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영향

6·25 전쟁대한민국북한은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다양한 영향을 끼쳤다.

부정적인 영향[편집 | 원본 편집]

수많은 인명피해[편집 | 원본 편집]

당장 전투로만 유엔군과 한국군에서 18만 명이 전사하였으며,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이 전사하였다. 이런 전투 외에 각종 학살과 폭격 등으로 발생한 민간인 사상자가 100만 단위에 육박하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낸 것. 이로 인한 전쟁과부와 고아의 발생은 덤이다.

지독한 사상 컴플렉스[편집 | 원본 편집]

본디 이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남한과 북한 모두 이념에 대해 그렇게 하드코어하지 않아 자유로운 이념과 종교 활동이 가능하였다. 남한에도 공산당이 있었고 북한에도 자유주의자가 있는 등 양국 다 제법 균형잡힌 안정된 모습을 취하고 있었고, 만약 이 상태가 그대로 이어졌더라면 양국은 동독과 서독 같이 지금보다는 좀 더 원만한 관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 이후 양국의 이념 활동은 극도로 경직되었다.

우선 한국 사회는 공산당이나 공산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떠는 사회가 되었다. 이후 독재정권에서 자신들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반공을 내세우며 반대파를 찍어누르는 구실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발목을 잡게 되는 원인이 된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면 '우리가 공산당에 맞서 싸운 민주주의 국가인데 뭔 소리냐! 우리를 전복시키려는 거 보니 넌 빨갱이가 분명하다!'(...)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면서 무고한 시민과 학생들을 셀 수도 없이 때려잡았다. 이는 이제 민주화, 자유화가 상당부분 이루어진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산주의의 공 자만 꺼내도 바로 민족의 반역자로 여기는 여론의 가혹한 반응 등으로 아직까지도 남한 내에서 공산주의를 향한 강한 적개심이 유효함을 선보이고 있다.

북한도 마찬가지라 전후 김일성은 자신의 파벌을 제외한 다른 파벌들에게 패전의 누명을 뒤집어씌워 죄다 숙청시켜 오직 자기 추종자들만을 남기는 절대적인 독재 체제와 여기서 비롯된 세습 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는 곧 김일성 스스로가 교주이자 신으로 군림하는 주체사상이라는 세계 최악의 막장 사이비 종교를 창시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한 북한 사회·경제·문화·교육·지리·생활의 막장화를 불러오게 된다.

긍정적인 영향[편집 | 원본 편집]

6·25 전쟁은 끔찍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전쟁으로 기왕이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 좋았겠지만,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이 전쟁이 몰고 온 긍정적인 여파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남북 대결 패러다임의 변화[편집 | 원본 편집]

사실 대한민국과 북한에는 당시 여러 호전론자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었다. 6·25 전쟁의 발발 원인에서 다룬 박헌영도 그 중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통해 서로를 흡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리낌없이 하였고, 국지전이 빈번했던 것도 이런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전쟁을 겪고 난 후 이러한 호전론자들의 상당수가 사라졌고, 전쟁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강력하게 퍼져 남은 동력조차 잃게 되었다. 덕분에 비록 '휴전' 관계임에도 오늘날까지 양국은 전쟁 한번 하지 않고 유지되게 되었다.

더불어 전쟁이 끝나고 그것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그 과정을 서로에게 과시하는 식의 새로운 대결구도가 형성, 이후 양국이 서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무의미한 손실도 매우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양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대한민국은 그것을 잘 이어나갔지만 북한은 중간에 침몰하여 사실상 만회하지 못할 나락에 빠진 상황이다.

완전한 계급제 철폐[편집 | 원본 편집]

사실 한반도는 6·25 전쟁의 배경에서 다루었듯이 자주적인 독립이 아닌 외세에 의한 독립을 거두었기에 사회 구조가 그대로였다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즉 일단 법으로는 모든 국민이 평등했지만, 앞집 김씨는 양반 출신 뒷집 정씨는 노비 출신 등 어디에 누가 살고 있는지는 그대로 이어졌고 이 때문에 제대로 된 '평등'이 이루어지진 못하였다.

하지만 전쟁으로 원래 살던 땅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전쟁의 포화를 피해 살아남기 위해 이리저리 피난을 가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서로가 어디의 누구였는지는 잊히고 말았다. 그 와중엔 죽어서 아예 잊힌 사람도 있고, 살아는 남았으나 기반이 파괴되어 전후에도 돌아가지 못한 사람도 있는 등 민족이 제대로 뒤엉켜버렸다.

게다가 이후 사회기반의 리셋으로 하루하루 끼니 걱정 하기도 모자랄 판국이 되어버린 탓에 먹을 것을 잘 구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대접받는 사회가 되었고 이런 판국에 양반이니 노비이니 하는 출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모두의 출신성분은 서서히 잊혀졌고 결국 비참하게나마 온 국민의 평등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전쟁 덕분에 평등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은 바로 이웃 국가인 일본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일본은 한국과는 달리 근대 와서 심각한 내전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누구는 카조쿠(화족) 출신이네, 누구는 부라쿠민(부락민) 출신이네 하는 것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지금까지도 민족차별이 빈번한 국가로 남아 있다.

물론 그 이후에 평등화된 사회를 지켜낸 것은 대한민국의 몫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은 신분제가 다시 등장했으니까.

미국과의 유대감 강화[편집 | 원본 편집]

전쟁을 통해 미군과 국군이 함께 싸우면서 양국의 유대감이 강화되었다는 점 또한 이점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국군은 미군과 함께 싸움으로서 미군의 최신식 장비와 그에 걸맞는 교리들을 다수 습득하여 전력이 강화되었다. 더불어 바로 실전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근 백여 년 간 전쟁다운 전쟁 한번 없던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교전 경험을 갖게 되어 실력 또한 향상되었다.

이러한 전쟁의 여파를 거치면서 한국은 미국에게 있어 종전의 '일본을 처리하면서 떠안은 부산물'이라는 천덕꾸러기 취급에서 벗어나 함께 싸운 전우라는 정신적 유대감에 더불어 실제로 미국식 사회제도나 경제제도가 잘 도입되어 다른 분야에서도 미국과의 유대감이 깊어졌다. 이러한 유대감은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지금도 한국과 미국은 서로 강력한 우방국 중 하나이다.

다만 한국과 미국이 강력한 우방국이라는 거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미국이 우리 편일거라고 착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도 결국 이익을 생각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국가이며, 이는 한국군이 하푼을 도입하려고 했을때 일본측의 로비를 받은 미국에서 하푼의 판매를 거절했었던 사실이나 M60 패튼을 대체하는 신형 전차의 도입 시도를 영 꺼림직하게 봤던 일 등에서 잘 드러난다. 따라서 미국이 한국의 우방국인 것은 맞지만, 국제 정세에 따라서는 태도가 달라지지 말라는 법이 없으므로 맹신이 아닌 적절한 외교를 통해 우방국으로서의 관계를 튼튼히 유지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몇몇 국가들의 부흥[편집 | 원본 편집]

남의 전쟁을 통해 배를 불렸다는 점이 당사자로서 심히 아니꼽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냉정하게 말해 한국전쟁으로 분명히 득을 본 국가들도 있긴 했다.

일례로 이웃국가 일본의 경우는 한국전쟁으로 대박이 터졌다. 심지어 요시다 수상은 전쟁 소식을 듣자, "이제 일본은 살았다!"라고 외쳤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의 적절한 예. 이것을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한국특수(韓国特需) 또는 조선특수(朝鮮特需)라고 부른다. 일본은 당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관리 하에 놓여져있는 입장이다보니 한국땅에서 싸우는 UN군을 원조할 중간기지 역할을 담당(UN군용 군수물자 생산 및 납품 등)하게 되면서 이로 인해 많은 경제적 이득을 얻긴 했다. 더군다나 일본은 전후 평화헌법에 의해 군대가 없던 실정[1]이라 한국에 병력을 파견할 일도 없었다. 즉 말 그대로 피 한방울 안보고 돈만 실컷 벌었다. 그리고 이것은 강력한 일본 경제의 기반이 된다.

한편 중화민국도 한국전쟁으로 나라가 죽다 살아났다. 이쪽의 경우 원래대로라면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1년 내로 무력으로 접수될 운명이였으나, 한국 전쟁이 북한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중화인민공화국이 하는 수 없이 북한을 원조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군사력을 한반도로 투입시켜야 했기 때문에 전후 중화민국을 접수할 힘이 남지 않아 살아남게 된 것이다. 만약 한국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조기에 정리되어 중화인민공화국이 개입할 여지 자체가 없어졌다면 중화민국도 지금쯤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이 외에도 몇몇 참전국들도 분명하게 대외적인 플러스 이미지를 얻었고 경제적인 이득도 일부 얻었다. 미국이 대표적으로 미국은 본 전쟁에서 '정의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얻어 국제사회의 입지가 공고해지는데 보탬이 되었다. (물론 베트남 전쟁에서 다 말아먹었지만)

각주

  1. 참고로 이 때 일본은 군대가 사라지고 미군이 대신 방위를 담당하고 있었으나, 한국 전쟁으로 일본에 주둔중인 미군들이 대량으로 한반도로 투입되다보니 자연스럽게 방위에 공백이 생겼고 이 때문에 미군을 대신하기 위한 자위대가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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