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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참고|한국사|설명=대한민국 수립 이전의 역사에 관해서는}}
{{고지달성|4000}}
[[대한민국]]의 역사는 20세기 초,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大韓民國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 ==
{{한국사의 시대 구분}}
=== 일제 강점기 ===
[[1910년]]까지 존속한 [[대한제국]]는 [[1910년]] [[8월 29일]] [[일본 제국]]의 위압으로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으로 멸망하고([[경술국치]]) 일본 제국이 설치한 [[조선총독부]]가 한국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한반도 내부에는 자주독립을 외치는 운동이 개인과 단체를 불문하고 전개되었지만, 그럴 때마다 일본은 강경하게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이승만]]과 [[김구]] 등을 비롯한 과거 [[신민회]]<ref>한국 최초로 민주공화제를 주장했던 혁명단체이다.</ref>의 인사는 위와 같은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설립해 건국을 미리 준비하였는데, 이 모임에서 멸망한 대한제국의 유지를 이어받는 뜻에서 새로운 나라의 국명을 '대한(大韓)'으로 고려하고 있었다.<ref>이들 외에도 독립 후 건국을 준비하는 세력은 몇몇 더 있었다.</ref> 대한민국 헌법에 기재된 건국 기원은 [[3.1 운동]] 이후 상하이에 수립한, 초대 대통령을 이승만으로 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명시하고 있어 명목적으로 '대한민국(-民國)'의 역사(건국일)를 [[1919년]] [[3월 1일]]<ref>실질적인 건립일인 [[1919년]] [[4월 11일]]을 건국일로 치는 견해도 있다.</ref>부터로 보고 있다.
 
=== 미군정기 ===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전쟁]]([[제2차 세계 대전]]) 종반에 미국이 일본 제국을 아예 멸망시킬 요량으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이어진 소련의 대일 선전 포고와 [[관동군]]의 붕괴, [[만주]] 상실로 인해 전의가 완전히 꺾인 일본 제국은 결국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일본 본토 이외의 땅을 모두 포기한다. 이로서 [[한반도]]는 자유의 땅이 되었지만 자력으로 쟁취한 독립이 아니었기에, 승전국인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에 진주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때 북위 38도를 경계로 북측은 소련이, 남측은 미국이 관리한다. 태평양 전쟁때도 미국과 소련은 서로 눈치를 보는 사이였고, [[부동항]]이 절실했던 소련은 억제력으로서 미국이 날린 협공 요청을 덥석 받아 남하한 것이 결국 분단의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소련이 예상보다도 빠른 속도로 한반도로 내려오니, 이에 놀란 미국이 최소한 서울만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소련에게 북위 38도선(일명, 38선)을 기점으로 하는 분할점령안을 제안하니 소련도 이를 받아들이며 확정된다.


동아시아의 반도 국가 대한민국의 역사
국토가 양분된 채로 분단될 것을 우려한 [[여운형]]의 세력이 과거 존재하였던 [[조선공산당]]을 급히 재건(1945년 8월 20일), [[조선인민공화국]]<ref>후술하지만, 현 북한의 조선로동당 체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와는 별개이다.</ref>이 급히 건국선포를 하였지만, 미/소 양측은 한반도 내 모든 독립적인 정부수립을 위한 조직이나 정당들의 활동을 무시하고 반드시 미군정/소련군정 아래에서 활동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렇게 조선인민공화국이나 상하이 임시정부 등이 추진한 통일국가 재건이 모두 무산되고, 조선공산당은 각 군정부의 아래에서 남조선로동당과 북조선로동당으로 쪼개어졌다. 소련은 처음에 이북 지역에서 최고 지도자였던 [[조만식 (1882년)|조만식]]에게 접근하였으나 조만식이 한사코 거절하여 당시 소련군 소속 항일인사였던 [[김일성]]에게 북조선로동당의 대표로서 통치권을 위임하였다. (남조선노동당은 훗날 김일성 세력에 의해 축출·숙청된다.)


== 고조선 ==
물론 미국과 소련도 명목상이나마 조선을 식민지로서 점령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통일 한반도 단독정부 수립을 위하여 제1,2 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어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였다. 나름대로 중도 좌익-우익 인사들이 모여 서로 간의 타협점을 찾아내려 노력했으나 서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우위의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협상 결렬, 설상가상으로 [[동아일보]]에서 [[신탁통치 오보사건]]을 내는 바람에 국민들의 의견까지 극단으로 양분화되었다.
고조선은 삼국유사에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단군이 건국한 국가로 단군의 탄생설화는 이러하다. 하느님 환인의 아들 환웅이 천계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땅을 다스렸는데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먹으면 인간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쑥과 마늘을 먹다가 호랑이는 [[포기]]를 하고 곰은 여자가 되어 환웅과 결혼해 단군이 탄생했다고 한다. 이 단군을 단군 왕검이라 한다. 이후 어떤 정치 체계가 구성되었는지는 기록이 매우 미비하기 때문에 특정하기 어렵다.  


문헌적으로 내려오는 고조선의 기록은 중국의 기원전 7세기 기록이며 이후 고조선은 [[중국]][[연나라]]에 개 처발려 요동 2천리를 빼앗겼다고 한다. 이후 진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연나라의 유민 위만이 고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으며 이를 위만조선이라 한다. 위만조선은 한반도 남부국가와 중국간의 중간교역을 통해 번성하였으나 그 손자 우거왕대에 한나라와 갈등을 빚다가 결국 한무제 시기에 한나라군에 의해 멸망한다.
[[미국]][[국제연합]]에 한반도 문제를 상정하여 남북총선거를 통해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고 결의하였다. 그러나 [[1948년]] [[소련]]은 남한의 인구가 더 많았기 때문에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결의안을 거부하고 유엔선거관리위원회의 방북을 차단하였다. 결국 남한에서만 단독선거(5·10 총선거)가 실시되고 이로 말미암아 구성된 [[대한민국 제헌 국회|제헌 국회]]는 [[이승만]]을 대통령, [[이시영 (1869년)|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하여 [[1948년]] [[8월 15일]] 광복 3주기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다. 이때를 실질적인 대한민국의 건국일로 간주한다. 이전까지는 편의상 계속 '조선'으로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북측에는 [[1948년]]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어 끝내 한반도는 분단되고 만다.


전설에 따르면 은나라의 왕족이었던 기자가 주나라에게 분봉되어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하고 조선시대까지 이를 믿는 식자층도 많았으나 현재는 부정되고 있다.
== 대한민국 정부 성립 이후 ==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헌법/대한민국|대한민국 헌법]]을 기준으로 특정 사유로 헌법이 수정되는 개헌이 일어나는 것을 기준으로 '''제○공화국''' 이라는 현대사 구분을 적용하고 있다.
=== 제1공화국 / 물리적 분단과 한국전쟁 ===
{{참고|제1공화국}}
* 1948년 8월 15일 ~ 1960년 6월 15일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정부 수반으로 하는 정부가 수립되어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신탁통치]] 하에서 강대국의 알력으로 찢어진 북한과 신경전을 벌였으며, 한편으로는 미 군정의 잔여 조직을 인수하면서 농지 재분배, 반민특위 등의 일제강점기 정리를 진행했다.


== 삼국시대 ==
{{참고|6·25 전쟁}}
고조선이 멸망한 후 고조선을 멸망시킨 장본인 [[한나라]] [[무제(한나라)]]는 4개의 군([[한사군]])을 설치해 반도를 다스린다. {{--|물론 살아남은 건 낙랑군과 현도군이었다.}} 한편 그 아래 쪽에는 [[삼한]]([[마한]],[[변한]],[[진한]])이 건국되었고 그 근처에는 [[옥저]],[[동예]],[[부여]] 등의 국가가 있었다. 그리고 부여쪽에서 일어난 고구려와 마한에서 세력을 키운 백제, 진한에서 세력을 키운 신라가 3국시대를 만들게 되고 나니, 이들은 주변 국가들을 쳐 먹으면서 마침내 3나라만의 "그들만의 리그"를 구축하게 된다. 말그대로 {{--|고구마백개심자 리그}} {{--|가야는 왜 빼?}}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북측의 기습공격으로 [[6·25 전쟁|한국전쟁]]이 터져 한반도가 전화에 휩싸였다. 초장부터 남측 세력이 부산 인근까지 패퇴한 탓에 얼마 남지도 않은 남측 산업 시설들이 모조리 파괴되고 지금의 경상남도만 남기고 모조리 점령당하여 부산으로 임시수도를 옮기는 등으로 격변이 일어났다. 때문에 갑작스레 인구 대이동(피난)이 일어나 어느 집 조상이 양반이고 어느 집 조상이 천민인지를 아무도 모르게 되어 자연스레 (관습상으로 유지되던) 신분제가 철폐되어 지방 향촌의 권력자나 유지들의 실권이 유명무실해졌다. 더불어 수많은 사회적 지도층이 전쟁에 희생되어 전통적인 사회구조는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측은 그나마 침공을 면한 부산 근방을 제외하고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되었고, 국민은 모두 <s>사이좋게</s> 알거지가 되는, 전형적인 빈민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나라가 통째로 무(無)의 상태까지 리셋된 것이다. 이후 서방세계의 군사 원조로 북위 38도의 휴전선까지 밀어올리는 데는 성공하긴 하였으나, 그 상태로 실질적 분단을 맞이한다.


=== [[고구려]] ===
이승만은 사실 초장부터 본격 정치를 펼치기도 전에 의회 내부의 암투로 자신이 숙청될 것을 우려하였는데, 와중에 전쟁도 터졌겠다, 투표 방식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간접선거제에서 직접선거제로 바꾸어 1951년 8월 15일에 [[자유당]]을 창당했었다. 제 1 공화국의 실질적인 시작이었다.  
고구려는 [[주몽]](동명성왕)이 세운 국가로 초반부터 북쪽 지역에서 세력을 키웠고 크기도 엄청난 강대국이었다고 한다. 한반도의 위쪽에 있던 국가였기 때문에 변방국가였으나 주변 국가를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 국가들을 정{{--|ㅋ벅}}복을 하면서 강대국이 되었다. 그뒤 아랫쪽으로 땅을 넓히다가 여러 위기를 거쳤고 [[고국원왕]]이 백제에게 도발을 하면서 결국 자신도 죽고 수도까지 빼앗겼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이 엄청난 [[캐리]]를 해주면서 땅이 졸라 넓어져 다시 강대국 서열에 올랐고 그 뒤를 이은 [[장수왕]]이 100년 가까이 다스리면서 나라가 강해졌다.


그러나 내부 분쟁와 분란으로 인해 고구려는 약해지기 시작하였고 6세기에 수나라가 쳐들어 왔으며 [[을지문덕]]이 캐리를 하지 않았다면 고구려는 그때 망했을지도 모를 만큼 나라가 약해졌다. 결국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멸망시킴에 이른다. {{--|그뒤 고구려 땅 일부가 중국으로 넘어가는데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차라리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지금보다 더 넓은 영토가 우리나라의 영토가 되었을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신라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1953년 정전 이후, 다시금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초토화 된 국토의 복구에 힘을 쓰지만 성과는 미미하였고, 그럴수록 일단 나부터 잘 살고 보겠다는 식의 정치적 유착이 심화되어 정권 부패는 심각한 지경에 이른다. 여당이던 자유당마저 권력욕을 버리지 못한 채 [[3·15 부정선거|제 4회 대통령 선거]]를 저지르게 되며, 이에 분노한 (지식계층이기도 한) 대학생이 주축이 된 [[4·19 혁명]]을 시작으로, 거센 민중 시위가 시작되었다. 정부는 경찰을 동원시켜 의병으로 비유되는 시위대와 교전까지 벌이면서 계엄령을 선포하였으나, 사회의 불안함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어서 결국 4월 26일 이승만의 자진 하야 및 자유당이 해체되면서 제1공화국이 끝난다.  


=== [[백제]] ===
=== 제2공화국 ===
백제는 아까 말한 고구려의 최초 건국자 주몽의 아들 [[온조]]가 건국한 국가이다. 온조가 한강 유역으로 가서 세운 국가로 형인 [[비류]]가 황무지에 가서 나라를 세우다가 죽자 그곳 사람들이 온조에게 오면서 백제라는 이름이 생겼다. 백제는 초반 삼국시대의 甲이었다. [[근초고왕]]이라는 인물은 마한을 완전히 쳐 먹고 고구려를 침공해 수도를 빼앗고 왕을 [[지옥]]으로 보내는 등의 엄청난 캐리로 백제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 이후의 왕이 다 말아먹었다. {{--|이게 다 광개토 대왕 때문이다!}} 그리고 개{{--|놈}}로왕이라는 인물은 나라를 완전히 거지국가로 만들다가 결국 장수왕이 침공하여 수도와 목숨을 장수왕에게 내놓았다.
{{참고|제2공화국}}
* 1960년 6월 15일 ~ 1963년 12월 17일
4.19 혁명 두 달 만에 새로운 헌법을 통한 제 4차 대통령 재선(1960년 8월 12일)으로 [[윤보선]](민주당)이 대통령직에 오른다. 당시는 [[장면]]을 국무총리로 하는 의회내각제였다.  


그뒤 백제는 오랫동안 암흑의 시대를 맞이하다가 동성왕,무령왕 등의 왕을 맞이해 정치가 발전되게 된다. 또한 내부적으로 안정을 찾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성왕이라는 사람은 백제 이름을 '''남부여''로 바꾸고 고구려를 침공하여 한강을 다시 찾았지만 즉시 신라에게 다시 땅을 빼앗기면서 결국 자신도 죽어 나라를 다시 말아먹는다.
윤보선 정권하의 국민들은 혁명의 성공으로 시민사회가 성취감에 부풀었고, 그들이 직접 제1공화국 잔재 정리에 나섰다. 하지만 여당인 민주당의 내부 갈등과, 환율 약세 등으로 국가가 병들어갔고, 정세는 혼란이 지속되어 나라 사정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개로왕처럼 암흑기가 길어지진 않았고 그뒤 서동 설화로 유명한 [[무왕]][[의자왕]]이 다스리면서 40여개의 성을 다시 가져가는 놀라운 캐리를 보여준다. 그러나 의자왕은 40개의 성을 얻은 후 {{--|의자에서 졸라}} 놀았고 결국 이로 인해 나라가 약해지면서 결국 신라에게 멸망.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1961년 5월 16일, 지식인의 암묵적인 동의 하에 나타난 [[박정희]]를 선두로 하는 군(軍)세력이, 무능한 민주당을 밀어내겠다는 명목으로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다. 원래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은 이미 1950년대 초부터 진행되고 있었지만, 10년 가까이만에 겨우 기회를 잡게 된 것.
=== 제3공화국 ===
{{참고|제3공화국}}
* 1963년 12월 17일 ~ 1972년 12월 26일
[[5·16 군사정변]] 이후 군사혁명위원회로 권력을 장악한 군부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간판을 바꿔 달면서 독재를 향한 물밑 작업을 지속했다. 제5대 대통령 선거로 [[박정희]]가 취임함에 따라 제3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시기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대표되는 빛나는 경제발전의 시기이면서 [[인혁당 사건]], [[10월 유신]] 등으로 대표되는 암흑의 시기이기도 했다. {{ㅊ|진짜 임흑은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 제4공화국 ===
{{참고|제4공화국}}
* 1972년 12월 27일 ~ 1981년 2월 24일
1972년 10월 27일, 제3공화국 말기에 국무회의에서 발의한 유신헌법이 국민투표를 통과함에 따라 박정희 1인체제로 돌아가는 제4공화국이 출범했다. 이전까지는 무늬만큼은 민주주의 모양을 냈지만 유신헌법 통과 이후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이 선출됨에 따라 거리낌이 없었다. 사회는 급속히 군사화되었으며 시민운동은 탄압되었다.


=== [[신라]] ===
권력에 취했던 박정희는 자신의 심복이었던 [[김재규]]에 의해 사망했다([[10.26 사건]]). 새로운 대통령으로 [[최규하]]가 취임했으나 계엄령을 틈타 이듬해 [[5·17 쿠데타]]를 통해 또 다시 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다. 이에 반발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으나 참혹하게 진압당했다.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은 유신헌법을 십분 활용해 대통령에 취임하고, 대통령선거인단제를 골자로 하는 제8차 헌법개정을 통해 제5공화국을 출범했다.
신라는 사실 말하자면 삼국의 국가들보다 먼저 건국되었는데 [[]]에서 태어난 [[박혁거세]] {{--|절대 그 [[거세]] 아니다!}}가 만든 국가라고 한다. 물론 알에서 태어난건 구라겠지만 어짿든간에 나라가 건국되었는데 초반에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 고구려,백제에 의해 짜지고 있던 국가를 일으킨 사람은 [[진흥왕]]이었는데 그는 영토를 넓히고 [[불교]]를 수용하여 신라를 단숨에 강대국으로 만드는 캐리를 보여준다. 마침내 신라는 [[태종무열왕]] 때 백제를,[[문무왕]] 때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했다.
=== 제5공화국 ===
{{참고|제5공화국}}
=== 제6공화국 ===
{{참고|제6공화국}}


== 후삼국 시대 ==
{{각주}}
[[추가바람]]
{{고지달성|4000}}
==고려 ==
[[분류:대한민국의 역사| ]]
[[추가바람]]
== 조선과 대한제국 ==
[[추가바람]]
== 일제강점기 ==
[[추가바람]]
== 현대 ==
[[추가바람]]

2023년 9월 5일 (화) 21:37 기준 최신판

대한민국의 역사는 20세기 초,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편집 | 원본 편집]

한국사의 시대 구분
선사시대
구석기 · 신석기 · 청동기
상고시대
고조선(단군 · 위만) ·
원삼국시대
부여 · 옥저 · 동예
마한 · 변한 · 진한
삼국시대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야
남북국시대
발해 · 신라
후삼국시대
태봉 · 후백제 · 신라
고려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미소군정기
미군정 · 소련군정
분단시대
대한민국 · 북한

일제 강점기[편집 | 원본 편집]

1910년까지 존속한 대한제국1910년 8월 29일 일본 제국의 위압으로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으로 멸망하고(경술국치) 일본 제국이 설치한 조선총독부가 한국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한반도 내부에는 자주독립을 외치는 운동이 개인과 단체를 불문하고 전개되었지만, 그럴 때마다 일본은 강경하게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이승만김구 등을 비롯한 과거 신민회[1]의 인사는 위와 같은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설립해 건국을 미리 준비하였는데, 이 모임에서 멸망한 대한제국의 유지를 이어받는 뜻에서 새로운 나라의 국명을 '대한(大韓)'으로 고려하고 있었다.[2] 대한민국 헌법에 기재된 건국 기원은 3.1 운동 이후 상하이에 수립한, 초대 대통령을 이승만으로 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명시하고 있어 명목적으로 '대한민국(-民國)'의 역사(건국일)를 1919년 3월 1일[3]부터로 보고 있다.

미군정기[편집 | 원본 편집]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전쟁(제2차 세계 대전) 종반에 미국이 일본 제국을 아예 멸망시킬 요량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이어진 소련의 대일 선전 포고와 관동군의 붕괴, 만주 상실로 인해 전의가 완전히 꺾인 일본 제국은 결국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일본 본토 이외의 땅을 모두 포기한다. 이로서 한반도는 자유의 땅이 되었지만 자력으로 쟁취한 독립이 아니었기에, 승전국인 소련미국이 한반도에 진주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때 북위 38도를 경계로 북측은 소련이, 남측은 미국이 관리한다. 태평양 전쟁때도 미국과 소련은 서로 눈치를 보는 사이였고, 부동항이 절실했던 소련은 억제력으로서 미국이 날린 협공 요청을 덥석 받아 남하한 것이 결국 분단의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소련이 예상보다도 빠른 속도로 한반도로 내려오니, 이에 놀란 미국이 최소한 서울만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소련에게 북위 38도선(일명, 38선)을 기점으로 하는 분할점령안을 제안하니 소련도 이를 받아들이며 확정된다.

국토가 양분된 채로 분단될 것을 우려한 여운형의 세력이 과거 존재하였던 조선공산당을 급히 재건(1945년 8월 20일), 조선인민공화국[4]이 급히 건국선포를 하였지만, 미/소 양측은 한반도 내 모든 독립적인 정부수립을 위한 조직이나 정당들의 활동을 무시하고 반드시 미군정/소련군정 아래에서 활동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렇게 조선인민공화국이나 상하이 임시정부 등이 추진한 통일국가 재건이 모두 무산되고, 조선공산당은 각 군정부의 아래에서 남조선로동당과 북조선로동당으로 쪼개어졌다. 소련은 처음에 이북 지역에서 최고 지도자였던 조만식에게 접근하였으나 조만식이 한사코 거절하여 당시 소련군 소속 항일인사였던 김일성에게 북조선로동당의 대표로서 통치권을 위임하였다. (남조선노동당은 훗날 김일성 세력에 의해 축출·숙청된다.)

물론 미국과 소련도 명목상이나마 조선을 식민지로서 점령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통일 한반도 단독정부 수립을 위하여 제1,2 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어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였다. 나름대로 중도 좌익-우익 인사들이 모여 서로 간의 타협점을 찾아내려 노력했으나 서로 사회주의자본주의 우위의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협상 결렬, 설상가상으로 동아일보에서 신탁통치 오보사건을 내는 바람에 국민들의 의견까지 극단으로 양분화되었다.

미국국제연합에 한반도 문제를 상정하여 남북총선거를 통해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고 결의하였다. 그러나 1948년 소련은 남한의 인구가 더 많았기 때문에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결의안을 거부하고 유엔선거관리위원회의 방북을 차단하였다. 결국 남한에서만 단독선거(5·10 총선거)가 실시되고 이로 말미암아 구성된 제헌 국회이승만을 대통령, 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하여 1948년 8월 15일 광복 3주기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다. 이때를 실질적인 대한민국의 건국일로 간주한다. 이전까지는 편의상 계속 '조선'으로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북측에는 1948년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어 끝내 한반도는 분단되고 만다.

대한민국 정부 성립 이후[편집 | 원본 편집]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을 기준으로 특정 사유로 헌법이 수정되는 개헌이 일어나는 것을 기준으로 제○공화국 이라는 현대사 구분을 적용하고 있다.

제1공화국 / 물리적 분단과 한국전쟁[편집 | 원본 편집]

  • 1948년 8월 15일 ~ 1960년 6월 15일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정부 수반으로 하는 정부가 수립되어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신탁통치 하에서 강대국의 알력으로 찢어진 북한과 신경전을 벌였으며, 한편으로는 미 군정의 잔여 조직을 인수하면서 농지 재분배, 반민특위 등의 일제강점기 정리를 진행했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북측의 기습공격으로 한국전쟁이 터져 한반도가 전화에 휩싸였다. 초장부터 남측 세력이 부산 인근까지 패퇴한 탓에 얼마 남지도 않은 남측 산업 시설들이 모조리 파괴되고 지금의 경상남도만 남기고 모조리 점령당하여 부산으로 임시수도를 옮기는 등으로 격변이 일어났다. 때문에 갑작스레 인구 대이동(피난)이 일어나 어느 집 조상이 양반이고 어느 집 조상이 천민인지를 아무도 모르게 되어 자연스레 (관습상으로 유지되던) 신분제가 철폐되어 지방 향촌의 권력자나 유지들의 실권이 유명무실해졌다. 더불어 수많은 사회적 지도층이 전쟁에 희생되어 전통적인 사회구조는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측은 그나마 침공을 면한 부산 근방을 제외하고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되었고, 국민은 모두 사이좋게 알거지가 되는, 전형적인 빈민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나라가 통째로 무(無)의 상태까지 리셋된 것이다. 이후 서방세계의 군사 원조로 북위 38도의 휴전선까지 밀어올리는 데는 성공하긴 하였으나, 그 상태로 실질적 분단을 맞이한다.

이승만은 사실 초장부터 본격 정치를 펼치기도 전에 의회 내부의 암투로 자신이 숙청될 것을 우려하였는데, 그 와중에 전쟁도 터졌겠다, 투표 방식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간접선거제에서 직접선거제로 바꾸어 1951년 8월 15일에 자유당을 창당했었다. 제 1 공화국의 실질적인 시작이었다.

1953년 정전 이후, 다시금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초토화 된 국토의 복구에 힘을 쓰지만 성과는 미미하였고, 그럴수록 일단 나부터 잘 살고 보겠다는 식의 정치적 유착이 심화되어 정권 부패는 심각한 지경에 이른다. 여당이던 자유당마저 권력욕을 버리지 못한 채 제 4회 대통령 선거를 저지르게 되며, 이에 분노한 (지식계층이기도 한) 대학생이 주축이 된 4·19 혁명을 시작으로, 거센 민중 시위가 시작되었다. 정부는 경찰을 동원시켜 의병으로 비유되는 시위대와 교전까지 벌이면서 계엄령을 선포하였으나, 사회의 불안함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어서 결국 4월 26일 이승만의 자진 하야 및 자유당이 해체되면서 제1공화국이 끝난다.

제2공화국[편집 | 원본 편집]

  • 1960년 6월 15일 ~ 1963년 12월 17일

4.19 혁명 두 달 만에 새로운 헌법을 통한 제 4차 대통령 재선(1960년 8월 12일)으로 윤보선(민주당)이 대통령직에 오른다. 당시는 장면을 국무총리로 하는 의회내각제였다.

윤보선 정권하의 국민들은 혁명의 성공으로 시민사회가 성취감에 부풀었고, 그들이 직접 제1공화국 잔재 정리에 나섰다. 하지만 여당인 민주당의 내부 갈등과, 환율 약세 등으로 국가가 병들어갔고, 정세는 혼란이 지속되어 나라 사정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961년 5월 16일, 지식인의 암묵적인 동의 하에 나타난 박정희를 선두로 하는 군(軍)세력이, 무능한 민주당을 밀어내겠다는 명목으로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다. 원래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은 이미 1950년대 초부터 진행되고 있었지만, 10년 가까이만에 겨우 기회를 잡게 된 것.

제3공화국[편집 | 원본 편집]

  • 1963년 12월 17일 ~ 1972년 12월 26일

5·16 군사정변 이후 군사혁명위원회로 권력을 장악한 군부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간판을 바꿔 달면서 독재를 향한 물밑 작업을 지속했다. 제5대 대통령 선거로 박정희가 취임함에 따라 제3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대표되는 빛나는 경제발전의 시기이면서 인혁당 사건, 10월 유신 등으로 대표되는 암흑의 시기이기도 했다. 진짜 임흑은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제4공화국[편집 | 원본 편집]

  • 1972년 12월 27일 ~ 1981년 2월 24일

1972년 10월 27일, 제3공화국 말기에 국무회의에서 발의한 유신헌법이 국민투표를 통과함에 따라 박정희 1인체제로 돌아가는 제4공화국이 출범했다. 이전까지는 무늬만큼은 민주주의 모양을 냈지만 유신헌법 통과 이후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이 선출됨에 따라 거리낌이 없었다. 사회는 급속히 군사화되었으며 시민운동은 탄압되었다.

권력에 취했던 박정희는 자신의 심복이었던 김재규에 의해 사망했다(10.26 사건). 새로운 대통령으로 최규하가 취임했으나 계엄령을 틈타 이듬해 5·17 쿠데타를 통해 또 다시 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다. 이에 반발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으나 참혹하게 진압당했다.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은 유신헌법을 십분 활용해 대통령에 취임하고, 대통령선거인단제를 골자로 하는 제8차 헌법개정을 통해 제5공화국을 출범했다.

제5공화국[편집 | 원본 편집]

제6공화국[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한국 최초로 민주공화제를 주장했던 혁명단체이다.
  2. 이들 외에도 독립 후 건국을 준비하는 세력은 몇몇 더 있었다.
  3. 실질적인 건립일인 1919년 4월 11일을 건국일로 치는 견해도 있다.
  4. 후술하지만, 현 북한의 조선로동당 체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와는 별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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