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남북국시대에서 넘어옴)

한국사(韓國史)는 한국역사를 의미한다. 한국사학계의 사관이라든가 그런 것을 의미할 리 없지 않은가 한국사의 기준의 면적이 아니라 '정체성'이다.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활동 범위에서 있었던 모든 역사를 의미한다. 면적 중심의 역사 고구려, 발해, 각종 부흥 운동, 예맥 계열 국가, 일제 강점기 당시 만주 독립 활동, 미주 한인 활동, 중앙아시아 한인 이주 등 한반도 외의 대한민국 국민 또는 한민족이라는 성격을 띠고 활동하여 남긴 그 족적들이 있는데, 그 발자취들은 한국 사람이 남긴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사는 '한반도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나 한민족이 활동한 모든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한국사의 흐름과 사건들은 한국사/연표를 참조해 보도록 하자.

흐름[편집 | 원본 편집]

한국사의 시대 구분
선사시대
구석기 · 신석기 · 청동기
상고시대
고조선(단군 · 위만) ·
원삼국시대
부여 · 옥저 · 동예
마한 · 변한 · 진한
삼국시대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야
남북국시대
발해 · 신라
후삼국시대
태봉 · 후백제 · 신라
고려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미소군정기
미군정 · 소련군정
분단시대
대한민국 · 북한

선사 시대[편집 | 원본 편집]

한반도의 선사 시대는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 유적을 자랑하는 등 굉장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지로 연천 전곡리는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발견된 곳이며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는 고래를 수렵하는 보기 드문 그림이 남아 있는 곳이다.

고대[편집 | 원본 편집]

고조선[편집 | 원본 편집]

사실상 한국사의 시초라고 보는 부분이다. 고조선은 《삼국유사에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단군이 건국한 국가로, 단군의 탄생설화는 이러하다.

옛날에 환인의 아들인 환웅이 자주 인간 세상을 내려다 보았다. 환인은 아들 환웅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1] 만하여, 이에 천부인 3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도록 하였다. 환웅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으니, 이곳을 신시라 하고 그를 환웅천왕이라 하였다. 그는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을 맡아 관장하고, 모두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면서 세상에 머물며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이때 하늘이 쑥 한줌과 마늘 스무 쪽을 주면서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쑥과 마늘을 먹으며 햇빛을 보지 않기 시작했다. 21일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중간에 도망쳐 나왔다. 여자가 된 곰은 혼인할 사람이 없었는데 매번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하였고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단군왕검은 중국의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조선(朝鮮)이라 불렀다.[2] 또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 그곳을 또는 궁홀산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불렀는데, 이곳에서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호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으로 옮긴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고 나이가 1908세였다.

이후 어떤 정치 체계가 구성되었는지는 기록이 매우 미비하기 때문에 특정하기 어렵다.

문헌적으로 내려오는 고조선의 기록은 중국의 기원전 7세기 기록이며 이후 고조선은 중국의 연나라에 크게 패배하여 요동 2천리를 빼앗겼다고 한다. 이후 진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연나라의 유민 위만이 고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으며 이를 위만조선이라 한다. 위만조선은 한반도 남부국가와 중국간의 중간교역을 통해 번성하였으나 그 손자 우거왕 대에 한나라와 갈등을 빚다가 결국 한무제 시기에 한나라군에 의해 멸망한다.

전설에 따르면 상나라(은나라)의 왕족이었던 기자주나라에게 분봉되어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하고 조선시대까지 이를 믿는 식자층도 많았으나 현재는 부정되고 있다.

삼국시대[편집 | 원본 편집]

고조선이 멸망한 후 고조선을 멸망시킨 장본인 한나라무제는 4개의 군(한사군)을 설치해 반도를 다스린다. 물론 살아남은 건 낙랑군과 현도군이었다. 한편 지금의 전라도, 경상도 쪽에는 삼한(마한, 변한, 진한)이 건국되었고 지금의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 쪽에는 옥저, 동예, 부여 등의 국가가 있었다. 그리고 부여 쪽에서 일어난 고구려와 마한에서 세력을 키운 백제, 진한에서 세력을 키운 신라가 3국시대를 만들게 되고 나니, 이들은 주변 국가들을 흡수하면서 마침내 세 나라만의 "그들만의 리그"를 구축하게 된다. 가야는 왜 빼?[3] 말 그대로 삼국시대라고 칭하기에는 그 시기가 너무 긴데, 삼국에 해당하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형성될 무렵의 부여, 옥저, 동예, 삼한, 가야 등의 국가들과 공존하는 시기도 매우 중요할뿐더러[4] 이후 삼국이 경쟁하는 시기도 매우 길기 때문이다.

고구려[편집 | 원본 편집]

고구려는 주몽(동명성왕)이 세운 국가로 초반부터 북쪽 지역에서 세력을 키웠고 크기도 엄청난 강대국이었다고 한다. 한반도의 위쪽에 있던 국가였기 때문에 변방국가였으나 그 주변 국가를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 국가들을 정ㅋ벅복을 하면서 강대국이 되었다. 그뒤 아랫쪽으로 땅을 넓히다가 여러 위기를 거쳤고 고국원왕이 백제에게 도발을 하면서 결국 자신도 죽고 수도까지 빼앗겼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이 엄청난 캐리를 해주면서 땅이 졸라 넓어져 다시 강대국 서열에 올랐고 그 뒤를 이은 장수왕이 100년 가까이 다스리면서 나라가 강해졌다.

그러나 내부 분쟁와 분란으로 인해 고구려는 약해지기 시작하였고 6세기에 수나라가 쳐들어 왔으며 을지문덕이 캐리를 하지 않았다면 고구려는 그때 망했을지도 모를 만큼 나라가 약해졌다. 결국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멸망시킴에 이른다. 그뒤 고구려 땅 일부가 중국으로 넘어가는데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차라리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지금보다 더 넓은 영토가 우리나라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신라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백제[편집 | 원본 편집]

백제는 상술한 고구려의 최초 건국자 주몽의 아들 온조가 건국한 국가이다. 온조가 한강 유역으로 가서 세운 국가로 형인 비류가 황무지에 가서 나라를 세우다가 죽자 그곳 사람들이 온조에게 오면서 백제라는 이름이 생겼다. 백제는 초반 삼국시대의 이었다. 근초고왕이라는 인물은 마한을 완전히 쳐 먹고 고구려를 침공해 수도를 빼앗고 왕을 지옥으로 보내는 등의 엄청난 캐리로 백제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 이후의 왕이 다 말아먹었다. 이게 다 광개토 대왕 때문이다! 그리고 개로왕이라는 인물은 나라를 완전히 거지국가로 만들다가 결국 장수왕이 침공하여 수도와 목숨을 장수왕에게 내놓았다.

그뒤 백제는 오랫동안 암흑의 시대를 맞이하다가 동성왕,무령왕 등의 왕을 맞이해 정치가 발전되게 된다. 또한 내부적으로 안정을 찾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성왕이라는 사람은 백제 이름을 '남부여로 바꾸고 고구려를 침공하여 한강을 다시 찾았지만 즉시 신라에게 다시 땅을 빼앗기면서 결국 자신도 죽어 나라를 다시 말아먹는다.

물론 개로왕처럼 암흑기가 길어지진 않았고 그뒤 서동 설화로 유명한 무왕의자왕이 다스리면서 40여개의 성을 다시 가져가는 놀라운 캐리를 보여준다. 그러나 의자왕은 40개의 성을 얻은 후 의자에서 졸라 놀았고 결국 이로 인해 나라가 약해지면서 결국 신라에게 멸망.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신라[편집 | 원본 편집]

신라는 사실 말하자면 삼국의 국가들보다 먼저 건국되었는데 에서 태어난 박혁거세 절대 그 거세 아니다!가 만든 국가라고 한다. 물론 알에서 태어난건 구라겠지만 어짿든간에 나라가 건국되었는데 초반에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 고구려,백제에 의해 짜지고 있던 국가를 일으킨 사람은 진흥왕이었는데 그는 영토를 넓히고 불교를 수용하여 신라를 단숨에 강대국으로 만드는 캐리를 보여준다. 마침내 신라는 김유신이라는 놀라운 장수를 바탕으로 태종무열왕 때 백제를, 문무왕 때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했다. 그 이후 내용은 통일 신라 부분으로 가자.

남북국시대[편집 | 원본 편집]

신라의 삼국통일부터 후삼국 시대 이전까지의 시기이다. 통일신라 시대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발해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이 지속적으로 지적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유득공이 《발해고》에서 처음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통일신라[편집 | 원본 편집]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정책을 정비하고 나라를 강력히 한 후 바다에 있는 한 바위로 사라졌다. 물론 당나라에게 고구려 땅 일부를 뺏긴 것은 큰 잘못이지만 멸망을 막아낸게 어딘가... 한편 고구려 땅에는 대조영이라는 인간이 발해를 건국하였고 고구려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나타났다.

발해[편집 | 원본 편집]

남쪽에 통일 신라가 세워졌다면 만주 지역엔 대조영이 말갈족과 고구여 유민들을 연합해 발해를 세웠다.

후삼국시대[편집 | 원본 편집]

후삼국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통일신라 말 ~ 고려 성립기. 시기도 매우 짧다. 견훤이 완산주 지역을 장악하고 후백제를 세우고, 궁예가 철원 지역을 장악하고 후고구려를 세워 대립을 했으나, 왕건이 궁예를 쫓아내고 고려를 세우고 정리함으로써 상황이 끝나버렸다.

왕건의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했다.

중세: 고려시대[편집 | 원본 편집]

이 시기부터를 한국사의 중세 시대로 대입하여 보는 관점이 일반적이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 태조로서 첫 왕이 되었다. 그 후 4대 왕인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여 노비들을 일부 해방시키고 왕권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지방 호족 세력들은 계속 커져갔고, 덤으로 북방에서는 요나라와 여려 차례 전쟁을 벌였다. 결국에는 인종 때 당시 외척이었던 이자겸이 난을 일으키기까지 한다. 인종: 외할아버지 뭐하시는 거예요. 이자겸: 왕위를 계승하는 중이다. 물론 이는 실패하고 인주 이씨의 세력은 박살났지만 이렇게 되자 정치는 매우 불안정해졌고 묘청의 난이 일어나면서 상황은 더욱 더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와 동시에 무신들은 싸움터에서 공적을 세우면서 위상과 세력이 차츰 커져갔지만 귀족들에게서 멸시를 받았다. 결국 1170년 의종 24년에 무신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의종을 폐위하고 무신정권을 세운다. 이후 무신정권은 몽골에게 대들다가 두드려 맞고 1270년 무너진다.

이후 정치적으로 원나라의 간섭에 시달리다가 원이 멸망 테크를 타자 공민왕은 재빠르게 쌍성총관부를 회복하고 개혁을 진행한다. 그러나 그의 개혁이 실패하면서 고려 역시 멸망 테크를 탄다.

결국 이성계, 정도전 등 급진 사대부들에 의해 고려는 공양왕을 끝으로 멸망한다.

근세: 조선시대[편집 | 원본 편집]

1392년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고 조선을 건국했다. 초기에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세종의 아들인 수양대군이 자신도 왕이 되겠다고 칼부림을 해서 곤혹을 치루기도 했지만, 초기에는 기틀을 잘 닦았다. 세종 때 훈민정음 반포라던가, 성종때 경국대전 완성이라던가. 하지만 연산군 때 와서 말아먹기 시작했지. 이방원과 수양대군이 했던 칼부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이 때부터 사화라는 이름의 칼부림이 일어났어. 사화란 사림이 화를 입었단 뜻으로,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까지 총 네 번 진행이 되었다. 정미사화는 을사사화의 2차전이라고 생각하면 편해 물론 사화가 끝이었으면 좋았지만 선조 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광해군이 어찌 수습하니까 맘에 안든다고 신하들이 몇 가지 사유를 들어 쫓아내니까 두 차례의 호란이 발생하고 병자호란에서 청 나라 황제에 조선 인조가 무릎울 꿇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 이때문에 볼모로 잡혀간 효종이 북진정책을 내세웠다. 그의 결과물이 나선정벌이고. 조금 지나서 영조, 정조 때 국가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발전하기 시작했다. 민화같은 서민 문화라던가, 선조때부터 시작된 대동법이 확립되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숨통이 트나 했더니 정조 사후 세도정치 때문에 거진 끝장 났다고 보면 된다. 약 60년을 말아먹었다고 해야하나.

1800년대 들어 서양 세력의 접근과 외척 가문의 세도 정치로 조선의 입지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1863년 아직 나이가 어린 고종이 즉위하게 되면서 흥선 대원군이 집권했고 기존의 기득권(안동 김씨 등)을 타파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펼쳤다. 계속 무역하자고 요구하는 서양 국가들에 대해선 쇄국 정책으로 대응했다.

서양 열강과의 충돌이 1866년 병인양요제너럴 셔먼호 사건, 1871년 신미양요로 이어졌고 이에 흥선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며 서양 국가들과는 거래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1873년 고종이 직접 나라를 통치하게 된다.

근대[편집 | 원본 편집]

구한말[편집 | 원본 편집]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 국가로 성장한 일본이 1875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조일수호통상조약(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어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의 세력 확대와 청나라의 조선 수호 사이에서 끼인 조선은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한 노력으로 외국에 시찰단을 보내기도 했으며 신식 군인인 별기군을 창설하기도 했다. 이에 구식 군인들이 신식 군인들과의 다른 대우에 불만을 품은 임오군란이 일어나기도 했고 김옥균을 위시한 급진적 개화파가 정권을 뒤엎고 근대화를 진행할 목적으로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1894년 전라도 고부 지방에서 농민들의 봉기로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지고 농민군을 제압할 능력이 없던 조선은 청에 도움을 요청한다.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게 되면서 두 세력의 충돌로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청일 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일본에 의해 조선에서 사실상 쫓겨났고 대신 러시아가 일본의 세력 확대를 저지하는 국가로 나섰다.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면 자신들의 남하 정책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청일 전쟁 기간 동안 갑오개혁을 단행해 자체적인 근대화 노력에 기울였으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본격적으로 갑오개혁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을 견제하려던 민비(명성 황후)가 눈엣가시였던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 황후를 시해하고 다음 해 고종은 자신도 죽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아라사(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1년동안의 러시아 공사관에서의 생활 후, 고종은 황제 즉위식을 단행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그와 동시에 광무 개혁도 진행한다. 개혁의 시기가 너무 늦어버렸다

1904년 러시아와 일본이 대한 제국과 중국 만주 지역을 두고 한판 붙었다. 이 전쟁으로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조선에서 축출했고 더 이상 경쟁국이 없어진 일본은 친일 대한 제국 대신들과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다.

1910년 8월 29일, 대한 제국은 일본에 정식 합병되면서 조선 왕조 역사는 막을 내리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일제 강점기[편집 | 원본 편집]

대한민국[편집 | 원본 편집]

해방 후 역사부터 본격적으로 다룬다.

각주

  1.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2. 우리가 부르는 고조선은 1392년에 세워진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앞에 '고'자를 붙인 것이다.
  3. 가야는 중앙집권국가인 고구려, 백제, 신라와 달리 여러 부족이 모여 만들어진 연합왕국이기 때문이다.
  4. 해당 시기를 고대국가 시기 혹은 철기시대로 구분하기도 하나, 본격적으로 철기 문화가 퍼진 게 아니기 때문에 철기 시대로 구분하는 것은 맞지 않다. 또한 고대국가 시기로 묶어버리기에는 그 기준이 모호하다. 국가형성기 라는 명칭을 쓰기도 하는데 그럼 고조선은 국가가 아니란 말인가(...) 더군다나 이 시기는 이미 부족의 개념은 초월한 상태, 즉 국가의 개념이 이미 자리잡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다. 애초에 고구려나 백제, 가야, 신라 등은 그 지배층의 조상이 다른 지역에서 흘러들어온 사람임이 명시되어 있어 부족국가로 분류하기에도 몹시 애매하다. 연합국가 시기라는 표현도 쓰지만 진짜 연합국가였던 것이 확실한 곳은 가야와 삼한 뿐으로, 고구려가 부족연합의 성격이 관직에 남아 있었던 걸 빼면 또 다른 나라들은 해당이 없다.