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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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扶餘)는 고대 한반도나라다.

개요[편집 | 원본 편집]

백두산에서 시작해 송화강 하류에 이르는 곳에 도이족의 한 갈래인 맥족의 나라. 부여가 국가의 형태를 갖추었을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집들이 8만 가구에 인구가 40만 명쯤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3세기 말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은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부여의 문화[편집 | 원본 편집]

로 된 농기구 대신 로 된 농기구를 주로 썼던 것이나 이들의 농사 방법인 화경과 휴경을 보면 부여인들의 생활은 그리 발달하지 못하였고 토지의 생산력을 자연의 이치에 맡겨 두었을 뿐 생산력을 높이려고 노력할 줄은 몰랐으리라 추측된다.

장례에는 옥갑을 사용하였고 많은 사람들을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형이 죽으면 아우가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형사취수제가 있었다. 백성들은 흰옷을 좋아했고 특이하게도 중국 은나라의 은력을 사용하였다.

매년 추수가 끝나는 12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이를 영고(迎鼓)라 했다.

부여의 정치체제[편집 | 원본 편집]

부여는 이 중심에 있어도 귀족들이 강성하여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왕 대신 귀족들의 협의기구인 제가평의회가 절대적 권력을 갖고 모든 것을 결정했다. 이는 중앙집권적인 지배 체제를 갖추지 못했음을 뜻한다. 제가평의회의 지도자인 제가는 모두 네 명이었는데 마가, 우가, 저가, 구가가 있었다. 이들의 이름에 가축 이름을 붙인 까닭은 부여는 목축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돼지 등을 길렀는데 그중 말이 가장 좋기로 전해진다.

부여의 지배 권력자들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렸다. 가들은 왕을 추대하기도 하였고, 나라의 상황이 좋지 않으면 그 책임을 왕에게 묻기도 하였다. 또 가는 행적 구획인 사출도를 직접 다스리고 있어서 권력이 막강했다.

귀족인 가 밑에는 호민이라 불리는 귀족은 아니나 지배적인 계층이 있었다. 그 아래에는 민과 하호로 불리는 계층이 있었으며 맨 아래에는 노비가 있었다. 노비는 호민층 이상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의 지휘 아래에서 호민과 민이 무장하여 싸웠으며 하호는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고 보급을 맡았다고 한다.

부여의 법[편집 | 원본 편집]

부여의 형벌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매우 엄격하고 혹독했다고 전해진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모조리 노비로 삼았으며 도둑질을 한 물건의 열두 배의 가치를 물어내는 일책십이법을 시행하였으며 남녀가 부정한 짓을 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였다. 이는 일부다처제를 지켜 나가기 위한 것이었다. 부여의 형벌이 엄격했다는 것은 부여의 경찰력 등 국가 체제가 튼튼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고구려와의 패권 다툼에서 밀려 600년 만에 멸망했다.

역대 군주[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