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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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毛澤東, 1893년 12월 26일 ~ 1976년 9월 9일)은 중국정치인으로, 중국공산당을 결성한 중국의 초대 중앙위원회 주석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모택동이라고도 표기한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초기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3년 12월 26일, 농민이었던 마오이창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오쩌둥이 태어났을 때의 환경은 중국의 여느 폐쇄적이고 가난한 시골과 다를 바 없었다. 마오쩌둥은 농사일을 하였다. 그런데 마오이창은 아들이 자기처럼 돈도 잘 버는 똑똑한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다. 아들의 행동이 자신들의 규범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강압적으로 다스려 부자(父子) 간의 충돌이 일어나, 마오쩌둥의 반항심을 불러일으켰다.

마오쩌둥의 어머니는 불교 신자로, 집안일을 돌보며 아들을 키웠다. 마오쩌둥은 9살 때 어머니와 무슨 수로 아버지에게도 불교를 믿게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논의했다. 15살 되던 해 어머니가 병이 나셨을 때, 그는 특별히 남악 형산에 가서 향을 피우고 소원을 빌었다. 아버지와는 다르게, 어머니에 대한 마오쩌둥의 애정은 매우 깊었다.

마오쩌둥은 유교 경전을 공부했다. 이런 경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뛰어난 기억력과 이해력으로 여전히 잘 배웠다. 어릴 때부터 가슴에 익은 지식은 쉽게 지워지지 않아 성년이 되면 자연스럽게 사용된다. 이후 좌전을 읽으며 역사에 큰 관심을 갖게 됐다. 또한 삼국지연의서유기 등의 소설을 즐겨 읽었다.

1900년 가을, 마오쩌둥은 사오산을 떠나 더 넓은 세계로 나갔다. 옛 서당에 비해 경적 외에 자연과학과 지리, 영어 등 새로운 과목이 있는 학당에서 공부했다. 이곳에서 마오는 광서제서태후가 죽었고, 선통제가 뒤를 이은 지 2년이 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마오쩌둥은 이때 량치차오의 글을 좋아했다. 캉유웨이, 량치차오는 그가 숭배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중국 이외의 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본에 유학했던 한 교원으로부터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이 강해졌다는 사실을 듣고 부러워했다. 워싱턴, 링컨, 나폴레옹, 표트르 대제 등의 이야기에 영향을 받았고, 중국에도 그런 인물이 있어야 하며 부국강병의 길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1911년 봄, 그는 중학교에 무사히 입학했다. 18세인 마오쩌둥은 시골과는 전혀 다른 사회 분위기를 느꼈다. 그는 혁명파들이 만든 민립보를 처음 보고 열렬한 독자가 되어 많은 혁명언론을 접했다.

어느 날 그는 혁명당이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민국을 세운다는 강령을 지지한다며 쑨원을 총통으로 하고, 캉유웨이는 내각 총리로, 량치차오는 외교부장으로 임명하자고 학교 벽에 글을 붙였다. 그는 쑨원과 캉유웨이, 량치차오 간의 정치적 주장 차이도 잘 모르고 있었다.

1911년 10월 10일, 우창 봉기가 발발했다. 마오쩌둥은 곧바로 혁명군에 투입되었다. 그는 군 복무 중 군사훈련을 받는 것 외에 신문 구독과 서적 구입을 했고, 시사에 대해 익혔다. 그는 신문을 매우 열심히 읽어서, 나중에 그의 일생의 습관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한신문에서 사회주의를 논하는 글을 읽었다. 이 글을 읽고 그는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알았다. 마오쩌둥은 관심을 갖고 병사들과 토론하고 몇몇 학우들에게 ‘이 문제를 연구해야 한다’고 열정적으로 편지를 썼다. 하지만, 반응은 냉담했고, 단 1명만이 동의의 답장을 보냈다.

우창 봉기 후 2달도 지나지 않아 전국 대다수 성은 이미 독립을 선언했다. 위안스카이는 민국 임시 총통이 되었다. 청나라가 무너진 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혁명이 이미 성공했다고 여겼다. 마오쩌둥도 자신의 군 입대 목적이 이미 실현되었다고 여겨 자신의 앞날을 재고하기 시작했고, 군에서 물러나 계속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신문에 난 신입생 모집 광고에 눈을 뜨며 전공 선택을 오락가락했다. 그는 이후 고등학교에 수석 합격했다. 이 학교에서 그는 반년을 공부했다. 마오쩌둥은 이런 학교에서의 판에 박힌 학칙과 제한된 수업으로는 그를 만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 그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도서관에서 독학했다. 그는 많은 국내외 서적을 열심히 읽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 다윈의 종의 기원,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등을 접했다. 이 때, 중국은 견디기 어려운 곤경에 처해 있었다. 제국이 공화국으로 바뀌었지만 각 군벌의 할거와 혼전이 일어났다.

일본은 1915년 1월, 21조를 제시하였다. 5월 9일, 위안스카이 정부는 기본적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마오쩌둥은 이 때 40행에 이르는 오언시를 썼는데, 그의 친필로 남겨진 최초의 시다.

1916년 6월 6일, 위안스카이가 죽었다. 신해혁명 후 몇 년간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중국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길을 찾게 하였다. 그리하여 신문화운동이 일어났다. 마오쩌둥은 초기 신문화운동의 발상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철학·윤리학부터 시작해 전국의 사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철학·윤리학을 개조하는 것은 당시 사상계에서 상당히 보편적이었다.

마오쩌둥이 공개적으로 발표한 첫 논문은 체육과 관련된 논문이었다. 1917년 4월 1일, 이 글을 《신청년》에 게재했다. 그는 이 글에서 자신이 고안한 체조를 자세히 소개했다. 마오쩌둥은 등산을 즐겨했으며, 특히 수영을 좋아했다. 그는 자주 친한 친구를 강에 불러서 수영을 했다.

1918년 8월 15일, 마오쩌둥과 등 24명의 청년들은 기차를 타고 수도 베이징으로 달려갔다. 8월 19일, 마오쩌둥 일행은 북경에 도착했다. 마오쩌둥은 후난성 청년들의 프랑스 유학 프로그램을 작성해 관련 조율을 하고, 이들의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친구들이 각 예비반으로 나누어 공부한 후, 마오쩌둥은 베이징에 남았다. 마오쩌둥은 당시 베이징대학 도서관 주임이었던 리다자오를 알게 됐다. 그는 마오쩌둥을 도서관에 가서 보조원이 되도록 하였다.

베이징은 신문화 운동의 중심이었다. 각종 사상이 이곳에서 다뤄졌다. 그는 이곳에서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많이 읽고, 과거에 접하지 못했던 인물들을 많이 접했으며, 베이징대의 두 학술단체에도 적극 참여했다. 하나는 1918년 10월 14일에 성립된 신문학 연구회로, 《경보》의 사장인 사오푸핑이 조직하여 신문을 취급하는 업무와 관련된 지식을 강연을 주관하였다. 또 다른 하나는 1919년 1월 설립된 철학연구회였다.

당시 마오쩌둥은 천두슈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베이징에 처음 왔을 때 천두슈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이때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적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의 정치에 대한 흥미는 계속되어, 사상이 갈수록 급진적으로 되었으며, 아나키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때 당시 후난 청년들의 프랑스 진출 조직자인 마오쩌둥은 정작 자신은 프랑스로 가지 못했다. 얼마 후, 중국에서 일어난 5·4운동은 일부 지식인들이 머리 속에 축적된 문제를 가지고 더욱 깊이 생각하게 하였다.

그동안 마오의 주된 관심은 교육권 안에서 성현의 역사 창조적 역할을 극구 추구해 왔고, 대철학자나 대윤리학자가 나와 사람들의 사상과 세계를 개조하는 중책을 맡아주기를 간절히 기대했다. 이제 그는 밑바닥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10월 혁명과 5·4운동의 역사적 사실에서 그는 과거에 발견하지 못했던 대중이 보여준 거대한 힘을 보고 영향을 받았으며, 이후 그는 대중 속에 자신을 두고 대중운동을 통해 이상을 실현하려 하였다.

마오쩌둥은 후스의 실험주의에 관한 강연을 들은 적이 있으며, 실험주의를 근대 사상 변혁의 징표 중의 하나로 꼽은 적이 있다. 때마침 조오정이라는 여학생이 부모의 청부결혼에 불만을 품고 자살을 하였다. 마오쩌둥은 즉시 이 사건을 붙잡고, 글을 계속 발표하여 봉건적인 혼인제도와 여성해방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도록 했다. 당시 사회주의는 이미 진보적 사상계의 주류가 되었다.

공산당에 참여한 마오쩌둥은 국공합작의 일을 하기로 되었다. 1923년의 일이 남긴 교훈은, 중국공산당으로 하여금 중국의 혁명이 노동자 계급에만 의지하여 고군분투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국민당은 쑨원이 신해혁명을 이끌고 성공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위신이 있고, 또 남쪽에 근거지를 만들었다. 쑨원은 민국이 성립된 후 몇 차례 좌절을 겪으면서 중국 혁명이 바뀌어야 한다고 느꼈고, 공산당원들이 그와 협력하는 것을 적극 환영하는 태도를 보였다. 공산당의 주요 지도자들은 잇달아 개인 명의로 국민당에 들어갔다.

광저우에 도착한 그는 안내에 올린 글에서 국민혁명의 역사적 사명은 군벌을 타도하고 군벌과 결탁한 외국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것이라며 연합전선을 촘촘히 구축해야 이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는 중국혁명에 대한 기본 견해를 제시했다.

3대에서는 국공 합작 여부에 대한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협력의 구체적인 조직 형태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장궈타오는 “노동자 계급은 자기 정당의 깃발 아래서만 혁명을 할 수 있다”며 “공산당원, 특히 산업노동자들이 국민당에 가입해 당내 협력을 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공산당의 독립성을 없애고 노동 대중으로부터의 지지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오쩌둥은 당시 호남 노동자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농민과 농민이 대거 국민당에 가입해 부르주아 계급과 연합전선을 구축해 혁명을 완수할 필요가 있다”고 연합전선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토론 끝에 ‘공산당원 전원이 개인 명의로 국민당에 가입하되, 공산당 조직의 독립성은 유지한다’는 주장을 채택했다.

마오쩌둥이 중국공산당의 지도부에 처음 진입한 30살이었을 때이다. 이때부터 마오쩌둥은 국민당의 일부 상류층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국공 합작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마오쩌둥과 그의 아내 양카이후이(楊開惠)는 장사에 여전히 거주하고 있었다.

1924년 1월 20일, 국공 양당의 엘리트들은 광동고등사범대학에서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였다. 마오쩌둥은 호남지방조직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1월 28일 국민당 규약을 토론할 때, 광저우의 팡루이린 대표는 당에 당이 있으면 안 된다며 국민당원이 다른 정당에 가입할 수 없다는 조문을 써달라고 요구했다. 이 제안은 공산당원들이 당을 뛰어넘어 쑨원의 용공 정책에 반대하는 것을 분명히 겨냥한 것이다. 결국 팡루이린의 제안은 부결되었다.

총회가 끝난 뒤 마오쩌둥은 국민당 상하이 집행부 업무에 참가하기 위해 상하이로 파견됐다. 6월 초, 양카이후이는 두 아들을 데리고 장사에서 상하이로 갔다. 마오쩌둥은 국민당 상하이 집행부에서 일했다.

4차 당대회가 끝난 지 2달도 안 돼 쑨원은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국공 양당 조직은 쑨원의 삼민주의 혁명 정신을 널리 알리며 대대적인 선전 활동을 벌였다. 이어 5·30운동이 전국을 휩쓸며 대혁명을 고조시켰다. 국민당 내에서도 좌파와 우파가 분화됐다. 1925년 8월 국민당 좌파 지도자 랴오중카이의 암살을 기치로 국민당 내부에는 장제스로 대표되는 우파가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국공 협력 관계는 더욱 복잡해졌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호남에서 돌아와 1925년 9월 광저우에 도착했다. 이때 광저우에 국민정부가 수립됐고, 왕징웨이는 정부가 번잡해 국민당 중앙선전부장직을 겸하지 못하자 10월 5일 마오쩌둥의 선전부장 대행을 추천했다.

마오쩌둥이 선전부 업무를 막 주재했을 때 국민당 내부에 큰 사건이 발생했다. 1925년 11월 23일, 국민당에서 공산당원의 당적을 취소하였다. 이를 주도한 사람들을 ‘서산회의파’라고 한다.

서산회의파 반대 투쟁의 절정은 1926년 1월 광저우에서 열린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 대회였다. 마오쩌둥은 중앙후보집행위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1월 18일 《당무보고결의안》을 토론할 때, 황푸군관학교의 대표 위안둥둥(袁同)은 국민당 내에 있어서 두 파의 분쟁이 발생한 것은 공산당원들이 국민당 내에서 당무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공개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마오쩌둥 등은 잇따라 반발했다.

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국민당 중앙후보집행위원으로 재선되었다. 중앙상무위원회는 마오쩌둥이 선전부장을 계속 대리할 것을 비준하였다.

이 회의는 세력이 득세하고 있는 국민당 서산회의파는 손대지 않았다. 장제스는 이번 회의에서 처음으로 중앙집행위원에 당선되었다. 이어 상무위원에 선출됐다. 국민혁명군에서 한 군대의 군단장에 불과했던 그는 다시 국민혁명군의 총감독을 맡았다.

중국 공산당은 물러났지만, 국공 간의 갈등이 완화되기는커녕 국민당 서산회의파의 세력을 키울 뿐이었다. ‘중산함 사건’이 일어났다. 3월 20일, 장제스는 공산당원들이 중산호를 몰래 조달하여 광동을 떠나려고 한다고 주장했고, 광저우에 계엄을 실시하여 많은 공산당원을 감시 및 가택연금하였다.

마오쩌둥은 사건 당일 밤 소련 군사고문단의 숙소로 달려가 고문단 단장 권한대행과 대책을 논의했다. 당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은 황푸군관학교의 공산당원이 500여 명이고 광둥(廣東)의 국민혁명군 6개 군에서 5개 군의 군단장이 장제스(蔣介石)와 갈등을 빚고 있으며, 장제스 1군의 정치 골간은 대부분 공산당원이고 우리가 예팅독립단 1개를 장악한 것은 역량으로 볼 때 반격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 건의들은 모두 거절당했다. 당시 소련공산당 대표단을 이끌고 광저우를 방문 중이던 이베노프스키도 동의하지 않았고, 소련공산당 중앙위원이자 소련 홍군정치부 주임으로 중산함 사건 처리에서 사실상 의사결정을 했다. 상하이의 공산당 중앙도 타협을 주장하였다.

장제스는 중산함 사건이 몰고 온 정치적 위기에서 빨리 빠져나왔다. 그는 2월 국민당 2기 2중전회에서 ‘당 내분’을 피한다는 구실로 공산당 성·시 이상 고위 당사에서 집행위원을 3분의 1 이상 맡지 못하도록 하는 ‘당무정리안’을 발의했다. 국민당 좌파들은 '당무정리안'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결국 통과됐다. 이후 그의 주된 정력은 농민운동의 일로 옮겨갔다.

그가 한 첫 번째 일은 농민들에게 사상계몽 교육을 하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야학 강의를 하여 농민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마오쩌둥은 3월부터 마오푸셴(毛福軒) 등을 주축으로 비밀 농민협회를 조직해 회원을 발전시켰다. 야학 수강생은 대부분 농협 골간이 되었고, 야학 장소도 비밀농협의 회지였다. 이런 비밀농협이 20여 개로 늘어났다. 마오쩌둥은 이를 바탕으로 사오산(昭山) 1진 공산당원을 직접 발전시켰다.

사오산은 7월에 큰 가뭄으로 논밭이 갈라지고, 보릿고개에도 식량 부족이 극심할 때이다. 지주는 오히려 기회를 틈타 매점매석하며 곡식을 비싸게 샀다. 마오푸쉬안(毛福軒) 등이 수백 명의 농민을 이끌어, 결국 지주는 농민이 사람이 많고 세력이 많은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창고를 열어 곡식을 팔았다.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위에도 농민부가 설치됐지만, 주로 국민당의 기치 아래 작업이 진행됐다. 1926년 1월에 열린 국민당 제2차 대회에서 마오쩌둥은 주석단의 지명을 받았다. 농민 운동 결의안의 개정에 참가하다. 결의안은 “중국의 국민혁명은 한마디로 농민혁명이다. 국민혁명의 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농민을 해방시키는 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호남 농민운동 고찰 보고》는 호남 농민들이 행한 14가지 큰일을 서술한 것이다.

1930년대~1940년대[편집 | 원본 편집]

결국 그 이후 국민당과 싸워 국공내전에서 이겼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이 되었다.

1950년대~1970년대[편집 | 원본 편집]

그 이후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을 이끌었으나 실패로 끝나고 1976년 사망했다.

참고 자료[편집 | 원본 편집]

  • Pang Xianzhi, Jin Chongji, eds. 2003. Mao Zedong zhuan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