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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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伽耶)는 한반도삼국시대인 서기 42년부터 562년까지, 520년간 존속하였던 국가이다.[1] 다른 말로는 가락(駕洛), 가락국(駕洛國), 임나(任那) 등이 있다.

1 범위 및 영토[편집]

원래는 '여러 나라의 등장' 시기의 변한 지역, 현재로는 섬진강낙동강 사이를 이른다고 알려져 있는데, 최근 들어 이에 대한 다른 의견이 제시되었다. 바로 가야의 영토가 비단 (전) 변한 지역에 국한되어있지 않을 거라는 의견이다. 가야의 영토를 알려주는 지표 유물들이 전라북도경상북도남부 등 더 넓은 범위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가야의 영토가 생각보다 넓었음을 알려주고, 그만큼 가야의 세력이 막강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2 성립[편집]

서기 전후로 김해 등지에 있던 구야국(狗邪國)을 중심으로 변한의 소국들이 결집해 전기 가야 연맹을 성립하였다. 그 국가는 총 6개로 알려져 있으나, 해남 등지의 국가가 가야 연맹에서 탈퇴했다는 기록 등을 보아 비단 6개의 국가는 아니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금관국 중심의 전기 가야 연맹이 와해되자 5~6세기 경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연맹을 만들었었다. 그러나 이 역시 신라와 백제의 사이에서 위협을 받으며 서서히 무너지고 562년 멸망했다.

전기 가야연맹은 김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웠으며 왜 등지와 교역을 하기도 했었다. 전기 가야연맹의 철기 문화는 뛰어난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당초에 변한(弁韓) 또는 변진(弁辰)의 각국의 왕들이 마한의 왕에게 임명된 마한 사람일 정도로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인근의 진한도 마찬가지였었다. 기원전 1세기에 진한이 사로국을 중심으로 결집해 마한으로부터 독립하고 서기 9년에 마한이 백제에 패망해 합병되는 등 마한의 영향력이 소멸하여가자 기원후 1세기를 전후해 기존 변한의 소국들은 김해의 구야국을 중심으로 국제무역을 기반으로 개별적으로 발전하면서 다소 엉성한 국가연맹체를 구성했었다.

구야국의 왕위를 두고 구야국왕인 수로왕이 신라 사람인 석탈해와 왕권다툼을 벌여 이겼고 석탈해는 신라로 돌아가 탈해 이사금이 되었다. 탈해이사금 21년인 77년에는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신라와 분쟁이 벌어지고 94년에는 전기 가야연맹 군이 마두성(馬頭城)[2] 을 함락하고 96년에도 가야군과 신라군의 분쟁이 벌어졌었다. 115년에는 신라군이 전기 가야연맹을 침공했다가 다시 황산하(黃山河)[3] 에서 대참패하고 물러났었다. 231년에는 감로국이 신라에 병합되고 전기 가야연맹은 철 공급권을 이용해 일본의 소국들로부터 병력을 수입하고 그들을 부추겨 신라를 공격했었다.

전기 가야연맹과 신라는 초기부터 경쟁 관계이었다. 전기 가야연맹의 구야국은 지금의 김해평야고김해만이라는 옛 바다를 천혜항구로 무역을 발달시켰던 전형적인 상업국가로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문화를 발전시키고 이를 또 일본과 변한에 공급하여 중계무역으로 이득을 보면서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요동, 요서의 한사군들도 변진과 전기 가야연맹의 철을 수입하였었다. 일본은 당시에 제철 기술 등이 전무해 전적으로 전기 가야연맹의 철에 의지했었다. 3세기를 전후해 구야국이 무역을 독점하고 구야국과 여타 소국간에 부의 불평등이 야기되면서 내부결속마저 깨지기 시작했었다.

골포국[4], 고사포국[5],사물국[6] 등의 전기 가야연맹의 소국들과 침미다례의 불미국 등 남해안 8개 나라가 전기 가야연맹에서 이탈해 포상팔국을 결성하고 전기 가야연맹에 대항했다. 포상팔국은 안라국을 침공하고 심지어 신라와도 항쟁하는 등 한때 극성했지만 결국 일련의 전쟁에서 연패해 쇠퇴하기 시작하고 신라의 원조로 전기 가야연맹이 이들을 간신히 평정할 수 있었었다. 포상팔국 전쟁에서 신라를 끌여들이고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구야국의 지위가 흔들리면서 소국간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한사군이 고구려에 정복되고 백제가 요서와 산동지방으로 진출하면서 구야국을 중심으로 짜인 해상무역 네트워크를 위협하고 신라가 낙동강 연안으로 진출하면서 낙동강 수로의 지배권을 놓고 분쟁했었다.

영락 9년(399년) 기해(己亥)년에 백잔이 태왕의 맹세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하고 10년(400년) 경자(更子)년에 태왕이 보병과 기병을 보내 신라를 구원해주었었다. 관군(官軍)이 도착하자 남거성(男居城)으로부터 신라성(新羅城)의 왜국 병들은 퇴각하였었다. 400년에 고구려와의 항쟁에서 연패하고 있던 백제는 고구려와 제휴하던 신라에 앙심을 품었고 결국 백제의 부추김을 받은 전기 가야동맹이 일본의 소국까지 끌어들이고 신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했었다. 전기 가야동맹의 중기병들과 신라에 상륙한 왜국 군들은 신라 보병들의 장창(長槍)과 방진(方陣)보다 강력하여 서라벌 남쪽의 남천에서 신라군을 격파한 뒤 신라의 서라벌을 함락하나 고구려 광개토호태왕의 원군(援軍)이 동원되고 신라가 구원되었었다. 서라벌의 왜국 군들이 궤멸당하고 가야 군들도 남쪽으로 후퇴해 결국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군이 구야국을 패망시키고 전기 가야연맹은 와해되었다. 신라는 구야국의 종발성을 빼앗고 고김해만과 낙동강 유역의 지배권을 상실하고 고김해만의 지배권을 잃고 경제 기반이었던 해상 무역도 거의 불가능해지고 주도권이 상실되었다. 전기 가야연맹은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신라에 합병되고 멸망했다.

3 같이 보기[편집]

4 각주

  1. 사실 가야를 국가로 규정하기에는 애매한 점이 한 가지 있는데, 현대에는 가야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아 '삼국시대'라고 부르고, 가야를 중앙집권체제가 이루어지지 않은 연맹 단계의 집합체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2. 양산시 물금 금정산
  3. 낙동강
  4. 마산
  5. 고성
  6. 사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