봉일천 전방에 방어선을 설치했다. 사단의 최후저항선인 이 방어선은 서에서 동으로 229고지-47고지-151고지-신산리-창만리를 연결했다. 이 지역은 문산에서 남하하는 북한군을 감제할 수 있으며 문산천을 중간에 끼고 있어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지만, 문산-서울의 1번도로와 법원리-광탄-벽제의 307번 도로로 기갑부대의 접근이 용이했다.

사단장은 작전지역의 특징과 아군의 상황을 감안해 방어작전만으론 최후저항선을 지탱하기 어렵다고 판단, 공세적인 방어작전으로 전환하였다. 다만 육군본부와 통신이 두절되어 우인접사단 제7사단과 제2사단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국군 제1사단이 철수함에 따라 북한군 제6사단은 완벽히 노출된 김포반도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1사단은 질서정연하게 철수하여 사단 건제를 대부분 유지하는데 성공하여, 서울방면 사단 중에서는 제일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각주

  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방어작전』, p.172
  2. 비둘기고지는 북한군의 위치에서 200m 거리로 평소에도 서로 욕배틀 욕설을 주고받았다.
  3. 장갑소대 M8 그레이하운드의 37mm 주포 위력은 별 볼 일 없었지만 장착된 무전기는 장거리 통신이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