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지역 작전

본 문서는 『6.25전쟁사 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전투』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 ISSN 1739-2705
동부지역 작전
군사 충돌 정보
북한의 기습남침
날짜 1950년 6월 25일 ~ 28일
결과 북한의 승리
북한의 전반적 전략에 대대적 차질 발생
교전단체
북한 대한민국
김광협 소장
오백룡 소장
박정덕 대좌
오진우 총좌
불명[1]
이성가 대령
최갑중 중령
병력:
14,000 명
병력:
6,866 명
손실:
사상 731 명

개요[편집 | 원본 편집]

동부지역 작전은 1950년 6월 25일부터 28일까지 동부 전선에서 한국군 제8사단이 내륙으로 침공한 제2군단 소속 제1경비여단, 제5보병사단의 제10연대, 그리고 동해안으로 상륙한 제945육전대와 제766유격부대와 맞서 싸운 작전이다. 특히 한국군 제8사단의 경우 2개 연대밖에 갖추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병력 부족 상황인데다, 전쟁 전 침투한 북한군 게릴라 토벌을 위해 그렇지 않아도 적은 병력을 더 쪼개놓은 상태였다.

반면 제5보병사단 제10연대를 배속받아 버프강화된 북한의 제1경비여단은 동해가도를 따라 남하하고, 제945육전대와 제766유격부대를 강릉 남쪽에 상륙시켜 국군 제21연대를 차단시키고 제10연대를 포위하고자 하였다.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갔다면 위키니트들이 작성한 데이터의 99%는 김씨 왕조를 찬양하고 있겠지. 그러나 북한의 상륙부대를 격멸하고 27일까지 강릉을 사수한 뒤 철수한 제8사단은 북한군의 작전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하였다. 게다가 작전지역 내 민간인들을 피난시키고 장기전을 북진이다! 그지 깽깽이들아! 대비하기도 하였다.

28일 강릉을 탈환(!)하기 위해 진출하던 중 육군본부에서 하달 된 전선균형을 위한 철수 명령에 따라 육본을 주깁시다 육본은 나의 원수 반격을 중단하고 대화-제천으로 이동하였다. 제8사단의 방어와 공격으로 북한군의 남진 속도가 지연되었으며, 동해가도를 통한 부산 공격 계획이 좌절되었다.

초기 방어작전의 콩라인. 제6사단만 아니었어도...

전투전 상황[편집 | 원본 편집]

북한군[편집 | 원본 편집]

동부지역의 북한군은 1950년 6월 10일부터 23일 사이에 훈련을 가장해 전개를 완료하였다.

제1경비여단은 양양-강릉 방면을 공격하고, 당일 강릉 남쪽에 상륙하는 부대와 합류해 한국군 제8사단을 섬멸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제1경비여단은 예하 7개 대대를 제1제대로, 제5사단 예하 제10연대를 제2제대로 편성한 후, 38도선을 돌파하도록 하였다.[2] 제1, 제5보병대대는 귀둔리-하남리, 제4보병대대는 하추리-현리-하남리, 제6보병대대는 원대리-갑둔리, 제2보병대대는 공수전리-서림리, 제3보병대대는 내현리-장리, 제7보병대대는 기사문리-주문진을 향해 공격하도록 하였다. 제10보병연대는 동해 연안을 따라 전과를 확대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로 했다.

제945육전대와 제766유격부대는 총참모부의 직속 부대로서, 두 부대 모두 23일 양양에 도착했다. 두 부대는 강릉 남쪽지역에 상륙하기로 계획되었으며, 24일 양양을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제945육전대는 강릉 남쪽 10km 지점에 상륙, 한국군의 증원 병력의 접근을 저지하고, 제1경비여단과 합류해 한국군을 포위 섬멸하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주로 남로당원 및 강동정치학원 출신으로 구성된 제766유격부대는 삼척에 상륙해 무장폭동을 유발하고 이것들 작전짠 것 보면 참 낙천적이다, 군수시설을 파괴, 한국군의 퇴로와 증원부대를 차단하기로 하였다.

한국군[편집 | 원본 편집]

제6사단 예하 제10연대와 제5사단 예하 제21연대로 편성된 제8사단은 제6사단 우측인 진흑동으로부터 동해안의 잔교리에 이르는 26km 길이의 38선 방어를 담당하였다. 사단은 창설 이후부터 전쟁이 시작되기 전 까지 게릴라 소탕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제10연대 제1대대는 진흑동에서 정족산의 12km 정면을, 제2대대는 동해안에서 연화동까지의 14km를 담당하였다. 제1대대는 제3대대와 임무를 교대하기로 되었었으나 전쟁 발발로 교대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제21연대는 1950년 5월, 8개월간 진행된 오대산 및 태백산지구 일대 게릴라 소탕작전을 일단락 지었으나 북한의 게릴라가 또다시 나타남으로서 소탕을 재개하였다. 이에 제2대대와 제3대대의 병력이 크게 분산되었다.

제8사단의 포병대인 제18포병대대는 주특기 교육 체계가 없던 창설 초창기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전투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역시나 포방부 준비성이 뛰어났던 제18포병대대는 전투 내내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3]

제8사단의 방어계획은 어떠한 경우라도 강릉을 확보한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4] 제10연대는 우일선으로서 동해안에서 정족산에 이르는 정면을 담당, 경계진지에서 최대한 공격을 저지하다 돌파될 경우 주문진으로 상대를 유인해 증원과 함께 포위하기로 했다. 철수 상황이 벌어지면 주진지로 축차 진입하여 반격을 감행, 공세로 전환하여 38도선의 회복을 노렸다. 제21연대는 좌일선으로서 정족산-진흑동에 이르는 정면을 담당, 적을 막는 것이 불가능 해지면 광원리로 철수하여 반격을 감행한다는 것이었다. 주진지마저 돌파되면 운두령에서 역습을 위한 부대 재편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제8사단은 탄생부터 1개 연대가 결여된 2개 연대로 이뤄진데다 38도선 경비와 게릴라 소탕을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병력의 집중이 불가능했다. 더불어 1950년 3월 자재와 예산부족으로 교통호와 진지 구축 작업이 중단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북한군 병사들이 1개월 뒤에 보자고 말했던 점 우리 중에 스파이가 있어, 야간에 남하하는 차량들이 목격되고 귀순병이 남침준비를 알리기도 했다. 이에 사단장은 육군본부의 특별경계령 해제를 씹고 무시하고 경계태세를 계속 유지시켰다.

주요 전투[편집 | 원본 편집]

결과와 평가[편집 | 원본 편집]

한국군 제8사단은 다른 사단에 비해 상황이 매우 열악하였다. 겨우 2개 연대가 26km에 이르는 38선을 경비하고, 게릴라로 인한 병력 분산은 사전에 마련한 방어계획을 펼치기는 커녕 제6사단과의 통신이 두절된 채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제8사단의 분투에 북한군의 초기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내가 못했으니 너도 못해야지. 물귀신 작전 성공! 당초 계획보다 5일이 지나서야 제1단계 목표인 삼척을 점령할 수 있었다. 제8사단의 방해로 동해가도를 통한 북한군의 포항, 부산 진출이 크게 지연되었음은 전역에 걸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러나 제8사단은 부차적인 임무인 게릴라 소탕작전을 지나치게 중시한 관계로 주임무인 전방 및 해안 방어 임무에 적합하지 않는 부대배치를 하여 예비대를 확보하지 못함으로서 전투력 집중을 기대할 수 없었다. 추가적으로 유기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해 지휘계통에 혼선이 있었다. 장병들의 외출, 외박을 자제시키고 민간인의 소개와 물자를 소산하는 조치는 적절하였지만, 전쟁 전 북한군의 분명한 남침 준비를 보았음에도 직접 침공이 있을 것이라고는 판단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8사단의 방어가 크게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38도선 방어선이 쉽사리 무너진 것은 통신이 두절된 각 부대가 고립된 것으로 잘못 판단해 독자적으로 철수를 한 원인이 컸다.

이후[편집 | 원본 편집]

제8사단은 28일 강릉 탈환을 위한 반격을 시도, 제21연대가 경포대까지 진출하였으나 육군본부의 명령을 받은 사단장은 반격작전을 취소, 철수를 시작했다. 본래 원주로 철수하려고 하였으나 북한군이 횡성에 진입했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진로를 바꾸어 평창, 영월을 거쳐 7월 2일 제천으로 철수를 완료하였다.

각주

  1. 조선인민군 해군 제945육전대를 이끈 부대장의 계급과 이름은 불명이다.
  2. 제10연대가 소속된 제5보병사단은 제2군단의 제2제대로서 제12보병사단을 따라 홍천에서부터 횡성, 원주 방면으로 진출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일부만이 제1경비여단을 보강하였다.
  3. 제6사단도 그렇고 제8사단도 포병대가 전투 내내 하드캐리를 하였다.
  4. 강릉이 쉽게 무너지면 북괴가 동해안을 통해 부산까지 연결되는 요단강 동해안 익스프레스가 완공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